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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우리들의 하느님
자- 권정생 산문집
(아버지의 소작 농민으로 월사금을 못 내어 어머니가 장날 행상을 다녔다. 밥 짓는 일을 열 살 때부터 맡아하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시작한 것이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점원노릇. 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 살 때부터였다.)
출-녹색평론사
독정-2018.2.5.읽고 -2020.8.14. 다시 읽다
· 심어놓은 앞 논에 비가 계속 내려 질척대니까 비닐덮개를 못해 걱정이고 내년 양파값이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 한국에선 농사꾼이야말로 영육을 함께 살리는 하느님의 일꾼이다. 정말 똥짐 지는 목회자는 없는가?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실 거다.
선영이네 할머니는 예순 다섯에 연탄불살개 공장에 다닌다. 아침 6시 반에 가서 저녁 8시에 온다. 하루 품삯이 만 이천 원이다. 고달프다는 말보다 부끄러워 검정 투성이 옷을 남몰래 밤에 개울에 가서 빤다. 이렇게라도 일할 수 있는 할머니는 다행하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들이 혼자서 외롭게 산다. 벙어리 외딸 하나 데리고 면사무소 양곡 받으러 오던 할아버지는 일흔 두 살에 세상을 뜨셨다. 교회 가서 울부짖으며 기도한다고 새삼스레 하느님이 더 주거나 덜 주는 게 아니다. 이미 주신 것을 함께 나눠먹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정의나 사회주의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달동네 목사는 미장이 일을 하는데 한국 목사님은 사회직업 하나씩 가지는 게 좋겠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가난한 자 곁에서 함께 가난해지는 것뿐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능수능란한 부흥사도 아니고 자선가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 가장 소박한 한 인간으로 우리 곁에 33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준 삶 때문이다.
· 밤늦도록 불을 켜놓은 집은 제사라도 지내는 걸까? 아픈 사람이 있어 병구완 하는 걸까? 낮에 못다한 일거리를 마저 하느라 밤을 지새우는 걸까? 홀로 불을 켜놓고 있어야 하는 집은 또 다른 외로운 집일 수도 있다.
“집사님은 밤에 혼자 무섭지 않아요?”
“혼자가 아니고 내가 가운데 누우면 오른쪽엔 하느님. 왼쪽엔 예수님이 누워 꼭 붙어 잔단 다.”
“자고 나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어디로 가요?”
“하느님은 콩 팔러 가고 예수님은 산으로 들로 다녀오신단다.” 외롭다 말고 태연하게 살 뿐이다. 하느님이 계속 침묵하시듯 우리도 입 다물고 견디는 것뿐이다.
· 생명은 껌질 없이도 된다. 모습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겉모습을 갖추었을 때 예수는 하나뿐이었지만, 모습이 사라졌을 때는 수십 수백 수천의 예수로 살아났다. 다시 살아난 예수는 생전에 그가 생동하고 이야기하고 생각했던 것이, 어렵던 수수께끼가 풀리듯 제자들 머리와 가슴과 온몸으로 풀리어 빛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생기고 계산 하지 않아도 답을 알았다. 겁 없어지고 용감해졌다. 그들은 바로 자신이 예수가 된 것이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 가. 기독교 부활은 바로 이런 부활이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
예수의 사상은 무소유, 무계급, 무정부 세 가지가 갖춰진 나라였다.
