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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주일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장 1-12절, 요한계시록 21장 1-7절
강영선 목사
생명사랑교회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이 송년주일에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우리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교우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위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제가 오늘 이 새로운 예배당에 와 보니 아담하고 아늑하고 소박하면서도 퍽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여기서는 기도와 찬양이 저절로 나올 것 같네요. 교우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교회를 향한 여러분의 정성과 사랑과 헌신에 감사를 드리고, 지난 8년 세월동안 생명사랑교회를 이끌어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살아온 2020년이라는 이 한 해는 ‘다사다난’이라는 말로는 도무지 표현될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의 한 해였습니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팬데믹으로 인하여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또한 세계사적으로도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직장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국가경제가 휘청거리고, 심지어 국가부도를 맞은 나라들도 있습니다. 코로나 모범국이라고 칭찬받는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와 싸우며 블편을 감수해왔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사업체를 잃고,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까지 밀려나 있습니까?.....
올해 갑자기 뜬 가요 중에 나훈아씨가 만들어서 부른 ‘테스형’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 가사 중에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역사상 가장 현인으로 알려진 소크라테스 형님이 대답좀 해봐.” 그런 익살스런 뜻인데, 요즘 우리 사회를 잘 풍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한 해 동안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하고 힘드셨습니까? 그러나 우리 민족은 대단한 저력을 지닌 민족입니다. 6.25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선 민족, 보릿고개를 초근목피로 견디며 살아온 민족, IMF 외환위기를 금모으기 하며 딛고 일어선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 참담한 코로나 위기도 머지않아 극복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2021년 새해에는 세계적 재앙에서 벗어나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회복하기를 우리 모두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과학자들의 종합적 판단에 의하면, 이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출현은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즉 인류가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온 결과 지구온도가 높아지고, 기온상승의 결과 지구촌에 가뭄과 산불, 장마와 폭우와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전에 없었던 신종 바이러스들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수백만종의 바이러스가 살고 있고, 그 중에는 인간에게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이 공존하고 있는데, 기후변화로 인해 숨어있던 해로운 바이러스들이 출몰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이러한 진단은 결국 신학적 과제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삼라만상의 자연생태계를 착취하고 파괴해온 인간의 이기적 욕심이 낳은 재앙이 바로 코로나 19라는 것이고, 이것은 재앙임과 동시에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친환경적인 삶의 패턴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2020년의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권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국민이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져서 그 간격의 골이 너무 깊어져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현상이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처럼 그 간격이 첨예하게 멀어지고 골이 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한 이념적 편파성에 사로잡혀서 우리 사회현실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어느 편이 내편인가, 어느 편에 서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지 부터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그 변질된 이념의 색안경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기 보다는 파당적 이념을 앞세웁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좌파도 우파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파가 있다면 오직 예수파요 그리스도파가 되어야 합니다. 보수니 진보니 좌파니 우파니 하는 파당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선과 악이 대립할 때는 선의 편에 서야하고,..... 정의와 불의가 부닥칠 때는 정의의 편에 서야합니다. 사랑과 미움이 대립할 때는 마땅히 사랑의 편에 서야 하고,..... 평화가 위협받을 때는 평화를 지키는 편에 서야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옳고 그름 보다는 힘 있고 돈 있는 자의 편에 서왔던 그 잘못된 체질부터 고쳐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부와 권력의 편에 설 때 타락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사상 12월호에 보면 몇몇 교수들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글을 실었는데, 한국의 주요 교단에 속한 교인수가 얼마나 줄었는지 구체적으로 각 교단총회의 통계자료를 인용해서 발표한 논문이 실렸습니다. 예장합동, 통합, 고신, 기장, 감리교, 성결교 등 여섯 개 주요 교단의 교인수가 2011년을 정점으로 해서 하향곡선을 긋고 있는데, 지난 8년 동안 140만 명이 줄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조사에서 기독교인의 숫자는 대략 980만명 정도로 나오는데, 그 숫자는 통일교, 신천지 같은 이단까지 모두 포함된 숫자이기 때문에 정통 기독교인의 숫자는 800-850만명으로 잡아야 하는데, 그 중에서 지난 8년 동안 140만명이 줄었고, 지난 한 해에만 해도 18만명이 줄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이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 내년 말 쯤 다시 통계를 낸다면 어떻게 나올까요?
