현대 정보 사회에서의 자아 정체성 형성
현실 세계의 인간은 육체라는 한 가지 물리적 신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얼굴, 지문, 목소리 등이 육체적 신원 파악에 사용되는 것은 육체적 신원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항상 육체라는 물리적 신원의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육체적 신원이 가져오는 벽을 뛰어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소망이었다.
예를 들어, 무협소설에 나오는 둔갑술이나 코믹 영화에서 남녀가 서로 몸이 바뀌는 상황의 설정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소망을 드러낸 것이다. 배우가 한 육체를 가지고 출연하는 영화에 따라 여러 역할을 맡듯이, 우리 인간은 현실 세계에서 한 육체를 가지고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을 그 때 그 때마다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은 가상공간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공간에서는 물리적인 제한이 없으므로, 육체적 신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상공간에서는 누구나 육체적 신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신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여자로 바뀔 수 있으며, 아이가 어른 행세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상공간이 인간이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가상공간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므로,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표현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역할 및 자아에 대해 깊게 인식할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자기 표현은 지적ㆍ감성적 개방성을 높이고, 포용력 있는 성향을 가지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가상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그들만의 사회나 단체를 구성할 수 있으며, 그 범위는 지구 반대편의 친구들까지 포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이런 가상공동체에서는 상호 교류를 통해 분석, 판단, 평가, 비평, 협조 등의 태도와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아울러 상호간에 감성적 동질감을 요구하기도 하고, 이를 통해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쌓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가상공간은 자아 발견과 자신만의 세계 구축을 촉진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가상공간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가상공간에서는 익명(匿名性)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체를 바꾸는 일이 매우 쉽고 현실 세계에서만큼 자기 통제력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책임하게 행동하게 될 우려가 많다.
특히, 가상공간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자아의 실험 기회를 갖게 해 준다. 그러나 다양한 자아의 실험은 입시나 이성 문제 등의 현실적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통합된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또, 가상공간은 타인의 실질적 존재가 부정되는 공간이므로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해로울 수 있다. 인간의 자아 형성은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 속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타인이 존재하기는 하되 현실적인 존재로 인정되지 않는, 타인들만 존재하는 가상공간은 객관적인 자기 모습을 파악하기 힘든 공간이다. 따라서, 가상공간은 인간이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객체로서의 자아를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여기서 ‘부유(浮游)하는 정체성’을 지니게 할 위험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