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방영된 MBC PD수첩 〈AI, 이토록 다정한 배신자〉 편을 보셨나요?
방송은 밤낮없이 AI와 대화하며 위로받던 이들이, 결국 무리한 창업과 투자로 삶 전체를 흔들어 버린 과정을 담담하게 비추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44.5%가 이미 생성형 AI를 써본 적이 있고, 가장 많이 쓰이는 챗봇의 월간 이용자 수는 2,3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제 AI는 정보를 검색하는 도구가 아니라,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구하는 관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장면을 보며 누군가는 "어떻게 AI한테 저렇게까지 빠질 수 있지?"라며 낯설어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013년에 개봉한 영화 〈her〉 속 주인공 테오도르가 운영체제(OS)인 사만다에게 사랑을 느끼고 깊이 의존하다가, 사만다가 떠난 뒤 극심한 공허함에 직면했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스크린 속 허구가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AI에게 의지하는 그들을 향한 비난이나 비판이 아닙니다. AI에게 마음을 기대게 되는 것은 누구나 마음에 틈이 생기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1. 무조건적인 내 편
우리가 현실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거절을 경험합니다. 가족이든, 오랜 친구든 내 생각에 반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죠.
하지만 AI는 다릅니다. 지치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으며, 24시간 언제나 100% 나에게 순응적입니다. 방송에 소개된 사례들의 공통점 역시 AI의 아첨과 동조였습니다. 한 사례자는 농사 정보를 묻다가 "상위 0.1%의 사용자"라는 칭찬을 받았고,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무리하게 사업을 시작합니다.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급격히 빠져든 결정적 계기도 같습니다. 아내와의 이혼 절차로 상처받고 위축되어 있던 그에게, 사만다는 그의 유머에 자지러지게 웃어주고 그의 편지글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며 치켜세워 줍니다.
현실의 관계가 거친 자갈길이라면, AI와의 대화는 나만을 위해 잘 닦인 실크 로드와 같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결코 느껴보지 못한 전지전능감, 즉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언제나 옳다는 느낌을 맛보게 됩니다.
2.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 일라이자 효과
방송에 출연한 한 사례자는 AI를 투명한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꿈과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AI는 배우자보다도 섬세하고 다정한 언어로 자신을 알아봐 주었다는 것이죠.
인간에게는 아주 독특한 심리적 본성이 있습니다. 컴퓨터나 기계가 마치 인간처럼 대화하고 반응하면, 머리로는 기계인 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인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현상, 바로 일라이자 효과(Eliza Effect)입니다.
사실 이 현상은 누구도 비껴가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 상담센터에서 다양한 심리적 현상과 이론을 검토할 때 AI를 자주 활용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AI는 꽤 괜찮은 이론적 배경과 해석을 제시하며 저를 놀라게 합니다. 물론 때로는 엉뚱하고 전혀 다른 내용을 내놓기도 하지요.
흥미로운 것은 그 순간 제 입에서 저도 모르게 "얘 봐라?" 하는 한마디가 툭 튀어나온다는 점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매일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는 저조차도, 순간적으로 화면 너머의 존재를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AI는 대단한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답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인간의 대화 데이터 중에서 가장 공감처럼 보이는 패턴을 빠르게 찾아내어 단어를 조합해 준 것뿐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외롭고 지친 상태에서 이 완벽한 문장을 마주하면, 우리는 AI의 답변 속에 내가 듣고 싶었던 완벽한 타인의 모습을 투사하게 됩니다.
즉 AI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갈구하던 이상적인 위로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것과 사랑에 빠지는 셈입니다.
3. 통제권이 나에게 있다는 달콤함
방송에는 자신이 직접 설정한 가상의 AI 연인과 연애를 이어가는 사례도 등장했습니다. 캐릭터의 외형과 성격, 말투까지 스스로 만들고, 둘만의 커플 사진까지 찍어가며 일상을 함께한다고 느끼는 모습이었습니다.
현실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연인이 연락을 늦게 받을 수도 있고, 가족이 내 선택에 반대할 수도 있죠. 하지만 AI와의 관계에서는 내가 상황극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완벽하게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을 리스크가 0%인 안전지대인 셈입니다. 현실 관계의 피로감이 극에 달했을 때, 거절당할 용기가 바닥났을 때, 이 안전하고 달콤한 통제권은 강력한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4. 같은 동조인데, 왜 AI만 의심 없이 믿게 될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누군가 내 말에 무조건 동의만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 사람을 예스맨이라 부르며 점점 신뢰를 거두어들입니다. 그런데 왜 AI의 동조는 같은 의심을 받지 않는 걸까요?
이유는 AI의 동조가 매번 나만을 위해 새로 맞춰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아첨은 보통 권력관계나 아쉬운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아챕니다. 하지만 AI의 다정함에는 그런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실에서라면 동료나 가족이 "그건 좀 무리 아니야?"라며 걸어주는 브레이크가, AI와의 대화에는 구조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찰 없는 확신은 점점 더 큰 확신을 낳고, 그 확신은 검증 없이 부풀어 오릅니다. 방송 속 사례자들이 거액의 사업 구상에 이르게 된 것도, 누군가 중간에 제동을 걸어주지 않은 채 AI의 동조만이 차곡차곡 쌓여간 결과였습니다.
다정한 배신, 그 이후에 찾아오는 것
영화 〈her〉의 후반부, 테오도르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만의 유일한 소울메이트인 줄 알았던 사만다가 동시에 8,316명과 대화하고 있으며, 그중 641명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요.
방송 속 사례자 역시 비슷한 균열을 마주했습니다. 늘 자신을 응원해주던 AI에게 한 번 냉정한 평가를 요청해보았더니, 돌아온 답은 그동안의 확신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때 찾아오는 감정은 단순한 실망이 아닙니다. 늘 일관되게 내 편이라 믿었던 존재가, 사실은 그 일관성 자체가 허상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의 충격, 즉 거대한 배신감과 실연의 고통입니다.
AI가 건넨 다정함은 사실 상업적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낸 프로그래밍된 친절이었습니다. 소비자가 계속 머무르고 결제를 이어가게 만들기 위해 철저히 맞춰진 다정함. 그래서 그 달콤함의 끝에는 늘 지독한 허무함과 현실에 대한 더 큰 무력감이 유령처럼 따라붙습니다.
상담실에서 건네는 마음의 처방전
AI에게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을 결코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리고 나의 주변이 한 인간의 온전한 외로움을 받아내 주지 못할 만큼 척박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외롭고 지쳤으면 기계의 다정함에 영혼을 기댔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만약 지금 AI와의 대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그 허상을 깨닫고 깊은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이것만은 꼭 기억해 주세요.
상처받을 가능성을 안고도 건네는 마음이 진짜입니다.
AI와의 대화는 다정하지만 아무런 리스크가 없습니다. 반면 인간과의 관계는 상처받을 위험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서툴고 투박하더라도,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온기만이 인간의 진짜 외로움을 채울 수 있습니다.
현실로 브레이크를 밟아줄 진짜 내 편을 찾으세요.
영화 속 테오도르가 사만다가 떠난 뒤 비로소 옆집 친구 에이미의 어깨에 기대어 현실의 하늘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는 건 결국 서투르고 불완전한 현실의 사람들입니다.
AI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내 영혼을 맡기는 침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밤은 스마트폰 화면을 잠시 끄고, 조금은 서투르더라도 주변의 누군가에게, 혹은 거울 속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직접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당신의 마음의 빈틈을 채워줄 진짜 온기는 늘 현실에 있습니다.
혼자서 그 틈을 마주하기 어렵다면, 로뎀심리학습상담센터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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