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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 466 2악장>
맨 밑에는 협주곡 전곡(3악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세계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독일의 뮌헨 쪽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오스트리아로 가자면 왼편 길 옆으로 찰랑이는 아름다운 킴제 湖를 지나고 얼마 안가 국경을 넘어서자 바로 잘츠부르크입니다. 비엔나에서 비행기로 내리면 300여 km의 길을 급행 기차로 3시간 반쯤 가다 도로 내려와야 합니다.
* 잘츠부르크 전경, 멀리 오른쪽에 호헨잘츠부르크 성이 보입니다
적어도 유럽인들에게는 잘츠부르크는 萬人의 고향 같은 도시입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도 기억 없는 어릴 때 떠나온 고향이기나 한 것처럼 늘 그리워하는 곳이죠.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칩니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통털어도 이만큼 아름다운 도시는 많지 않습니다. 독일의 대여행가 알렉산더 폰 홈볼트는 세계 3대 美都의 하나로 잘츠부르크를 꼽았습니다.
천연의 美觀에다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요 누구나 음악을 귀로 듣기 시작하면서 함께 최초로 듣는 음악가의 이름인 모차르트. 그 모차르트의 고향임에랴. '잘츠부르크의 아들'로 자랑하는 모차르트의 後光이 있어 아름다운 이 도시는 조명한 듯이 눈부십니다.
* 잘츠부르크 전경
시내에 들어서면 도시 남쪽으로 중세의 高城인 호헨잘츠부르크 城이 언덕 위에 우뚝하고 구시가지 쪽의 묀히스베르크와 신시가지 쪽의 카푸치너베르크 두 山 사이를 알프스의 눈 녹은 물을 모아 흐르는 잘차흐 江이 시가를 양분하며 시원한 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먼저 로마 문명의 빛을 받고 가장 먼저 기독교의 세례를 받아 이 도시는 19세기 초까지 로마 교황이 임명하는 대주교의 통치하에 있었고, 그래서 '북방의 로마'라더니 과연 시내 발길 닿는 데마다 교회입니다.
유럽인들은 이 도시 이름을 '잘츠부르크'라고 부르지만 현지민들은 꼭 '살츠부르크'라고 발음합니다. 잘츠부르크는 '소금의 성채(城砦)'라는 뜻입니다. 근교에서 암염(岩鹽)이 나서 잘차흐 강으로 배에 실어 유럽 내륙으로 날랐고 대주교는 그 통행료로 부유한 궁정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 궁정 악단에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단원이었고 후에 모차르트도 들어가게 됩니다.
* 모차르트의 생가
잘츠부르크 舊시가지의 좁은 길에는 인파가 득실거립니다. 여름철이면 인구 20여만의 이 도시에 주민 수의 수배나 되는 많은 관광객들이 득실거립니다. 모차르트를 경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음악이란 누구의 전유물인 것이 아니어서, 잘츠부르크의 거리를 거닐어 보면 모차르트 광장 한복판에 선 그의 동상 아래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나와 음악의 천재를 찾아온 사람들의 흥을 돋우고 있고, 모차르트가 한 때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던 돔 성당 입구에는 소년 하나가 바이올린을 켜고 서서 천재 소년 모차르트를 연상시킵니다.
아름다운 잘츠부르크의 이 모든 아름다운 소리들은 실로 모차르트의 고고성(呱呱聲)이 그 도음(導音)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트 동상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난 집은 구시가지 쪽의 게트라이데 가세 9번지. 중세 때의 古家들이 늘어선 좁다란 상점가가 조그만 광장이 나타나면서 넓어지는 곳에 있습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집의 하나로 잘츠부르크 특유의 스타일을 가진 적황색의 6층 건물에는 벽면에 '모차르트의 생가'라는 글씨가 자랑스러운 듯이 커다랗습니다.
침침한 계단을 오르면 4층이 모차르트 일가의 주거입니다. 대주교 궁정의 바이올리니스트이던 아버지 레오폴트가 신혼 얼마 후인 1747년에 세든 아파트입니다.
