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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묵상글 들 ( 부활 8부 금요일 - 헛수고의 뜻.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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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8부 금요일-헛수고의 뜻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오늘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들은 주님을 잃고 난 뒤 그리고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씀을 들은 뒤 그 말씀대로 갈릴래아에 갑니다만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기에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나가자 같이 고기잡이를 나섭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복음을 읽다가 '그날 밤에는'이 눈에 꽃혔습니다.
이 표현은 다른 날이라면 고기를 많이 잡건 적게 잡건
고기를 잡았을 텐데 '그날 밤에는' 유독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무슨 뜻이고
그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겁니까?
아무 의미 없고 그저 그날은 운이 없거나 우연히 그런 건가요?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보면
우연이 아니고 운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에는 모릅니다.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서 계신 분도 주님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압니다.
수고가 헛수고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수고를 헛수고가 된 것은 내 탓이거나 운이 없어서가 아님을.
수고를 헛수고로 만드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가 될 때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그때가 주님이 나타나실 때라는 것을.
우리의 헛수고에도 뜻이 있음을.
우리의 고통에도 뜻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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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얼마 전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제게 읽어보라며 보내준 책이었습니다. 원래 공짜로 받은 책은 잘 읽히지 않는데,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인상 깊어서 곧바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당뇨 합병증으로 만성신부전증을 앓게 된 남편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해 준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이식 전의 감정과 이식 후의 감정을 담담하게 적었습니다. 사실 신장을 이식해준다는 것이 부부관계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큰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공여자의 고통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여자 모두가 신장을 이식받고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니랍니다. 또 공여자는 더 이상 개복 수술을 받을 수가 없으며, 여러 암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아내도 급성골수성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사랑만으로 이 모두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식 수술로 인한 인간 육체의 고통도 문제지만, 수여자의 건강이 좋아지지 않고 공여자인 자신도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아주 열심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이겨냅니다. 신앙을 통해 사랑이 커지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을 때였습니다. 처음 제자들을 부를 때 곧바로 순종했듯이,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그물을 던졌고 너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만이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주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요한이었지만, 주님께 먼저 다가가기 위해 호수로 뛰어 들어간 것은 베드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라는 말에 곧바로 응답했던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리고 예수님과 전교 여행을 함께 하면서 그들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커졌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니까요. 그러나 그 사랑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진짜 사랑을 주님께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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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을 살아라. 삶은 멋진 선물이다. 거기에 사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나이팅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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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실천의 중요함
한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불에서 고생을 하며 그는 자신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비록 남을 위해 특별한 사랑을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생 죄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외쳤습니다.
“왜 제가 지옥에 있어야 합니까? 저는 죄짓지 않았어요!”
바로 그때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맞다. 너는 평생 어떤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는 좋은 일도 한 적이 없다. 너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사랑 실천이 전혀 없었습니다. 즉, 죄인은 용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지만, 사랑 실천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긴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그렇게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죄의 있고 없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있고 없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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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려놓는 만큼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미 빵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식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고기의 유무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활 식사를 위해 너희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냐?’그분의 나눔에 우리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식사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애썼지만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없이‘못잡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이르셨고,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나눔의 자리는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주님을 알아봤고, 베드로는 빠르게 행동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행동의 조화로움이 어디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함께하십니다. 다만 문제에 집착해서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를 내려놓는 만큼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수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는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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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3절) 하자 모두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못 잡았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제자들은 스승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았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7절).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분께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들이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8절).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고기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물고기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와야 하며, 죽어야 하고 불에 구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을 버리시고 즉 물 밖으로 나오셨고 돌아가시고(십자가형) 영광을 받으셨고(성령의 불꽃)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한다. 나의 고집으로부터 나의 선입견에서 과감히 벗어나(물 밖으로 나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이 죽는 삶(죽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삶(성령의 불로 타오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삶이(“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되어야 한다.
