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167호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네 일에 충실하라 (잠26:17)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네 일에 충실하라. 남의 잔치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시간이 어디 있냐? 네 일에 전념해야만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이번 추석 때 손자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했느냐 하면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침묵하며 철저히 자기 일에 매진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공하지 못한 자들은 이 간섭 저 간섭, 이 참견 저 참견하느라 삶의 진도가 나가지 못해 매일 그날이 그날이요, 매일 그 밥에 그 반찬입니다. 세상에서야 이런 사람을 오지랖이 넓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정작 자기 집 석가래는 썩고 있다는 거지요. 세상 간섭 다하는데 진척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땅을 기름지게 해놓고 남의 땅을 살펴야지요. 남의 잔치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려면 내가 감 사다 놓으면서, 배 사다 놓으면서 말해야 힘이 있지요.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감 놔라 배추 놔라’ 하면 그 집에서 좋아할까요? ‘왜 와서 참견이야?’ 할 겁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골목에서 멍석을 깔아놓고 바둑을 둘 때면 약방의 감초처럼 꼭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쪽에 이렇게 두라, 저쪽에 저렇게 두라 훈수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이쪽저쪽에서 ‘왜 와서 참견이냐? 어여 가던 길이나 가!’라고 욕을 한 사발 먹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26:17). 개의 귀를 만지면 안 됩니다. 엄청 싫어해서 그냥 물어버리거든요. 남의 일에 참견하다가는 이런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벧전4:15)고 경고했고, 바울도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5:22)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은 참견하는 게 사랑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더러 자기 형에게 자기에게도 유업을 나누어주라고 말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일은 예수님의 지혜와 역량으로 얼마든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눅12:14)라고 말씀하시며,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오지요.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사람과 삼시에, 그리고 육시와 구시, 심지어 십일시에 들어와 일한 사람조차도 일을 마친 후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아침부터 일한 자가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쟤들은 늦게 왔지 않느냐? 그런데 왜 같은 돈을 주느냐?” 그러자 주인은 “내가 너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했고, 주었는데 무슨 말이 많은가? 저 사람의 품삯은 내가 알아서 결정할 테니 너는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자기 일만 하면 되고, 자기 길만 가면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예수님이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면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베드로가 가게 될 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베드로가 순교하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듣고 있던 베드로가 옆에 있던 요한을 가리키며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냉정하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21:22) 이 말인즉 ‘다른 사람 일에 쓸데없는 관심 갖지 말고 네게 주어진 일에나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내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충실(充實), 곧 채워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일에 전심전력하여 목적한 바를 이루라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1장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행1:6).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1:7).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 소관이니 상관 말고 네 일이나 해라.’ 하신 것입니다. ‘네 일’, 곧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참견 말고 믿음 생활 잘하고, 복음을 전파하면 된다. 그러면 언제 오시든지 들림 받게 되고, 늦게 오시면 주 안에서 죽게 되므로 복이 된다.’는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목사는 열심히 성도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정치인들도 여당, 야당이 어쩌느니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일 열심히 하면 됩니다. 학생은 공부하면 되고요. 자동차의 라이트가 언제 브레이크에 간섭하던가요? 핸들이 자기 할 일은 놓고 액셀러레이터에 이래라저래라하던가요? 아닙니다. 그냥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기에 자동차가 움직이고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겁니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곁눈질할 시간이 없습니다. 목표만 보고 귀는 닫고 가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에 참견하지 않고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의 길만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기에 바울이 유럽 전역에 복음을 전했고, 우리에게 13서신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남의 일이나 말에 신경을 썼다면 오늘의 이초석 목사는 없었을 것이고, 예수중심교단도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별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참견하고 변명하고 간섭했더라면 저는 여전히 철산리 지하에서 토닥거리고 있었을 겁니다. 세계 73개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꿈도 못 꾸었을 겁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아니, 남도 살피면서 살아야죠.” 하십니까? 참견과 나눔은 다른 겁니다. 참견하는 것은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쓸데없이 관여하는 것이고, 나눔과 베풂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줄 수 있게, 나눌 수 있게 내가 먼저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내 일에 충실(充實)해야 합니다. 나를 채워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경에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고 하셨지 않습니까. 네가 먼저 구원받고, 네 가족이 구원을 받아야 남에게도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듯, 내가 열매가 있어야 그것으로 남과 나누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남의 일에 참견할 시간에 내 갈 길이나 열심히 갑시다. 내 일에 충실하여 열매를 맺읍시다. 그리고 나중에 그 열매를 나누는 자들이 됩시다.
외야수가 관중의 소리에 다 반응한다면 일류선수가 못됩니다. 마라토너가 관중의 소리에 일일이 신경 쓴다면 순위에 들 수 없습니다. 성공하고 싶습니까?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내 일만 합시다.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전3:22). 할렐루야!
입으로 말하지 말고 결과로 말하라
성공한 자들은 자기 일에 충실한 자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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