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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한 목소리로 말하리라 - 고향에 잠든 권기도 형 < 근로봉사, 송탄유 채취 >
이야기의 시점이 조금 뒤로 돌아간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한 첫 해 한 겨울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이라고 한 침략전쟁의 초기에 그들은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말부터 전세는 크게 역전이 되었다. 무적을 자랑한 일제의 함대는 남태평쪽에서 미군의 반격을 받아 차례로 깨어졌다. 대륙 쪽의 병단(兵團)도 중국군의 총력전에 걸려들어 도처에서 패퇴해 버렸다. 일제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전국민의 동원을 뜻하는 ‘일억(一億) 총돌격(總突擊)’을 구호로 내걸었다. 그들의 총돌격 체제는 아직 소년들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까지를 침략전쟁 수행의 수단, 또는 부속품으로 내몰았다.
내가 3학년, 그가 4학년이 되자 각 학년의 학급이 일제히 군대식 편제로 바뀌었다. 각 학년의 분단은 분대로, 그리고 각 학급이 소대로 개칭되었다. 그 전까지는 주에 한 번이었던 열병 분열식이 거의 무시로 실시되고 방공훈련과 적전 돌격연습인 전쟁놀이가 교과목 학습과 병행으로 과해졌다. 특히 매주 하루가 수업이 없는 근로봉사 일로 바뀌었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낫이나 손도끼에 지게를 지고 소나무가 있는 산으로 내몰리었다. 일제는 그 무렵에 벌써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인 유류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체연료로 소나무공이를 따서 기름을 얻어 쓰는 송탄유자재(松炭油資材) 채취에 우리를 동원했다.
일제가 강제한 송탄유 채취는 군작전에 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출발 전에 정신대기가 나부꼈다. 그런 대열에는 또한 행진곡을 부는 나팔수가 붙었다.
권기도형이 바로 그런 나팔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와 급장인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학급 선두에 섰다. 그리고는 학급 담임의 지시에 따라 보조 맞추어 라든가 작업 개시, 헤쳐모여 등의 동작을 취했던 것이다. 더욱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송탄유 자재를 채취할 때 나에게 보여준 호의들이다. 송탄유 채취나 기타 근로봉사에서 나팔수들은 작업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특전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와 꼭같이 채취도구를 가지고 가서 각자의 책임량에 가까운 일을 했다. 그런 자리에서 그는 매우 부지런하고 유능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의 몫을 채취하고 나면 힘에 붙이는 듯 보이는 다른 아이의 몫도 돌보아 주었다. 언젠가는 그의 배려가 나에게까지 미쳤다. 그날 나는 말라리아에 걸려 오한이 난 다음이었다. 그런 내곁에 그가 다가왔다. “너는 몸이 약하니까 힘이 들게라”하면서 자신이 채취한 것을 내 몫으로 하라고 보태어 주었다.
당시 우리 모두는 일제의 송탄유자재 채취량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더러는 제가 봐둔 나무의 공이를 다른 반의 학생이 가로채어 간다고 싸움이 붙는 수도 있었다. 그런 서슬 속에서 권기도형은 애써 채취한 솔공이들을 내 바지게에 옮겨 주었던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서 내 송탄유 채취량은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했다. 70년이 흘러가버린 세월 다음에 생각해도 그때 그의 살뜰한 정이 참으로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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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내몰리고 매맞고 그러는 민족의 마음과 몸도 아프지만...
이렇게 아린 흔적을 지니고 있는 소나무 아픔도 또렷이 남은 것.
다시는 이렇게 어리석은 피해와 아픔을 당하지 않아야 될 것...
어느 누가 그 아픔을 알아주었는가? 이제 우리의 몫일 뿐...
안면도 자연휴양림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탕건봉.
머리 꼭대기에 쓰는 탕건을 생각하면서...
항상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봉우리가 아닐까?
이제는 진정한 자연휴양림으로 거듭나서...
오랜 명칭처럼 안면이 이루어지는 민족자산으로 우뚝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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