· 내가 금메달을 따면 못 따는 사람이 있고 내가 수석하면 꼴찌가 있고 내가 당첨되면 떨어진 사람이 있고 내가 잘 되기 위해 누군가가 못되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훌륭한 의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어린이는 자신만 훌륭한 의사가 되고 다른 사람은 모두 불쌍한 환자가 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예수는 종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과부 사정 들어주는 여자 예수님
· 집을 마다하고 떠나간 탕자도 아버지는 기다렸다가 송아지를 잡아 잔치 한다. 남아있는 형이라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형이야말로 이기적인 현실주의자요. 배타주의자요, 독선자다. 집 나간 동생을 가련하게 여기지도 못하는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다.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좋다. 통일의 재단 위에 사랑의 제사를 하느님께 드리자. 그러기 위해 지금은 더욱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 복 짓기에 대하여 -옷짓기와 밥짓기ㅡ
기독교가 있기 전에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이 있었고 신심이 있었다. 기독교의 어머니는 유대교였고 유대교의 어머니는 인간이었다. 하느님은 그 인간의 마음속에 있었지 외부에서 숭배하는 우상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들은 고목나무나 큰 바위에 가서 절하고 비밀을 털어놓고 약속을 했다. 고목나무나 바위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들이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약속한 것이다. 바위라는 하나의 대상을 정하는 것은 흔들리기 쉬운 인간의 결심을 거기 비끌어 메어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고목나무와 바위는 절대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다. 동네 바깥이나 산속은 어머니들이 비밀을 쏟아놓을 수 있는 조용한 장소다. 그야말로 정성만 있으면 된다 바위는 헌금도, 시주도 요구하지 않는다. 까다로운 설교도 설법도 않는다. 어머니들이 필요할 때 찾아가면 되지 상대의 필요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억지가 없고 거짓이 없다.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두 손과 머리만 조아리면 고목나무나 바위는 만족해준다. 바위나 고목나무에게 약속한 언약은 절대 파계가 안 된다. 그것은 어머니들의 능력에 맞게 정해지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교회나 절간에서 요구하는 종교행사나 거기 따르는 물질은 대중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고 현실을 떠난 관념적 설교는 맹종과 위선을 낳게 된다. 우리들 어머니, 그것은 참다운 평화와 순수의 종교였다. 이 곳 송리동 당집에는 정월 보름날 제사가 있다. 한 50년 저에는 당집 천정에 ‘옷걸이’와 ‘옷따기’가 있어 있었다. 정월 열나흘 밤까지 좀 형편이 나은 집에서 새옷을 짓거나 아직 한번도 입지 않은 새옷을 지어 아무도 몰래 가져가 걸어 놓을 때는 남의 것을 훔치러 갈 때보다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옷을 갖다 건 것을 자기 집 식구조차 몰라야 한다. 그렇게 걸어놓은 옷은 또 가난한 이웃이 아무도 모르게 가져와서 입는다. 이것을 “당집에 옷따다 입는다.”고 했다. 여기서 아주 감동적인 것은 옷걸기를 한 사람이나 옷 따다 입은 사람 모두가 그해 복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복은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이 화목한 지극히 소박한 복이었다. 옷은 한사람이 한 가지씩 따다 입어야지 그 이상 가져다 입으면 벌을 받는다. 따다가 입고 있는 옷은 절대 비밀이 지켜지기 때문에 누가 걸었고 누가 따다 입고 입은 것인지 당사자밖에 모른다. 교회에서도 두손 모아 꿇어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거기 공자님의 말씀, 부처님 말씀, 서낭당 당집에 빌던 우리 조상들의 신도 함께 있고 바위, 나무에서 치성 드리던 원래 하느님도 섞여 있다. 석가나 예수는 하느님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본래 하느님 모습을 찾으려 애쓴 분들이다. 결국 그들은 모두에게 하느님 모습을 발견했고 각자 가려진 눈을 뜨게 하여 자기 모습을 보게 했다. 이 세상에서 진정 공생의 길을 찾고 평화적 삶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가 참된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다. 우리의 모습이 본래부터 하느님이었는데 새삼스레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가장 우둔한 짓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자연을 자연답게 보호하는 길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개는 개의 모습대로 닭은 닭의 모습대로 모든 동물과 식물이 그들대로의 섭생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정말 아름답다.
· 농촌사람들은 60살만 넘기면 그 머릿속은 거의 백과사전 같아진다. 아픈 사람이 생기면 약도 가지가지다.
