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과의 접촉과 몽골의 침략
13세기 초 중국에서는 금이 쇠퇴하고 몽골이 세력을 확대하였다.
고려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거란인이 있돈 강동성을 함락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는 몽골과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몽골은 고려를 복속국으로 취급하며 많은 공물을 요구하여 고려와의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에 온 몽골 사신이 귀국하는 길에 살해되자 몽골은 국교를 끊고 고려를 침략(1231)
고려는 몽골의 칩입에 맞서 귀주성을 비롯한 북방의 여러 성에서는 백성과 관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성을 지켰다
그러나 많은 성이 함락되고 고려의 방어군이 패패하자 최씨 정권은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몽골군은 북밪의 머령지와 개경에 다루가치를 두고 돌아감
강화 천도와 장기간 항전
몽골의 간섭에 맞서 최씨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게 하여 항전을 준비.
고려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몽골은 고려를 다시 침략 하지만 처인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돌아갔다(1232)
고려 정부는 민심을 모으고 불교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작.
전쟁의 피해와 몽골과의 강화
고려는 몽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졌고 많은 백성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또한 대구 부인사의 대장경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 많은 문화유산이 불에 탔다
이러한 상황에 몽골이 강화를 제안하자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여론이 높았지만 최씨 정권은 항전을 주장,결국 무신들을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
당시 태자인 원종은 쿠빌라이를 만나 고려의 독립과 풍속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음.
쿠빌라이는 고려의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기고 일본원정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제공하라고 요구,무신정권은 다시 몽골에 저항하려고 했으나 내분으로 무너졌고 고려 정부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감.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개경으로 돌아가는데 반대하며 봉기,이들은 진도를 근거지로 삼아 남해안 일대를 장악,그러나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남은 세력이 제주도로 옮겨가 항쟁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진압(1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