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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되다
나는 '불후의 명곡'이란 가요 프로그램을 즐긴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가 부르면 대중가요도 명곡으로 둔갑한다. 출연자들이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지 소름이 돋고 경륜과 입지를 무색하게 순위가 바뀌기도 하지만, 용기있어 보여서 좋다. 정제된 목소리로 정갈하게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대를 최대한 화려하게 꾸며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 할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최대한 무대 효과를 곁들여 노래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 노래의 재 해석과 편곡으로 새 맛을 주기도 하고 명품 보컬이라는 호칭과 함께 목소리만으로 진승을 거두기도 한다. 명품 작곡가와 명품 가수에 명품 진행자까지 곁들여 진지하게 경쟁을 벌이는 모습도 아름답다.
그 무대는 나이로 대접이 따르지 않고 경력으로 박수를 받지 못한다. 준비를 충실히 하여 열창을 하면 청중의 귀에 의해 점수가 따라붙는다. 오직 노래로 청중의 판정을 받는 무대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작곡가나 가수를 초대하여 오히려 원작자의 가슴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초청되는 작가나 가수를 '전설'이라 부르고 어느새 그 프로그램이 나이를 먹으니 전설로 호칭되는 사람은 젊어만 간다. 10대나 20대에게는 전설인 사람이 우리에게는 애송이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 또래가 전설로 불리는 때는 이미 지났다.
나는 전설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저런 말을 들어보면 기분이 어떨까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언감생심, 내가 감히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닌 것 같고 다만 부럽고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결과로서가 아니라 젊은이가 보는 인생의 시각에 의해 내가 복지관의 전설이 되었다. 복지관내에 인사이동으로 구 센터장이 새 센터장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복지관의 전설'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그 말이 나를 지칭하는 말 같지 않아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다리 아래로 흘러간 물처럼 내 귀를 지나가게 두었다. 나는 삶이 감사하고 고마워서 일주일에 하루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심정으로 그 곳에 발 길을 텄으니 하느님이 전설이 된 셈이다. 그러고 보니 맞긴 맞다.
17년 전, 처음에 그 곳에서 글쓰기반을 개설했을 때, 나는 잘 하거나 못하거나 거기에 오는 분들에게 심리적으로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는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빛을 담으면 그 가족이 환해지고 한 가정에 빛이 담기면 그 이웃들이 조금이라도 환하게 살 것같아서 조촐하나마 수업을 시작했다. 기능이 우선이 아니라 사랑이 앞서서 갔다. 그러자 하니 내 가슴은 스폰지가 되어 어떤 충격이 가해져도 다 받아낼 여유가 있어야 했고 그것이 가능했다.
중도 장애인 판정을 받은 사람의 가슴에는 응어리가 담겨 있고 그 가족들의 시간에는 수고가 담겨있다. 아픈 사람은 아파서 끙끙거리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람의 끙끙거리는 삶으로 하여 그늘이 진다.
나는 세 차례나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고 내 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5살 때에는 차가 나를 치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외적으로는 상처가 나지 않았다. 그 때의 후유증으로 어린 아이가 신경통을 앓으면서 금 간 항아리 테매서 사용하듯 내 몸을 지탱하며 30년을 살았다. 외상 후 장애로 트라우마가 생겨 불안과 낯선 경계심이 따라 다녔다.
나는 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로 아침마다 사투를 벌였다.등이 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듯한 한계 안에서 40년 가까이 남이 모르는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다.
어느 누구의 삶에든 땀과 눈물이 곁들이지 않은 삶이 없는 것처럼 나도 아프고 견디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40에 이르러 호되게 1년 동안 아프고나서 나는 하느님께 삶 자체를 의탁해버렸다. 죽어도 당신 것이고 살아도 당신 것이니 아무 때나 데려가시라고 해놓고 기도에 열중하였다. 기도를 하다가 죽으면 영광일 것이니 죽이든 살리든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내 힘으로 노력하는 자세를 바꾸었다.
회개가 우선 되어야겠기에 고백성사를 충실히 보았고 알아야 하느님 사업에 면장이라도 할 것같아서 성서공부를 하고 조금씩 교회일을 도왔다. 하다가 보니 반원들의 질문에 응할 수가 없어서 교리신학원을 다녔다. 질긴 어둠도 은총 앞에서는 무력했다.
