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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1:1)
우리가 잘 아는 무디 목사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종노릇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나라입니다. 주인이지만 종의 삶을 살고 서로 섬기며 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앞에 나와서 바꾸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는 도리어 섬기는 것입니다. 대우받고 높임받고 존경받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도리어 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바로 진정한 섬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누구에게 종노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섬기는 종의 참된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성경이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섬긴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도 아끼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피차간에 서로 섬길 수 있다면, 피차간에 서로 복종할 수 있다면, 피차간에 서로 종노릇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관계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풍성해지고, 얼마나 더 만족스럽고, 또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한다면 섬길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사랑한다면 얼마든지 종노릇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더 깊이 생각해보면 진정한 믿음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말하고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애입니다. 인애(어질仁 사랑愛, mercy , kindness),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것입니다.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이유없는 사랑입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같이 조건이 있었다면 벌써 우리는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속에 어떤 사랑이 있습니까? 헤세드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표현할 때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용서로 나타납니다. 이해로 나타납니다. 관심으로 나타납니다.
전에는 나밖에 못보았는데 이제는 남의 아픔이 보이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에는 안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한번도 걸어보지못하는 걸인 장애인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나타날 때 우리는 진정한 예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간관계가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종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스리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결국에는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해가는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갈 5:15에서도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의 종노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입니다. 사단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우리에게 종이 되라고 강요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신 주님께 먼저 우리의 종이 되셨기에 우리도 그 은혜를 깨닫고 서로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종으로 자원하세요. 교회에서도 종으로 자원하세요. 그것이 진정한 헤세드입니다. 진정한 섬김입니다.
억지로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종이 된 것이고, 부자유스러운 종이 아니라 참된 자유를 누리는 종이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사랑에 완전히 붙들린 종이 된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내가 평생 당신을 섬기겠어요.”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없이 남편에게 시중드는 것은 옛날 종들이 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긴다면 그 멍에는 전혀 힘들거나 무겁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종이 되어줍니다. 그래도 마냥 기쁘고 즐겁습니다. 발을 씻어 주어도 자존심이 하나도 상하지 않습니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줘도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그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을 주일마다 들었고 읽었지만 말씀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실천이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눅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주여주여하고 부른다 할지라도 그 말씀대로 살지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겉만 멀쩡한 21세기의 바리새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은 삶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와 내가 사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뿐 만 아니라 내가 죄가운데 헤메일 때에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주님의 주권이 미치고 있습니까? 무엇을 결정할 때 누구의 뜻이 우선합니까? 내 뜻입니까? 주님의 뜻입니까? 여러분 주님의 뜻이 여러분의 삶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야고보서는 바로 이런 생활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생활을 강조하면서 생활을 회복시켜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은 다음에 양치질을 함으로 이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처럼, 더러운 옷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때가 깨끗하게 빠지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더러운 부분이 있으면 말씀을 통해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구겨지고 더러워진 옷을 세탁소에 맡기면 깨끗하게 세탁을 하고 다림질을 해서 새 옷이 되는 것처럼 생활이 구겨지고 더러워진 사람이 야고보서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깨끗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항상 정직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에게는 기쁨이고 더 나아가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1장 1절 한 구절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이런 내용은 주로 편지의 첫 부분, 즉 서두에 쓰여지는 인사말입니다. 인사말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속에 보석처럼 숨어있는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야고보서를 1장부터 끝까지 쭉 읽어보면 한 구절 한 구절이 얼마나 귀한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도 큰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하는 이 내용 속에 어떤 교훈이 담겨져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야고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세베대의 아들이요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나오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있고,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 사도가 아닙니다. 그 야고보는 이미 헤롯왕의 칼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입니다. 마 13:54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고향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어디에서 저런 지혜와 능력의 말씀이 나오느냐? 아니,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우리와 같이 살고 있고 그의 동생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같이 살고 있고, 누이동생들이 우리 마을에 같이 살고 있고, 자기도 우리 집을 고쳐 준 목수였는데, 언제 저런 지혜를 배워서 이렇게 가르치느냐?”하고 모두 놀라면서도 배척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야고보가 자신을 소개할 때에 ‘예수의 동생 야고보’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라는 말은 노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주권이 없는 노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후 주님을 알고난 후에 주님을 주인으로 부른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뜻앞에 자기를 다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유다서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놀랍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종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야고보가 성령을 받고난 다음에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아마 옛날에는 ‘형!형!’하면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성령을 받고 나서 은혜로 영의 눈이 열리니까, 영안이 밝아지니까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구세주이십니다. 야고보가 이것을 분명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은 초라한 피조물에 불과하고, 십자가로 구원받게 된 자이지만, 예수님은 창조주시요, 우주만물의 주인이시요,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혈연관계를 초월해서 영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음을 자랑하며 늘 그 이름을 자랑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린 것처럼 종은 세 가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에게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소유권이 주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물질, 재능, 가정, 직장,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내것을 내것으로 주장하고 거기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더 많은 복을 달라고 하여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왜 우리가 주의 것입니까?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기적을 나타냈더라도 그것은 주님의 능력이 나를 통하여 나타난 것이고, 말씀을 전하였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내 입술을 사용하신 것 뿐, 물질도, 기능도, 전혀 나의 소유가 없습니다. 너는 내것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전 7:22-23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도 하나님의 것을 드렸을 뿐 교회봉사도 은혜를 힘입어 하였을 뿐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잃는 다 할지라도 구약의 욥처럼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자녀, 건강, 물질, 주신 주님께 그동안 주셔서 누린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이시니 우리는 그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2. 선택권이 주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했다면 그 증거는 선택권이 주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뜻앞에 순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했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유심하게 보시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마1;22,4:14,21:4) 예수님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말씀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종된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려면 항상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뜻입니다.
