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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에게도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고, 위기의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재물로 인하거나 건강 때문이거나,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시작하는 일마다 점점 기울어져 가는 등 어려움이 지속될 때, 모든 것에서 손을 놓게 됩니다. 그 때가 위험한 순간입니다. 이렇게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성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합의 처인 이세벨로부터 살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다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왕상 19: 4를 보시면,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며, 절망의 깊은 수렁에 빠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반드시 꼭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방관하지 않고, 또 고아와 같이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는 다는 겁니다. 고전 10: 13절을 보시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들이 다가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은 시인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은혜를 찬양한 데 이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연단과 회복의 은혜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렘 18: 2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으로 갔을 때, 마침 토기장이는 잘못 만들어진 그릇을 깨고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이 렘 18: 6입니다.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하고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간섭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하신 가나안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풍부한 곳으로 들이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 - 9절을 보시면,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시련은 있으나 실족함은 없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인에게 아무리 어려움이 있고, 환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겠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입니다. 본문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송축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송축하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경사를 기리고 축하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결코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만 알고 개인적으로 감사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힘쓰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인의 송축은 자신에게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을 대상으로 합니다. 즉,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송축하겠다는 겁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송축할 것을 촉구하는 겁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란, “우리를 생명 가운데 두시며,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시며”란 뜻으로, 하나님은 곧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의 생명의 근원임과 동시에 생명의 보호자이심을 말합니다. “실족함”의 의미는, “미끄러지다”로, 이는 큰 재앙이나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선 택한 성도들을 끝까지 권념하시기에, 비록 그들이 범죄하고 신앙적으로 퇴보하여 징계를 하지만, 결코 완전히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일은 없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선민을 위기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에게도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그러한 위기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은 친히 개입하셔서, 실족지 않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만 의지한다면 실족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에 우리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죄에서 구속함을 받는 것도,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실족지 않게 하시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실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에게는 시련은 있어도 실족함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 - 1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단련하기 위해, 고난과 어려움과 환난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단련하실까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믿기 이전의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의 그물에 끌어들이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보면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신다고 합니다. 은은 은광에서 캐 낸 후 그 광석을 납과 함께 큰 도가니 속에 넣어 밑에서 뜨겁게 불을 지핍니다. 그러면 그 도가니 속에 있는 광석이 녹으면서 찌꺼기는 납과 함께 밑으로 가라앉고 가벼운 순결한 은만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을 가지고 귀하고 값진 그릇을 만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험은 마치 은을 단련함 같은 뜨거운 불로 우리들의 생애를 녹입니다. 이 같은 연단으로 우리 육체 속에 박혀 있는 못된 죄악성은 찌끼처럼 가라앉고 순결한 은으로 상징된 새로운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요긴한 그릇으로 쓰임 받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고통을 바라볼 때, 우리는 환난에 의해 유익을 얻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밑바닥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 목적에 있는 우리 자신의 영광과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시면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물”과 “어려운 짐”이라는 것은 선민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경험들을 말합니다. 즉 그물에 들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민을 곤란과 감금의 상태에 빠져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환난의 상황에 둘러싸이게 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라는 것은, 무거운 삶의 질고를 통해 그들에게 극한 고통을 느끼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주시는 시련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면 그 성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시험할 때, 소위 “불같은 시험”으로 불리는 강한 시련으로 시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 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임해야 합니다. 등산할 때 배낭을 허리에 메는 사람은 없습니다. 허리에 메면 산에 오르기는커녕 걷기조차도 힘듭니다. 그런데, 이 짐이 내가 가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과일과 음료수가 들어있다면, 내가 가면서 먹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고, 가면서 먹으면 점점 줄어드는데 어려움과 환난과 고난과 시험의 짐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때는 인내하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시험을 다 치르기까지 모든 고통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을 최선의 노력으로 무사히 통과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풍부한 곳으로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면,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본문을 보시면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전쟁에서 패하여 죽거나 도주하다가 쓰러진 군사들을 적군의 말발굽과 병거의 바퀴가 짓밟고 달리는 장면을 상상케 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시험으로 인해 선민이 당한 시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라고 합니다. “불과 물”을 통과하였다는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불타는 듯한 광야와 홍해와 요단강을 통과한 것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선민이 당한 시련이 매우 혹독한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는, 본절 후반부에서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풍부한 곳”의 의미는, “물릴 정도로 실컷먹다”라는 뜻으로, “풍요로운 장소, 물과 열매가 가득한 장소”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과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것에 빗대어, 현재 혹독한 불과 물의 시련을 통과한 이스라엘에게 풍성한 축복을 베푸심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라는 표현은, 시련을 통과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과한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사실과 현재 불과 물의 혹독한 시련을 통과한 이스라엘에게 풍성한 축복을 베푸신 사실은, 성도인 우리에게 귀한 소망을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선 오늘날 시련을 통과한 성도된 우리에게도 놀라운 축복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본문 앞에서 “끌어내신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는 겁니다. 곧, 우리를 높이신다는 말이며, 풍부한 곳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은 풍성한 열매를 허락하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아무리 큰 어려움과 시험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붙들어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언제까지나 시험 가운데서 허우적거리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고, 연단을 주고, 채찍을 내리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꾼으로 만들어 사용하고자 함이며, 여기에 충실한 자를 풍부한 곳으로 들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겪는 고난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축복이요, 찬양의 이유가 되며, 성도가 겪는 고난 저편에는 그 이전보다 더 풍성한 은혜가 있기에 고난의 바다가 깊어도 소망을 붙들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주기 위해, 우리를 고난 속으로 인도하지만 곧, 그 그물에서 끌어 내사 풍부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