전시실이 된 당시의 거실, 침실, 서재 등 각 방에는 소년 모차르트가 쓰던 소형 바이올린, 만년의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마지막 10년 간 연주회 때마다 이용한 1780년제의 구식 그랜드 피아노,그의 최후의 해에 <마술피리>를 작곡하면서 쓰던 클라비코드 등 악기와 모차르트 父子의 감동적인 편지 원본들, 자필 악보들, 그리고 일가의 초상 원화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 모차르트 전시실
초상 중에는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지아 女帝 앞에서 연주하던 6세 때의 모차르트와 모차르트의 후년기의 모습을 보여 주는 유일한 그림인 요제프 랑게의 미완성화가 특히 값진 것입니다.
거실은 모차르트가 4세 때부터 아버지한테서 음악을 배우던 방입니다. 3세 때 누나 난네를의 레슨을 어깨 너머로 듣고 있다가 레슨이 끝나자 쳄발로의 건반을 혼자 두들겨 3도의 화음을 찾아내고는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모차르트. 그 경청(傾聽)이 들리듯 함께 귀 기울여집니다.
* 모차르트 전시실
4세 때 小曲의 정확한 연주를 할 줄 알았고 5세 때는 벌써 작곡을 시작했으며 6세가 되자 연주 여행을 떠났던 모차르트의 빠른 성장이 만화 보듯 이 방에서 보입니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17세 때까지 살았고 이 시절에 초기의 피아노 협주곡,바이올린 협주곡,여러 교향곡 등을 썼습니다.
모차르트는 1781년 25세 때 고향을 영영 떠나 비엔나로 갑니다. 그가 고향을 다시 찾아온 것은 2년 후 아버지와 누나한테 결혼 승낙을 얻기 위해 부인 콘스탄체를 데리고 왔을 때 한 번 뿐이었습니다.
* 왼쪽부터 누나,모차르트,아버지
모차르트가 비엔나를 처음 방문한 것은 6세 대인 1762년이었습니다. 그 이래 11세 때와 17세 때 연주 여행을 왔었고 1781년에는 고향 잘츠부르크를 완전히 하직하고 비엔나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는 이때부터 아버지 곁을 떠나 독립된 음악가로 자립하여 35세의 짧은 생애를 마칠 때까지 곡 10년간을 이 도시에 머물게 됩니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
음악사를 빛내는 대작곡가들의 족적(足跡)들이 발길마다 밟히는 곳이 비엔나요, 그래서 거리마다 대음악가들의 銘板이 다닥다닥 인명록을 이루고 공원마다 광장마다 각 시대 대 음악가들의 기념상이 生時처럼 서서 동시대를 사는 곳이 비엔나입니다.
유명한 오페라 극장을 비롯하여 세계 유수의 음악 학교가 뛰어난 연주가들을 배출하고 있고 또 세계에 자랑하는 음악 도서관, 악기 박물관 등 음악 관계 기관들이 도처에 깔려 비엔나는 그야말로 명실 공히 음악의 도시인 것이다.
모차르트가 비엔나에 나타났다 사라진지 200년이 넘었지만 이 古都에는 그의 체취 스친 곳이 여럿 남아있습니다.
*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아들을 소개하고 있는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우선 6세의 모차르트가 처음 비엔나에 와서 마리아 테레지아 女帝 앞에서 신동의 묘기를 피로하던 쇤브룬 궁전. 합스부르크 왕가가 부르봉 왕가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대항하여 여름 이궁(離宮)으로 1696년에 세운 이 장대한 궁전은 1,000개가 넘는 방 가운데 본관 2층의 40개 실이 지금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모차르트의 피아노를 듣고 경탄하던 여제의 살롱입니다.
모차르트가 비엔나에 자리잡게 된 것은 잘츠부르크 대주교와의 불화 때문이었습니다.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자 대주교는 요제프 2세에게 그의 궁전 악단을 소개하기 위해 이듬해 비엔나에 왔고 여행 중인 모차르트를 급히 불렀습니다. 이 때 모차르트가 대주교와 함께 머물던 곳이 독일館이라는 집입니다.
이 집 현관 우측에는 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가 이 집에서 대주교와 다투어 대주교의 장관이던 아르코 백작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며 쫓겨났다는 내용의 안내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픕니다. 우리의 모차르트를 발길질한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요. 독일관 앞에는 온 세계에서 이런 분개들이 모여듭니다. 모차르트는 이때부터 비엔나에 주저앉게 됩니다. 모차르트가 1782년 26세 때 콘스탄체와 결혼한 이후 죽을 때까지 비엔나에서 거처를 옮겨다닌 곳은 무려 11군데나 됩니다. 이 가운데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비엔나에서 유일한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공개되고 있는 집이 '피가로 하우스'입니다.