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는 음식이 될 수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자신 항상 나의 편견이나 아집에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탈출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하느님 안에 기쁨이 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다음으로 153마리는 물고기의 종류가 또한 그만큼 된다는 것으로 모든 종류를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라는 그물은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들어와도 그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그물을 베드로가 끌어올렸다는 것은 그의 역할로서, 백성들을 모아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13절)
물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고기처럼, 하느님이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 구원의 빵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도 같은 삶으로 끊임없이 물 밖으로 나와 죽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그래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그분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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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 하고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배추 잎을 먹고 자란 배추벌레가 배추색깔이듯이,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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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고향인 갈릴래아로,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돌아왔습니다. 아직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 하니 다른 제자들이 따라나섭니다. 어부인 그들이 밤새 그물질을 하였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어느덧 새벽이 되어 한 줄기 빛이 비추자 예수님께서 물가에 나타나시어 물으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한 번 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할 때도 있습니다. 또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피정, 강의를 통하여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영적 열매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영적 열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일을 하느님과 함께 해 내는가와 그 일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나가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직업이 어부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을 새워도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자신의 상태와 하고자 하는 일을 솔직하게 상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일할 때 우리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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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내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독서에서는 태생 불구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킨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오천 명 가량의
새로운 신자들을 얻게 되자 이를 우려하는 유다교 당국자들이 험악한 분위기에서 심문을 하는데도
당당하게 그 위협에 맞서는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발현 기사는 복음서에 여러 번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엠마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뵈온 두 제자는(마르 16,12-13; 루카 24,13-35)
열두 제자단에 속하지 않던 이들이었는데 이들의 발현 목격담을 듣고도 스승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던
열한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마르 16,1418; 마태 28,16-20; 루카 24,36-49).
그런데 요한은 공관복음사가들이 보도하지 않은 발현 기사를 더 알려주었습니다.
위의 ‘열한 제자’ 속에 토마스는 빠져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는 스승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믿지 않았으며
그래서 토마스가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 20,24-29).
그러니까 오늘 독서에서 들으신 것처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제자 시절의 유치함과 불신
그리고 몰이해를 졸업하고 사도라는 명칭에 걸맞게 담대한 믿음과 굳센 용기로 복음을 선포하면서
유다교 당국의 박해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되기까지 오늘 복음상황을 포함하여
모두 세 번의 발현 체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선 두 번의 발현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과 달리,
오늘 복음의 세 번째 발현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났는데, 이 두 번에 걸친 발현 체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 채 본래의 생업인 어부로 돌아가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당신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던 예수님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 이 세 번째 발현에서는 초강수(超强手)를 두셨습니다.
두 번째 발현에서 십자가에서 찔린 상처를 지닌 당신 몸까지 보여주셨는데도 믿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능력이란 밤새 물고기를 잡느라고 애를 썼어도
허탕친 그 어부 출신 제자들에게 어부 차림으로 나타나셔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배에 가득차도록 물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었습니다.
이 풍어(豐漁)의 기적은 당신이 이미 돌아가시기 전에도 치유와 구마 등의 형태로
여러 번 발휘하신 바 있었던 신적인 능력을 상기시키셨음은 물론이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사도들 안에 현존하셔서 일으키실 선교활동에 있어서도 풍요롭게 발휘될 것으로
예상되는 성령의 능력까지를 예상하게 하는 기적이었습니다.
풍어의 기적이 선교적으로도 나타날 것임을 암시해 주는 표징이 잡힌 물고기의 숫자입니다.
큰 고기가 153마리가 잡혔다고 하는데, 이 153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는 매직 넘버였습니다.
수학에서 ‘Triple Cube Number’라고 부르는 이 숫자는 각 자리수를 각각 세제곱해서 더해도
원래 자신의 수가 나오는 신기한 숫자입니다. 즉, 1³+5³+3³=153이 됩니다.
이 숫자의 마법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태생 불구자를 걷게 만든 기적을
일으킨 즉시로 위력을 발휘했는데, 무려 오천 명 가량의 장정들이 믿게 되었습니다(사도 4,4).
여자들과 노인들과 어린이들까지 합하면 군중의 총수는 이만 명을 넘을 것입니다.
이 같은 놀라운 선교 성과에는 두 가지 요인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처럼 버려짐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신 것이라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제자들 역시 빈 무덤의 충격으로
믿음을 잃어버리고 두 번에 걸친 발현 체험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되지 못했었고
그래서 또 다시 세 번째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밤새 허탕친 제자들에게 풍어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사도로 변화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가능했고,
또 빈 무덤의 충격과 밤새 허탕친 좌절로 풀이 죽어있던 제자들에게
풍어 기적이 나타났고 그래서 용기를 내어 사도가 된 이들에게 태생 불구자의
기적이 일어나서 놀라운 선교 성과도 가능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닥을 쳐야 도약할 수 있듯이,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을 하느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신 경우라 할 것입니다. 이 풍어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요한 21,6) 하고 말씀하셨고 낯선 목소리였겠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 보라는 이 제안에 제자들이 순명했기 때문에 주어졌습니다.
이 내용과 병행되는 기사가 루카복음서에 나와 있는데,
거기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 시기 입교자와 성소자가 급감하고 냉담자는 증가하고 있는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의
선교상황도 빈 무덤으로 좌절한 제자들이나 밤새 허탕친 어부들의 처지를 방불케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오른쪽 깊은 선교어장’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 사회의 양극화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기침체로
더욱 좌절하고 있는 소외계층은 복음적인 의미에서 ‘오른쪽 깊은 선교어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복음을 전하신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종교적 유목민처럼 신앙을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자발적 무신론자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 한국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이들
역시 역사적인 의미에서 ‘오른쪽 깊은 선교어장’입니다.