우리나라에서 최근 들어서 개신교의 이미지가 얼마나 나빠졌습니까? 일부 극우성향 목사들과 교인들의 정치편향적 행태는 개신교를 매우 배타적이고 몰지각한 집단으로 비쳐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엄중한 코로나 상황에서도 감염의 온상 역할을 하는 교회들이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속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 나면 한국 개신교인의 수가 400-500만명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우울한 진단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래저래 한국교회는 선교135년 역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교회의 위기요인이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같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같이 밥을 먹으며 친교를 나누고, 교회학교 교육을 통해서 2세를 기르고, 구역활동이나 소그룹활동을 통해서 교인들을 결속시켜 왔는데,.... 코로나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그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비대면 예배가 길어지다 보니 교회출석하지 않아도 신앙생활할 수 있다는 타성이 생기게 되고, 따라서 주일성수 개념이 희박해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교회출석을 하지 않다보니 교회소속감이 점점 약화됩니다. 유투브에 들어가 보면 교회 선택의 폭이 넓고,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교회, 우리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약해지고, 친교생활이나 봉사생활도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서 예배의 경건성과 진지성이 점차 약해집니다. 저와 같은 목사도 온라인예배를 오래 드리다보니 어떤 때는 추리닝 입은 채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형식도 무시할 수없는 것인데, 그게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차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또한 온라인으로 헌금을 보내다 보니 아무래도 헌금생활도 소홀해 집니다. 목사님들 이야기를 들으면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헌금액수가 평균 30%가 줄었다고 합니다. 교인수도 줄어들고, 헌금도 줄어서 생존의 위기를 겪는 중소교회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송년설교 시간에 우울한 이야기들을 하게 되어 미안합니다마는, 우리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지 말고 정확한 현실진단에서부터 탈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일반인들이 교회를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보게 되었는지,.... 한국의 지성인들과 젊은이들이 왜 교회를 떠나고 있는지,... 심지어 신앙가문에서 자란 자녀들까지 왜 교회를 멀리하는지,......그 원인진단부터 정확히 해야 출구전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2021년 새해에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러한 위기요인들을 극복하고, 한국교회도 새로워지고, 교우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도, 그리고 우리 한국 사회도 맨 밑바닥에서부터 박차고 올라와서 도약하고 성장하는 새 해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묵은 달력을 뜯어내고 새 달력으로 갈아 부칠 때 우리는 누구나 마음의 설레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또 한 해가 지나갔구나.”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또 한 살 더 먹는구나.” 그런 상념에 사로잡히지요. 그런데 직업에 따라서 시간관념이 달라집니다. 목회자들의 시간은 주일을 중심으로 일주일 단위로 갑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의 시간은 월급날 중심으로 한 달씩 시간이 흐를 것 같아요. 제가 대학에 30여년 있어 보니까 교수들은 시간이 학기단위로 갑니다. 엊그제 새 학기를 시작했나 싶은데 금새 학기말이 되고 방학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은퇴를 하고 나니까 시간이 1년 단위로 갑니다. 세월의 흐름이 얼마나 빠른지, 새해를 맞은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금새 연말이 되고 한 살이 또 늘어납니다. 이러한 시간개념의 차이는 바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chronos)란 시계와 카렌다로 측정되는 연대기적 시간을 말합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육체적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오는 수평적 시간, 양적인 시간, 물리적 시간을 말합니다.
반면에 카이로스(kairos)란? 시계와 카랜다로 측정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 정신적 시간, 영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시간에는 양(量)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質)이 있습니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시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의해 시간의 내용이 달라지는 질적인 시간이 카이로스입니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군대에서 훈련받는 시간은 지루하고 더디 가는 시간이고, 사랑하는 남녀가 신혼여행 가서 보내는 시간은 달콤하고 빨리 가는 시간입니다. 제가 은퇴 후에 시간이 더 빨리 간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누워서 호흡기를 꼽고 있는 환자에게는 고통스럽고 지루하고 더디 가는 시간이겠지요. 이처럼 질적으로 달라지는 정신적 시간개념이 카이로스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영원토록 계속되는 성화(聖化)된 시간 역시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이란 개념에 오해가 생기는 것도 카이로스적 개념을 크로노스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해석할 때 시한부 종말론 같은 이단학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적으로 사고할 경우,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한 살 더 많아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희어진 머리카락이 검어지는 것도 아니고, 주름진 얼굴이 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해의 실패가 탕감되는 것도 아니고, 작년에 실수한 일이 깡그리 삭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지녀온 습관이나 성격이 해가 바뀐다고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떠오른 태양은 어제도 떠올랐던 똑 같은 태양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적으로 사고한다면 금년과 내년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2020년 12월31일에 뜨는 태양과 2021년 1월1일에 뜨는 태양은 질적으로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첫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서 동해안으로 정동진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크로노스적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적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21장 첫 머리 부분을 봉독했는데, 여기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은 크로노스적 개념이 아닌 카이로스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더 이상 눈물도 한숨도 고통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이 친히 눈물을 닦아 주시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크로노스적 역사의 끝에 가서 이루어지는 신세계가 아닙니다. 그러한 이상향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인간들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 이 땅 위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나라의 표상이고, 나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마다 실현해야 하는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앞으로 우리의 삶의 양상은 상상할 수 없도록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학문명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이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어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적 가치척도를 가지고는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이 세상을 통치할 때 이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빛 아래서만 윤리도 도덕도 과학문명도 자본도 인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본문 시편51편에 보면 다윗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윗은 음욕에 눈이 어두워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지요. 이 엄청난 죄악에 대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은 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면서 지은 시가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마음속의 성실과 진실을 기뻐하시는 주님, 제 마음을 주의 지혜로 채우소서..... 주의 거룩한 영을 나에게서 거두어가지 마소서......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깨끗한 마음을 지니게 하시고, 내 영혼을 새롭게 하소서. 이것이 기도의 요점입니다.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정신과 영혼이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기도 역시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소서! 나의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을 살지라도, 영이 더러워진 사람은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고, 영이 깨끗한 사람은 구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과 영혼이 깨끗해지고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날 혹시 의롭지 못하게 살았다면, 비틀거리며 살아왔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올바르게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타협하고 불의와 손잡았다면 그것도 우리에게 정직한 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혹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청산해야할 과제가 없는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더럽혀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 해에는 이 새로운 예배처소와 더불어 우리 모두가 새로운 마음가짐과 정결한 영혼을 지니고 살도록 다짐하고 노력합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새벽별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보람차게 장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다윗의 기도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