* 피가로 하우스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자 그가 죽자 장례식이 올려진 곳이기도 한 슈테판 대성당, 이 성당 뒤쪽의 좁다란 길가에 이 집이 있습니다. 포석(鋪石)이 울퉁불퉁하게 깔려 옛날 분위기가 살아있는 거리입니다. 정문을 열고 조그만 안뜰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2층 전체가 전시실입니다.
모차르트는 1784년 28세 때 이 집 2층으로 이사와서는 1787년까지 살았습니다. 이 3년이 모차르트로서는 비엔나 음악계의 총아로 군림하고 있던 때라 일생 중 가장 마음 편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여유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4개의 큰 방과 2개의 작은 방에 부엌이 딸린 당시 이 건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를 얻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살던 집 중에서는 가장 넓은 집입니다.
* 아내 콘스탄체
창작면에서도 성숙기의 뛰어난 작품들을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써냈습니다. 희가극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인 <피가로의 결혼>도 이 집에서 태어났고 그 때문에 '피가로 하우스'라고 불리웁니다. 전시실에는 하이든, 베토벤, 브람스의 초상이 걸린 것은 이들이 이 집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785년 29세 때 아버지 레오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아들을 찾아온 다음날 하이든이 이 집을 방문했습니다. 모차르트는 나중에 하이든에게 헌정하게 되는 3개의 현악 4중주곡을 선보였습니다. 하이든은 이 때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은 내가 아는 작곡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격찬했습니다.
2년 뒤에는 16세의 소년 베토벤이 찾아왔습니다. 베토벤과의 유일한 상면이 되는 이 자리에서 모차르트는 그의 즉흥 연주를 듣고 옆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소년을 지켜보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이든도 옳았고 모차르트도 옳았습니다. 후일 '비엔나의 고전파'라고 불리게 되는 당대 음악계의 3거인끼리 서로가 서로를 알아준 知音의 高所가 피가로 하우스였습니다. 브람스는 모차르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한참 뒤인 1862년 비엔나에 오자마자 이 聖所부터 참배했습니다. 당시 이 집에는 피아니스트 엡슈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생애 최후의 거처는 라우헨슈타인 가세 8번지. 비엔나의 중심 지대이자 구시가 지역인 제1구의 거리인데 기대를 가지고 찾아가 보면 그 번지판이 붙은 낡은 아파트 건물 입구에 '모차르트의 방은 옆 백화점 6층으로 올라가시오'라고 쓰여 있습니다.
* 모차르트가 마지막 살다간 집, 지금은 당시 건물이 아니고 개축이 되어 알베르티나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옆쪽의 '슈테플' 백화점은 7층자리 현대식 건물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가면 캠핑 용구를 파는 코너 한 쪽 구석이 모차르트의 임종의 방입니다. 당시 집 모습의 그림과 함께 모차르트의 흉상을 모셔 놓았습니다.
한 大家의 집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예사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없어진 집 자리에 서면 남아 있는 집이 새삼 대견스럽고 없어진 집이 안타깝습니다.
* 옆에 붙어있는 슈테플 백화점
모차르트가 이 집에 이사 온 것은 죽기 전해인 1790년이었습니다. 여기서의 1년여 동안은 궁핍이 최악의 상태에 있을 때였습니다. 아내 콘스탄체는 임신 중이었고 건강도 좋지 않아 돈이 필요했습니다. 빚에 쫓겨 쓴 것이기는 했으나 이 때 낳은 작품들은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인 <마술피리>요, 또 미완성으로 남긴<레퀴엠(진혼곡)>입니다.
* 모차르트 안내 명판
죽음의 사신같은 잿빛 옷의 키 큰 사나이가 찾아와 <진혼곡>을 주문하고 간 것이 이 집이었습니다.
장작을 살 돈이 없어 한겨울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이 방에서 아내를 붙잡고 계속 춤을 추었다던 모차르트를 생각해 봅니다. 인류에게 너무나 큰 유산을 남겼으면서도 자신은 천재 하나밖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모차르트. 그가 숨을 거둔 침대 자리의 한 뼘 유허(遺墟)에서 그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는 다시 한번 가슴이 아파옵니다.