· 신부는 나룻배를 타고 천국 가는 길을 설교하였다. 배가 한가운데 왔을 때 사공이 신부를 물에 빠트렸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이까짓 강물 하나도 헤엄쳐 못 건너면서 그 먼 천국 가는 길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 쥐 주둥이 찧는 날, 정월 초사흘이면 쥐 주둥이 찧자하며 디딜방아를 찧는다. 부잣집 곳간에 쥐가 들끓어 하인이 곡식만 꺼내고 불을 질러버리려 하자 주인이 “그것도 새끼 낳고 식구들 거느리고 사는데 어떻게 불을 질러 죽이겠느냐? 곡식이 좀 축나더라도 그냥 두어라.”했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쥐들이 모두 주인집 마당에 나와 한 줄로 줄 서서 대감님 방 쪽을 향해 자꾸 절을 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대감이 집밖으로 나와 이만치 걸어오는데 감자기 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져 내렸다. 쥐들은 이렇게 자기를 살려준 대감께 은혜를 갚은 것이다.
·이 땅에서 영구집권이나 독재를 했던 사람치고 자기 명대로 산 사람이 없다.
·김태정씨가 쓴 <우리 꽃 백가지에 보면 왕벚꽃은 원산지가 제주도라 한다. 그러고 보니 봄에 가장 많이 피는 꽃은 산벚꽃일 것이다. 벚꽃을 일본 꽃이라 해서 계속 미워하고 배척해서는 안될 것이다. 삼천리강산에 태어나서 자라온 우리 꽃이니 우리 쪽에서 더 사랑하고 아끼며 가꿔야 하지 않겠는가? 꽃은 꽃일 뿐이지 거기 무슨 불순한 사상이 묻어있단 말인가.
· 권정생은 6.25 동화를 썼지만 애국심으로 쓴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해 아니오를 말하고 싶었고 그런 동화를 통해서나마 작은 희망을 가져보고 싶었을 뿐이다.
·열녀 효부상을 준다니 영천 댁은 뒷방에 숨어 울었다. 열아홉 살에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도 자보지 못한 채 신랑이 죽어 처녀과부로 시집살이 하며 홀시어머니와 나이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자식처럼 키우며 살았다. “나는 상 받을라고 이적제 고상하며 산 게 아이시더. 뱃제 가만있는 사람 질벅거려 마음 상케 하니껴. 나는 상 긑은 거 안 받을라니더.” 동장과 반장이 번갈아가며 군청으로 오라 독촉해도 끝까지 상 받으러 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영천댁이 살아온 칠십 평생은 그 어떤 상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고통만 새삼 일깨워준 셈이다. 인생의 끝은 스스로 할 일이 없어졌을 때, 그래서 뒷구석으로 밀려났을 때다.
·운명이란 길들이기에 따라 정해진다는 말도 있지만 기계문명에 길들여지는 현대 인간이야말로 양계장 안의 닭들과 똑같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교육이란 기계 속에 잘 적응하게 길들여지는 단순한 훈련일 뿐이다. 징검다리를 위태위태 몸을 가누며 직접 건너온 아이와 자동차를 타고 훌쩍 다리를 건너온 아이 중에 어느 쪽이 진정 강을 건넜다고 느낄까? 손수 농사지은 곡식으로 밥을 지어먹는 사람은 쌀 한 톨에 애정을 가지지만 돈 주고 사다먹는 사람들은 먹다 남으면 쉽게 버려도 아깝지 않다.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와서 지금은 바쁘다고 내좇고 보니 뒷모습이 틀림없는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 나가 보니 거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도 허사였다. 집에 온 아주머니는 통곡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농촌을 위해 농촌에서 생산되는 고추, 사과, 양파를 사가며 선심 쓰듯 사먹어 주고 생색을 부린다. 거꾸로 농민들은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곱게 포장까지 해서 제발 많이 사 먹어달라고 굽신댄다. 주인과 손님이 바뀌어도 삼류 코미디 같은 현실이다.
ㆍ형제끼리 한방에서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 자던 초저녁에는 서로 이불 밀어주며 형은 동생에게 동생은 형에게 덮어주다가 잠들면 어느새 서로 잡아당기며 밤을 지낸다. 이불 하나로 정을 나눴다. 요새처럼 넓은 방 하나씩 따로 가지고 사니 서로 서먹서먹하게 이기주의만 키운다.