기적과 치유, 은사 등의 변화가 나에게 왔으나 나는 그러한 것에 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치유로 숨쉬기가 어렵던 내가 숨을 제대로 쉬게 되었다. 숨 한번 쉬려면 몰아서 끌어올리거나 가슴을 조였다가 풀면서 간신히 숨을 쉬었다. 그래도 일상이 되면 살아가게 된다.
어느 날 영성체를 영하고 자리에 들어와 앉자마자 등짝과 가슴을 관통하는 어떤 기운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들더니 속이 시원해지며 숨쉬기가 편해졌다.
아 숨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았다는 말인가.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숨을 쉬려고 수고를 하지 않고도 숨이 편하게 쉬어진다는 것이 나에게는 경이로움이였다. 그 날로부터 몸은 나날이 체중이 늘고 힘이 커졌다.
나는 감사해서 전신마비 장애가 된 이웃을 돌보기 시작했다. 가족과 외출하였다가 급발진이 일어나 논두렁을 차가 박히다가 목에 충격이 가해져 전신마비로 남게되었다. 나는 매일 그녀에게 가서 성서를 같이 읽고 기도를 함께 하는 벗이 되어주었다. 이 또한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으면 내 방식으로 바꾸고 싶어서 실망이 따를 것이 자명하여 성령세미나를 준비하였다. 혼자 강의하고 기도하고 준비를 한 다음 지구 봉사자들이 와서 안수 봉사를 해주기를 청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서 외출했다가 그 날 성당 앞에서 사고를 당했다. 건널목을 지날 때 멈추어 서지 않는 차에 부딪쳐서 나동그라졌다. 연거푸 사고로 이어지던 자리인데 그 전 주에도 교사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내 구두의 쇠가 구부러졌는데도 내 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렇게 봉사하면서..."하고 떫은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았다면 "그랬으니까 큰사고에 무탈했지"로 시선이 갈리었다.
이러한 경험이 누적되자 나는 사랑의 부채를 갚기 위해 주부 교리교사를 맡았고 성령운동을 펼쳤다. 너무나 일상과 먼 영적활동에 치우치자 나의 삶은 다양한 경험으로 이어져 갔다. 어차피 신앙의 끝은 신비이기는 하지만 나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가족이 평범하게 보기가 힘들어 하니 내가 완급조절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되어 나를 조율하기로 했다.
그간 공부하는 가운데 사물과 사건을 보는 눈이 열렸으니 글을 쓰는데는 유익했다. 이 분야에서도 나는 치열했다. 일주일에 한 편씩 습작 하기를 쉬지 않았다. 글은 쌓이고 발표지면은 작아 고민 끝에 기도회 식구에게 그동안 외도한 내용을 이야기 하자 대뜸 꾸르실료 동기라고 박우사 출판사에 심사를 받아보라고 소개해주었다. 그리하여 내 글은 심사를 통하여 출간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걱정이 되었다. 만약에 책이 안팔리면 저 분에게 미안해서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글이 좋으니 안팔리면 교도사목하는데로 돌리면 좋은 일이 된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 이동으로 새로운 생각을 가진 신부님이 본당으로 파견되었다. 어찌 아셨을까. 도망간 나를. 주보에 글 쓸 자리를 마련하고 평신도들도 글을 써보도록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주보의 글 관리나 필진을 내가 관장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출발이 아니었다. 우선 성직자 수도자가 문을 열어주어야 감이라도 잡을 것같아서 글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분들의 일이 한가지 늘면 곤란할 것 같아서 고민하였다. 세번째 글을 받기 위해 청탁을 기다리는데 6시가 되어도 피정간 보좌신부님에게서 연락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쓴 글을 대체하려고 준비를 하고 돌아오자마자 이름을 넣지 말고 글이 괜찮으면 실겠다고 하여 내 글이 올라갔다.
이 글이 첫발을 내 딛으면서 누가 그 글을 썼느냐고 다그침을 받아 고백하게 되었고 그 주부터 내처 55주간은 거르지 않고 내 글로 도배되었다. 나는 여러사람이 쓰듯이 동화형식과 수필형식, 대화체 등등의 다양한 형식을 빌러 묵상글을 올렸다. 돌아보니 그 한 해는 은총에 잠겨 산 것같다. 이제 갓 등단한 작가가 매주 한 편씩 감동적인 글을 생산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7매 안에다 내용을 담는 훈련시기가 되어 주었다.