무지와 오해 속에서 주술로 폄하되어 왔지만, 우리 민족의 직계 조상들은
그 오랜 옛날에 빛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섬기려고 우상숭배에 물든 무리를 떠나 동방으로 떠나왔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우리 후손들에게 하느님 신앙을 물려 주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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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자전거를 타면서 안장의 높이가 걱정이었습니다. 안장이 낮으면 타고 내리기가 편했습니다. 그러나 폐달을 밟는 모습이 팔자모양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었는데 모습이 우스웠습니다. 후배 신부님이 안장을 높여 주었습니다. 타고 내리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안장이 높아서 걱정했는데, 타고 내리는 법을 익숙하게 배우니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리를 쭉 뻗어서 폐달을 밟으니 속도가 빨라졌고, 자세도 좋아졌습니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둥지에서 나와야 합니다. 날개의 힘을 믿고 힘차게 둥지에서 날아야 합니다. 안장을 조금 높이니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 있었듯이, 우리의 삶도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부활은 새가 둥지를 날아 높이 날아오르듯이, 위험하게 보이지만 안장을 높여야 더 잘 달릴 수 있듯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변한 것입니다. 내가 변한 만큼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목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동은 양을 들판에 풀어놓습니다. 양들은 알아서 풀을 찾아다닙니다. 대부분의 양들이 돌아오지만 간혹 돌아오지 못하는 양이 있습니다. 풀을 찾아가다가 웅덩이 빠진 양이 있습니다. 양은 목동을 부르면서 웁니다. 목동은 웅덩이 빠진 양을 봅니다. 그러나 바로 웅덩이에서 양을 빼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울다 지친 양이 쓰러져 있으면 그제야 목동은 양의 목에 줄을 걸고 양을 들어 올립니다. 양이 울고 있을 때 줄을 내리면 양이 올라오다가 몸부림 치고 잘못하면 양이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동은 양이 울다 지칠 때까지 기다립니다. 어린 날 힘들고 괴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것이 어깨를 누르는 짐이 되기도 했습니다. 열등감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던 것도 즐거웠습니다.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꽃을 보고, 바람을 느낀 것도 좋았습니다. 열이 심하면 먼저 열을 낮춘 다음에 치료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울다 지친 제자들을 기다려 주시는 것은 아닐까요? 목동이 울다 지친 양의 목에 줄을 걸어서 올려 주듯이, 주님께서는 울다 지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하느님 나라와 가까워졌습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여전히 사도들을 감옥에 가둘 수 있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습니다. 여전히 밤은 찾아왔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그 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그 밤입니다. 물속에 빠져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외쳤던 그 밤입니다. 헤로데가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그 밤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그 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밤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밤은 새벽이 다가오는 여명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비록 그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지만, 이미 저녁때가 되었지만 그것으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힘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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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순례 여정중의 공동체
- 예수님 중심의 삶 -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 구원받지 못합니다.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잠시 수도원 집을 떠나니 집이 생각나고, 잠시 공동체를 떠나니 공동체가 생각납니다. 천국 입장도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라 합니다. 여기 피정집에 왔을 때 수녀님의 물음에 잠깐 고민한 일이 있습니다.
“신부님, 식사는 저번때처럼 수녀님들과 함께 같이 식당에서 하시겠어요? 아니면 사제식당에서 따로 하시겠어요?”
40여년 수도공동생활을 해왔어도 혼자 조용히 있기를 좋아하는 은수자적 성향이 강한 저인지라 따로 할까 하는 유혹에 잠시 망서렸습니다만, 곧 결정해 연락드렸습니다.
“전번처럼 식당에서 수녀님들과 함께 먹겠습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가 답입니다. 혼자와 함께의 균형이 답입니다. 혼자만 좋아하다보면 급기야 이상한 괴물이 될 수 있고,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의 배려와 존중, 섬김의 삶중에 온전한 인격으로의 성장입니다. 공동전례기도인 미사와 성무일도시간만 빼고 온종일 혼자 있게 될 터인데 밥까지 혼자의 혼밥은 할 수 없다는 분별의 지혜였습니다.
