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CH, 1899년 5월 8일 ~ 1992년 3월 23일)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아버지로 불린다. 1938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1974년 화폐와 경제 변동에 관한 연구로, 이데올로기적 라이벌인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과 더불어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칼 군나르 뮈르달
Karl Gunnar Myrdal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됐을 때 온 세계가 술렁였다.
오랫동안 노벨경제학상은 압도적으로 우파 경제학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명단을 보면 확실히 ‘진보 쪽’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나 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 등 몇 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스웨덴의 보석’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진보적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이 선정된 것이다.
이 해 노벨경제학상이 특히 눈에 띈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뮈르달과 함께 공동으로 상을 받은 이가 바로 우파 경제학자 중 ‘악마적 거장’으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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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노벨경제학상은 가장 진보적인 경제학자와 가장 보수적인 경제학자 두 명의 손을 동시에 들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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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르달과 하이에크의 공동 수상 사실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이에크는 알겠는데 뮈르달이라는 듣보잡은 누구야?”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당시 두 학자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이는 너무나 큰 오해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이후 하이에크가 유명해져서 그렇지 1974년만 해도 뮈르달은 하이에크보다 훨씬 유명한 경제학자였다.
오히려 하이에크가 무명에 가까웠다. 하이에크는 노벨상을 받음으로써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케이스다. 그의 전기를 쓴 기자도 “하이에크가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면 현재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다”고 쓸 정도였다.
차별과 빈곤의 본질을 파헤친 누적적 인과관계 이론
뮈르달이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938년 그가 미국의 흑인문제를 연구한 『미국의 딜레마(An American Dilemma)』를 출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 흑인들의 빈곤이 왜 끝없이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줬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Friedrick Hayek
오스트리아 학파, 시카고 학파 (경제학)
하이에크의 고뇌
https://nomadidea.tistory.com/entry/%ED%95%98%EC%9D%B4%EC%97%90%ED%81%AC%EC%9D%98-%EA%B3%A0%EB%87%8C
하이에크가 예견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체제는 '치명적 자만'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시장모형은 여러
현실적 제약과 한계때문에 작동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1930년대 중반까지 하이에크는 전형적인 경제학자였다.
그는 카를 멩거에서 발원하여 하이에크의 스승이었던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및 조지프 슘페터 등을 배출한 오스트리아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케인스를 중심으로 한 케임브리지학파의 경제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젊은 경제학자들을 물색하고 있던 런던정경대학교의 라이어넬 로빈스의 눈에 띄어 1931년 영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으로 맡은 연속 강의에서 그는 케인스의 경제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으며, 곧바로 케인스에 필적할 만한 경제학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루트비히 하인리히 에들러 폰 미제스
Ludwig Heinrich Edler von Mises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경제학자, 사회학자, 논리학자, 역사학자이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중 한 명이다.
대표 저서는 <Human Action : A Treatise on Economics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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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렘베르크(Lemberg) 출생. 유태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철도 사업 자금조달과 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집안 출신인 부친과 오스트리아 의회 정치인 가문 출신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0년 빈 대학교(University of Vienna)에 진학, 이 무렵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창시자인 카를 멩거(Carl Menger)의 저작들에 영향을 받았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 해 오스트리아 정부 재무행정 공무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비엔나의 로펌에서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1차세계대전 중에는 전방 포병 장교로 복무하기도 하고 국방부 경제 고문을 맡았다. 오스트리아 상공 회의소 수석 이코노미스트였고 돌푸스 정부의 경제 고문을 맡기도 했으며 이후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경제 고문역을 맡기도 했다.
1920년부터 칼럼을 통해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스템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1922년에 그는 그의 책(Socialims:An Economic and Sociological Analysis)에서 시장 가격 시스템은 인간행동의 표현이며 어떠한 형태의 관료주의로도 복제될 수 없다며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비판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1940년까지 그곳에서 교수로 일하는 가운데 Margit Herzfeld Serény와 결혼했다.
1940년 독일이 진군해오자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45년부터 1969년 은퇴할 때까지 뉴욕대학교(NYU) 초빙교수로 있었다. 이 시기 많은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그의 유럽에서의 명성을 듣고 그의 뉴욕대학 세미나나 그의 아파트에서의 비공식적인 미팅에 찾아와서 그의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미국 내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가 되었다.
미제스는 살아 생전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의 입장에서 광범위한 저작물을 남기고 강의를 하였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사상인데 전통적 자유주의(traditional liberalism), 자유방임적 자유주의(laissez-faire liberalism), 시장자유주의(market liberalism),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전적'이라는 수식어는 경제적 문제에 대해 국가가 개입자로서 더 강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촉구한 20세기의 새로운 자유주의, 혹은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같은 움직임과 구별하기 위해 나중에 붙은 형용어이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19세기 말부터 쇠퇴했지만 고전적 자유주의를 되살리려고 노력한 인물들이 바로 미제스, 그리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3인이다.
이러한 부활은 그 반대자들로부터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