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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녀(烈女) 서문>
옛적에 여자가 나면 보모(傅姆)의 가르침이 있고 성장하면 동사(史)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므로 집에 있어서는 현녀(賢女)가 되고 남에게 시집가면 현부(賢婦)가 되며 변고(變故)를 만나면 열부(烈婦)가 되었다. 후세(後世)에는 부훈(婦訓)이 규방(閨房)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탁연(卓然)히 자립하여 난(亂)에 임(臨)하여 백인(白刃)을 무릅쓰고 사생(死生)으로써 그 지조(志操)를 바꾸지 않는 것은 아아! 가(可)히 어렵다고 하겠기에 〈열녀전(烈女傳)〉을 짓는다.
§ 호수(胡壽) 처 유씨(兪氏)
호수(胡壽)의 처(妻) 유씨(兪氏)는 그 세계(世系)가 자세하지 않다. 고종(高宗) 44년에 호수(胡壽)가 나가 맹주(孟州)의 수령이 되었을 때에 맹주(孟州)에서는 병란(兵亂)을 피하여 해중(海中)에 우거(寓居)하였었는데 몽고병(蒙古兵)이 신위도(神威島)를 함락하여 호수(胡壽)가 해(害)를 만나니 유씨(兪氏)가 적(賊)에게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 현문혁(玄文奕) 처
현문혁(玄文奕)의 처(妻)는 사(史)에 그 성씨(姓氏)를 잃었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三別抄)가 강화(江華)에서 반(叛)하였는데 현문혁(玄文奕)이 도망하여 옛 서울(개성(開城) 로 달아나니 적선(賊船) 4, 5척이 날개처럼 퍼져서 이를 쫓거늘 현문혁(玄文奕)이 홀로 활을 쏘았으나 화살이 서로 접(接)할 정도였다. 처(妻)가 옆에서 화살을 뽑아 주어 적(賊)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현문혁(玄文奕)의 배가 얕은데 교착하매 적(賊)이 추급(追及)하여 이를 쏘아 팔을 맞혀 배 가운데 쓰러졌다. 처(妻)가 말하기를, “내가 의리상 쥐 같은 무리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두 딸을 이끌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적(賊)이 현문혁(玄文奕)을 잡아 그 용기를 아껴 죽이지 않았는데 얼마 후에 현문혁(玄文奕)이 옛 서울에 도망하여 돌아왔다.
홍의(洪義) 처
홍의(洪義)의 처(妻)는 사에 성씨를 잃었다. 공양왕조(恭讓王朝)에 홍의(洪義)가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는데 조일신(趙日新)이 난(亂)을 일으켜 사람을 보내어 홍의(洪義)를 그 집에서 해(害)하려 하였다. 칼을 빼어 장차 베려 하니 홍의(洪義)의 처(妻)가 빨리 몸으로써 이를 가리고 울부짖으며 끌어당기니 내려치는 칼날에 얼굴과 팔, 다리가 잘리고 상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나 홍의(洪義)는 죽지 않았다.
§ 안천검(安天儉) 처
안천검(安天儉)의 처(妻)는 사(史)에 성씨(姓氏)를 잃었다. 안천검(安天儉)은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낭장(郞將)이 되었는데 밤에 집에서 불이 났으나 안천검(安天儉)이 때마침 취(醉)하여 누워 있었다. 처(妻)가 불을 무릅쓰고 들어가 부축하여 나가려 하였으나 힘이 이기지 못하여 몸으로 안천검(安天儉)을 덮었으므로 드디어 함께 타 죽었다.
§ 강화(江華) 3녀(女)
세 여자는 강화부(江華府) 아전의 처녀(處女)들이다. 신우(辛禑) 3년에 왜(倭)가 강화(江華)를 침구(侵寇)하여 마음대로 죽이고 약탈하매 세 딸이 적(賊)을 만나 의리상(義理上) 욕되지 않으려고 서로 붙들고 강(江)에 달려가 죽었다.
§ 정만(鄭滿)의 처 최씨(崔氏)
최씨(崔氏)는 영암군(靈巖郡)의 사인(士人) 최인우(崔仁禑)의 딸이니 진주 호장(晋州戶長) 정만(鄭萬)에게 시집가서 자녀(子女) 4명을 낳았는데 그 막내는 아직 강보(襁褓)에 있었다. 신우(辛禑) 5년에 왜(倭)가 진주(晉州)에 침구(侵寇)하니 때에 정만(鄭滿)은 서울에 간지라 적(賊)이 살고 있는 마을에 침입해 들어왔으므로 최씨(崔氏)가 여러 자식을 이끌고 산중(山中)에 피하여 숨었다. 최씨(崔氏)는 나이 바야흐로 30여 세이고 용모가 또한 아름다웠으므로 적(賊)이 얻어 이를 욕보이고자 하여 칼을 빼어 위협하니 최씨(崔氏)가 나무를 안고 거부하며 꾸짖어 말하기를,
“죽기는 마찬가진데 그 더럽힘을 당하고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의(義)에 죽을 것이다.”
하고 꾸지람이 입에 끊어지지 않으니 적(賊)이 드디어 이를 죽이고 두 아들을 잡아갔다. 아들 정습(鄭習)은 겨우 6세라 시체 옆에서 울부짖었고 강보(襁褓)에 쌓인 아이는 오히려 기어가 젖을 빠니 피가 줄줄 흘러 입에 들어가 얼마 안되어 죽었다. 10년 후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장하(張夏)가 이 일을 상문(上聞)하여 이에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고 정습(鄭習)의 이역(吏役)을 면하였다.
§ 이동교(李東郊)의 처 배씨(裴氏)
배씨(裴氏)는 경산부(京山府) 팔거현(八縣) 사람이니 삼사 좌윤(三司左尹) 배중선(裴仲善)의 딸인데 낭장(郞將) 이동교(李東郊)에게 시집 갔다. 신우(辛禑) 6년에 왜적(倭賊)이 경산(京山)을 핍박하매 온 지경이 소란하였으나 감히 막는 자가 없었다. 이동교(李東郊)는 때에 합포(合浦)의 군막(軍幕)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적(賊)의 기병(騎兵)이 배씨(裴氏)가 사는 마을에 돌입(突入)하였으므로 배씨(裴氏)가 그 아이를 엎고 소야강(所耶江)에 이르니 강물이 바야흐로 넘치는지라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알고 물에 투신하니 적(賊)이 강변에 와서 활을 당겨 화살을 겨누면서 말하기를,
“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니 배씨(裴氏)가 돌아보고 적(賊)을 꾸짖어 말하기를,
“어찌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 나는 서생(書生)의 딸이다. 일찍이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고 들었으니 내가 어찌 적(賊)에게 더럽혀지리요?”
하니 적(賊)이 쏘아 그 아이를 적중(適中)시키고 활을 당기며 또 전과 같이 말하였으나 마침내 나가지 않고 해(害)를 만났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일을 갖추어 상문(上聞)하므로 드디어 이문(里門)에 정표(旌表)하였다.
§ 강호문(康好文)의 처 문씨(文氏)
문씨(文氏)는 광주(光州) 갑향인(甲鄕人)이니 이미 성년(成年)이 되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강호문(康好文)에게 시집갔다. 신우(辛禑) 14년에 왜적(倭賊)이 돌입(突入)하였는데 주병(州兵)이 창졸히 제압하지 못하였다. 문씨(文氏)에게는 두 아이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는 엎고 큰 아이는 이끌고 장차 달아나 숨으려 하다가 문득 사로잡힌 바 되어 스스로 죽고자 하여 함께 가기를 거절하니 적(賊)이 그 목을 얽어 매고 핍박하여 앞세워 가게 하고 또 핍박하여 엎은 아이를 버리게 하니 문씨(文氏)가 면치 못할 줄 알고 어린 아이를 싸서 나무 그늘에 두고 큰 아이에게 말하기를,
하였으나 아이가 억지로 따라 갔다. 가다가 몽불산(夢佛山) 극락암(極樂菴) 길에 이르니 높이 1천여 척(尺) 가량의 돌 낭떠러지가 있고 그 위에 실[線]같은 길이 있었다. 문씨(文氏)가 같이 잡힌 이웃 여자에게 말하기를,
“적(賊)에게 더럽히고 삶을 구(求)함이 몸을 깨끗히 하여 죽음에 나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몸을 떨쳐 떨어지니 적(賊)이 미쳐 정지시키지 못하자 극구(極口)로 욕하고 그 아이를 죽이고 같다. 언덕 밑에는 칡넝쿨과 부풀들이 빽빽히 우거져 죽지 않고 오른팔이 부러졌다. 오래있다가 다시 소생하니 마침 마을 사람이 먼저 벼랑구멍에 와 있었는데 보고 불쌍히 여겨 죽으로 구완하였다. 3일 만에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향리(鄕里)에 돌아오니 놀라며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김언경(金彦卿)의 처 김씨(金氏)
김씨(金氏)는 서운 정(書雲正) 김언경(金彦卿)의 처(妻)로 광주(光州)에 살았다. 신우(辛禑) 13년에 왜구(倭寇)가 표략하여 갑자기 그 집에 이르니 집 사람이 사방(四方)으로 숨었는데 김씨(金氏)가 김언경(金彦卿)과 더불어 수풀사이로 달아나 숨었더니 적(賊)이 김씨(金氏)를 잡아 목을 얽어 <끌고> 가서 이를 더럽히고자 하니 김씨(金氏)가 땅에 엎어져 적(賊)을 꾸짖고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곧 나를 죽여라! 나는 의(義)로 욕을 당하지 않겠다.”하니 성내어 드디어 이를 죽였다
§ 경덕의(景德宜)의 처 안씨(安氏)
안씨(安氏)는 창평인(昌平人)이요 판사(判事) 방혁(邦奕)의 딸이니 전의 정(典醫正) 경덕의(景德宜)에게 시집가서 정읍현(井邑縣)에 살았다. 신우(辛禑) 13년에 왜적(倭賊)이 안씨(安氏)가 사는 마을에 침입하여 들어왔다. 경덕의(景德宜)는 때에 서울에 있었으므로 안씨(安氏)가 창황히 두 아들과 비(婢) 3인을 이끌고 후원(後園) 토우(土宇)에 숨었는데 적(賊)이 손에 넣고 이를 욕보이고자 하엿다. 안씨(安氏)가 꾸짖고 또 저항하니 적(賊)이 그 머리털을 붙잡고 칼을 빼어 위협하자 안씨(安氏)가 극구(極口)로 꾸짖어 말하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를 좇지는 않겠다.”
하니 적(賊)이 드디어 이를 죽이고 그 아들 하나와 비(婢) 하나를 사로잡아 갔다.
§ 이득인(李得仁)의 처 이씨(李氏)
이씨(李氏)는 고부군리(古阜郡吏) 이석(李碩)의 딸이니 낭장(郞將) 이득인(李得仁)에게 시집가서 정읍현(井邑縣)에 살았다. 신우(辛禑) 13년에 왜적(倭賊)이 와서 이씨(李氏)를 잡아 이를 더럽히고자 하거늘 이씨(李氏)가 죽음으로써 굳게 저항하다가 드디어 적(賊)에게 살해당하였다.
§ 권금(權金)의 처
회양부(淮陽府) 백성 권금(權金)이 밤에 범에게 물렸는데 집에 장정 7, 8인이 있었으나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하거늘 처(妻)가 권금(權金)의 허리를 안고 문지방을 버티고 큰 소리로부르짖으니 범이 이를 놓고 암소를 물고 갔는데 이튿날 권금(權金)이 죽었다. 공민왕(恭愍王) 2년에 교주도 관찰사(交州道觀察使)가 도당(都堂)에 보고하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 <효우(孝友) 서문>
효도와 우애는 사람의 항성(恒性)인데 세상의 풍교(風敎)가 쇠퇴하면서부터 백성이 그 본성(本性)을 상실한 자가 많아졌다. 그러므로 이에 힘을 다한 자가 있으면 표창하여 권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高麗) 5백년 간에 효우(孝友)로써 사책(史冊)에 쓰이고 정표에 나타난 자가 10여 인이므로 효우전(孝友傳)을 짓는다.
§ 문충(文忠)
문충은 세계(世系)가 자세하지 않으나 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의 마을에 살아 서울에서 30 리 떨어져 있었다. 봉양을 위하여 봉록(俸祿)을 받고 벼슬하매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돌아오면 면전에 고하고 정성(定省)하여 조금도 쇠멸함이 없었다. 그 어머니의 늙음을 탄식하여 목계가를 지어 이름을 오관산곡(五冠山曲)이라 하였으니 <그 곡이> 악보에 전한다.
§ 석주(釋珠)
석주(釋珠)는 문종(文宗) 때 사람이니 일찍이 고아가 되어 의탁할 곳이 없어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는데 나무를 깍아 부모의 형상을 만들어 그림으로 장식하여 아침 저녁으로 정성(定省)하여 봉양하는 예(禮)가 모두 평일과 같이 하였다. 유사(有司)가 이를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정란(丁蘭)의 효(孝)도 이에 더할 수 없다.”라 하고 명하여 후하게 상주었다.
§ 최루백(崔婁伯)
최루백(崔婁伯)은 수원(水原)의 리(吏) 최상저(崔尙)의 아들이다. 최상저(崔尙)가 사냥하다가 범에게 죽었는데 최루백(崔婁伯)의 나이가 때에 15세였다. 범을 잡고자 하니 어머니가 이를 중지시키는지라 최루백(崔婁伯)이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 하고 곧 도끼를 메고 범을 추적하니 범은 이미 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었다. 최루백(崔婁伯)이 곧 앞으로 나아가 꾸짖기를, “네가 나의 아버지를 먹었으니 나는 마땅히 너를 먹으리라.”