더불어 생각난 것이 7년전 안식년중 미국에 있는 왜관수도원의 분원인 뉴튼수도원에서 3개월을 지낼 때였습니다. 사막같은 수도원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내다 보면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은 수도형제들과 함께 하는 공동전례기도시간과 공동식사시간뿐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 성당에서의 공동전례기도시간이고, 육적으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 식당에서의 공동식사시간이었습니다. 성사聖事처럼 중요하기에 식사食事요 농사農事라 합니다. 왜관 수도원의 병실의 노수사님들에게도 재미난, 그러나 의미심장한 일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불편해도 공동전례기도는 휠체어를 타고라도 필사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전과 형제들을 살펴 보면서 소속감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또 ‘살기위해서’ 본능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당장 공동체를 떠나면 신원의 위기를,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내에서의 각자의 구체적 제자리가 내 신원을,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수도형제자매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영성을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제가 자주 강조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수도공동체는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이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나 성격, 취향이 맞아서 공동생활이 아니라 각자 바라보는 중심의 방향이 같기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기에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수도생활은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함께 사는 것이고, 수도생활의 어려움은 이런 함께 사는 것이며,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최고의 수행이자 도닦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함께 살아갈 때, 영원한 도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정도 깊어지면서 예수님을 닮아 둥글둥글 원숙圓熟하고 원만圓滿한 인격의 성장이요, 더불어 수도형제자매 도반들과도 깊어지는 우정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더불어 순례 여정중의 공동체-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정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7년전 산티아고 800km 순례 체험의 은총입니다. 그대로 순례 여정을 압축한듯한 30여일의 순례기간이었고, 여기서 참 중요했던 요소가 바로 함께 하는 기도와 도반이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늘 함께 하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또 눈에 보이는 형제들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순례 여정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더불어 순례 여정중인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 복음과 제1독서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늘 보이게 함께 하는 분이 아니라 의기소침해있던 여섯 제자들은 공동체의 지도자인 베드로를 따라 쓸쓸히 옛 고기잡이 일터로 복귀합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께서 부재하실 때 별무소득, 허무만 가득한 삶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어지는 다음 묘사는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신데 눈이 가려 못 알아보는 경우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흡사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한 예수님의 모습이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영혼의 태양으로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도 정겹기 한이 없습니다. 이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그물에 가득 고기를 잡았을 때 전광석화 눈이 열려 알아본 이는 예수님의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애제자의 탄성과 더불어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 듭니다. 애제자이자 관상가 요한과 수제자이자 활동가인 베드로가 환상의 콤비이자 도반임이 드러납니다. 둘 다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서로 이런 깊은 영적우정임을 깨닫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파스카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제자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닮았습니다.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의 사랑의 기적 체험이 베드로를 참으로 담대한 주님의 용사로 만들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베드로 곁에는 그의 도반이자 절친인 요한이 늘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베드로의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고백은 얼마나 통쾌한지요!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평생 화두로 삼고 싶은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삶의 중심이자 영원한 도반이신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더불어 순례 여정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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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3-6).”
1)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생각하면,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고기를 잡으러 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은, ‘먹고 사는 일’만 생각하는 인생은
허무하게 끝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남는 것이 없는, 또는 얻은 것이 없는 허무한 인생일 뿐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인생을 일률적으로 다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현세만 생각하면서 살다가는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라는 말씀은,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충만한 은총을 누리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는 루카복음 5장에 있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와 여러 가지로 많이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만 보면, 예수님께서 곁에 안 계시는 상황에서
어부들이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것이 같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을 던져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도 같습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이야기는, ‘먹고사는 것만 생각하는 어부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람 낚는(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새롭게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로,
즉 제자들이 새롭게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간 것을,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하러 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선교활동을 하러 간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그날 밤’은 그들이 예수님을 떠나 있는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 그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은 ‘예수님 없이’ 자기들의 힘만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을 던져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은 일은, 그들이 예수님께 기도했고, 믿음과 기도의 힘으로, 선교활동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고, ‘예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도와드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 힘만으로 한다는 말은,
기도하지 않으면서, 마치 세속 사람들의 영업 활동처럼 한다는 뜻입니다.)
선교활동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3).”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라는 고백이고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에게 빵과 고기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을 그냥 ‘배가 고파서’ 한 일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사람 낚는 일’(선교활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을 먹이시고, ‘새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지칠 때도 있고, 허기와 갈증에 시달릴 때도 있고,
외롭거나 무섭거나 슬플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전례 때에 사용하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는 인사말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인사말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지쳐서 주저앉아 있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숯불과 물고기와 빵을 준비하셨을까?
아마도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작은 기적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라는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고,
잡은 고기의 수를 세어보게 하기 위한 상황 설정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미 물고기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먹기 위해서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153’이라는 숫자는 ‘충만함, 완전성,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언제나 항상 ‘넘치도록 풍성한’ 은총입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십니까?’ 라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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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못 잡았습니다."(요한 21, 5)
못 잡은
것이
오히려
은총이다.