· 제주도 어린이들은 구덕 안에 담겨져 흔들거리며 할머니가 들려주는 자장가로 잠들었다. 무서운 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도시의 뒷골목이다. 음악학원에만 일찍 보내면 곧장 훌륭한 음악가가 되는 게 아니다. 고향과 어머니와 자연이 없는 음악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사랑이 없는 예술은 감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베토벤의 음악도 고호의 그림도 모두가 자연의 사랑이 낳은 예술이다. 손수 만든 물건은 아무렇게나 버리지 않는다. 제 손으로 만든 물건이니까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새것만 좋아하는 사람치고 속이 찬 사람을 못 봤다.
· 온 우주를 말씀으로 만들었다는 하느님은 왜 컴퓨터를 만들지 않았을까? 진작 그랬더라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컴퓨터 감시 안에서 절대 이탈하지 않아도 되었을 게 아닌가? 아담과 하와도 네로황제도 히틀러도 재깍재깍 처리했을 텐데.
요즘 아이들은 거의가 병원에서 태어나 아파트라는 밀폐된 방안에서 자란다.
1950년대 미국은 한집에 자동차가 한 대 일본은 자전거가 한 대, 한국은 지게가 하나씩이라 했다.
· 갖가지 인간 향료를 넣고 만든 음료수보다 깨끗한 냉수가 건강에 좋고 사우나탕에서 일부러 땀 흘리기보다 넓은 들판에서 밭 갈며 흘리는 땀이 훨씬 건강하다. 솜씨 좋고 예의바르고 부지런한 우리 농촌 어머니들은 늙으면서 더 아름답다. 거기다 우리 농촌 자연은 어느 나라보다 물 좋고 골짜기가 아름답다. 사계절이 뚜렷해 빛깔이 바뀌고, 기후가 그러니 농산물도 맛이 좋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데 어쩌다 우리는 여지껏 남의 것에 흘려 자신을 업수히 여겨왔는지
· 여자애들이 산과 들로 나가서 나물을 캐면서 평생 동안 익히는 식물에 대한 식견은 어떤 전문가보다 훨씬 깊다. 보통 식물학을 전공한 사람도 시골 할머니만큼 한포기 풀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가지기란 어렵다. 달래 나물은 어떤 곳에서 캐면 가장 맛이 있는지를 책상머리에서 공부한 사람은 절대 모른다. 달래 나물은 목화밭에서 자라는 것이 가장 알이 잘 영글고 깨끗하다. 그것도 이른 봄 달래싹이 바늘처럼 보일 듯 말 듯 돋을 때 캐면 한 구덩이에서 새알같은 달래뿌리가 한웅큼씩 나온다. 시장에서 팔고 있는 달래는 시퍼런 달래잎이 20센티가 넘고 알뿌리가 작다. 원래 달래는 알뿌리를 먹는 나물이다. 바늘같은 줄기 끝에 새알같이 하얀 뿌리가 달랑달랑 달려 있어 달랑이라 했던 것이 달랭이, 달래로 바뀐 것이다. 지금도 경상도 농촌에서는 달랭이라 부른다. 본래 말을 만드는 사람은 전문 국어학자가 아니라 농어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은 말을 만들었다. 달랭이는 모양을 보고 이름을 지었고 씀바귀는 맛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꽃다지 나물은 원래 코딱지라 했다. 허허롭게 빈 밭에 코딱지처럼 다닥다닥 돋아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지은 것이다. 동이처럼 생긴 동이감, 더 길쭉한 상투감, 또아리처럼 납작한 또아리 감, 익을수록 시커멓게 되는 먹감이라 부른다. 질경이풀을 농촌에서는 간가지로 부르지 않는다. 뺍지구와 질겅우 두 가지로 부른다. 질겅우는 줄기가 길고잎은 순가갈처럼 생겼고 뺍자구는 뿌리 머리에서 잎이 시작되어 질겅우와는 다르다. 가뭄이 들면 뼙자구 쪽이 더 납작하게 잎이 땅바닥에 붙어버린다. 일본말에 납작한 것을 ‘빼짱꼬’라고 하는데 이 뺍자구가 건너가서 그렇게 불린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농촌 할머니들은 두 가지의 질경이를 분명히 구분 지을 줄 안다, 이른 봄부터 나물을 캐면서 식물의 모양, 빛깔, 그리고 쓴맛 단맛을 익히고 언제 어느 때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까지 안다
· 지금 농촌에는 실질적 농민은 없다. 모두가 도시로 빠져나가고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버려진 인생들뿐이다. 늙고 병들고 배우지 못한 어정쩡한 사람들만 남아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곳이 농촌이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도시의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온갖 모습으로 모양을 내고 빽빽이 지나다니는데 농촌의 들판에는 젊은이가 없다.