하니 범이 꼬리를 흔들며 구부려 엎드리는 것을 빨리 찍어 그 배를 갈라서 범의 고기를 독[瓮]에 담아 냇물 가운데 묻고 아버지의 뼈와 살을 취하여 그릇에 안치(安置)하여 드디어 홍법산(弘法山)의 서쪽에 장사하고 여묘(廬墓)하였다. 어느날 잠깐 잠들었는데 최상저(崔尙)가 와서 시(詩)를 읊어 이르기를,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廬幕)에 이르니, 정(情)이 많으매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 위에 보태니, 소리를 아는 것은 명월(明月)과 청풍(淸風) 뿐이로다.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누가 효(孝)에 시종(始終)이 없다고 이를소냐.”라고 하고 읊기를 마치고서는 드디어 보이지 않았다. 복(服)이 끝나매 범의 살을 취하여 다 먹었다.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의종조(毅宗朝)에 여러 관직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 국자 사업(國子司業) 한림 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 위초(尉貂)
위초(尉貂)는 본래 거란인(契丹人)이니 명종조(明宗朝)에 산원 동정(散員同正)이 되었다. 부(父) 위영성(尉永成)이 악질(惡疾)을 않았는데 의원(醫員)이 이르기를,
“자식의 살코기를 쓰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
하니 위초(尉貂)가 곧 다리살을 베어 경단 속에 섞어 넣어 먹이니 병이 조금 나았다. 왕이 이를 듣고 조(詔)하기를,
“위초(尉貂)의 효(孝)는 고금에 으뜸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충신은 효자의 문에서 구한다 하였으니 위초(尉貂)의 효(孝)는 반드시 상줄 바라.”
하고 재상(宰相)에게 명하여 포상할 것을 의론하니 한문준(韓文俊), 문극겸(文克謙) 등이 아뢰기를,
“당(唐)의 안풍현(安豊縣) 백성 이흥(李興)이 아버지가 악질(惡疾)에 걸리니 이흥(李興)이 스스로 다리 살코기를 베어 다른 물건이라 가탁(假托)하여 먹였는데 아버지의 병(病)이 심하여 능히 먹지 못하고 밤을 지내고 죽으니 자사(刺史)가 그 일을 상서(上書)하여 그 여리(閭里)에 정표하였습니다. 지금 위초(尉貂)는 거란(契丹)의 유종(遺種)으로서 글을 알지 못하면서도 이에 능히 그 몸을 아끼지 않고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이고 죽음에 미쳐서는 또 무덤에서 3년 동안 여막(廬幕)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니 그 효(孝)를 다 하였다 말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이문(里門)에 정표하고 이것을 사책(史策)에 써서 영원히 후세에까지 가르쳐 보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제(制)하여 좋다고 하였다.
§ 서능(徐稜)
서능(徐稜)은 장성현(長城縣) 사람이니 고종(高宗) 때에 어머니를 봉양하고 벼슬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목에 창(瘡)이 났으므로 의원을 청하여 진찰케 하니 의원이 말하기를,
“만약 생개구리를 얻지 못하면 고치기 어렵다.”
하니 서능(徐稜)이 말하기를,
“때는 바야흐로 엄한(嚴寒)인데 생개구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병은 반드시 고치지 못하겠구나.”
하고 소리쳐 울기를 마지 않으니 의원이 말하기를, “비록 생개구리는 없으나 위선 약을 지어 시험하자”
하고 이에 나무 밑에서 약을 볶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나무 위에서 솥 안에 떨어지니 곧 생개구리였다. 의원이 말하기를,
“그대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곧 이를 주었으니 그대의 어머니는 반드시 살 것이라.”
하고 약을 지어 이를 붙이자 과연 나았다. 같은 현(縣) 사람 대장군(大將軍) 서희(徐曦)가 매양 이 일을 말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 김천(金遷)
김천(金遷)은 명주(溟州)의 아전이니 어렸을 때 자(字)는 해장(海莊)이다. 고종(高宗) 말에 몽고병(蒙古兵)이 내침(來侵)하매 어머니와 아우 김덕린(金德麟)이 사로잡혔다. 때에 김천(金遷)의 나이 15세였는데, 밤낮으로 큰소리로 울다가 사로잡힌 자가 많이 길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상복을 입고 상제를 마쳤다. 14년 후에 백호(百戶) 습성(習成)이 원(元)으로부터 와서 명주인(溟州人)을 저자에서 3일이나 부르니 마침 정선인(旌善人)인 김순(金純)이 이에 응하거늘 습성(習成)이 말하기를,
“김씨(金氏)란 여인(女人)이 동경(東京 요양(遼陽) )에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인(溟州人)이데 아들 해장(海莊)이 있다.’ 하고 나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부쳤으니 네가 해장(海莊)을 아는가”
하니
“나의 벗이라.”
하고 편지를 받아 김천(金遷)에게 주었다. 편지에 이르기를,
“나는 살아서 모주(某州) 모리(某里) 모가(某家)에 이르러 종이 되었는데 주려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하매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어 갖은 신고(辛苦)를 겪고 있으니 누가 나의 사생(死生)을 알리요?”
하였으므로 김천(金遷)이 편지를 보고 통곡하고 매양 식사할 때면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았다. 가서 어머니를 속(贖)하여 오고자 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돈이 없으므로 남에게 백금(白金)을 빌려 가지고 서울에 가서 어머니 찾아 가기를 청하니 조의(朝議)가 불가하다 하므로 이에 돌아왔다. 충렬왕(忠烈王)이 입조(入朝)함에 이르러 또 가기를 구하였으나 조의(朝議)가 처음과 같으므로 김천(金遷)이 오랫동안 서울에 머무르니 옷이 떨어지고 양식이 다하였으므로 근심스럽고 무료(無聊)하였는데 길에서 고향의 중[僧] 효연(孝緣)을 만나 울며 애통스럽게 찾으니 효연(孝緣)이 말하기를,
“나의 형인 천호(千戶) 효지(孝至)가 지금 동경(東京)에 가니 네가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곧 이를 부탁하였다. 혹자가 김천(金遷)에게 말하기를,
“네가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지 이미 6년이니 어머니의 존몰(存沒)을 알겠는가? 또 불행히 중도에서 도적이라도 만나면 공연히 몸을 잃고 보물만 잃을 것이라.”
하니 김천(金遷)이 말하기를,
“차라리 가서 만나보지 못할지언정 어찌 신명(身命)을 아끼리요?”
하고 드디어 효지(孝至)를 따라 동경(東京)에 들어가서 본국의 통역별장(通譯別將) 공명(孔明)과 더불어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에 가서 곧 어머니 있는 곳을 찾았다. 군졸 요좌(要左)의 집에 이르니 한 할미가 있어 나와 절하는데 옷은 헤어지고 머리는 흩어졌으며 얼굴에는 때가 껴서 김천(金遷)이 이를 보고도 그가 어머니임을 알지 못하는지라 공명(孔明)이 말하기를,
“너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 호장(溟州戶長) 김자릉(金子陵)의 딸인데 형제인 진사(進士) 김용문(金龍聞)은 이미 과거(科擧)에 급제하였고 나는 호장(戶長) 김종연(金宗衍)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김해장(金海莊)과 김덕린(金德麟)인데 김덕린(金德麟)은 나를 따라 여기에 와서 이미 19년이라 지금 서쪽 이웃에 있는 백호(百戶) 천로(天老) 집의 종이 되었으니 어찌 금일에 다시 본국인을 보리라 헤아렸으리요!”
하니 김천(金遷)이 듣고 내려와 절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니 어머니가 김천(金遷)의 손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고 하였다. 요좌(要左)가 마침 부재중이었으므로 김천(金遷)이 속(贖)하지 못하고 이에 동경(東京)에 돌아와 별장(別將) 수룡(守龍)의 집에 의탁하여 한달 있다가 수룡(守龍)과 더불어 다시 요좌(要左)의 집에 가서 속(贖)하기를 청하니 요좌(要左)가 듣지 않는지라 김천(金遷)이 애걸하여 백금(白金) 55냥(兩)으로써 이를 속(贖)하였다. <어머니를> 그 말에 태우고 도보(徒步)로 따라가는데 김덕린(金德麟)이 전송하러 동경(東京)에 와서 울며 말하기를,
“잘 돌아가시오! 잘 돌아가시오! 지금 비록 따라가지 못하나 만일 하늘이 복(福)을 주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모자가 서로 안고 울며 능히 말하지 못하였다. 마침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원(元)으로부터 동경(東京)에 이르러 김천(金遷) 모자를 불러 보고 칭찬하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으며 총관부(摠管府)에 말하여 <증명서를> 주어 주전(廚傳)을 이용케 하여 보냈다. 장차 명주(溟州)에 이르니 김종연(金宗衍)이 듣고 진부역(珍富驛)에서 맞이하여 부부가 서로 보고 기뻐하였다. 김천(金遷)이 술을 받들어 올리고 물러가서 통곡하니 온 좌석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자릉(金子陵)은 나이 79세였는데 딸을 보고 기쁨이 심하여 땅에 넘어졌다. 그후 6년에 천로(天老)의 아들이 김덕린(金德麟)을 이끌고 오니 김천(金遷)이 백금(白金) 86냥(兩)으로써 이를 속(贖)하고 몇 해가 되지 않아서 전후(前後)에 빌린 바 백금(白金)을 도두 갚고 아우 김덕린(金德麟)과 함께 종신토록 효(孝)를 다하였다.
§ 황수(黃守)
황수는 대대로 평양부(平壤府)에 살았으며 충숙왕(忠肅王) 때에 본부(本府)의 잡재서 승(雜材署丞)이 되었는데 부모의 나이 모두 70여세였다. 아우가 있어 황현(黃賢), 황중련(黃仲連), 황계련(黃季連)이라 하였으며 또 자매 2인이 있었는데 같이 밥지어 먹으며 날마다 세 때에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먼저 부모에게 드리고 물러가서 함께 먹었다. <이렇게 하기를> 20여 년이라 자손들이 좇아 익혀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찬성(贊成) 강융(姜融)과 판밀직(判密直) 김자(金資)가 몸소히 그 집을 찾으니 부모가 모두 흰 머리로 뜰에서 출영(出迎)하거늘 말려서 앉게 하였다. 강융(姜融)이 눈물을 흘리며 탄복하기를,
“지금 세상에 사대부(士大夫) 간에도 또한 드물게 듣는 바이어늘 어찌 이 성(城) 안에 이러한 효자의 가문이 있을 줄 생각하였으리요?”
하고 부인(府人)으로 하여금 장(狀)을 갖추어 상문(上聞)케 하니 마을에 정려(旌閭)가 높이 보였다.
§ 정유(鄭愈)
정유(鄭愈)는 진주인(晋州人)이니 지선주사(知善州事)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21년에 아우 정손(鄭)과 더불어 아버지를 따라 하동군(河東郡)에 수자리를 살다가 왜구(倭寇)가 밤을 타서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뭇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나 정임덕(鄭任德)은 병으로 말[馬)을 탈 수 없었으므로 정유(鄭愈)와 정손(鄭)이 부축하여 달아났다. 적(賊)이 뒤쫓아 따라 오므로 정유(鄭愈)가 말을 타고 수인(數人)을 사살하니 적(賊)이 감히 앞에 오지 못하였다. 한 적(賊)이 칼을 휘두르며 뛰어와서 정임덕(鄭任德)의 빰을 찌르므로 정손(鄭)이 자기 몸으로써 이를 가리우고 또 4인을 베고 힘껏 싸워 이를 물리쳤으므로 정임덕(鄭任德)은 면할 수 있었으나 정손(鄭)은 마침내 적(賊)에게 죽었다. 이 일이 들리매 정유(鄭愈)에게 종부 시승(宗簿寺丞)을 제수하였다. 때에 또 어떤 백성의 형제(兄弟)가 함께 가다가 아우가 문득 황금(黃金) 2정(錠)을 얻어 그 1정(錠)을 형에게 주었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같이 배를 타고 건너다가 아우가 갑자기 금을 물에 던지자 형이 괴이하여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평일에 형을 매우 돈독하게 사랑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니 문득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이를 강에 던져 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형이 말하기를, “너의 말이 진실로 옳다.”
하고 역시 금을 물에 던졌다. 때에 배를 같이 탄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성명과 읍리(邑里)를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 조희참(曹希參)
조희참(曹希參)은 수성인(守城人)이니 여러 관직을 거쳐 군기 소윤(軍器少尹)이 되었다. 일찍이 왜구(倭寇)를 피하여 그 어머니를 부축하고 장차 경산부성(京山府城)에 가려 하여 가리현(加利縣) 동강(東江)에 이르니 배가 없어 건너지 못하였다. 적(賊)이 쫓아오니 어머니가 조희참(曹希參)에게 이르기를,
“나는 늙고 또 병들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그 말[馬]을 달려 면하라.”
하였다. 조희참(曹希參)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계신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어머니와 함께 밭 가운데 숨었다. 적(賊)이 이를 잡아 창으로 조희참(曹希參)을 찌르고 또 장차 그 어머니를 살해하려 하니 조희참(曹希參)이 모든 궁마(弓馬)와 재산을 적(賊)에게 주고 몸으로써 어머니를 가리우고 이르기를,
“원컨대 나를 죽이고 나의 어머니를 해치지 말라.”
하니 적(賊)이 칼로 조희참(曹希參)을 쳐죽이고 그 어머니를 버리고 갔다. 신우(辛禑) 때에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빨리 글을 올려 조정에 상문(上聞)하니 드디어 비석을 세우고 사실을 기록하여 이를 정표(旌表)하였다.
§ 정신우(鄭臣祐)의 딸
정씨(鄭氏)는 우달적(達赤 관명(官名) ) 정신우(鄭臣祐)의 딸이다. 아버지가 죄로써 해주(海州)에 귀양갔는데 병이 위독하매 글을 그 집에 부치니 어머니가 글을 보고 통곡하였다. 정씨(鄭氏)는 때에 나이 17세였는데 방에 있다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의 죽음이 조석(朝夕)에 있으니 재가 가서 뵈옵겠습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나라에 죄를 얻었으니 어찌 너에게 가서 뵈옵기를 허락하겠는가?”