내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라
여기면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
못 잡는
날도 있고
많이 잡는
날도 있다.
무엇에
사로잡혀
있기에 늘
빈 그물이다.
아무 것도
못 잡은
거기에서
주님 말씀을
듣는다.
말씀과
일상은
우리 앞에
있다.
그래서
늘 새롭다.
묵은 어제가
아니라
새로운
아침이다.
낮아지는
쪽에서
시작되는
깊어짐이다.
낮은 곳으로
오시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을 통해
가장 따뜻한
아침을
맞이한다.
부활의 기쁨을
나누시는
주님이시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은총의
밤이고
은총의
아침이다.
주님의
은총 없이는
이 모든
일상은
불가능하다.
부활은
일상의
새로운
변화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아침에
감사하는
일이다.
빈 그물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의
일상이다.
주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소중한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다.
부활은 걱정과
욕심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감동과 감사이다.
우리는
못 잡았지만
주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주시는
사랑이시다.
사랑이
그물을 채우고
사랑이
오늘을
끌고 간다.
못 잡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못 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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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의미 깊은 만남의 장이 펼쳐집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3)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몇몇 제자들이 다시 고기를 잡으러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되살아나신 그분을 만난 놀라움과 기쁨은 잠시이고, 부활의 메시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지요.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한때는 고기잡이가 전문 영역이었건만 오랜만에 돌아온 제자들은 밤새 헛탕을 치고 맙니다. 그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일러주시지요. 그분은 전문 어부는 아니시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한 어부들의 부르심 대목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지요.(루카 5,1-7 참조) 직관으로든 기억에 의해서든 요한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알아보는 건 분명 사랑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숯불과 빵과 물고기.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호숫가의 밥상은 참 소박하고 따뜻하며 온기 넘칩니다. 상을 차려놓고 누군가를 불러 음식을 나누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밤을 지샌 노동으로 지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옛 삶을 기웃거리다가 빈 손에 실망한 이들에게야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예수님은 배반하고 도망가고 되돌아간 제자들을 탓하지도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상을 차려 주시고 먹이시며 말을 건네고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지금 제자들을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는 건 사랑뿐입니다. 아울러 대개 사랑을 베푸는 이도 그 사랑으로 위로를 받기 마련이니, 예수님도 그러시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최고 의회 증언 대목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4,10)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켰는지 묻는 종교 지배자들에게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군에 넘겨 죽임을 당하게 한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베드로는 에둘러 답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일은 치유 받은 이의 공로나 믿음에 의한 기적이 아니었지요. 제자들의 능력은 더더욱 아니었고요. 예수님의 신임을 받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분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자신의 약함을 직면했던 부끄러운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이 제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 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흘러나온 것이었지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말씀을 근거로 타 종교를 배척하는 건 하느님 사랑을 너무 편협하게 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지만 진리와 사랑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배제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구원을 보증하는 탁월한 길인 이유는, 그 이름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그 사랑의 완성이며 절정이시니까요. 아무도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다정히 우리를 초대해 상을 차려 주시고 귀를 기울여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푹 잠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실패와 부끄러움을 아시는 그분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촐한 사랑으로 당신도 위로받으시지요. 죄인인 우리에게 구원을 보증하는 사랑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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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요한21,4)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삶의 자리인 고기 잡는 물가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러자 그들이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21,6)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153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고, 그런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이 얼마나 충만한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니 많은 물고기가 잡혔고, 그물도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제자들의 성공적인 선교 활동과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충만함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온전하게 머물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성령으로 가득 찬 베드로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1-12)
날마다 아니 매순간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부르면서,
그 이름 안에 머물러 봅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대화(기도)해 봅시다!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힘이 듭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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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복음 21장 5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밤새 헛탕친 제자들에게 말씀을 건네시자 제자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굴 놀리나? 우리는 이 바닥에서만 경력이 30년인 전문직 어부들이야!
누가 누구를 가르키고 있어 정말!’
그러나 포스와 위엄이 잔뜩 느껴지는 그분의 말씀에 압도된 제자들은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거짓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터져나갈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눈치빠른 요한 사도가 알아차렸습니다. 베드로에게 보고를 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잡힌 물고기는 총 153마리였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에 따르면 고대 자연과학자들은 세상 모든 물고기의 종류를 153가지라고 여겼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그물 안으로 총집합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표가 그물 속에 든 153마리의 고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힌 물고기를 몇마리 갖고 오라고 하시고는 손수 숯불을 피우셔서 노릇노릇 맛있게 구으시고, 빵도 꺼내놓으시고는 외치십니다.