· 목숨이 있는 인간은 만들어진 인형과 다르다. 인형은 조종사에게 조정되지만 목숨 있는 인간이나 동물은 스스로 행동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 정치 이데올로기는 교육이데올로기, 종교이데올로기까지 둔갑해갔고 반공교육은 동족까지 원수로 길들였다.
·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돌려줘야 하는 것이 바로 더불어 사는 평등의 원칙이며 그게 평화다.
· 초가지붕을 뜯고 나니 참새가 없어지고, 지붕 속에 살던 능구렁이와 족제비가 없어지고, 그러다보니 쥐가 많아져서 쥐약을 살포해서 고양이가 죽고 다른 가축들이 죽었다. 자연은 어느한 군데가 망가지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화학비료를 하다 보니 땅이 죽고 땅이 죽으니 그 속 곤충이 죽어 상대적으로 해충이 늘어났다. 농약을 살포하니 개울로 흘러들어 물고기가 죽고 물고기가 죽으니 새들이 죽고 새가 죽으니 나무들이 병들고. 교육은 힘을 가르치고 힘만이 최상의 평가기준이 되었다.
중국 연변에는 아직도 양말을 기워 신는다. 양말 기워 신는 사람은 이웃에게 못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밤늦도록 남편과 아이의 옷을 깁고 양말을 깁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은 모두가 성실하고 따듯한 마음씨를 잃지 않을 것이다.
· <레미제라블>은 대중소설로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한다. 비록 장발장이 전과자에서 보석가공 공장 사장이 되고 사장이 되는 과정이 부자연스럽고, 그가 초능력을 지닌 인간처러 묘사된 부분도 있지만, 위기에 처한 인간에겐 그럴 수 있는 힘이 나올 수 있음을 부정할 수만 없다.
· 서양사람한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춤 가운데 우리는 곱사춤, 문둥이춤, 앉은뱅이춤 같은 신체장애인들의 노골적인 몸짓도 거리까지 않고 춤으로 남겨놓았다. 한국의 춤을 보면 다른 외국인들의 춤과 달리 그냥 눈으로만 즐기는 춤이 아니라 뼈속까지 저려오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데 역시 말못하는 백성들의 몸짓이 그렇게 춤이 되어 남았기 때문이다.
· 맑스는 가장 큰 불행이 ‘복종’이라 했고, 엥겔스는 ‘치과에 가는 일’이라 했다. 어느 쪽이든 얽매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했다. 그래서 그는 진리대로 살다보니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고 사마천 역시 진리라는 걸 지키기 위해 예수처럼 고난의 십자가를 진 것이다. 자유라는 게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다.
<용구삼촌>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삼촌은 건넛집 다섯 살 배기 영미보다 더 어린애 같았다. 영미는 마을 들머리 구멍가게에 백 원짜리 동전으로 얼음과자도 사 먹을 줄 아는데 , 용구삼촌은 밥 먹고 뒷간에 가서 똥 누고 고양이처럼 입언저리밖에 씻을 줄 모르고 야단만 맞고 자라서인지 벙어리에 가깝게 말이 없었다. 그런 삼촌이 언제부터인지 누렁이를 데리고 못골 산으로 풀을 뜯기러 다니게 된 것이다. 삼촌이다 소를 데리고 간다기보다 누렁이가 삼촌을 데리고 간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삼촌이 누렁이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누렁이가 앞장 서서 가고 삼촌은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용구도 이제 소를 다 뜯길 줄 알고, 색시감만 있으면 장가도 가겠구나.”
감나무집 할아버지가 우스게 말을 하고 껄껄 웃으며 삼촌을 칭찬까지 했는데, 오늘 이렇게 기어코 바보로 돌아간 것이다.