내가 복지관에 다니면서 글쓰기 반을 개설하게 된 동기의 뿌리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드나들었지만 햇수로 17년차를 맞았다. 글치료 그림치료를 겸하고 있는데 지역사회복지센터의 담당 직원이 7번 바뀌고 세번째 관장을 맞았다. 그러한 세월을 나는 길다고 느끼지 못하고 오늘까지 왔다.
수업용 프린터 물을 뽑기 위해 지역사회복지센터에 들어가니 센터장이 바뀌었다. 이제 익숙한 자리에 새 사람이 등장하면 다시 낯을 익혀야 하기에 나는 불편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는 일이고 그것이 변화하는 세상이라서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고 나는 내가 할 일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먼저 센터장이 새 센터장에게 나를 소개한다.
"우리 복지관의 전설이십니다."
?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저 분이 지금 뭐라 했는가. 나 더러 전설이라고 한다. 전설.
아 그러고보니 전 직원 중 내가 최고령자이다. 71세까지 근무하는 사람은 없는 것같다.
그 센터장은 벌써 나를 여러번 놀라게 했다.
처음에 수업이 시작되고 나의 열정은 날개를 달았다. 그들에게서 '구정물 빼기'를 원하였다. 자기 고백을 거쳐야만 내적 치유가 가능하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모두가 운다. 우는 만큼 가벼워진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참으로 진지하게 들었다. 어떠한 주문도 하지 않았다.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어디서건 싸움질을 일삼던 사람도 몇번만 참석하면 순한 양으로 변한다.
수면제를 한 주먹씩 먹어도 잠을 들이지 못하던 사람이 세번째 수업을 듣고 가서 그날밤 잠을 잤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받아보았다고 말하면서 울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인지 수시로 나를 테스트 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그가 어떻게 트집을 잡아도 공격하지 않고 그들이 처음 받았던 사랑을 돌려주었다.
몸은 마음이 고쳐지면 서서히 원형을 찾아간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서 알았다.
"아픈게 죄인가요. 고개를 들고 다니세요. 사람과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하세요."
이것이 일주일간 숙제였다. 죄지은 것도 없이 고개를 푹숙이고 복도 한 곁으로 불편하게 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짠했다. 초창기의 멤버들은 어색했지만 실천했다. 직원들이 놀라고 그 분들도 놀랐다. 호응이 되돌아오면서 우리 교실의 인식이 새로워졌다.
어느 날 직원이 무슨 수업을 하는지 좀 들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수락하였다. 그들은 수업을 마치고 나가면서 갸우뚱 했다. 그 때를 상기하면서 자신들은 마치 예수시대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들듯이 교실 분들의 추종이 대단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고보니 어느 피정 후기를 썼을 때 지도신부님이 내 인생도 내가 끌고가지 않고 내 안의 성령께서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해준 적이 있다. 좋은 호응의 뒤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있었다. 모두가 내 것이 아니라 그 분 것이었다.
어느 시골학교의 전설은 조금 특별했다. 잘못한 크기 만큼의 회초리를 구해오라고 했을 때, 통나무를 들고 들어와 선생님을 교실 밖으로 내보낸 학생이 전설이 되었다. 부당한 매도 맞고 벌도 스면서 어른이 된 사람들, 그 학교 학생들은 언제나 입학하면 그 전설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멧돼지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전설, 씨름판에 혜성처럼 나타나 괴력의 사나이가 된 전설, 바다의 대형 물고기를 잡아도 전설, 전설도 다양하다.
결국 월등하게 뛰어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 전설이 된다.
나는 한번 어느 지면이나 발을 딛으면 10년을 족히 넘기는데, 청담 성당 주보에는 25년을 넘겼으며 한 신문의 컬럼난을 15년 이상 쓰고 있으니 누군가가 나를 모르면 청담 성당 식구가 아니라고도 했다. 이 또한 최 장기 필진이었으니 전설이나 다름없다. 이 또한 내 안의 그 분이 받을 말이기에 증언한다. 그 난을 신설한 신부님이 돌아가시자마자 필진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온 인류의 전설, 그 분의 덕을 가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만이 내가 할 일이다. 나는 내 안의 명령에 따라 시키는대로 하고 그 분 영광이 그늘지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서는 일 뿐이다. 늦게라도 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매번 그늘을 지우다가 비켜 선다는 것이 놀랍고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크다. 그 어리석음이 언제까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