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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종려주일)
요한복음 19:31~37
십자가를 바라보라
(초안: 2022년 4월 3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우리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계절은 혹독한 추위를 지나 따사로운 봄기운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계절은 희망의 계절을 향해 나아가는데, 우리의 신앙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순절(四旬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40일 간의 시간입니다. 누구도 고통을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통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처럼 다시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
지금도 이 지구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지난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겠습니까? 아니 이 땅에 인류가 생겨난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다가 죽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2천 년 전, 저 조그마한 유대 땅에서 33년의 짧은 인생을 살다간 예수의 죽음에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분의 삶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정말 특별한 삶을 사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 배고픔을 느끼셨고(마 4:2), 때로는 피곤에 지치셨습니다(요 4:6). 또한 예수님은 배 위에서 팔베개를 베고 주무시기도 했고(막 4:38), 때로는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습니다(요 11:35).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연약함을 똑같이 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사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충분히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셨고, 포로 된 자유에게 자유를 주셨으며, 갇힌 자에게 놓임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으며, 영과 육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겸손과 낮아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꺼려하던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삶을 전해주고 있는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죽음의 과정이 많은 분량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들에게 몇 가지 의미 있는 단서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 단서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죽으신 날 때문입니다.
3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이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이 날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안식일은 유대인의 큰 날, 즉 유월절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은 안식일 전날이자, 유월절 전날이었던 것입니다. 유월절을 준비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시체는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준비해야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있는 유월절이 안식일과 겹친 특별한 날에 시체를 나무에 달아놓는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속히 나무에 매달아 놓은 시체들을 처리해 달라고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것 때문입니다.
33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은 단지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달라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은 이들의 다리를 꺾어서 그 죽음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쇠몽치로 죽은 이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죽은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아직 죽지 못한 자의 죽음을 촉진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와 함께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완전히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구지 다리를 다시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 때문입니다.
3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기절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왜 이와 같은 사실이 중요합니까? 훗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인해 기절하셨다가 서늘한 무덤에 옮겨지자 정신을 차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무덤 입구를 인봉하여 막아놓았던 육중한 돌은 어떻게 옮겨졌으며, 무덤 입구를 지켰던 로마 병사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처형을 정확하게 집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조금의 소홀함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완전히 죽으셔야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영의 부활만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한 이유는 예수님이 죽으신 날이 유월절 전날이었기 때문이고, 그분의 다리가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분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증언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증언이 참이라고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죽으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36절과 37절을 읽겠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는 출애굽기와 민수기, 시편의 예언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라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정말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되었던 정말 특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한 이유는 그분이 죽으신 목적이 특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7~8절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의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도 아니고, 선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구약 성경의 유월절 예표를 통해 더 밝히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유월절 전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 절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이집트 종살이 할 때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습니다.
유월절의 절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집에 모여 양 고기를 먹는 규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리 준비된 양고기를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거나, 고기를 남겨두거나, 양의 뼈를 꺾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이 유월절 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랐을 때 죽음이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
유월절, 영어로 “pass over”라는 단어는 “넘어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됨으로 유월절 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한 것은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유월절 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이는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인 것을 증거 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는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용서를 상징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물은 그분이 보내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이었던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선물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삶을 사시고, 우리를 위하여 완전히 죽어주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 양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6).”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하나님의 어린 양. 그분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가 사랑하신 제자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증언이 참이라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자신의 증언이 참이라고 외치는 이유는 우리로 그 증언이 참인 줄 알고 예수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5절).”
사도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연히 죽임을 당하였거나, 아무런 의미 없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이를 본 자가 증언”한 내용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요한의 증언에 따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구약성경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라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피 흘려 죽어주셨으니, 우리는 날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광야에서 있었던 구리 뱀 사건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나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다음과 같이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 21:5).”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불 뱀들을 보내셨는데, 이 불 뱀들로 인해 하루에 몇 천 명씩 죽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만든 뱀을 장대 위에 높이 매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 뱀에 물린 사람마다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 뱀을 보는 순간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모세가 높이 든 놋 뱀이 먼 훗날 인류를 구원하게 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합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도 갈보리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리신 피와 물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박진식 시인이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은 일곱 살 때 희귀병에 걸렸는데, 그 병 이름이 특이합니다. ‘부갑상선 기능 항진 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란 병인데, 그 몸에서 칼슘이 과다로 분비되어서, 온 몸이 마치 석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병입니다.
이 분은 아홉 살 때부터 누워서 지내야했고, 열세 살 때에는 몸이 붓고 석회질이 살갗을 뚫고 나와서 온몸이 피투성이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살갗에서 딱딱한 석회질이 나온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급기야 이 분의 나이가 스물 다섯 살 되었을 때에는 온 몸이 딱딱하게 석회화 되어서, 폐와 심장까지 굳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온몸의 30%가 완전히 굳어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게 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런데 이 분은 그 절망의 시간에 하나님을 믿고 절대 왕 되신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두 손에 볼펜을 끼워, 그것으로 컴퓨터를 두드리며 감사의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 분은 “절망의 아픔은 또 다른 희망”이라고 고백하며, 오히려 자신과 같이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박진식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절망은 희망의 가면입니다. 인생의 여정에는 즐거운 천연색 날실뿐만 아니라 고난의 검은색 씨실도 필요합니다. 검은색 실도 있어야 아름다운 비단이 만들어지듯이, 절망을 거부하며 삶을 긍정하면 반드시 승리의 길이 열립니다. 절망은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는 공간이고, 나 자신을 찾는 시간입니다. 절망은 또 다른 희망의 의지를 불러줍니다.
제가 고통의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더라도,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떠올리면 나의 아픔은 더 이상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라고 미소 짓게 됩니다. 몸은 잔인한 고통으로 뒤덮였지만, 꿈꿀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 인생은 충분히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는 여러분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현실을 이기게 하는 능력,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의지를 선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더 깊이 십자가를 묵상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