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에서 영주 가는 무궁화 기차를 타고 점촌에 내리자 오후 1시다. 문경시민운동장 인근에 있는 소머리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든든하게 먹고 시간을 두고 달릴 채비를 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는 랜턴을 빼먹고 왔다. 매번 대회 때마다 중요물품 한두 개는 빼먹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이를 탓해야 하나. 주변 불빛에 의지해 달려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니 암담하다.
우연찮게 Anett 영사를 만났다. 제주대회에서 무릅부상으로 고생했지만 회복한 듯했다. 20km까지는 같이 진행하기로 했다. 오후 4시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출발했지만 가슴이 갑갑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긴 언덕을 만나며 속도를 늦추자 Anett 영사를 놓치고 만다. 20km는 고사하고 5km에서 본의 아니게 이별을 해야 했다. 10km를 지나자 몽우리재까지 긴 오르막이 펼쳐진다. 한참을 걷다가 내리막을 달리는데 젊은 여성주자(안*람씨)가 추월해 간다. 결국 그 주자와는 80km 지점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여러 번 만나게 된다.
CP마다 먹거리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어 파워젤도 그닥 필요가 없다. 포카리와 물을 물주머니에 넣어 BCAA와 e에너지를 번갈아 타서 먹으며 체력조절에 신경을 썼다. 20km CP엔 샤인머스켓이 배치되어 있었다. 양껏 먹은 다음 깜빡이를 켜고 가능하다면 랜턴을 들고 있는 주자와 함께 가려고 했다. 30km CP에서 떡을 먹으며 걸어가는데,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에 부친다. 어깨가 묵직하고 졸음도 쏟아졌다. 5CP에서 그만둘까?
4CP를 지나자 문경시내를 천변을 따라 달려갈 때는 조금씩 졸음이 물러가는 것 같았다. 가로등 불빛이 밝아서 혼자 달리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기온도 내려갔다. 51.4km 용연삼거리 5CP에서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바람막이에 장갑을 꼈다. 출발하려고 일어서서 시간을 보니 51.4km를 달리는데 7시간이나 소요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안타깝지만 지난번 해운대 썸머비치대회처럼 완주시간이 14시간 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km 이후 스피드가 8~9분주였는데 식사를 해도 나아지질 않았다. 여우목고개 정상까지 5km 긴 오르막 구간에 만나며 스피드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커피를 마셔봐도 졸음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흐느적거리며 12~13분주로 걸었으니 등산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62km 지점인 여우목 고개 정상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잔하고 내리막을 달리기 시작했다. 급한 내리막조차 속도가 나질 않았다. 백두대간 대미산과 황장산이 파나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하늘은 별이 반짝거렸다.
1km 정도 내려서자 뒤에서 랜턴을 든 주자가 쫓아왔다. 그와 같이 가지 않으면 컴컴한 내리막길에서 넘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자세를 고치고 보폭을 줄였다. 실제로 이번 대회에는 넘어져서 부상당한 주자가 많았다. 8~9분주 페이스가 6분 30초가 되었다. 속도가 빨라지자 잠도 확 달아났다. 7cp는 순식간에 도착했다. 이젠 14시간 완주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앞선 주자들을 한 명씩 따라잡는 기분도 괜찮았고, 제 컨디션을 찾은 게 다행스러웠다.
8cp에서 안*람씨를 다시 추월한 다음부터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자봉하신 분이 나한테 56번째 통과자라 했다. 언제나 10위권 전후해서 골인했는데 50위권 밖으로 밀려났으니 다음대회 때부터는 분발해야겠다. 83km 지점 버스정류장에서 개별적으로 자봉하시는 분이 막걸리 한잔을 권했지만 사양했다. 그때부터 경찰관 출신 류*곤씨와 동행하게 되었다. 경천호를 지날 때는 주자 여럿을 추월했다. 9cp에서는 류*곤씨와 함께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14시간 완주가 충분하자 류*곤씨와 또 다른 주자를 포함하여 셋이서 걷기 시작했다. 1km 정도를 걷자 바람막이를 입은 나는 괜찮지만 다른 주자들은 한기에 몸을 덥혀야 한다며 달리자고 했다. 어느 순간 류*곤씨가 앞서 나가며 또다시 둘이 같이 가게 되었다. 골인지점 3km 정도 남겼을 때 그가 멈춰 서면서 이별을 했지만, 앞서 나가는 내 입장에서는 이 길이 맞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게 했다.
13시간 43분으로 골인하고 식사를 하면서 막걸리를 마시자 구토가 올라왔다. 결국 밥은 먹지도 못하고 국물만 조금 삼켰을 뿐이다. Anett 영사는 12시 28분에 여자 2위로 골인했다고 했다. 3위가 아직 안 들어와 시상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처럼 후반에 제 컨디션이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대회였다. 다음 대회쯤이면 Anett 영사의 기록은 따라잡을 것 같았다. 운동장 샤워장에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김천행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점촌역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