하니 말하기를,
“내가 또한 이것을 조정에 청하겠습니다.”
하고 곧 달려 서울에 이르러 글을 갖추어 고하니 도당(都堂)이 받지 않는지라 정씨가 문 밖에 서서 여러 재상(宰相)이 나오기를 기디리다가 나아가서 시중(侍中)의 말 고삐를 잡고 말하기를,
“첩(妾)의 아버지 정신우(鄭臣祐)는 죄가 반역이 아니온데 멀리 이향(異鄕)에 귀양보냈고 지금 또 병이 위독하오니 청컨대 첩(妾)이 가서 보기를 허락하소서.”
§ 손유(孫宥)
손유(孫宥)는 청주(淸州)의 아전인데 매양 공무(公務)로 인하여 촌락에 출입하였으나 조금도 취하지 않으니 이 때 사람들이 청백리라 칭찬하였다. 신우(辛禑) 4년에 그가 사는 마을에 왜(倭)가 침구(侵寇)하였는데 자녀들이 옷을 붙잡고 울었으나 손유(孫宥)가 돌아보지 않고 빨리 어머니의 집에 달려가서 엎고 숨어 면할 수 있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탄복하였다
§ 권거의(權居義)【노준공(盧俊恭)】
권거의(權居義)는 백주인(白州人)이니 여러 벼슬을 거쳐 부령(副令)이 되었다. 신우(辛禑) 때에 모친 상을 당하여 애통하고 훼모(毁慕)하여 3년 간 무덤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았다. 또 광주(光州) 사람 노준공(盧俊恭)도 또한 무덤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을 지냈다. 때에 상제(喪制)가 폐하여 무너져서 모두 100일 동안 복(服)을 입고 벗었는데 두 사람은 홀로 능히 유속(流俗)에서 초월하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모두 문려(門閭)에 정표하였다.
신사천(辛斯)의 딸
신씨(辛氏)는 영산인(靈山人)인 낭장(郞將) 신사천(辛斯)의 딸이다. 신우(辛禑) 8년에 왜적(倭賊) 50여 기(騎)가 영산(靈山)에 침범하니 신사천(辛斯)이 가족을 데리고 난을 피하였다. 멸포(浦)에 이르러 배를 탔는 바 그 자식 신급열(辛及悅)이 <배를> 밀고 당기는데 마침 장마로 물이 빨라 닻줄이 끊어져 배가 언덕에 닿으니 적(賊)이 쫓아와서 배 가운데 사람들을 거의 모두 죽였고 신사천(辛斯)도 역시 살해되었다. 한 도적이 신씨(辛氏)를 잡아 배에서 내리려 하니 신씨(辛氏)가 좇지 않으므로 적(賊)이 칼을 들어내어 겨누자 신씨(辛氏)가 크게 꾸짖기를,
“도적놈아! 죽이려면 죽여라! 너는 이미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의 원수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를 좇지 않으리라!”
하고 드디어 적(賊)의 목을 움켜잡고 차서 거꾸러뜨리니 적(賊)이 노하여 드디어 이를 살해하였다. 때에 나이 16세였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그 일을 상서하여 드디어 그 곳에 비석을 세웠다.
§ 윤구생(尹龜生)
윤구생(尹龜生)은 찬성사(贊成事) 윤택(尹澤)의 아들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가 되었다가 물러가 금주(錦州)에 살면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삭망(朔望)과 사중속절(四仲俗節)에는 3대를 제사하고 동지에는 시조(始祖)에게 제사하였으며 입춘에는 선조(先祖)에게 제사하여 한결 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썼다. 부모와 조부모의 무덤에 묘석(墓石)을 세워 그 기일(忌日)을 기록하고 또 아버지 묘(墓)에는 묘비(墓碑)를 세웠으며 묘(墓)의 남쪽에 재실(齋室)을 짓고 고조(高祖) 증조(曾祖) 이하의 기일(忌日)도 돌에 새겨 후세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였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노숭(盧嵩)이 금주(錦州)에 이첩(移牒)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영(令)을 내려 가묘(家廟)를 세우게 하였으나 한 사람도 행하는 자가 없는데 윤구생(尹龜生)은 아직 영(令)이 있기 전부터 묘(廟)를 세우고 제사를 받들어 공경스럽게 조고(祖考)를 섬기니 그 효(孝)는 실로 여러 사람의 표준이 된다. 선왕(先王)의 정사에서는 선악을 표출하여 가리고 이로써 풍교(風敎)를 세웠으니 이제 문려(門閭)에 정표하고 효자비(孝子碑)를 세우며 그 집에 조세와 부역을 면제케 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장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윤창종(尹昌宗), 윤소종(尹紹宗), 윤회종(尹會宗)이니 윤소종(尹紹宗)은 따로 전(傳)이 있다.
§ 반전(潘)
반전(潘)은 안음현(安陰縣) 사람이니 산원(散員)으로 향리(鄕里)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14년에 왜적(倭賊)이 창졸히 이르러 그의 아버지를 잡아 돌아가거늘 반전(潘)이 은정(銀錠)과 은대(銀帶)를 가지고 적중(賊中)에 가서 애걸하여 아버지와 교환하기를 청하니 적(賊)이 의롭게 여겨 이를 허락하였다.
§ 군만(君萬)
군만(君萬)은 광대이니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그의 아버지가 밤에 범[虎]에게 물려갔다. 군만(君萬)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궁시(弓矢)를 가지고 산에 들어가니 범이 이를 거의 다먹고 산을 등지고 있다가 군만(君萬)을 보고 소리치며 앞에 와서 먹은 뼈마디를 토하거늘 군만(君萬)이 한 화살로 이를 죽이고 드디어 칼을 빼어 그 배를 갈라 남은 뼈를 모두 거두어 불태워 장사하였다.
§ <방기(方技) 서문>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겸(兼)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 봉(奉) 교수(敎修)】
대개 한 가지 예능으로써 이름이 나는 것은 비록 군자(君子)로서 부끄러워하는 바이나 그러나 역시 나라를 가진 자에게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일자열전(日者列傳)과 구책 열전(龜策列傳)과 창편전(倉扁傳)을 세운 이래로 후세의 작사자(作史者)들이 모두 방기전(方技傳)을 술(述)하였음은 어찌 이 뜻이 아니리요? 방기전(方技傳)을 짓는다.
§ 김위제(金謂)
김위제(金謂)는 숙종(肅宗) 원년(元年)에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이 되었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란 승(僧)이 있어 당(唐)에 들어가서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전했는데 김위제(金謂)가 그 술(術)을 배워 상서하여 남경(南京)으로 환도(還都)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도선기(道詵記)에 이르되, ‘고려(高麗)의 땅에 삼경(三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은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은 남경(南京)이 되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 되니 11, 12, 1, 2월은 중경에 머무르고 3, 4, 5, 6월은 남경에 머무르며 7, 8, 9, 10월은 서경에 머무르면 36국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 후 160여 년에 목멱양(木覓壤)에 도읍한다.’고 하였사오니 신(臣)은 이 때가 바로 이 새 서울에 순주(巡駐)할 때라고 생각하나이다. 신(臣)은 또 그윽히 도선(道詵)의 답산가(踏山歌)를 보건대 말하기를, ‘송성(松城)이 떨어진 뒤에 어느 곳으로 향할 것인가? 삼동(三冬)에는 해뜨는 평양(平壤)이 있도다.
라고 하니 이에 일자(日者) 문상(文象)이 좇아 호응하였다. 예종(睿宗) 때에 은원중(殷元中)이 역시 도선(道詵)의 설(說)로서 상서하여 이를 말하였다.
§ 이영(李寧)
이영(李寧)은 전주인(全州人)이니 어릴 때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인종조(仁宗朝)에 추밀 사(樞密使) 이자덕(李資德)을 따라 송(宋)에 가니 휘종(徽宗)이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가훈(王可訓), 진덕지(陳德之), 전종인(田宗人), 조수종(趙守宗) 등에 명(命)하여 이영(李寧)을 좇아 그림을 배우게 하고 또 이영(李寧)에게 칙령하여 본국의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리게 하므로 얼마 후에 바치니 휘종(徽宗)이 찬탄하기를,
“근래에 고려(高麗)의 화공(畵工)으로 사신을 따라온 자가 많으되 오직 이영(李寧)이 뛰어난 솜씨라.”
하고 주식(酒食)과 금기(錦綺) 능견(綾絹)을 사(賜)하였다. 이영(李寧)이 젊어서 내전숭반(內殿崇班) 이준이(李俊異)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이준이(李俊異)는 후진으로서 유능한 화가는 질투하여 추천함이 적었다. 인종(仁宗)이 이준이(李俊異)를 불러 이영(李寧)이 그린 산수화(山水畵)를 보이니 이준이(李俊異)가 깜짝 놀라 말하기를,
“이 그림이 만일 이국(異國)에 있었으면 신(臣)은 반드시 천금으로 샀을 것입니다.”
하였고 또 송상(宋商)이 그림을 바치매 인종(仁宗)이 중화(中華)의 기품(奇品)이라 하여 기뻐하며 이영(李寧)을 불러 자랑하니 이영(李寧)이 말하기를,
“이는 신(臣)이 그린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인종(仁宗)이 믿지 않으므로 이영(李寧)이 그림을 취해 배접한 뒷 부분을 찢으니 과연 성명이 있는지라 왕이 더욱 사랑하였다. 의종(毅宗) 때에 이르러서는 내합(內閤)의 그림 그리는 일은 모두 이영(李寧)이 주관하였다. 아들 이광필(李光弼)도 역시 그림으로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았는데 왕이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소상팔경(瀟湘八景)을 읊으라 하고 인해 그림을 그렸다. 왕이 그림에 정통하고 더욱 산수화(山水畵)를 잘하므로 이광필(李光弼), 고유방(高惟訪) 등과 더불어 물상(物像)을 그리되 종일토록 게으름을 잊고 군국(軍國)의 일에는 함부로 뜻을 두지 않으니 근신(近臣)이 뜻을 맞추어 모든 주사(奏事)는 간단함을 숭상하였다. 이광필(李光弼)의 아들은 서정(西征)한 공으로 대정(隊正)에 보(補)해졌는데 정언(正言) 최기후(崔基厚)가 의론하기를,
“이 자가 나이 겨우 20세이니 서정(西征)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10세였다. 어찌 10세의 동자(童子)로 종군할 수 있었으리요?”
하고 고집하여 서명치 않으므로 왕이 최기후(崔基厚)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홀로 이광필(李光弼)이 우리 나라를 영광스럽게 하였음을 생각치 못하느냐. 이광필(李光弼)이 없었더라면 삼한(三韓)의 그림이 아마 거의 끊어졌을 것이라.”고 하니 이에 최기후(崔基厚)가 이를 서명하였다.
§ 이상로(李商老)
이상로(李商老)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중부(李仲孚)의 아들이다. 이중부(李仲孚)가 묘청(妙淸)과 더불어 좋게 지냈으므로 연좌되어 청주(淸州)에 유배되매 이상로(李商老)가 따라 갔다. 장년이 되어서는 방랑하여 술꾼[酒徒]만 따르더니 어떤 이상한 중[僧]이 의방(醫方)을 가르쳐주므로 이상로(李商老)가 인하여 의(醫)를 업으로 하였다. 뒤에 서울에 이르니 고관(高官)이 등창을 앓는지라 이상로(李商老)가 이를 치료하여 효험이 있었다. 의종(毅宗)이 발병이 나서 낫지 않았는데 그 이름을 듣고 불러 침을 놓게 하니 곧 낫는지라 능백(綾帛)을 주었으며 뛰어 양온 령(良令)을 제수하여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고 권대(眷待)하기를 후하게 하매 몇 해 지나지 않아 옮겨 낭관(郞官)에 이르렀다.
명종조(明宗朝)에 대부 소경(大府少卿)을 제배하였는데 때에 산업(算業)으로 급제한 팽지서(彭之緖)가 승선(承宣) 송지인(宋知仁)과 진사(進士) 진공서(秦公緖)를 참소하기를 이들이 남몰래 남적(南賊) 석령사(石令史)와 더불어 난을 일으키려 꾀한다고 하였다. 왕이 내시(內侍) 이존장(李存章)과 낭장(郞將) 차약송(車若松) 등에게 명하여 이들을 국문케 하였는데, 체포함이 매우 많았으므로 다시 내시(內侍) 윤민첨(尹民瞻)과 상장군(上將軍) 최세보(崔世輔)에 명하여 안험(按驗)케 하매 진위(眞僞)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해도(海島)에 유배하였다. 또 성문을 닫고 크게 그 당(黨)을 수색하매, 이상로(李商老)도 역시 참소로 같이 잡혀 섬에 유배된 지라 백관(百官)이 비록 그 억울함을 알았으나 두려워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곧 소환하여 복직시키고 내시(內侍)에 적(籍)하였다가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제배하였는데, 이상로(李商老)는 학술이 없는지라 식자(識者)가 그 맞지 않음을 기롱하였다.
§ 오윤부(伍允孚)
오윤부(伍允孚)는 부흥군(復興郡) 사람이니 대대로 태사국(太史局)의 관(官)이 되었는데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여러 관직을 거쳐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가 되었다. 오윤부(伍允孚)는 점후(占候)에 정통하여 밤이 다하도록 잠자지 않으며 비록 심한 추위나 성한 더위라도 병들지 않으면 하루 저녁도 그만두지 않았다. 별이 천준(天樽 왕의 술단지 )의 자리를 범하매 말하기를,
“마땅히 술 마시는 자가 봉사(奉使)하여 올 것이라.”
하였고 별이 여상림(女牀林)의 자리를 범하자,
“마땅히 사신이 와서 동녀(童女)를 뽑을 것이라.”
