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경 시인의 시집 『연하리를 닮다』(푸른사상 시선 209).
시인은 강원도 산골마을 연하리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들의 아픔과 기쁨을 끌어안는다. 감각적인 지각을 넘어서는 밝은 시력으로 아이들과 이웃과 자연을 품은 시인의 얼굴은 어느덧 연하리를 닮았다.
2025년 7월 28일 출간.
■ 시인 소개
1957년 경북 영천에서 나고 강원도 영월 연하리에서 살고 있다. 아동그룹홈에서 40년째 아이들과 함께 산다. 연하리의 바람을 10년간 찍어서 사진전 <바람, 존재의 노래>(서울 인사동 Gallery now, 2018)를 열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미지의 신세계였다
거친 길, 부드러운 길, 가파른 바위, 길도 없는 벼랑
그러나 길은 늘 오르는 곳으로 나 있었다
계곡물 소리 경쾌하고 온갖 꽃으로 뒤덮인 비밀의 정원
장쾌한 능선, 웅장한 원시림도 있었다.
■ 작품 세계
정유경의 이번 시집은 네 개의 ‘다른 인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하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른바 ‘문제아들’, 그리고 연하리의 또 다른 어엿한 주민인 뭇 생명이 그 둘이고 나머지 둘은 심도 깊은 자기 성찰과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다. (중략)
좋은 시를 판별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가 ‘감각 지각’이다. 독자의 감성을 자극해 독자로 하여금 세계감(世界感)을 깨닫도록 하는 시가 좋은 시다. 위 시에서 살펴보았듯이 정유경의 시는 감응을 통한 인식 지평의 확장, 즉 아이스테시스의 모범을 보여준다. 랑시에르의 관점을 빌리자면, 아이스테시스는 곧 정치(민주주의)와 직결된다. (중략)
정유경의 사회적 상상력은 “천 개의 가시가 되어/어른들의 가슴을 찔러다오”라고 역설하며 세월호 참사를 안타까워하고(「얘들아 용서하지 마라」),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영아의 앞날을 예감하거나(「하루에 한 아기가 베이비박스에 버려진다고」), 학교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응원하고(「푸른 거울」), 급기야 모든 상품을 “섹시”하게 포장하는 것도 모자라 “지구”를 “섹시하게 디자인”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자본보안법」). 이처럼 정유경의 시는 감각적 지각에서 이성적 인식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자칫 주제 의식이 산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시인의 폭넓은 시야가 내게는 남다른 미덕으로 보인다. 그의 시는 시야만 넓은 게 아니고 시력 또한 밝기 때문이다. 외부 사물에 초점을 정확히 맞춘다고 해서 시력이 높은 것은 아니다. 시선을 안으로 돌려 내면을 응시하는 능력, 즉 자기를 성찰하는 힘도 시력에 포함된다.
― 이문재(시인·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연하리를 닮다
정유경
자연을 꿈꾸는 머리와
편리함을 사랑하는 몸을 가진 나를
연하리는 늘 낯설어했다
향기로운 산나물을 식탁 가득 풍성하게 내어주면서
네 몸은 어디 있니, 물었다
몸을 데리고 오렴
내 땅을 네 두 발로 느끼고
내 품에서 네 손으로 먹거리를 가꾸면
내 푸른 피가 도는 소리 네 귀에 들릴 거야
내 향내 네 마음에 이르고
비로소 내 맛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몸은 고속버스로 쉽게 데려와지지 않았다
완강히 버티는 몸을 달래
한 발 한 발 걸어오는 날들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다
금단증세야
편리함에 오염된 금단증세
시간이 필요해
자주, 떠나온 서울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짓는 내게
연하리는 안쓰러운 듯 말을 걸어왔다
머리만으로는 안 될까
몸이 뿌리인걸
그 뿌리 안에 우리가 만나는 길이 있어
몸이 오고 있는지도 잊어갈 즈음
동네 아저씨 지나가다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더니
“거참, 이상하네. 얼굴이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연하리를 닮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