모차르트는 <마술피리>가 초연된 지 9주 만에 미완의 <진혼곡>에 매달린 채 죽었습니다. 모차르트는 병상에서 <마적>에 나오는 파파게노의 아리아 <나는 새잡이꾼>을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고 합니다.
슈테판 성당에서 장례식을 마친 모차르트의 유해는 聖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습니다. 성 마르크스 묘지는 당시 성문 밖의 한적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도심에서 멀지 않습니다. 고속도로가 바로 곁은 지나가 소음이 亡者들의 安眠을 방해하지만 내부는 아늑한 묘지 맛이 납니다.
* 모차트트 묘석
문을 들어서서 정면으로 올라가다 왼쪽으로 꼬부라지면 모차르트의 묘석이 있습니다. 천사가 팔을 걸치고 슬퍼하는 대리석상입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여기 묻혀 있지 않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무덤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천사의 천진한 오열이 가슴을 찌릅니다.
모차르트의 장례는 당시 가장 비용이 싸게 먹히는 3급으로 치러지고 유해는 묘파는 인부들만에 의해 10구를 한꺼번에 묻는 공동 묘혈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 아무런 표식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인 콘스탄체나 조객들이 묘지까지 따라가지 않은 것은 악천후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새로운 주장으로는 기상대 기록에 그날 날씨가 좋았고 다만 영구마차가 어둡기 전에 돌아오자면 빠른 걸음으로 달려야 했기 때문이라기도 합니다.
* 비엔나 중안공원의 모차르트 가묘, 왼쪽에 베토벤 오른쪽에 슈베르트 묘비가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차르트의 무덤은 실종되었습니다. 1855년 시 당국이 무덤 자리의 조사에 나섰으나 확증은 못 찾은 채 추정 위치인 지금의 묘석 자리에 1859년 기념비를 세웠고 1891년 이 기념비를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 잠든 중앙 묘지의 특별 명에 묘지 구역으로 옮긴 뒤 이 자리에는 1902년 현재의 묘석을 대신 놓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천성의 여행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연주 여행을 다녀 여행길에서 자라고 여행길에서 배웠습니다 .34년 10개월 9일 간의 생애 중 여행으로 지낸 것이 10년 2개월 8일 간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행려(行旅) 사망자처럼 죽어 간 모차르트는 地上에 무덤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천재는 죽어서도 지상에 발붙일 땅이 없는 것인가요.
[ 음악으로 승화된 죽음의 노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
섬세하고도 정서 풍부한 마음의 노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는 모차르트만이 작곡할 수 있는, 정말로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곡입니다.
변화 많은 클라리넷의 음색은 쓸쓸하지만 정감이 이를 데 없습니다. 특히 제2악장은 우리들의 가슴을 후벼 파면서 끝간데 없이 우리를 데려갑니다.
모차르트의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에는 4곡의 호른 협주곡을 비롯해 바순,클라리넷,오보에 그리고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들이 있습니다. 후일의 작곡가들의 작품에도 이 곡들을 능가할 만한 관악기 협주곡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모차르트가 클라리넷을 처음 접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1763년부터 6년에 걸친 프랑스,영국,네델란드에 이르는 여행 때인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그가 들렸던 만하임이나 런던의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이 기악의 한 파트로서 가담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하직하기 약 2달 전에 완성된 명작입니다. 만년의 모차르트의 생활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족족 죽고, 아내는 병든 상태였고, 빚은 늘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무더운 여름에도 그는 쇠약해 가는 몸을 다잡으며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이런 모차르트의 역경에 힘이 되어준 음악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클라리넷의 명 연주자이던 안톤 슈타틀러였습니다.
슈타틀러는 손수 나서서 돈은 구해 주기도 했고, 개인 자격으로 작곡도 의뢰하면서 모차르트의 가정을 도왔습니다. 이러한 그의 은공에 보담하기 위해 모차르트가 쓴 곡이 바로 이 <클라리넷 협주곡>과 <클라리넷 5중주>였습니다.
이 곡을 쓰던 당시의 모차르트가 이미 2개월 후에 닥칠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듯, 제2악장은생에 대한 체념이 오롯이 담겨 담담히 흐릅니다. 이 곡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우리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주고 있죠.
석양 무렵 광활한 아프리카의 대평원을 여유롭게 거니는 주인공들 뒤엔 이 곡의 제2악장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전곡, 샤론 캄의 클라리넷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