“와서 아침을 들라.”
참담한 실패의 밤을 보낸 허기진 제자들 앞에 손수 빵과 물고기를 대령하시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 작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텐데, 그날 따라 단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뭘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상태에서 임재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 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부재 사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 안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현존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기쁨과 희망,
따스함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맛갈지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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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가장 쉽고 빠르고 완전한 법: 복음을 전하면 됨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명이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밤새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물가에서 어떤 낯선 이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을 무시하나 싶어 화가 날 법도 하지만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자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물고기는 백쉰세 마리였는데, 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히브리말 숫자와 같습니다.
즉, 배는 베드로를 포함한 교회를 상징하고 그 교회가 많은 영혼을 낚으며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모든 것일 불가능했음을 깨닫고 교회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되는 장면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고 하시는데, 누구도 감히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이러한 일은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본 사람만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낳을 때 남편의 심정은 어떨까요? 자신이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분만실에 함께 들어가 손을 잡고 남편도 함께 고통에 동참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렇듯 선교는 그리스도의 자녀를 낳는 것이기에 이 일을 할 때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기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선교하는 이에게 주님께서 가장 명확하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개신교 선교사의 편지이고 아주 특별한 경험도 아니지만, 중국 선교를 하며 체험한 한 잔잔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선교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 이만월 선교사는 소수민족을 선교하던 중 체험한 이런 경험을 편지로 보내왔습니다.
“2018년 6월로 기억되는데, 저는 선교 여행을 운남성 남녘 시솽반 나 멍송으로 갔었습니다.
그곳 멍송에서의 밤하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멍송 차 농가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원주민의 방에는 물 것이 많다고 하여 밖에서 자기로 하고 텐트를 쳤습니다.
나는 좀 예민한 편이라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게다가 텐트를 친 장소가 차잎을 말리는 곳이라 바닥에 울퉁불퉁한 나무 막대기가 깔려 있어 등이 배겨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소변을 볼 양으로 텐트를 열고 몇 발자국 걸어나가 바지의 지퍼를 내리는 순간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습니다.
아니 저 앞 나지막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걸어가서 마치 손으로 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머리 위를 쳐다보니 캄캄한 하늘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은하수가 유유히 흐르고 그 주위에는 이루 셀 수 없는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밤하늘 별들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때 번득 이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아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이 분명하고도 커다란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아브람에게 하시던 음성을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4천 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이어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렇다. 하느님의 언약대로 이 세상엔 저 뭇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아브람의 영적인 자손들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나를 통한 복음으로 아브람의 자손 된 사람들이 저 뭇별처럼 밤하늘을 빛내겠지.’
나는 그때 선교의 비전이 열렸습니다.
또 선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역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밤하늘의 뭇별을 향하여 치켜들고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리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소리높여 찬양했습니다.
몇 번을 불렀는지 모릅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시며 하염없이 흘러내리는데 얼굴엔 웃음이 가득합니다.
나는 그 이후 밤하늘의 뭇별을 헤아리는 버릇이 생겼고 주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그 찬송을 좋아하게 되었고 제일 잘 부르기도 합니다.
나는 그 이후에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밤하늘을 우러러보았지만, 그때만큼 많은 별을 볼 수 없어 못내 아쉽습니다.
그때 그 감격을 재현해 보려고 해도 그 날밤 그만큼 많은 별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간 영영 한 번의 감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초조함으로 오늘도 밤하늘의 별을 헤아립니다.
코로나로 아주 힘든 시간이지만 선교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기도로 승리하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출처: ‘중국 선교지에서 들려온 기적 같은 이야기’, 유튜브 채널, ‘말씀의 검’]
저는 매일 복음 묵상을 씁니다. 써온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 묵상할 때마다 ‘오늘은 아무 말씀도 안 주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여지없이 기도의 응답을 주십니다.
저는 복음 묵상을 쓸 때마다 매번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따르는 것 같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지금 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가장 절실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음 묵상 나누기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주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이 지금보다는 확실히 적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기쁨을 누리는 데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믿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의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동행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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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형제님.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잡는 일은 그들의 생업입니다. 밤새 그물질을 수차례 했을 겁니다. 번번이 다 허탕만 친 것입니다. 사람은 노력을 했을 때 노력한 결과에 비해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힘이 빠지고 기력이 소진하게 됩니다. 이제 어느덧 밤의 어둠은 밀려가고 동이 트는 아침이 되자 백 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뭍에서 지켜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마 미루어 짐작하건데 예수님께서 밤새 허탕질만 하는 제자들을 지켜보시고 계셨을 겁니다.
