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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과 겸손의 갈림길
마가복음 12:38~44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좌불안석(坐不安席)이란 뜻을 아실 것입니다. 앉아있으나 자리가 편하지 않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가 불편하고 불안해 보신 적이 있나요?
제 경우는 40대 중반에 들어서 전철을 타게 되었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는 제 나이와 비슷하게 보이는 분이 저를 몇 차례 훑어보더니 “영감님! 여기 앉으시지요” 그러면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는 나는 아직 젊다고 하면서 사양을 해야 합니까? 손사래를 지으면서 사양하였지만 굳이 앉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앉기는 하였지만 얼마나 불편한 자리였는지 모릅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생각이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평가에 의하여 주어진 자리가 내게는 영 어울리지 않고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편한 자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도 자신이 스스로 자리를 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편에 앉으라고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지정하여 주신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도 영원한 나라에 앉히실 자리를 준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의 자리요 영원한 내게 걸맞은 자리가 되어 기쁨과 화평을 누리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위치한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에 따라 장차 얻게 될 자리가 영광의 자리가 될지 아니면 수치의 자리에 이르게 될지를 가늠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경계해야 할 자리와 태도입니다.
막 12:38~39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삼가라’는 뜻은 원문에서는 ‘블레포 βλέπω’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잘 살펴서 알아 차리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중동지역에서는 글을 배우는 데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으므로 율법을 필사하고 연구하며 가르치기도 하였던 서기관은 학자이거나 높은 관리였습니다. 율법은 주로 제사 의식에 대한 규정이므로 초기 서기관들은 서기관 겸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율법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그로 인하여 공의회에 한 회원으로 들어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함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던 사람들이며 이들 중에는 주로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서기관인 율법 학자가 되려면 존경받는 율법 학자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밤에는 스승에게 율법을 배우고 낮에는 스승의 일을 거들면서 훈련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여 보통 40세쯤 되면 안수를 받고 독립적인 율법 학자의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나름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점에 이르러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했다는 겁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대우했을 겁니다. 이런 사회 구조 가운데서 서기관들은 대접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게 더 심각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행태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인사를 받는 것과 회당과 잔치 자리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긴 옷이란 것은 옷단에 옷 술을 길게 늘어뜨린 옷으로 아마 이를 통해서 자신들이 경건한 유대인이나 율법 학자임을 과시했던 것 같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회당의 상석은 토라를 보관한 상자 맞은편에 있습니다. 이 자리는 명망가나 공적인 인물이 앉는 곳입니다. 잔치에 가서도 상석을 찾습니다. 잔치 자리의 상석은 주인의 옆자리입니다.
막 12:40에서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켰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삼킨다는 단어를 ‘등쳐먹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과부들은 사회적으로 약자입니다. 서기관이 과부의 재산을 막무가내로 강탈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 해석의 도움을 주고 과도한 금액을 요구한 것입니다. 과부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서기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를 길게 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들어서 은혜롭게 느낄만한 내용으로 기도했습니다. 최고 지성인들이었던 그들은 그럴 능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길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위선을 짚으신 다음에 결론적으로 그들이 엄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기관처럼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우리 자식들도 그런 자리에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이 더 엄한 벌을 받는다면 서기관이 되지 않는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건지 종잡기가 어렵습니다. 최선은 서기관의 자리에 올랐으나 위선적으로 살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죽을 각오로 노력하지 않는 한 어렵습니다. 죽을 각오로 살지 않으려면 서기관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는 게 차라리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직도 역시 위험스럽습니다. 본문에 나온 서기관은 오늘의 목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보통 목사라기보다는 큰 교회 목사라고 보는 게 좋습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어디 가도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사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다른 이들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심판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그걸 각오하지 않으면 목사가 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두 번째로 그러면 어떤 자세로 사는 것이 겸손한 것인지 과부의 헌신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전쟁과 재난이 많았습니다.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한 재산의 피해도 컸지만 아울러 부모를 잃은 고아나, 남편을 여의고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과부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생계 수단으로 이른 새벽 무화과 몇 개를 따기 위해 과수원에 나가 있어야 했고, 해 질 녘에는 추수 때 떨어진 이삭들을 줍기 위해 남의 밀밭 귀퉁이에 있어야 했습니다. 또 그들은 수확기가 지나면 매년 절기를 지키는 행사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일을 거들고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므로 과부들은 사회적으로 약자였고, 비천한 자였습니다. 그러한 자리일지라도 열심히 일하여 자식을 먹여 살렸지만 언제나 수입은 빠듯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들의 생활은 언제나 가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이 여인은 유월절에 수입 가운데 조금 남은 돈을 손에 꼭 쥐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그가 헌금하기 위해 손에 쥔 액수는 동전 두 닢, 우리나라 돈으로 이천 원 정도도 채 안 되는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는 그 동전을 헌금함에 넣기 위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헌금 행렬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관습으로 헌금 함은 여인의 뜰에 놓여있었습니다. 이 뜰은 여자는 남자와 함께 예배드릴 수 없으므로 여자들을 위해 따로 마련한 예배 처소였습니다. 그곳에는 나팔 모양의 열두 헌금 함이 있었는데, 남녀 모두 다가가서 헌금을 넣기 쉬운 곳에 놓여있었습니다.