하더니 모두 그대로 되었다. 또 점(占)을 잘하매 원(元)의 세조(世祖)가 불러 시험하였으므로 더욱 유명해졌다.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국가가 일찍이 춘추(春秋) 중월(仲月)에 지구가 태양에서 먼 위치에 있는 날[遠戊日]을 사(社)로 하였는데 송(宋)의 구력(舊曆)과 원조(元朝)의 지금 책력을 살피건대 모두 지구가 태양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날[近戊日]을 사일(社日)로 하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가까운 무일(戊日)을 쓰소서.”
하니 <왕이>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왕이 몸소 대묘(大廟)에 협제(祭)하고 시책(諡冊)을 올릴새 공주(公主 충렬왕비(忠烈王妃) )도 역시 제사에 참여코자 하거늘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대묘(大廟)는 조종(祖宗)의 신령이 계시는 곳이라 가히 두렵습니다.”
하니 공주(公主)가 두려워하여 그만두었다. 오윤부(伍允孚)가 다시 공주(公主)에게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자주 나타나고 대한(大旱)이 더하여지니 청컨대 영선(營繕)을 늦추고 덕(德)을 닦아 재앙을 쉬게 하소서. 뒤에 만일 후회가 있으면 제가 말하지 않은 죄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말씀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공주(公主)가 장차 원(元)에 갈새 출발할 무렵에 재추(宰樞)를 불러 일자(日字)를 점(占)하여 궁실을 지으라 하니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에게 불리하오니 신(臣)이 감히 점(占)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공주(公主)가 노하여 장차 관직을 빼앗고 매치려 하거늘 유경(柳璥)이 간(諫)하여 이를 그치게 하였다. 재추(宰樞)가 사람을 보내어 공주(公主)에게 사뢰기를,
“침전(寢殿)의 목재와 기와는 이미 갖추어졌으나 일관(日官) 오윤부(伍允孚)는 토목공사가 왕과 공주(公主), 세자에게 불리하다 하여 날짜를 점(占)치려 하지 않사오니, 바라건대 호종하는 일관(日官) 문창유(文昌裕)를 시켜 날을 점(占)치도록 지(旨)를 내리소서.”
하니 공주(公主)가 노하여 오윤부(伍允孚)를 유배코자 하매 왕이 부득이 그 관직을 면하였다. 뒤에 왕이 오윤부(伍允孚)가 빨리 날짜를 점(占)치지 않았다 하여 이를 매치니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날짜를 점(占)치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위협으로 이를 가리게 할진대 가리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오니 신(臣)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감히 명령에 아첨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화성(火星)이 달을 먹으매 오윤부(伍允孚)가 문창유(文昌裕)와 더불어 울며 왕께 사뢰기를,
“화성(火星)이 달을 먹은 것은 비상한 변(變)인데 어찌 중[僧]에게 공양하고 불(佛)을 섬기는 것으로써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그 시주함을 삼가하여 재변(災變)을 멸(滅)하소서.”
라고 하니 이에 직언(直言)을 구하고 조성(造成)하는 역도를 파하였다. 오윤부(伍允孚)가 전법 총랑(典法摠郞) 박인주(朴仁澍)에게 말하기를,
“사(司) 내의 일이 어찌 그렇게 많이 지체되는가?”
라고 하니 박인주(朴仁澍)가 말하기를,
“내교(內敎)의 판지(判旨)가 빗발같이 많이 내려오니 어찌 지체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므로 오윤부(伍允孚)가 왕께 고하거늘, 왕이 하여금 박인주(朴仁澍)에게 말하기를,
“내가 편벽하게 들어[廳] 그 사람을 옳다 함이 아니다. 무릇 고하는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로 하여금 일찍 판결케 하고자 하는 까닭으로 이를 명할 뿐이지 어찌 사(私)를 위한 것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박인주(朴仁澍)가 대답하기를,
“만약 판지(判旨)와 내교(內敎)를 내리지 않는다고 하여 신(臣) 등이 사정(私情)을 용납하여 처리하면 그 죄가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어느날 용화원(龍化院)의 못에 있는 고기가 수없이 죽어 떠오르거늘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갑술년(甲戌年 원종(元宗) 15년 )에 동지(東池)에 이같이 괴이한 일이 있더니 왕이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수성(修省)하소서.”
라고 하였다. 순창궁(順昌宮)에 화재가 나니 왕이 오윤부(伍允孚)와 문창유(文昌裕)를 불러 말하기를,
“경등(卿等)이 일찍이 마땅히 화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는데 어찌 그럴 줄을 알았느냐?”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하늘의 꾸지림이 명백하니 이 불도 오히려 작은 재앙입니다.”
라고 하였다. 오윤부(伍允孚)가 또 말하기를,
“천변(天變)은 가히 두려우니 청컨대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설(設)하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이제 장차 남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마땅히 행하겠다.”
고 하였다. <원(元)의> 세조(世祖)가 몸소 내안(乃顔)을 정벌하니, 왕이 정벌을 돕기 위하여 군사를 거
느리고 평양(平壤)에 이르렀는데 먼저 유비(柳庇)를 보내어 가게 하고 오윤부(伍允孚)로 하여금 점(占)치게 하니 대답하기를,
“모일(某日)에는 유비(柳庇)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며, 전하께서도 역시 이로부터 군사[]를 돌릴 것입니다.”
“너의 점(占)에 틀림이 없느냐?”
하고 좌우로 하여금 이를 잡게 하니 오윤부(伍允孚)가 진언하기를,
“오늘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사오니 조금만 기다리소서.”
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역기(驛騎)가 먼지를 날리며 돌아오니 과연 유비(柳庇)였다. 유비(柳庇)가 이르러 말하기를,
“제(帝)가 내안(乃顔)을 평정하고 여러 도(道)의 군사를 파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더욱 그를 믿었다. 오윤부(伍允孚)가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왕께 사뢰기를,
“성변(星變)이 왕과 공주(公主)에게 불리합니다.”
라고 하였더니 왕이 이를 물리칠 바를 물으므로 대답하기를,
“백성의 원망이 없으면 이를 물리칠 수 있사온데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2도(道)의 왕지 별감(王旨別監)과 공주(公主)의 식읍(食邑)을 파하는 것만 같지 못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왕이 다만 공주(公主)의 식읍(食邑)만 파하고 그 포백(布帛)은 좌창(左倉)에 돌려 백관(百官)의 봉급에 충당케 하였다. 오윤부(伍允孚)는 성품이 절직(切直)하여 매양 재이(災異)가 생기면 말이 매우 간절하였고 시정(時政)에 할 말이 있으면 곧 들어가 간(諫)하였으며 듣지 않으면 눈물로 굳이 다투어 기어코 청종(聽從)하게 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꺼리었다. 항상 봉은사(奉恩寺)에서 삭(朔)을 고하는데 절하고 울며 말하기를,
“태조(太祖)시여! 태조(太祖)시여! 임금의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나이다.”
하고 인하여 흐느끼는데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으니 그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사람됨이 용모는 추(醜)하나 말과 웃음이 적은지라 공주(公主)가 일찍이 왕께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자주 이 사람을 인견하십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오윤부(伍允孚)는 나의 최호(崔浩)라 용모는 비록 추(醜)하나 버릴 수 없다.”
하니 뒤에 공주(公主)도 자못 얼굴을 고치고 이를 예(禮)로 대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천문(天文)을 그려 바쳤더니 일자(日者)가 다 취하여 이를 본받았다. 관직이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졸하였다.
§ 설경성(薛景成)
설경성(薛景成)은 계림인(鷄林人)이니 스스로 말하기를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의 후손이라 하고 대대로 의술(醫術)을 생업으로 하였다. 그 기술에 정통하매 처음에 상약 의좌(尙藥醫佐)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여러 관직을 거쳐 군부 총랑(軍簿摠郞)이 되었으며 갑자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승진되었고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전직(轉職)하였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매양 병을 만나면 반드시 설경성(薛景成)으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유명하여졌다. 원(元)의 세조(世祖)가 병이 나매 사신을 보내어 의원을 구하거늘 안평 공주(安平公主 충렬왕비 제국 공주(齊國公主) )가 여비와 옷 2 벌[襲]을 주어 보냈다. 약을 써서 효험이 있는지라 세조(世祖)가 기뻐하여 관사(館舍)와 미곡(米穀)을 주고 문지기에 칙명하여 무시(無時)로 출입케 하며 심지어 어전(御前)에서 바둑을 두게 하고 친림(親臨)하여 이를 관람하기에 이르렀다. 2년 동안 체류하고 돌아가기를 고하니 세조(世祖)가 매우 후하게 상주며 말하기를,
“아내를 생각함이 아니겠는가? 너는 돌아가서 가족을 데리고 오라.”
고 하였다. 설경성(薛景成)이 돌아와서 처와 더불어 가고자 하였으나 처가 불가하다 하므로 이에 그만두었다. 얼마 안되어 세조(世祖)가 그를 부르는 지라 이로부터 자주 왕복하매 세조(世祖)가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으니 전후(前後)로 준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종(成宗)이 병이 들매 또한 이를 부르므로 인해 원(元)에 체류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수선(受禪)하매 한국 공주(韓國公主 충선왕비 계국 공주(國公主) )가 조비(趙妃)를 투기하여 비(妃)의 아버지 조인규(趙仁規)의 죄를 무고하였다.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국문하고 설경성(薛景成)에게 돕게 하였더니 설경성(薛景成)이 용사(用事)하는 자와 더불어 내통하지 않으므로 특히 찬성사(贊成事)를 더하여 치사(致仕)케 하였다. 졸하매 나이가 77세였다. 설경성(薛景成)은 키가 크고 풍의(風儀)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근후(謹厚)하여 비록 천자에게 알려지고 국왕에게 사랑을 입었으나 일찍이 자손을 위하여 은택을 구하지 않았으며 또한 가산(家産)을 다스리지 않았다. 아들은 설문우(薛文遇)이니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 <충의(忠義) 서문>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생(生)도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요 의(義)도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으면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사람이 누가 죽음을 싫어하지 않으리요마는 충신과 의사(義士)는 한번 변고를 만나면 비록 정확(鼎)이 앞에 있고 도거(刀鋸)가 뒤에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은 하고자 함이 사는 것보다 심함이 있는 때문이다. 고려(高麗)는 인종(仁宗)으로부터 이후로는 왕실에 환난이 많았으므로 절의에 죽은 사람도 또한 적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 일을 차례로 서술하여 충의전(忠義傳)을 짓는다.
§ 홍관(洪灌)
홍관(洪灌)의 자(字)는 무당(無黨)이요 당성인(唐城人)이니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어사 중승(御史中丞)과 문덕각(文德閣)과 보문각(寶文閣)의 학사(學士)를 역임하였다. 예종(睿宗)이 일찍이 편년통재(編年通載)를 열람하고 홍관(洪灌)에게 명하여 삼한(三韓) 이래의 사적(事跡)을 찬집(撰集)하여 바치게 하였다. 또 이궤(李軌), 허지기(許之奇), 박승중(朴昇中), 김부수(金富脩), 윤해(尹諧) 등과 더불어 음양에 관한 서(書)를 논변하였다. 인종조(仁宗朝)에 수 사공(守司空)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제배하였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홍관(洪灌)이 도성(都城)에서 숙직하다가 변(變)을 듣고 탄식하기를,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 것이니 내가 스스로 편안할 수 있으리요”
§ 고보준(高甫俊)
고보준(高甫俊)은 인종(仁宗) 때의 사람이니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불궤(不軌)를 꾀하거늘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록연(智祿延)이 상장군(上將軍) 오탁(吳卓)과 고보준(高甫俊)의 형인 대장군(大將軍) 고석(高碩) 등과 더불어 <이들을> 주살(誅殺)할 것을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이 오탁(吳卓)과 고석(高碩)을 죽이는지라 고보준(高甫俊)이 오탁(吳卓)의 아들 오자승(吳子升)과 더불어 달아나 북산(北山)에 숨었다. 이자겸(李資謙)이 그 당(黨)인 박영(朴永)을 시켜 쫓아가 잡게 하였는데 고보준(高甫俊) 등이 높은 바위에 올라가 박영(朴永)을 꾸짖기를,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은총을 도적질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하여 해독을 생민(生民)에게 끼침이 시랑(豺狼)보다 심하여 장차 사직을 전복하려 하는데 너희 무리는 모두 간사하게 아첨하여 이를 섬기니 일찍이 노예만도 못하다. 우리들이 의거를 일으켜 우리 백성에게 사죄하려다가 이루지 못함은 운명이라 하겠으나 의사(義士)가 어찌 너희 같이 용렬한 놈들 손에 죽겠느냐!”
