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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내시'제도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중기 이전까지만해도 거세한 환관이 아닌 가문과 학식,재능이 뛰어난 문관중에서 선발된 엘리트로 왕의 최측근이였습니다.
조선조에 오면서 자격 요건이 변질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내시가 되기위해서는 거세한 자로서 선발시험에 합격하면 내시부에 입학을 하였고
소환(어린내시) 90명은 청소,잔심부름,왕을 업고 궁궐을 비밀스레 탈출 시키는 훈련등..
정식 내시부에 소속이 되면 업무 수행을 하였는데요.
대전,왕비전,세자궁,빈궁등에서 음식물을 감독.. 왕명의 출납, 궁궐의 문지기, 궁궐안 청소 등을 전담하였고 일부는 왕실 직영 잠실에 파견되어 잠모들을 관리하였습니다 .
또한 왕릉을 살피는일과 왕명으로 관리들의 상가집에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주는 일도 하였다네요.16개의 관직에서 140명이 분담했고 종2품 상선~종9품 상원까지 관직을 받은 이는 59명뿐이였습니다.
내시들의 승진은 승정원에서 1년에 4회 상중하로 인사고과를 주었습니다. 연이어 3번 중을 받으면 파직..
헐 ^^궁궐의 삶도 치열했군요. 반대로 연이어 10번 상을 받으면 승진..시험을 통해서도 품계를 올려주기도 했고요.역시 시험은 그때에도 머리 아픈 녀석..!
시험교재는 무엇이었을까요?
4서(논어,맹자,중용,대학),소학, 삼강행실도 등이였어요. 35세가 되면 시험을 면제 해주기도 했다는걸 보면 뇌의 노화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본거같습니다. 내시들의 거주지는 생각보다 넓게 분포..
파주 금촌에도 내관의 집이 있었다네요.
내시들도 결혼생활을 했다는 사실..?
가정을 이루고 양자를 들여서 대를 이었다고 합니다. 내시들의 아내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고자 여편네 하듯''
이란 속담이..
조선조에는 죽으면 사산금표(무덤금지 지역)밖에 묘를 써야했습니다. 도성밖 10 리(성저십리) 밖에서 볼 수있는 내시 묘역중 가장 많은 묘가 은평구에 자리합니다.
5000여기의 무덤이 집단으로 발굴되었음은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이죠.
ㅡ이말산 내시묘역의 석상ㅡ
(운니동에 있던 내관이 살던집) '
_운당여관 _
ㅡ내시의 복장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