복음을 묵상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게 모든 복음이 어떤 경우는 아주 상세하게 묘사를 하지 못해 복음의 행간 사이를 읽는 사람이 그 공간을 잘 메우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기를 잡았는지 물어보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뭍에 계셨습니다. 거리는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습니다.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지 않으신다면 들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근데 복음은 이런 상황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이런 걸 생각해봤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물리적 거리가 적용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물리적인 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리 예수님과의 거리가 설령 멀리 떨어져 있다고 그렇게 느낄지라도,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거리는 지근거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에서 보면 마치 가까운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큰소리로 말씀하셨다고 하신 표현이 없는 걸로 봐서는 그렇게 판단을 해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예수님의 질문 속에 사랑이 묻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어보시는 의미보다는 무엇을 잡았느냐 하고 하는 뉘앙스입니다. 이 말씀엔 미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관심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고기를 단순히 잡았느냐와 만약 고기를 잡았다면 무슨 고기를 잡았느냐와는 조금 느낌이 다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주 작은 것에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게 작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드러나는 모습은 작지만 실제 이렇게 하려면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런 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때 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화를 하긴 하지만 이때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저는 이걸 기도와 관련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못 잡았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니 그렇게 합니다.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그들이 하긴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지시한 것이라고는 의식을 하지 못합니다. 언제 그들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지했는지는 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이 돼 있지 않습니다. 고기가 그물에 걸려 끌어 올릴 수가 없을 때, 이 상황을 보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둠이 가시고 가시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됐기 때문에 알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먼저 설령 가시거리 범위 내에 계셨더라도 예수님을 보고 인지한 것이라기보다는, 고기가 생각보다 많이 잡힌 것을 보고 예수님이심을 인지했다고 보는 게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은 환경임에도 예수님을 제일 먼저 인지한 것은 요한사도였습니다. 왜 요한사도가 먼저 인지를 했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예수님의 애제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마 다른 제자들보다 좀 각별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의식을 하지 못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십니다. 대화를 먼저 요청을 해오십니다. 근데 우리는 우리의 일 때문에 그 요청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이 마치 기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오셨지만 요한사도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현존을 인식하지 못한 거지 예수님이 우리 곁에 안 계시신 게 아니라는 사실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하면 가시거리를 넘어 계신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지 물리적인 거리는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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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제1독서(사도4,1-12)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11~12)
베드로는 산헤드린 최고 의원들 앞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면서 과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신 마태오 복음 21장 42절 말씀을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에 자신이 기록한 서신인 베드로 전서 2장 7절에서도 예수님께 관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하고 언급한다.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에 없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은 그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모퉁이 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오늘 본문은 시편 118장 22절의 인용이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러한 구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이방의 강대국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같은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들어서 집을 짓는데 긴요한 모퉁이 돌 즉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내용을 역설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의 사명의 성격을 나타내셨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무가치하게 여겨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요한2,20~22) 교회의 모퉁이 머릿돌이 되셔서 귀하게 사용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 에서 '주어진'으로 번역된 '데도메논'(dedomenon)은 '주다'(give)를 뜻하는 '디도미' (didomi)의 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여기서 수동태는 그 주체가 유일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받는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에서 '없습니다' 에 해당하는 '우크 에스틴'(uk estin)은 현재 시제이다. 여기서 현재 시제는 변치 않는 진리(truth)와 사실(fact)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이름을 통한 구원이 없다는 이 사실이 베드로가 말하기 이전과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오늘날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라는 말이다.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절에서 '구원'에 해당하는 '소테리아'(soteria)는 '치유'와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①먼저 '치유' 즉 육체적 구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히브11,7). 이 경우는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고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役事)를 가리킨다(사도3,6~8).
②두번째, 영적인 구원의 의미이다(2코린7,1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제관과 그 무리들이 구원받지 못할 백성임을 밝힌 셈이다.
위의 두 가지를 종합하면, 베드로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통해서 자신을 죄인 취급하며 심문하는 대제관과 무리들을 향해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이나 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육신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어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질병이나 물질의 축복만을 구한다. 또 반대로 어떤 이들은 육신의 일이나 현세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영적인 구원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이란 영혼과 육신이 모두 온전해지는 총체적이고도 전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우린 우리 자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 21,1-14)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 제자들의 소개부분이 다른 때와 좀 다릅니다. 완전, 충만을 뜻하는 그 일곱(안식)에 맞추어 소개하는 듯합니다.
그 칠(7)의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말씀과 떨어지면 흙의 본성, 습성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 어떻게 몰라볼 수 있을까요? 두 번아나 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신 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임을 깨닫지 못해 쉼, 안식의 그분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 베테랑 어부들이 잡지 못했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 사람의 뜻, 베테랑의 그 방법과 다른 예수님의 뜻, 방법의 오른쪽입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가 염치 없이 갑니다. 겉옷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덮으신 그 의로움의 겉옷을 입고(깨닫고) 갔기에 염치 없이 ‘주님이십니다.’라는 소리를 듣자 곧바로 간 것입니다.