라 하고 이에 하늘에 울부짖으며 곧 함께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 정의(鄭)
정의(鄭)는 청주인(淸州人)이니 초명(初名)은 준유(俊儒)이다. 고종(高宗) 4년에 정의(鄭)가 어사대(御史臺)의 관리로서 서경(西京)을 분사(分司)하였는데 거란병(契丹兵)이 침입하매 왕이 서경 병마사(西京兵馬使)인 상장군(上將軍) 최유공(崔兪恭)과 판관(判官)인 예부 낭중(禮部郞中) 김성(金成) 등에게 조(詔)하여 서경병(西京兵)을 거느리고 5군(軍)을 도와 이를 치게 하였다. 때에 최유공(崔兪恭)은 침어(侵漁)하기를 좋아 하므로 사졸(士卒)이 이반하였는데 졸병에 최광수(崔光秀)란 자가 있어 나아가려 하지 않고 독기(纛旗)를 세우고 군사를 소집하여 돌아서서 서경(西京)으로 향하였다. 최유공(崔兪恭)은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잃었으며 김성(金成)은 취해서 누워 인사불성이었다. 최광수(崔光秀)가 드디어 성(城 서경(西京) )에 웅거하여 난을 일으켜 구고려흥복 병마사(勾高麗興復兵馬使) 금오위섭상장군(金吾衛攝上將軍)이라 자칭하고 관속을 두며 정예(精銳)를 불러 모으고 격서를 북계(北界) 여러 성(城)에 전하고 장차 대사(大事)를 일으키고자 하여 여러 신사(神祠)에 기도하였다. 정의(鄭)는 평소에 최광수(崔光秀)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서로 잘 지냈는데 이에 그 소행을 분하게 여겨 교위(校尉) 김억(金億), 백유(白濡), 필현보(畢玄甫), 신죽(申竹) 등 10여 인을 거느리고 도끼를 소매에 넣어 최광수(崔光秀)의 처소에 가서 더불어 말하다가 인하여 찍어 죽였다. 그 당여(黨與) 8인을 주살(誅殺)하고 나머지는 불문에 부치니 성중(城中)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정의(鄭)에게 섭 중랑장(攝中郞將)을 초수(超授)하여 내시(內侍)에 소속하게 하고 의관(衣冠)과 안마(鞍馬)를 사(賜)하였다. 김억(金億)과 백유(白濡)에게는 별장(別將)을 가(加)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상(賞)과 작(爵)을 차등 있게 하였다. 정의(鄭)는 여러번 벼슬을 거쳐 장군(將軍) 시랑(侍郞)이 되었다가 대장군(大將軍)이 제배되었다. 고종(高宗) 20년에 현보(玄甫)가 서경(西京)에서 반(叛)하므로 대신(大臣)들이 안무(安撫)의 방책을 의론하였는데, 현보(玄甫)가 일찍이 정의(鄭)에게 등용된 바 있다 하여 곧 정의(鄭)를 천거하여 <그에게> 전마(傳馬)를 달려 선유케 하였다. 이미 대동강에 이르니 종자(從者)들이 갑자기 들어가지 말기를 청하거늘 정의(鄭)가 분연히 말하기를,
“명(命)을 받고 나왔으니 감히 조금인들 지체하겠는가? 죽는 것은 진실로 분수라.”
하고 이미 현보(玄甫)를 <만나>보니 현보(玄甫)가 정의(鄭)를 얻음을 기뻐하며 주장(主將)을 삼고자 하여 한편으로 달래고 한편으로 협박하였으나 정의(鄭)는 끝내 굴하지 않고 살해당하였다. 아들은 정현(鄭)이니 벼슬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렀고 정현의 아들은 정해(鄭)이니 스스로의 전이 있다.
§ 문대(文大)
문대(文大)는 고종(高宗) 18년에 낭장(郞將)으로서 서창현(瑞昌縣)에 있다가 몽고병(蒙古兵)에게 포로되었다. 몽고병(蒙古兵)이 철주성(鐵州城) 아래에 이르러 문대(文大)로 하여금 주인(州人)을 불러 효유(曉諭)하기를,
“진짜 몽고병(蒙古兵)이 왔으니 빨리 나와 항복하라!”
고 하게 하였다. 문대(文大)가 이에 소리쳐 말하기를,
“가짜 몽고병(蒙古兵)이다. 아직 항복하지 말라!”
고 하였다. 몽고인(蒙古人)이 베려다가 다시 소리치게 하였으나 또한 여전하였으므로 드디어 참(斬)하였다. 몽고병(蒙古兵)이 성(城)을 공격하여 매우 급박하였는데, 성(城) 안에 양식이 다하여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장차 함락되려 하매 판관(判官) 이희적(李希績)이 성(城) 안의 부녀와 어린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들여 불을 지르고 정장(丁壯)을 거느리고 자문(自刎)하여 죽었다.
§ 조효립(曹孝立)
조효립은 고종(高宗) 40년에 문학(文學)으로서 춘주(春州)에 있었는데 몽고병이 성(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목책(木柵)을 2중으로 새우고 참호를 한 길이 넘게 파놓고 여러 날을 공격하였다. 성 안의 우물이 모두 말라서 우마를 잡아 피를 마셨으므로 사졸의 곤함이 심하였다. 조효립이 성(城)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처와 더불어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안찰사(按察使) 박천기(朴天器)는 대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먼저 성 안의 전곡(錢穀)을 불태우고 결사대를 거느려 목책(木柵)을 부수고 포위를 돌파하였으나 참호를 만나 나가지 못하여 한 사람도 벗어난 자가 없었다. 드디어 그 성은 도륙되었다.
§ 정문감(鄭文鑑)
정문감(鄭文鑑)은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직학(直學)에 보임(補任)되었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위관(僞官)을 두고 정문감(鄭文鑑)으로 승선(承宣)을 삼아 정사(政事)를 처리하게 하니, 정문감(鄭文鑑)이 말하기를,
라 하고, 곧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의 처 변씨(邊氏)도 정문감(鄭文鑑)이 죽는 것을 보고 또한 물에 몸을 던졌다. 변씨는 서해 안찰사(西海按察使) 변윤(邊胤)의 딸이다.
§ <환자(宦者) 서문>
고려의 엄인(人 내시 )은 그 본계(本系)가 백성이 아니면 천한 종이었다. 고려에서는 궁형(宮刑 부형(腐刑) )을 쓰지 않았으므로 어렸을 때 개에게 고환을 먹힌 자가 모두 이런 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만 궁중의 영항(永巷)의 직임에만 채용할 뿐이고, 관원(官員)으로는 제배(除拜)되지 못 하였으니 그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바 있었다. 의종 때 정함(鄭)·백선연(白善淵)이 처음으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나 정함이 지후(祗侯)가 되었을 때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이 굳이 다투어 왕의 뜻을 받들지 않았으니 대개 아직도 선왕의 유풍(遺風)이 있었음이었다. 제국 공주가 일찍이 원(元) 나라 세조(世祖)에게 몇 사람을 바쳤는데 이들은 규원(閨 궁녀(宮女) )을 모시고 탕장(帑藏 금고(金庫) )을 출납(出納)함에 자못 능하여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사신(使臣)으로 와서는 그 집안을 부흥(復興)시키고 그 족속을 벼슬시키는 자도 있어 은총(恩寵)이 지극히 두터웠다. 그리하여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점점 서로 부러워하고 모방하여 아비가 그 아들을 거세(去勢)하고 형(兄)이 그 아우를 거세(去勢)하였다. 또 강포(强暴)한 자는 조금만 분원(憤怨)이 있으며 문득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불가 수십 년이 되지 않은 사이에 도거(刀鋸 거세(去勢) )하는 무리가 매우 많아졌다. 원(元)의 정치가 점차 문란하여 지면서 엄인(人)이 권력을 마음대로하여 이들 중에는 어떤 자는 벼슬이 대사도(大司徒)에 이르렀으며 어떤 자는 먼 곳(원(元) 나라) 에 있으면서 평장 정사(平章政事)를 받은 자가 있었고, 그 다음도 모두 원사(院使), 사경(司卿)으로 되었고 인아제질(姻弟姪)이 함께 조명(朝命)을 받으매 저택[第宅]과 수레, 그리고 의복이 참람하게도 경상(卿相)에 비기게 되어 부귀(富貴)와 광영(光榮)이 한남(漢南)의 엄인(人)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되었다. 국가에서 매양 주청(奏請)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 자들의 세력에 의뢰하였으므로 충렬왕 때 이미 봉군(封君)된 자가 있었다. 충선왕이 오랫동안 원(元)에 머물면서 자주 3궁에 출입하였는데 이 무리들과 서로 친근해 짐으로 인하여 많은 청알(請謁)이 있었다. 왕은 그 중에서 원 나라 황제에게 가장 근행(近幸)한 자를 골라 대개 봉군(封君)하고 작(爵)을 주었으며 그 나머지도 대개 검교 첨의밀직(檢校僉議密直)을 제배(除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옛 법이 완전히 무너졌으며 거세(去勢)하여딱지도 떨어지지 않은 자까지도 역시 본국(本國)을 경시(輕視)하였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방신우(方臣祐)·이대순(李大順)·우산절(禹山節)·이삼진(李三眞)·고용보(高龍普) 등은 모두 그 주인을 배반(背反)하여 참소로 화(禍)를 꾸몄으니, 이를 말하면 가(可)히 마음 아픈 일이다. 공민왕(恭愍王)이 왕위에 있은 세월이 오래됨에 대신(大臣)을 시기하고 여러 소인들을 이목(耳目)으로 삼았으며 혼시(寺 내시 )를 신임(信任)하여 이들이 심지어 나라를 경륜하고 도(道)를 논하는 지위(地位)에 까지 포열(布列)하게 되어, 이들이 묘당(廟堂)에 앉아 국정(國政)을 의론하게 되니 고려의 사직(社稷)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였다.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환자전을 짓는다.
§ 정함(鄭)
정함(鄭)은 인종(仁宗) 때 내시 서두 공봉관(內侍西頭供奉官)이 되었고 의종(毅宗)의 유모(乳母)를 처(妻)로 삼았는데 의종(毅宗)이 즉위함에 저택(邸宅) 한 채를 하사하고 내전숭반(內殿崇班)을 제수(除授)하였다. 왕이 덕흥 궁주(德興宮主)를 책봉(冊封)하고 연회(宴會)를 베풀었을 때 우간의(右諫議) 왕식(王軾)은 정함이 서대(犀帶)를 띠고 있음을 보고 <어사(御史)> 대원(臺員)을 꾸짖어 말하기를,
“이런 일이 있는데도 탄핵하지 않으니 대관(臺官)들은 눈이 없는 자들이다.”
라고 하니 어사 잡단(御史雜端) 이작승(李綽升)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탄핵받지 않는지 아느냐.”
하고 곧 대리(臺吏) 이빈(李)을 시켜 그 서대를 빼앗아 오게 하였다. 정함이 하사(下賜)받은 물건이라 하고 내어주려 하지 않으므로 이빈(李)이 강제로 빼앗았다. 정함(鄭)이 왕께 고소하니 왕이 대노(大怒)하여 내시(內侍) 이성윤(李成允)에게 이빈을 잡아오라고 명(命)하였다. 이빈이 어사대문(御史臺門)으로 뛰어 들어갔으므로 이에 다른 관리(官吏)인 민효정(閔孝旌)을 잡아와 중금초노(中禁抄奴)들이 구타한 후 결박하여 궁성소(宮城所)에 가두었다. 왕이 불쾌하여 연회를 파(罷)하고 자기가 띠고 있던 서대(犀帶)를 풀어서 정함에게 주고 민효정(閔孝旌)을 형부옥(刑部獄)에 하옥하였다. 대간(臺諫)이 왕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음을 알고 그 띠를 내시원(內侍院)에 돌려주니 내시원 집사(內侍院執事) 한유공(韓儒功)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미 빼앗아 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돌려주는가”
하고 이를 받지 않다가 몇 차례 왕래(往來)한 뒤에야 이를 받았다. 대간(臺諫)이 규합(閨閤)에 엎드려 이성윤(李成允) 등의 죄를 논(論)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대간(臺諫)들이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왕이> 이성윤(李成允)과 한유공(韓儒功) 등 5인을 물리쳤으나 간관(諫官)들은 출근하지 않고 대관(臺官)들만 출근하여 일을 보았다. 얼마 후에 정함(鄭)을 권지 합문 지후(權知閤門祗候)로 삼으니 대관(臺官)이 환자(宦者)로서 조관(朝官)에 참여함은 옛 제도에 없다고 하여 이를 다투었으나 듣지 않으므로 대관(臺官)이 또 나오지 않으니 왕이 불러 설유하기를,
“이미 정함의 지후(祗侯) 임명(任命)을 거두라고 말하였다.”
고 하므로 대관(臺官)이 배사(拜謝)하고 물러갔다. 정함이 이를 원망하여 비밀히 사람을 달래어 대성(臺省) 관원들과 이빈(李) 등이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려 한다고 무고하였는데 안문(按問)하여도 증거가 없었다. 재상(宰相)과 간관(諫官)이 각(閣)에 엎드려 아뢰기를,
“정함이 개인 원한으로 대간(臺諫)을 모함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하여 논청(論請)하기를 마지않으므로 이에 그 직(職)을 파(罷)하고 물리쳤다. 얼마 후에 소환(召還)하여 다시 내시(內侍)에 충용(充用)하니 낭장(郞將) 최숙청(崔淑淸)이 비밀히 좌복야(左僕射) 권정균(權正鈞)에게 말하기를,
“정함(鄭)이 승선(承宣) 직 문하성(直門下省) 이원응(李元膺) 등과 함께 세도를 믿고 권세를 농간(弄奸)하므로 내가 그를 베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였더니 권정균(權正鈞)이 곧 이것을 상문(上聞)케 하여 최숙청(崔淑淸)을 먼 섬에 유배(流配)하였다. 얼마 후 다시 정함을 권지 합문 지후(權知閤門祗候)로 삼았다. 왕이 우승선(右承宣)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공승(李公升)에게 명하여 문하성(門下省)에 독촉하여 정함의 고신(告身)에 서명(署名)케 하니 재신(宰臣) 및 간관(諫官)이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므로 이공승(李公升)이 재삼(再三) 왕래(往來)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짐(朕)의 말을 듣지 않으니 짐(朕)은 먹어도 단맛을 모르겠고 잠을 자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다.”
