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속의공간] ⑫ 변소이거나 화장실이거나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를 생각하자
변소도 문학작품의 무대가 될 수 있을까. `변소'라는 말이 품위 없어 보인다면, 말을 바꿔서 같은 질문을 다시 해 볼 수도 있다. `화장실'도 문학작품의 무대가 될 수 있을까. 변소든 화장실이든 그곳은 틀림없이 더러운 장소이다. 그러나,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말하는 것은 잘 봐 주어야 문학적 순진성에 속한다. 그 더러움을 다른 차원으로 치환하는 것이 문학행위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김지하의 담시 <똥바다>에서 그 한 예를 본다. <분씨물어>(糞氏物語)라는, 이 작품의 발표 당시 제목이, 일본이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 자랑하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를 겨냥한 것임은 분명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일본인 분삼촌대(糞三寸待)는 어릴 적부터 제 어미로부터 “네 변소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저 조선반도”라는 말을 듣고 자란 인물이다. 아비와 할아비, 증·고조 할아비는 물론 비조까지도 조선에서 똥과 관련해 죽은 내력 때문에 조선과 똥이라면 이를 가는 이 인물은 “설욕의 그날까지 죽는 일이 있더라도/똥싸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을 자식 된 도리로 삼는다. 그가 마침내 조선반도에 갈 기회가 생긴다. `한일친선, 기생포식, 처녀시식, 오물배설, 불만해소, 자존과시, 선인능멸, 자원약탈, 보물도굴, 폐품처리, 공해수출, 시장확보, 일확천금, 과거설욕, 노력수탈 민간방한단'이 그것이다.
김지하 득의의 장르인 담시는 과장과 해학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삼는다. 주인공이 삼십년간 참았던 똥을 서울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위에 올라 한꺼번에 내지른다는 <똥바다>의 설정에서도 그 특징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분삼촌대는 물론 제 조상들의 선례를 좇아 결국 그 똥바다에 빠져 최후를 마치거니와, 그 전에 그가 생산하는 다종다양한 똥의 일부만을 감상해 보자.
“홍똥, 청똥, 검은똥, 흰똥/단똥, 쓴똥, 신똥, 떫은똥, 짠똥, 싱거운똥/다된똥, 덜된똥, 반된똥, 반의반된똥, 너무 된똥/너무 안된똥, 물똥, 술똥, 묽은똥, 성긴똥, 구린똥/고린똥, 설사똥, 변비똥, 피똥, 똥 같지 않은 똥, 똥 같지 않지만 똥임이 분명한 똥/지렁이 섞인 똥, 회충 촌충 십이지장충 섞인 똥, 똑똑 끊어지는 똥, 줄줄 이어지는 똥, 꼬불꼬불 말리는 똥, 확확 퍼져나가는 똥,”
<똥바다>가 산업화 바람을 타고 노골화한 일본의 대한 `진출'을 풍자했다면, 남정현의 소설 <분지>(糞地)는 미국에 예속된 한국의 현실을 똥과 변소에 비유함으로써 작가에게 필화를 입힌 문제작이다.
변소는 더러운 동시에 치사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것이 모든 목숨붙이들의 숙명인 신진대사와 관련되어 있는 까닭이다. 한마디로, 먹지 못하면 죽는 것과 꼭 같은 이치로, 싸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아무 데나 싸지를 수는 없는 법. 변소의 유무가 사활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깨달음은 슬픈 것이다/똥은 계급의 날카로운 거울이다//(…)//똥! 깨달아버린다/똥누는 것 참으로 대단히 처절한 쾌감임을/(…)//똥은 하늘이다!”(차창룡 <똥은 계급의 첨예한 반영이다―그들의 사당동>)
똥과 변소를 소재로 한 차창룡의 시들은 대체로 자기 소유의 변소가 없어서 주인집의 변소나 공중변소를 이용해야 하는 변두리 인생들의 `배설전쟁'을 다루고 있다. 양귀자의 단편 <지하생활자>에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무리 집안이 가난하고 또 천덕꾸러기더래도, 조용하게 호젓이 앉아, 우리 가진 마지막 것―똥하고 오줌을 누어 두는 소망 항아리만은 그래도 서너 개씩은 가져야지.(…)이 마지막 이거라도 실컷 오붓하게 자유로이 누고 지내야지.”(<소망(똥깐)>)라는 미당의 소박한 바람 역시 `배설의 계급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음이다.