그 당시 화폐는 동전이었기 때문에 헌금함 안에 거액의 동전이 떨어지면 소리가 크게 들렸고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곤 했습니다. 그때 옆에서 헌금함을 지키던 관리들이 고액의 헌금자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적절한 예우를 표하고 거리에서 그들을 만나면 깍듯이 인사하고 회당에서는 상석을 내주곤 했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같이 푼돈을 내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헌금함을 향해 앉아 계셨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고 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거액의 돈을 넣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입은 옷, 그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점잖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행렬에서 다 해어진 옷을 입은 한 과부가 발을 질질 끌며 헌금 함으로 다가와 동전 두 닢을 넣었습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동전은 너무 작고 얇아서 헌금함에 넣을 때 소리도 잘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헌금함을 침묵 가운데서 바라보며 앉아계시던 예수께서 헌금함에 동전 두 닢을 넣고 사라지는 여인을 보시고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발견하신 듯 제자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2:43~4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 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적은 액수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중에서도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헌금을 넣은 여인의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누구보다도 그 돈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돌보아 줄 친척도 없고 의지할 만한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 돈이 그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바치면 내일의 양식 살 돈이 없어 굶어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가 가진 것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여야 한다고 간섭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감사는 고사하고 주의를 끌고자 하는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고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무척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신 9: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그들이 형통하고 내세울 것이 많아지면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높아지고 하나님을 떠나기를 수없이 반복하여 행하여 왔습니다.
사람에게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의 골 2:18 ‘꾸며낸 겸손’이라고 하였고, 쉬운 말 성경에서는 ‘일부러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칫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겸손이라 착각하는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라는 분은 『겸손』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피조물이요,둘째는 죄인이요, 셋째는 성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겸손한 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기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의 덕목 중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하기가 말과 같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는 자랑할 것이 참 많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문으로 말하면 왕족이 베냐민 지파였고,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지녔습니다. 학문으로 당시 최고의 학문을 닦는 사람들이 모이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게다고 종교적으로는 율법 학자로서 대단한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렸웠더니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쳐서’라는 원어는 ‘콜라피조 κολαφίζω’에서 나온 것으로 ‘주먹으로 치다, 학대하다’를 의미입니다. 이는 노예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잔혹한 형벌을 말합니다. 자랑할 것이 많은 바울에게 자기가 가지 모든 것을 가치가 전혀 없는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겸손을 이루기 위하여 이렇게 가혹한 채찍을 줬다는 말입니다.
이땅에서 높고 자랑할 것이 많은 것이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겸손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과부가 되어 세상에서 자랑할 것도 의지할 것도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볼 수 있는 겸손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재물이 없었기에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거침없이 부르심에 따를 수 있는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부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많은 헌금을 한 것 가지만 그 돈을 내었다고 하여 자기 생활에 조금도 불편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자기의 것으로 잘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작을지 모르지만, 이 돈이면 하루를 버틸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이것을 몽땅 드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늘에 속한 평안을 얻었습니다. 염려가 사라지고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졌을 것입니다.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땅에서 힘쓰고 애써 자랑할 것이 많이 갖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교만과 겸손의 갈림길에서 교만을 버리고 겸손의 자리에 들어서는 비결은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한 손길이라 인정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나라에서 각 사람에게 최적의 환경과 높임으로 자리를 만들어 주시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