“정함(鄭)의 선조는 성조(聖祖 태조(太祖) )가 창업(創業)할 때에 명령을 거슬러 신하답지 못하였으므로 벼슬을 막아 노예(奴隸)에 충당(充當)하고 종류(種類)를 구별(區別)하여 조정(朝廷)에 참렬(參列)을 못하게 하였거늘 이제 정함에게 높은 관직(官職)을 주어서 태조(太祖) 공신(功臣)의 후손(後孫)을 도리어 불신(不臣)한 유(類)에게 종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태조(太祖)께서 법제를 확립하고 왕통(王統)을 후세에 전한 뜻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정함의 관직을 삭탈하고 무릇 정함과 함께 결당(結黨)한 자도 또한 서인(庶人)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니 왕이 대노(大怒)하여 그 상소를 되돌려 보내니 간관(諫官)이 합문(閤門)에 이틀이나 엎드려 있어도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좌정언(左正言) 허세수(許勢修)는 눈물을 흘리고 한탄하며 관직을 버리고 갔다. 왕이 다시 대간(臺諫)을 불러 서명하기를 독촉하였으나 이공승은 또 명(命)을 받들지 않았으며 신숙은 상소(上疏)하여 힘써 쟁간(爭諫)하였으므로 왕이 할 수 없이 명령을 내려 정함의 관직을 깎고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였다가 얼마 안 지나서 정함을 복직하였다. 일찍이 정함이 왕을 위해 연회를 배설하고 옷을 바쳤는데 최윤의(崔允儀)·이원응(李元膺) 등이 연회에 참석하였고 풍악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듣는 자가 모두 탄식하여 말하기를,
“권세가 내시[內竪]에게 있도다.”라고 하였다.
§ 백선연(白善淵)
백선연(白善淵)은 본래 남경(南京)의 관노(官奴)였는데 의종(毅宗)이 일찍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다가 보고 기뻐하여 양자(養子)라 이름하였다. 궁인(宮人) 무비(無比)도 역시 관비(官婢)였는데 왕의 사랑을 받았다. 백선연(白善淵)이 이와 친근하여 자못 추한 소문이 있었다. 백선연은 왕광취(王光就)와 함께 왕의 침전에 무상으로 출입(出入)하면서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서리(胥吏) 진득문(秦得文)이 노예같이 두 사람을 섬겨서 보성 판관(寶城判官)에 제배(除拜)되더니 죽제(竹製)의 책상과 상자를 만들어 바쳤는데 왕이 기뻐하여 불러 내시(內侍)를 삼았다. 내시(內侍) 김헌황(金獻璜)도 역시 백선연에게 아첨하고 섬기던 자인데 어사대(御史臺)가 탄핵하여 내시 적(籍)을 삭탈(削奪)하였다. 광주 서기(廣州書記) 김류(金)는 백성의 재물을 토색하여 진기한 완구(玩具)와 기명(器皿)을 사서 환자(宦者)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음으로 백선연(白善淵)과 왕숙공(王肅恭)이 천거하여 내시(內侍)에 소속시켰다. 예성강인(禮成江人)이 백선연(白善淵), 왕숙공(王肅恭), 영의(榮儀)에게 뇌물을 주어 예성(禮成)을 현(縣)으로 삼기를 청하므로 백선연 등이 왕께 강(江)에서 유행(遊幸)하기를 권하였는데 강인(江人)들이 백성에게서 백금(白金) 300여 근(斤)을 거두어 기이하고 음란한 재주를 하였다. 왕이 물놀이를 보고자하여 내시(內侍) 박회준(朴懷俊) 등에게 명하여 50여 척(隻)의 배에 모두 채범(彩帆)을 달고 악기(樂伎)와 채붕(綵棚) 및 고기잡는 기구를 싣고 앞에서 유희를 벌리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귀신놀이를 하는데 불을 머금고 토하다가 잘못하여 한 배를 태우므로 왕이 크게 웃었다. 백선연이 일찍이 왕의 나이에 맞추어 동불(銅佛) 40개를 만들고 관음(觀音) 40개를 그려 부처님의 생일에 별원(別院)에서 점등(點燈)하고 복(福)을 빌었는데 왕이 밤을 타서 미행(微行)하다가 이를 구경하였다. 또 만춘정(萬春亭)에다 연흥전(延興殿), 영덕정(靈德亭), 수락당(壽樂堂), 선벽재(鮮碧齋), 옥간정(玉竿亭)을 짓고 물 가에 송죽(松竹)과 화초(花草)를 심어서는 왕이 매양 배를 남포(南浦)에 띄우고 유련(流連)의 즐겁게 하였으니 모두 백선연과 박회준, 유장(劉莊) 등의 꼬임에 따라 이루어졌다.
§ 최세연(崔世延)
최세연(崔世延)은 그 처(妻)가 독살스럽고 투기하므로 노하여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고자가 되었다. 환자(宦者) 도성기(陶成器)가 충렬왕(忠烈王)과 공주(公主)에게 사랑을 받고 있을 때 최세연이 그에 아부하여 입궁(入宮)하게 되었고, 총애(寵愛)를 받음이 도성기보다 더하여 수년(數年)이 못되어 도성기와 함께 장군(將軍)에 제배(除拜)되니 두 사람이 세도를 믿고 횡포하고 방자하였다. 왕이 일찍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는데 최세연이 말을 달려 의장(儀仗) 앞에 출입(出入)하므로 상장군(上將軍) 이정(李貞)이 정지시켰으나 듣지 않았고, 감찰사(監察司)는 두려워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다. 중군 도령(中軍都領)은 서반(西班)의 요직(要職)이라 반드시 제군(諸軍)의 도령(都領)을 지낸 뒤에야 보임될 수 있었다. 최세연은 그의 형(兄) 최세안(崔世安)을 초수(超授)하여 이를 주니 제군(諸軍)의 도령(都領), 지유(指諭) 등이 왕께 아뢰어 이를 쟁론(爭論)하였으나 역시 고칠 수 없었다. 최세연이 찬성(贊成) 조인규(趙仁規)의 집을 샀는데 그 좁고 더러움을 싫어하여 누각(樓閣)을 후동(後洞)에 다시 지었는데 누각이 대궐 가까운 곳에 있어 공주(公主)가 바라보고 최세연에게 이르기를,
“이는 기피(忌避)하는 방위(方位)니 이를 범하지 말라.”
고 하여도 최세연이 듣지 않으니 공주(公主)가 노하여 말하기를,
“조인규(趙仁規)는 재상(宰相)이었으나 더럽다하지 않았는데 너는 낮은 내수(內竪)에 불과하면서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더욱 그 거소(居所)를 넓히느냐.”
하고 좌우(左右)에 명하여 그 뺨을 치고 목에 칼을 씌워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가 얼마 후에 석방하였다. 최세연은 권세(權勢)를 마음대로 하여 용사(用事)하매 많은 뇌물을 받았고 신료(臣僚)의 승진과 강직이 그의 말에 달렸으므로 비록 종실(宗室)과 재보(宰輔)라도 감히 그의 뜻을 거스리지 못하였다. 낭장(郞將) 김홍수(金弘秀)가 장량비(長良庇)와 더불어 노비(奴婢)의 일로 전법사(典法司)에 소송하였는데 장양비는 자기가 굴복하게 될 줄을 알고 그 노비(奴婢) 40여 구(口)를 모두 최세연에게 주었다. 최세연이 김홍수를 만나 거만하게 꾸짖으니 김홍수 역시 최세연을 거만하게 꾸짖으므로 최세연이 왕께 참소하여 김홍수를 전법 옥(典法獄)에 내리니 좌랑(佐郞) 심유(沈愉)가 최세연(崔世延)의 뜻에 아첨하여 김홍수의 노비(奴婢)를 모두 빼앗고 <그를> 해도(海島)에 유배(流配)하므로 김홍수가 면전(面前)에서 심유(沈愉)를 꾸짖어 말하기를,
하니 심유가 부끄러워서 굴복하였다.
최세연이 또 내시(內侍) 박추(朴樞)의 노비(奴婢) 20여 구(口)를 빼앗고, 또 양민(良民) 강주(康柱)를 유인하여 노비로 삼으려하니 강주(康柱)가 듣지 않으므로 최세연이 강주가 초() 10정(錠)을 도적질하였다고 칭탁하고 은병(銀甁) 10구(口)를 추징하였다. 강주가 은병(銀甁) 4구(口)를 꾸어서 바치고 상장군(上將軍) 차신(車信)의 집에 숨었더니 최세연이 차신(車信)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강주(康柱)를 숨겼는가”
하매 차신이 말하기를,
“강주가 그대의 징독(徵督)을 괴로워하여 나의 은병(銀甁) 4구(口)를 꾸어서 갚았으니 초() 10정(錠)의 값은 이미 족(足)하거늘 다시 추징코자 하는가”
하므로 최세연이 왕께 아뢰고 순마군(巡馬軍)으로 하여금 그를 찾아 체포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였다. 드디어 최세안(崔世安)과 함께 차신의 집에 가서 체포하기를 급하게 함으로 차신이 왕궁(王宮)에 나아가 그 연고를 자세히 말하였다. 그 때에 충선왕(忠宣王)이 세자(世子)였는데 대노(大怒)하여 이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김홍수(金弘秀)와 박추(朴樞)의 노비(奴婢)를 빼앗고 김홍수를 유배(流配)한 죄가 첫째요, 미친 개를 많이 길러서 수흥궁(壽興宮)의 비(婢)를 물어 죽게 하였고 궁주(宮主)가 너에게 미친 개를 기르지 말라고 청하였어도 너는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궁주(宮主)의 여생(餘生)이 얼마나 되기에 나에게 개를 기르지 말라 하십니까 라고 하여 궁주(宮主)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 죄가 둘째요, 내부(內府)의 재물(財物)을 도적한 죄가 셋째요, 은(銀)과 동(銅)을 섞어 사사로이 은병(銀甁)을 만들은 죄가 넷째요, 강주(康柱)를 종으로 삼고자하여 차신(車信)의 집을 침우(侵)한 죄가 다섯째이라. 이는 특히 큰 것 뿐이요 나머지는 다 헤아리지 못한다.”
고 하니 최세연의 항변(抗辯)하는 말이 자못 불순(不順)하거늘 세자(世子)가 왕께 아뢰기를,
“최세연은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여 온 나라에 해독(害毒)을 입혔으니 마땅히 귀양지로 쫓아내어 그 악행을 징계하소서.”
라고 하였다. 최세연이 항상 인후(印侯)를 아비로 섬겼는데 왕이 인후의 말을 잘 들었으므로 난색을 보이자 세자(世子)가 울며 완강하게 청하였다. 이에 인후가 세자(世子)를 원망하므로 세자(世子)가 인후를 꾸짖어 말하기를,
“재상(宰相)의 항아리 같은 큰 배 속에는 최세연의 술과 고기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최세연과 함께 같은 악행을 저지르고 서로 감싸주고 있으니 이런 무리는 마땅히 한 도끼 밑에 처단하여야 할 것이다.”
고 하였다. 최세연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속여 말하기를,
“바라건대 공주(公主)에게 한마디 말만 하고 죽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대개 왕의 음사(陰事)에 호소하여 처벌을 면해 보고자함이었다. 또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죄를 범하였으나 도성기(陶成器)는 나보다 심합니다.”
라고 하니 공주(公主)가 대노(大怒)하여 도성기에게 장형(杖刑)을 가하고 최세연과 함께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 도성기는 어리석고 지각이 없어 간사함이 최세연만 못 하였으므로 도성기가 최세연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를 천거하였거늘 이제 와서 도리어 나를 참소하느냐? 속담에 기른 개에게 도리어 물린다더니 너를 이름이라.”
고 하였다. 이에 도성기의 노비(奴婢)와 전장(田庄) 및 재산을 적몰(籍沒)하니 은병(銀甁)이 70여 구(口)에 이르렀다. 최세연은 인후(印侯)와의 연고로 재산은 적몰(籍沒)되지 않고 다만 김홍수의 노비(奴婢)를 묘련사(妙蓮寺)에 예속시겼고 박추의 노비(奴婢)를 내방고(內房庫)에 예속시켰다. 최세연이 모든 재보(財寶)를 인후에게 주며 말하기를,
“바라건대 내가 섬으로 유배(流配)되는 것을 면하게 해달라.”
고 하니 인후는 만약 뇌물을 받고도 구해 주지 못하면 최세연이 다시 다른 꾀를 도모할 것을 우려하여 드디어 왕께 아뢰고 최세연과 도성기를 먼 섬으로 유배(流配)하였으나 얼마 안되 함께 소환(召還)되었다. 최세연이 왕을 따라서 원(元) 나라에 있었는데 매일 위사(衛士)로 하여금 말똥을 줏어 써 행주(行廚)의 땔나무로 대비케 하니 사람이 모두 웃었다. 궁인(宮人)인 무비(無比)는 태산군인(泰山郡人) 시씨(柴氏)의 딸로서 뽑혀 입궁(入宮)하였는데 왕이 도라산(都羅山)으로 왕래(往來)할 때면 반드시 따라가 왕이 유련(留連 객지(客地)에 머묾 )하는 낙으로 삼으므로 사람들이 도라산(都羅山)이라 불렀다. 바야흐로 특별한 사랑을 받는지라 그에 붙어 의탁(依托)하는 자가 중외(中外)에서 횡포하므로 세자(世子)가 매우 미워하였다. 세자가 공주(公主)의 초상을 당하여 원(元) 나라로부터 돌아와 왕께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는 공주(公主)에게 병이 생긴 이유를 아십니까? 반드시 내총(內寵) 중에서 질투하는 자의 소위(所爲)이니 바라건대 이를 국문하소서.”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잠시 복상(服喪) 마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세자(世子)가 좌우(左右)로 하여금 무비(無比) 및 그 일당인 최세연, 도성기와 장군(將軍) 윤길손(尹吉孫)·이무(李茂)·소윤(少尹)·유거(柳), 지유(指諭) 승시용(承時用)·송신단(宋臣旦), 내료(內僚) 김인경(金仁鏡)·문완(文玩)·장우(張祐), 중랑장(中郞將) 김근(金瑾), 엄인(人) 전숙(全淑)·방종저(方宗), 궁인(宮人) 백야진(伯也眞)을 잡아 가두고 무비(無比)의 저주한 일을 국문하니 무녀(巫女)와 술승(術僧)이 모두 자복하므로 점차 저주한 진상을 알게 되었다. 도성기, 최세연, 전숙(全淑) 방종저, 김근, 무비(無比), 백야진(伯也眞)을 베고 그 일당 40여 인을 유배(流配)하니 국인(國人)이 두려워하였다. 그 때에 환자(宦者)의 총애가 두터웠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여 스스로 거세(去勢)하는 자가 많았다. 감찰사 녹사(監察司錄事) 최성(崔成)이 환자(宦者)에게 매를 맞고 욕된 바 되매 드디어 발분(發忿)하여 스스로 거세(去勢)하였고 또 창녕현(昌寧縣) 백성이 조성도감(造成都監)의 역도(役徒)가 되었는데 은(銀)을 징수함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최세연의 집 앞에서 스스로 거세(去勢)하였다.