변소는 일 개체의 신진대사에 관계하는 동시에 자연계 전체의 순환과도 맞물려 있다. “무릇 거룩한 삼라만상이여 썩을지어다”(<어린 시절의 두엄자리>)라는 고은의 축복마따나, 썩어서 다른 생명의 거름이 되는 일이야말로 생명의 권리요 의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변소는 무덤과도 통한다. 전통적인 배설문화에서 똥과 오줌은 논과 밭의 훌륭한 영양 물질이었다. 그러나, 양변기를 갖춘 화장실에서 똥오줌은 다만 처리해야 할 골칫덩이일 따름이다.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김선우 <양변기 위에서>)
양변기의 불모성은 그것으로 하여금 욕망과 허무의 결합으로서 삶 자체를 상징하도록 만든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변기 이미지에 집착하는 최승호의 시 <변기>가 대표적이다.
“움푹한 자궁과 움푹한 무덤이/아가리를 맞추고/한 덩어리/둥글네모난 감옥을 이룬/뭐랄까,/임신해서 매장까지의 길들이/둥근 벽 안에서 미끄러지고 뒤집히는/거대한 변기의 감옥”
반대로, 변기와 화장실이 종교적 명상과 해탈에 쓰일 수도 있다. 절집에서 변소를 `해우소'라 이를 때, 거기에는 생리적 근심의 해소에 더해 인간계의 온갖 번뇌를 씻어 버린다는 뜻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대흠에게는 간이 화장실이 곧 해우소이다.
“똥 ― 하고 바닥에 떨어져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곳으로/가벼이 날아가는 똥이여 나도 너처럼 어느 아늑한 데로/가고 싶다 똥똥 똥 떨어지는 소리의 그윽함이여/열망뿐인 내 젊음은 언제 저리 깊어질 수 있을런지/아픔의 날들도 오래 되면 똥처럼 부드러워지리”(<이동식 화장실에서 1>)
더러워서 피하고만 싶던 변소가 종교적 초월의 표상으로 구실하는 것은 놀라운 변신이다. 썩어서 거름이 되는 똥의 화학작용이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노릇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요절한 작가 김소진이 와병 직전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던 미완의 단편에서 죽음은 똥이 되는 일로 표현된다.
“이제 나는 세상의 똥으로 돌아갑니다. 더럽고 냄새 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버려지는 똥 말입니다.(…)똥이 다시 부드러운 흙과 투명한 바람과 서로 몸을 섞고 맑은 공기를 따라 푸성귀도 되고 짐승의 살이 되듯 일평생 똥이 가득 머물다 간 집이었던 내 몸뚱어리는 스스로가 똥이 되려 합니다. 거름이 되려 합니다. 끝내 다시 태어나려는 기억도 잊으려 합니다….”(<내 마음의 세렌게티>)
글 최재봉 기자bong@hani.co.kr 사진 탁기형 김정수 김정효 기자
줄기차게 변기를 노래한 시인 둘
한국문학에서 변소 또는 화장실을 가장 많이 작품화한 이라면 시인 최승호와 차창룡을 들 수 있다. 최승호는 두 번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에서부터 줄기차게 변기를 노래해 왔다. 그가 어찌나 변기 이미지에 집착했던지, 작고한 평론가 김현은 그의 시세계를 `거대한 변기의 세계관'이라 이름했을 정도였다. 뒤샹이 전시장에 달랑 변기를 가져다 놓고 거기에다가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처럼, 최승호에게는 변기가 창작의 원천인 셈이었다. 그런데, 같은 변기라고는 해도 그 변기가 지니는 함의는 시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다.
“초기에는 정치적 알레고리로 변기를 동원했다. 더러운 세계가 축소된 공간이 변기였던 셈이다. 그것이 나 자신을 겨냥할 땐, 더러운 나의 표상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자연과의 부조화를 변기를 통해 나타내기도 했으며, 최근작 <똥>에서는 우주적 메타포로 똥과 변기를 사용했다.”
<똥>에서 오므렸다 펴면서 뱃속의 찌꺼기를 내보내는 괄약근의 움직임은 우주의 빅뱅에 견주어진다. 시인이 “똥, 이합 속의 삶/똥, 집산 속의 죽음”이라 말할 때, 섭생과 배설, 삶과 죽음은 한통속이 된다.
최승호에 비해 차창룡은 변소의 원초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한갓 생리작용 속에 숨어 있는 사회·정치적 의미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변소 시들은 현실참여적이다.
“먹는 것이 계급적이듯 내놓는 것 역시 계급적이다. 내용물만이 아니라 그 장소 또한 그러하다. 나의 변소 시들은 서울 변두리에서 살았던 경험의 소산이며, 80년대 후반의 사회 상황을 나름대로 요약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변소와 똥은 비판과 풍자의 대상인 동시에 민중적이며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그런 양면성을 좀 더 심화시킨 시를 써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