내 생각에는 내 뜻이 가장 내게 유익한 것같은데 내뜻을 내려놓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입니다. 그러나 주권이 주께 있음을 인정한다면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깨달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당장에는 내가 손해보는 것같고 내가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것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까지 지시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애가 담겨진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가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저도 이 말씀을 수없이 외치고 있지만 가장 버거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않으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권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삶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힘들 때에도 언제나 우리의 선택의 기준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함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영광권이 주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왕이 많은 백성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합니다. 그 때 백성들이 왕에게 아부하면서 이것은 신의 소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헤롯왕은 그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으ㅟ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닏바. 그런데 그 영광을 가로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자기 영광이 전부입니다.
내가 영광을 받으면 내가 성공한 것이고 내가 기쁨이 가득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세상은 자기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주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 거기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요즘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역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저 주님의 종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거기에 나는 없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복종시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남김없이 자기를 다 내려놓은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종이 되어 복종하고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도가 되지 않고 세상이 교회를 조롱합니다. 교회가 너무 똑똑해서 그렇습니다. 너무 잘나서 그렇습니다. 너무 높아져서 그렇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그렇습니다. 조금 손해도 보고 희생도 하고 나누어 주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오늘 우리 교회가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낮아지면 섬기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종하는 삶, 겸손한 삶을 사는 것은 진정으로 못나서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낮아지시고 겸손해지심으로 우리를 얻으신 주님을 본받아서 우리들도 겸손해질 때에 어느 것이나 낮아질 때에 어느 곳이나 희생의 사람이 될 때에 우리 자존심보다 더 귀한 것, 우리의 육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땅의 것을 주고 영원한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손해보는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키지 않습니다. 미련한 것같지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 2: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분명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그에게 다 주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높이 올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성공이 아닙니다. 잠시 주는 쾌락에 불과한 것입니다. 헛된 망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종됨을 순간순간마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진정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야고보가 자신을 ‘예수의 동생 야고보’라고 해도 누가 왜 그렇게 말하느냐? 라고 따지거나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생 야고보’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훨씬 더 은혜스럽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누가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고 싶겠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을 좀 더 좋게 표현하고 싶고, 자신을 더 높이고 싶고, 어떻게 해서라도 인정받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 마음 아니겠습니까?
야고보가 종이라고 했다고 해서 그가 더 낮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교회에 꼭 필요한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도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첫 번째 총회를 할 때에 베드로가 총회장이 아니라 야고보가 총회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교훈이 뭘까요? 종이라고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자가 되었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시고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인도의 성자라 불리우는 간디는 인류를 파멸하게 하는 것들 일곱 가지 중에 하나가 "희생이 없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한국 교회도 역시 100여 년 전 수많은 선교사들과 성도들의 순교라고 하는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희생이 없는 신앙"으로 점점 비대해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희생이 없는 교회"는 결국에는 멸망을 초래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희생이 없는 교회, 십자가의 눈물이 없는 성도는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 교회 안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십자가가의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눈가림만 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실 때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서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의 목적적을 분명히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종됨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바로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우리를 섬겼습니다. 주인이지만 종으로 섬겼습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비밀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모두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십자가의 군사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처럼 야고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의 종입니다. 나는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주님의 주권이 드러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그 어떤 고난과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있을 때 종의 도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진정한 섬김, 진정한 인애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으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