이숙(李淑)의 어릴 때 이름은 복수(福壽)요 평장군(平章郡) 사람이다. 어머니는 태백산(太白山)의 무녀(巫女)이다. 이숙은 충렬왕(忠烈王)의 총애(寵愛)를 받았으므로 벽상삼한정광 평장군(壁上三韓正匡平章君)에 봉해졌고 그 후 뽑혀 원(元) 나라에 가서 태감(太監)이 되었다. 왕이 원 나라 조정에 주청할 때는 이숙의 공로가 있었으므로 왕의 대우가 매우 두터웠다. 일찍이 어향(御香)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애기(愛妓)의 아들 정승주(鄭承柱)를 내승 별감(內乘別監)으로 임명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미 허락하고도 아직 쓰지 않았다. 이숙이 장차 금강산(金剛山)으로 가게 되어 왕은 연회를 베풀고 그를 맞이하였으나 이숙은 노하여 오지 않았는데 왕이 거듭 그의 요청을 허락하니 그제야 왔다.
뒤에 왕유소(王惟紹)와 더불어 충선왕(忠宣王)을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세우려는 음모를 꾀하였는데 이 일은 왕유소(王惟紹) 열전(列傳)에 있다.
§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는 상서(尙書) 주면(朱冕)의 가노(家奴)였는데 스스로 거세(去勢)하고 환자(宦者)가 되었다. 충선왕(忠宣王) 때 비인군(庇仁君)으로 봉해졌다. 어떤 인연으로 원(元) 나라 인종(仁宗)을 동관(東官)에서 섬겼는데 아첨하고 마음이 험하여 법을 어김이 많아 충선왕(忠宣王)이 그를 매우 미워하였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가 이를 알고 중상(中傷)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인종(仁宗)과 황태후(皇太后)가 충선왕을 후하게 대우하므로 도발할 수 없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에게 무례하기에 충선왕(忠宣王)이 황태후(皇太后)에게 청하여 그에게 장형(杖刑)을 가하고 또 황태후(皇太后)가 명(命)하여 그가 빼앗은 남의 토전(土田)과 장획(臧獲 노비(奴婢) )을 거두어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원한이 더욱 깊었다. 인종(仁宗)이 붕(崩)하고 황태후(皇太后)도 역시 별관(別官)에 퇴거(退居)하게 되자 임백안독고사는 더욱더 두려워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팔사길(八思吉)를 후하게 대접하여[] 갖은 계략으로 무고하고 참소하니 영종(英宗)이 사신을 보내어 전민(田民)을 그에게 다시 주었으며 충선왕(忠宣王)을 토번(吐蕃)에 귀양보냈다. 그래도 임백안독고사가 참소함을 마지않으므로 화(禍)가 어떤 지경에 이를는지 거의 예측할 수 없었으나 승상(丞相) 배주(拜住)의 구원을 받아서 그 화를 면하였다. 충숙왕(忠肅王) 10년에 복주(伏誅)되었다. 그의 형 임서(任瑞)는 초명(初名)이 우문이(文伊)이니 아우의 연고로써 일찍이 밀직 부사(密直副使)가 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동생이 복주(伏誅)되었음을 듣고 두려워하여 도망하였으므로 이에 그의 집을 적몰(籍沒)하였다.
§ 방신우(方臣祐)
방신우(方臣祐)의 어릴 때 이름은 소공(小公)이요 상주(尙州) 중모인(中牟人)이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궁중(宮中)에서 급사(給事)를 하다가 안평 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元) 나라에 가서 유성 황후(裕聖皇后)를 뵈옵고 이로 인해 그를 머무르게 하고 망고대(忙古台)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원 나라 선종(宣宗)은 장알 승(掌謁丞)에 제수(除授)하고 천부대경(泉府大卿)을 더해 주었으며, 무종(武宗) 때에는 수원 황태후(壽元皇太后)를 섬겼는데 흥성궁(興聖宮) 원사에서 장작원사(將作院使)로 바꾸었다가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승진하였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요양 행성 우승(遼陽行省右丞) 홍중희(洪重喜)가 왕이 법을 준수치 않고 횡포하다는 등의 일들을 중서성(中書省)에 속여 참소하여 언 나라 조정에서 충선왕과 함께 변론(辯論)하도록 청하므로 중서성(中書省)이 이를 상주(上奏)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매우 근심하였다. 방신우(方臣祐)가 수원 황태후(壽元皇太后)께 아뢰기를,
“홍중희(洪重喜)는 고려(高麗)의 포민(逋民)인데 감히 마음대로 거짓으로 속여 종국(宗國)<고려(高麗)>의 전복을 꾀하였으니 그 죄(罪)는 이미 죽여야 하거늘 도리어 왕과 함께 대변(對辯)케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태후(皇太后)가 깨닫고 황제에게 말하니 중서성(中書省)에 칙명(勅命)을 내려서 대변(對辯)치 말게 하고 홍중희에게는 매를 쳐서 멀리 조주(潮州)에 유배(流配)하였다. 원(元) 나라에서 방신우를 보내와서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쓰는 것을 감독케 하였다. 황태후(皇太后)가 금박(金薄) 60여 정(錠)을 보냈으며 방신우는 승려와 속인(俗人) 300인을 모아 필사(筆寫)케 하였다. 개성 판관(開城判官) 이광시(李光時)는 자기 딸을 방신우의 처(妻)로 주었다. 방신우가 장경(藏經)을 신효사(神孝寺)에 옮기고 황태후(皇太后)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해당 기관으로 하여금 죄수(罪囚)를 석방케 하였으나 그 기관은 방신우의 사정(私情)이 끼였음을 알고 놓아주지 않으므로 재삼(再三) 강요(强要)하매 이에 놓아주었다. 처음에 신우(臣祐)가 국경(國境)에 들어오매 군현(郡縣)의 수재(守宰)가 모두 모욕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매를 맞은 자까지 있었다. 그가 여러 도(道)에 강향(降香)할 때에는 제찰(提察)과 수령(守令)들이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막대한 선물을 주었다. 전라 제찰사(全羅提察使) 이중구(李仲丘)는 종이를 선물하니 방신우는 받지 않고 그것을 트집 잡아서 그를 모욕하였다. 왕이 방신우를 중모군(中牟君)으로 봉하였다. 방신우가 또 태정 황후(泰定皇后)를 섬겨 총애(寵愛)를 받았고 태자 첨사(太子詹事)로 제배 하였다가 휘정원사(徽政院使)로 고치고 뒤에 저경사사(儲慶司使)를 더해 주었다. <원(元) 나라> 삭방(朔方)의 심왕(瀋王)인 팔려미사(八驢迷思)가 무리를 거느리고 원(元)에 귀순하니 원(元)이 장차 그들을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살게 하려 하거늘 방신우가 아뢰기를,
“고려(高麗)는 땅이 좁고 산(山)이 많아 농사하고 목축할 곳이 없으니 북방의 풍속으로 사람들이 반드시 즐겁게 살지 못할 것이요, 한갓 동방의 백성들을 놀라게 할 뿐입니다.”
라고 하니 황제가 그렇게 여기고 중지하였다. 또 일찍이 본국(本國)에 성(省)을 세우려고 할 때 방신우가 수원 황후(壽元皇后)께 아뢰어 이 일이 중지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충숙왕(忠肅王)도 역시 그를 후대하여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 봉(封)하고 추성 돈신 양절 공신호(推誠敦信亮節功臣號)를 하사하였다. 그의 아버지 방득세(方得世)는 본래 중모현 리(中牟縣吏)였는데 그의 아들 때문에 가문을 일으켜 관성 현령(管城縣令)이 되었다가 수년(數年) 뒤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제배(除焙)되었으며 매서(妹壻)인 박려(朴侶)는 농부로서 갑자기 승진하여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고 박여의 아들 박지정(朴之貞)도 갑자기 총랑 전서(摠郞典書)에 올랐는데 탐욕스럽고 법을 어기니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방신우가 원(元) 나라의 7명의 황제와 두 명의 태후(太后)를 섬겨 국가 기밀에 참여(參與)하고 이를 맡으매 여러 번 초구(貂)와 주의(珠衣), 금옥 칠보 요대(金玉七寶腰帶)와 강남(江南)의 기름진 토지[田] 4000 무(畝)를 하사받았고, 황금(黃金), 백금(白金), 보초(寶)는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충숙왕(忠肅王) 17년에 퇴직하고 본국에 돌아와서 선흥사(禪興寺)를 화려하게 수축하였다. 충혜왕(忠惠王) 후3년에 원(元)에 소환(召還)되었다가 그 다음 해에 죽었다.
§ 이대순(李大順)
이대순(李大順)은 소태현인(蘇泰縣人)이다.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총애(寵愛)를 얻어 권세를 부리게
되니 충선왕(忠宣王)이 소태(蘇泰)를 태안군(泰安郡)으로 승격시키고 이대순을 태안 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封)하였다. 일찍이 위득유(韋得儒)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그의 처가 영평궁(永平宮)의 노비(奴婢) 문제로 다투었다.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하제(下制)하여 언부(部)로 하여금 이를 결정(決定)케 하였다. 이 때에 전서(典書) 김사원(金士元)과 산랑(散郞) 이광시(李光時)가 이 안건을 맡아 위씨(韋氏)를 돕지 않았다. 이대순이 노하여 팔찰(八) 등으로 시켜 황제의 명이라 칭하고 김사원 등에게 매쳐서 귀양보냈다. 낭장(郞將) 백응구(白應丘)가 왕명을 받아 전라도(全羅道)에 갔는데 이대순이 점유한 인호(人戶)를 빼앗으니 이대순이 또 이삼진(李三眞)으로 하여금 황제의 명령이라 칭하고 이를 국문하여 백응구를 행성(行省)에 가두었으니 그 횡포함이 이와 같았다. 그 아우 이공세(李公世)도 본국(本國)에 벼슬하여 원수(元帥)가 되고 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처음에 충렬왕(忠烈王)이 원(元)에 행차하매 이대순이 황제(皇帝)에게 이공세를 별장(別將)으로 임명하도록 고려왕에게 명령하도록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데는 법제(法制)가 있고 나라에는 임금이 있는데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라고 하고 대관양(大官羊)과 상존주(上尊酒)를 하사하고 이대순(李大順)으로 하여금 스스로 왕께 아뢰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너의 형은 교위(校尉)인데 산원(散員)을 뛰어넘어 별장(別將)을 제수(除授)함은 옛 관례가 아니다.”
하니 이대순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했는데 뒤에 왕이 황제의 말을 전해 듣고 이를 제수(除授)하였다. 이공보(李公甫)도 역시 그의 아우인데 농부로서 갑자기 귀하여져서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고 태안군(泰安君)으로 봉해졌다. 방신우(方臣祐)가 일찍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재추(宰樞)와 함께 민천사(旻天寺)에 모였는데 술이 취하여 이공보와 방신우 매서(妹壻) 박려(朴侶)가 모두 일어나 춤추거늘 방신우가 이공보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위하여 옛날에 하는 놀이를 보여 주겠는가.”
하니 이공보가 곧 장기를 붙들고 밭가는 형상을 하므로 좌중(座中)이 크게 웃었다. 이삼진(李三眞)도 역시 원(元) 나라에서 총애(寵愛)를 얻었으므로 멀리서 평장(平章)을 받고 충선왕(忠宣王)이 회음군(淮陰君)으로 봉하였는데 세도를 믿고 방종하였다. 그가 각 도[諸道]에서 강향(降香)을 하매 수령(守令)이 조금만 잘못하여도 매를 쳤다. 일찍이 숙비(淑妃)를 뵈오니 비(妃)가 성대한 위로연을 베풀어 주고 은병(銀甁) 20구(口)를 하사하여 그 아비의 집을 사게 하였다.
§ 우산절(禹山節)
우산절은 충숙왕 때에 풍산군(豊山君)으로 봉해졌으며 충선왕(忠宣王)이 그 아비 우석(禹碩)을 춘주 부사(春州府使)로 제배하면서 양현고(養賢庫), 자첨사(資瞻司) 및 여러 궁사(宮司)로 하여금 은(銀)을 차등 있게 내게 하여 노자로 주었다. 우산절은 일찍이 김목경(金牧卿)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김목경이 밀성 부사(密城副使)로 있을 때 찰방 별감(察訪別監) 박숙정(朴淑貞)이 김목경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을 탄핵하여 파면하였다. 김목경이 우산절의 권세를 믿고 양부(兩府)에 간청하여 다시 복직하였다.