못골 골짜기는 캄캄해지고 낙엽송 솔숲은 조용하기만 했다. 응달쪽 사람들도 모두가 양지쪽 참나무 숲쪽으로 모여들었다. 숨이 차는 것도 잊은 채 아버지와 하께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억새풀이 우거지고 작은 소나무가 있는 조금 우묵한 곳에, 사람들은 모여 앉아 있기도 하고 서있기도 했다. 여러 개의 손전등이 쪼그리고 누워있는 삼촌을 비추고 있었다. 삼촌은 죽지 않았다. 다복솔 나무 밑에 웅크리고 고이잠든 용구삼촌 가슴에 회갈색 산토끼 한 마리가 삼촌처럼 쪼그리고 함께 잠들어 있었다. 귀머거리에 가깝도록 가는 귀가 먼 삼촌이 큰소리로 불렀는데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건 이상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그동안의 걱정과 피로도 다 잊고 용구삼촌의 잠든 모습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엾는 삼촌, 그러나 누구보다 착하고 고운 삼촌은 이렇게 우리들이 애쓰는 천연덕스럽게 잠을 자다니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삼촌은 우리들 눈 앞에 평화를 즐기고 있는 거이다.
“용구삼촌!”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삼촌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가 그때까지 곤히 잠들었던 멍청한 회가랙의 산토끼가 놀라 눈을 뜨더니, 축구공처럼 굴러가듯 달아나는 것이었다.
“삼촌! 일어나 집에 가.”
그러면서 나는 삼촌이 얼굴에 뺨을 비비며 흐득흐득 흐느껴 울고 말았습니다.
· 노인들은 옛날 어려웠던 시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고 하면서도 “그때는 그래도 사람답게 살았지.”한다. 꽁보리밥에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어도 꿀맛 같았고 삶은 호박에 볶은 콩가루를 더북더북 묻혀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었던가? 초가을 풋수수를 잘라다 꾹꾹 찧어 어래미에 내려 풋콩을 까넣고 쑨 수수풀때기는 최고의 건강식품이었다.
· 시골 아이들은 젓멋이 때를 빼면 부모가 따로 크게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란다, 부모가 일터에 나가 땀 흘려 일하는 동안에 자연이 품에 안아 기르는 것이다. 여름에는 매미가 자장가를 불러주고 가을철에는 엄마가 돌아올 때를 귀뚜라미가 알려준다. 엄마를 대신해서 삽사리가 볼을 핥아주고 고샅길을 아장걸음으로 나서면 거위가 꽥꽥거리면서 길라잡이 노릇을 자청한다. 아이의 살갗에 닿는 것, 코와 입, 귀와 눈에 닿는 것 가운데 아이들을 해칠만한 것이 없다. 풀잎에 종아리를 베거나 가시가 손바닥에 박히는 정도가 고작이다.
-윤구병의 <실험학교 이야기>에서
하지만 이런 농촌은 30년 전이다. 고샅길엔 경운기, 승용차, 트럭도 다니고 송아지만한 도사견 같은 큰 것 아니면 발바리라고 부르는 작고 앙칼진 개뿐이다. 깨진 유리병조각과 깡통과 플라스틱 비닐조각이 널려 있다. 한가로이 우는 매미소리 귀뚜라미소리도 사라졌다.
· 한국인들은 ‘나’라는 개별적 개념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아주 강한 국민이다. 그래서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집이다. 우리라는 복수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다.
산토끼나 노루가 마을에 내려오면 절대 잡지 않는다. 마을에 내려온 이상 우리 마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이지만 그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차례를 지낸다. 우리와 함께 먹고 한자리에 계신다는 따뜻한 마음씨는 죽음이란 시공을 초월한 정 때문이다. 이것을 미신, 우상으로 매도하는 것은 오히려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아름다운 관습이 많다. 가족 중에 누군가 먼길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그릇씩 떠놓는다. 그 떠놓은 밥을 우연히 집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한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일단 집에 찾아온 손님은 박대하지 않고 먹이고 재워준다.
·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