(이사61,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에페6,14)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 숯불 위에 놓여진 물고기와 빵, 죄를 덮으시는 성령, 그 불 위에 놓인 제물을 뜻합니다.(레위16,11~13참조)
(레위16,13) 그 향을 주님 앞에서 숯불에 놓아, 향 연기가 증언 궤 위에 있는 속죄판을 덮게 한다. 그래야 그가 죽지 않는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 예수님의 말씀대로 잡은 물고기입니다. 그 고기(제물)만 받으십니다.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153)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입니다. 사람을 낚는 도구~ 말씀입니다.
말씀을 앞뒤 문맥을 연결해서 보지 않고 한 부분만 읽고 묵상하면 말씀이 조각나 찢어진 것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의 뜻, 베테랑의 지혜로, 도덕과 윤리로 깨닫게 되어 사람을 구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 반대의 의미로 예수님의 말씀 뜻대로 잡았기에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53~ 100- 완전을 뜻하는 하늘의 수, 50-모세오경, 3-삼위를 뜻합니다. 모세의 율법(제사와 윤리)을 하늘 삼위께서 다 이루셔서 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로마3,21-22)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12ㄱ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아침- 빛의 양식으로 먹어라~입니다. 저녁(땅)의 내일(하늘)의 양식, 곧 ‘하늘의 양식을 먹어라’ 하심입니다.
12ㄴ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 세 번째~ 예수라는 성전이 부서지시고(죽으시고) 그리스도라는 성전으로 다시 세워지신 안식의 구원자의 모습을 뜻합니다.
(요한2,19.21)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사흘 안에’를 직역하면 세 번째 것입니다. 오늘 그 세 번째 것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오늘 나는 그분을 모신 안식의 성전이 됩니다.
(1코린6,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아멘, -^ㅎ^-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복음(요한21,1~14)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밴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1)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당시 그 자리에 다른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도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리는데 힘을 합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마치 시몬 베드로 혼자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힌 그물을 끌어올린 것처럼 기록했다.
이것은 고기를 끌어올리는 행위가 상징하는 앞으로의 제자들이 수행하는 선교 사업에 있어서,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제로 시몬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사도9,32~34).
그리고 요한 복음 21장 11절에서 이 사건의 목격자인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잡은 고기가 매우 풍성했음을 세 단어를 사용해서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가득'에 해당하는 '메스톤'(meston; fulls), '그토록 많은데도'에 해당하는 '토수톤'(tosouton; so many), '큰'에 해당하는 '메갈론'(megalon; great; large)이 세 단어인데, '메스톤'(meston)은 밀도의 정도를, '메갈론'(megalon)은 크기나 부피의 정도를, '토수톤'(tosouton)은 분량이나 수의 정도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가득찬 큰 (고기가) ~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같은 삼중적 표현을 통해 단순히 고기가 양적으로 많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놀라운 결과로서의 풍요함을 독자들이 생생하게 느끼도록 했다.
또한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 사건이 주는 놀라움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정확하게 잡힌 고기의 수를 세어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이 숫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100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수이며, 50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수이다. 그리고 3은 삼위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장차 유대인과 이방인의 복음화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완성될 것을 보여준다는 견해이다(성 치릴로).
둘째, 자연수인 1부터 17까지를 모두 합할 경우에 그 합이 153이다. 17에서 10은 율법의 수요, 7은 은총의 수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이 이른다는 견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셋째,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인 베드로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인 '시몬', '바르요나', '게파'의 알파벳이 나타내는 수가 가리키는 합이 153이므로, 이것은 시몬 베드로를 중심으로 복음 전파가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튀빙겐 학파).
넷째, 자연계의 물고기의 종류가 153가지나 되므로, 이것은 세상 모든 종족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견해이다(성 예로니모).
이러한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해석들은 앞으로 제자들이 담당해야 할 세계 선교의 결과가 매우 풍요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제자들을 고기잡는 어부에서 사람잡는 어부로 부르신 것처럼, 이제 부활 이후에 다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이 사건을 통해 사람 낚는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신 일과 관련해서 요한 복음 21장 11절의 상황과 유사한 내용이 기록된 루카 복음 5장 6절을 보면, 고기를 많이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온다.
루카 복음사가는 하느님께로 돌아올 사람들이 매우 많음에 초점을 맞추었고, 요한 복음사가는 그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의 포용성, 즉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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