§ 고용보(高龍普)
고용보는 원(元) 나라에 가서 황제의 총애(寵愛)를 받아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제배(除拜)되었으며 충혜왕(忠惠王)은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였다. 황제의 명령으로 와서 왕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하였다. 한 달 남짓해서 원(元) 나라에서 타적(朶赤), 별실가(別失哥) 등을 교사(郊祀)한 후 사면하라는 조서를 반포하라는 명목으로 보내오니 왕이 병을 칭탁하고 영접하지 않고자 하므로 고용보가 말하기를,
“황제가 항상 왕께서 불경(不敬)하다고 하시는데 만약 영접하러 나가지 아니하시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동성(征東省)에서 조서(詔書)를 듣는데 타적(朶赤) 등이 왕을 발로 차고 묶거늘 왕이 급히 고원사(高院使)를 부르자 고용보는 왕을 꾸짖었다. 타적(朶赤) 등이 왕을 잡아 말에 태워 잡아갔고, 고용보에게 나라 일[國事]를 정리(整理)케 하였다. 고용보가 사람을 보내어 왕을 시종(侍從)하던 군소(群小)인 박양연(朴良衍), 임신(林信), 최안의(崔安義), 김선장(金善莊), 승신(承信), 등 10여 인을 잡아 가두었는데 송명리(宋明理), 조성주(趙成柱), 윤원우(尹元佑), 강찬(姜贊) 등은 평소 고용보와 사이가 좋았으므로 면하였다. 고용보가 행성관(行省官)인 기철(奇轍) 등과 함께 내탕(內帑)을 봉했으며 얼마 후에 원(元) 나라로 갔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 12자(字) 공신호(功臣號)를 하사하였는데 고용보가 황제의 측근(側近)에 있으면서 권세를 마음대로[用事]하니 천하(天下) 사람이 이를 미워하였다. 어사대(御史臺)가 아뢰기를,
“고용보는 고려(高麗)의 매탄장(媒炭場)의 사람인데 황제의 총애(寵愛)를 받아 세도를 믿고 위복(威福)을 만드니 친왕(親王)과 승상(丞相)도 위풍(威風)을 바라보고 좇아가 절하고 있습니다. 재물과 뇌물을 모아 금백(金帛)이 산적(山積)하고 권세가 천하(天下)를 기울이니 아마 한(韓) 나라의 조절(曹節), 후람(侯覽)과 당(唐) 나라의 구사량(仇士良), 양복공(楊復恭)이 오늘에 다시 일어날까 두렵사오니 바라건대 그를 죽여써 천하(天下)의 인심(人心)을 쾌(快)하게 하소서.”
하므로 황제가 금강산(金剛山)에 유배(流配)하였다가 얼마 뒤에 소환(召還)하였고 그 뒤에 다시 환국(還國)하였다. 고용보가 일찍이 무고한 사람을 죽였는데 전법사(典法司)가 이를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고용보(高龍普)는 곧 신예(辛裔)의 매서(妹壻)요 좌랑(佐郞) 최중연(崔仲淵)은 신예의 문생(門生)이고, 정랑(正郞) 강군보(姜君寶)는 신예의 동년우(同年友)인 까닭에 소홀히 하여 놓아주었다. 조일신(趙日新)의 난(亂)에 도망하여 숨어서 죽음을 면하였고 드디어 중이 되어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이 어사 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을 보내어 그를 죽였다. 세간에 전하는 말에는 충혜왕(忠惠王)이 잡힐 때에 고용보가 내응(內應)하였기 때문에 사형(死刑)하였다고 한다.
§ 김현(金玄)
김현(金玄)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침구(侵寇)하자 형부 상서(刑部尙書) 김진(金縉)을 따라 수백 명의 기병(騎兵)를 거느리고 상원군(祥原郡)으로부터 지름길을[閒道]를 따라 좇아가 서경(西京)에서 적을 공격하러 가는 도중 갑자기 적병 300여 인과 마주쳤는데 결사적으로 싸워 100여 명을 죽이니 이 공로가 2 등(等)으로 수록되었다. 환자(宦者) 수십명이 서장(書狀)에 서명(署名)하여 상(賞)을 구하였는데 명부(名簿)에 위조한 것이 많았으니 김현이 사실상 주모(主謀)한 것이다. 왕이 그 간악(姦惡)함을 살펴 그를 매치고자 하였으나 그 때에 환관(宦官)의 세력이 왕성하였므로 서로 힘써 구하여 모면하였다. 얼마 뒤에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남쪽으로 호종(扈從)한 공과 서울을 수복(收復)한 공, 흥왕사(興王寺)의 변란(變亂) 때에 시위(侍衛)한 공(功) 등에서 모두 1 등(等)으로 수록되었다. 김현은 탐오(貪汚)하고 교활하였고 외면으로는 부지런하고 공경함을 꾸며 윗 사람을 잘 받들어 모셨다.
신우(辛禑)가 즉위하자 더욱 총애와 사랑[寵幸]을 받았고 또 명덕 태후(明德太后)의 신임(信任)도 있어서 모든 기무(機務)를 관장하고 궁중(宮中)에서 용사(用事)하였는데 여자의 청을 공공연히 행하였다. 전주(銓注)할 때마다 김현이 문득 우왕(禑王)의 앞에 이르러 관직(官職)을 주고 빼앗기를 기탄 없이 하였다. 일찍이 우왕(禑王)의 곁에 거만하게 앉아서 근신(近臣)이 일을 아뢰면 우왕(禑王)이 아직 말하기도 전에 김현이 먼저 천단하여 결정하였다. 어느 날 우왕(禑王)이 정사(政事)를 보는데 김현이 그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었으므로 우왕이 꾸짖기를,
“네는 이 집 종인데 어찌 불경(不敬)하기 이와 같으냐”
하니 김현이 말이 없었다. 그 후 반야(般若)의 옥사(獄事)가 생기자 대사헌(大司憲) 안종원(安宗源)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김현이 궁중의 일을 총괄하면서 잡인의 출입을 단속하지 못하고 반야(般若)가 궁중(宮中)에 바로 들어가 태후(太后)를 놀라게 하고 보고 듣는 이를 놀래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유사(攸司)에 내리어 국문하고 죄(罪)를 주게 하소서.”하니 이에 김현을 회덕현(懷德縣)에 유배(流配)하였다.
§ 안도적(安都赤)
안도적(安都赤)은 공민왕(恭愍王) 12년에 역적이 행궁(行宮)인 흥왕사(興王寺)를 침범하여 문지기를 베고 바로 침전에 이르러 환자(宦者) 강원길(姜元吉)을 죽였다. 숙위(宿衛)가 모두 달아나 숨었으나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은 왕을 업고 창문으로 빠져 달아났다. 안도적은 용모가 왕과 비슷하므로 몸으로서 왕을 대신코자하여 드디어 침내(寢內)에 누었더니 역적(逆賊)들은 그를 왕인줄 알고 죽였다.
§ 신소봉(申小鳳)
신소봉(申小鳳)은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원(元) 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한 지 무릇 11년인데 왕이 즉위하자 대호군(大護軍)에 제배(除拜)하고 수종(隨從)한 공(功)을 1 등(等)으로 수록하였으며 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가 뒤에 영원 부원군(寧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노국 공주(魯國公主)가 훙(薨)하자 신소봉이 능(陵)을 지켰으며 복상(服喪)을 마치매 그 공로로 상(賞)으로 충근 절의 익위 공신(忠勤節義翊衛功臣) 칭호를 하사받고 밀직사(密直使) 상의 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제배(除拜)되고 백관(百官)에 명하여 영빈관(迎賓館)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날에 송악(松嶽)이 무너지니 그 때의 공논이
“조종(祖宗)의 법은 환자(宦者)가 참관(參官)을 받지 못하는데 이제 옛법을 무너뜨리고 그를 암랑(巖廊 고위중임(高位重任) )에 두었으니 나라의 주산(主山)이 무너짐은 반드시 이로 말미암음이다.”
고 하였다. 첨의 평리(僉議評理)로 전직(轉職)하여 죽으니 관비(官費)로 장사를 차려 주고 특히 충희(忠禧)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 이득분(李得芬)
이득분(李得芬)은 신우(身禑)에게 총애(寵愛)를 받아 지위(地位)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는데 탐욕(貪慾)스러워 뇌물을 받고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였다. 동지밀직(同知密直) 목충(睦忠)과 함께 이인임(李仁任)과 최영(崔瑩)을 참소하여 비방하자 재추(宰樞)와 대성(臺省)이 회의(會議)하고 우왕(禑王)에게 아뢰기를,
“이득분(李得芬)은 일찍이 보원고(寶源庫)를 관리할 때 전세(田稅)를 거두어 자기 집에 들이고 또 양현고(養賢庫)의 밭을 빼앗아 선비를 기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남의 재물을 많이 거두고 토전(土田)을 빼앗았습니다. 또 일찍이 자기 집에 원자(元子)를 맞아 모셔서 사사로이 유모(乳母)를 갈아 사당(私黨)을 맺었으니 이는 신하로서 할 바가 아니니 질서(秩序)를 문란케 한 화(禍)가 이로부터 움트나이다.”
라고 하니 우왕(禑王)이 그렇게 여겨 이득분을 계림(鷄林 경주(慶州) )에 유배(流配)하고 그 집을 적몰(籍沒)하였으며 가자(假子 양자(養子) )인 환자(宦者) 정난봉(鄭鸞鳳) 등 20 인을 쫓아내고 또 목충을 안동(安東)에 유배(流配)하였다. 이에 앞서 목인길(睦仁吉)이 양현고(養賢庫)의 전답으로 연안부(延安府)에 있는 100여 결(結)을 빼앗았는데 목인길(睦仁吉)이 죽자 이득분이 또 이를 빼앗았다. 이에 이르러 성균관(成均館)이 상소(上疏)하여 다시 양현고(養賢庫)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이를 따랐다.
§ 김사행(金師幸)
김사행(金士幸)의 처음 이름은 광대(廣大)이다. 공민왕(恭愍王)의 총애(寵愛)를 받아 여러 차례 옮겨 판내부사(判內府事)가 되었다. 성품(性品)이 아첨을 잘하였는데 왕의 뜻을 맞추어 정릉(正陵) 영전(影殿)의 공사[役]를 크게 일으켜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지였다. 이로 말미암아 재력(財力)이 고갈되고 백성이 마음놓고 살지 못하였으므로 왕이 죽자 선왕(先王 공민왕(恭愍王) )을 미혹케 하여 공역(工役)을 일으켰음을 논죄(論罪)하여 익주 관노(益州官奴)로 삼고 그 집을 적몰(籍沒)하였다. 신우(辛禑)가 즉위하자 그 죄를 사면하고 고신(告身)을 돌려 주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되었는데 왕이 경연(經筵)에 출어(出御)하고자 하니 김사행이 이를 만류하여 말하기를,
“시일(時日)이 많으니 하루 동안 출강(出講)하지 않아도 정사에는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고 또 불교(佛敎)로써 왕을 유도하기를,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혹(或)은 천하(天下)의 주인이 되고 혹은 일국(一國)의 주인이 되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귀천(貴賤)이 같지 않음은 다름이 아니라 전세(前世)에서 선(善)을 닦음에 후박(厚薄)이 있는 까닭입니다.”
라고 하거늘 헌사(憲司)가 아뢰기를, “환관(宦官) 김사행(金師幸)과 김완(金完)은 일찍이 교언(巧言)과 사치로서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 )의 총애(寵愛)를 받아 독(毒)을 백성에게 흘렸으므로 좌우(左右)에 둠이 마땅치 않사오니 바라건대 그들을 쫓아내소서.”하였고 간관(諫官)이 또 상소(上疏)하여 이를 논(論)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았다. 이 후 일은 본조(本朝 이조(李朝) )에 속한다.
§ <혹리(酷吏) 서문>
옛날에는 백성을 다스리는 권한은 맡겼으나 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은 맡기지 않았다. 중세(中世)에 이르러 비로소 법(法)을 전임(專任)케 하니 법령(法令)이 더욱 밝아져서 혹리가 나왔다. 그 해독을 논하여 이를 맹호(猛虎)에 비유(比喩)한 자가 있었으나 어찌 지나친 논평이라 하겠는가? 고려(高麗)는 관후(寬厚)하게 다스렸으므로 형(刑)에 참혹함이 없었으나 그 중엽(中葉)에 와서 변고가 많아진 때로부터 일에 밝은 관리(官吏)를 기용하므로 말미암아 잔혹(殘酷)한 풍조가 비로소 일어났다. 옛 역사[舊史]는 빠져서 갖추어지지 않으므로 이제 두 사람에 대한 자료를 얻어서 혹리전(酷吏傳)을 짓는다.
송길유(宋吉儒)는 성품(性品)이 탐혹하고 아첨을 잘하여 졸병(卒兵)에서 입신(立身)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최항(崔沆)에게 아첨하여 야별초(夜別抄) 지유(指諭)가 되었는데 매양 죄수(罪囚)를 국문하면 반드시 두 손의 엄지손가락[拇指]을 묶어 대들보에 달고 또 두 발의 무지(拇指)를 한데 묶고 큰 돌을 달아매는데 땅에서 한 자 가량 떨어지게 하였다. 그 밑에 숯불을 피워 놓고 두 사람을 좌우(左右)에 서게 하여 등허리를 번갈아 매치게 하니 수인(囚人)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문득 거짓 자복하곤 하였다. 여러 차례 옮겨 장군(將軍)이 되었고 얼마 후에 어사 중승(御史中丞)에 제배(除拜)되였는데 유사(有司)가 가계(家系)가 천(賤)함으로 고신(告身)에 서명(署名)치 않으니 최항이 강제로 핍박하므로 이에 서명(署名)하였으며 대장군(大將軍)을 가(加)하여 경상도 수로방호 별감(慶尙道水路防護別監)을 삼았다.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주현(州縣)을 순시하였는데 백성을 독촉하여 해도(海島)에 들어가 보전하라 하되 영(令)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이를 때려 죽였으며 혹은 긴 노끈으로 사람의 목을 엮고 별초(別抄) 등을 시켜 끌어서 물 속에 던졌다가 거의 죽게 되면 곧 끌어내고 조금 깨어나면 다시 이같이 하였다. 또 백성들이 재물을 아껴 고향(故鄕) 떠나기를 어려워할까 염려하여[重遷] 그 집과 전곡(錢穀)을 불태우니 죽는 자가 십중팔구였으며 또 남의 토전(土田)과 재물을 빼앗아 덜고 깎기를 한없이 하였다. 안찰사(按察使) 송언상(宋彦庠)이 탄핵하여 도병마사(都兵馬使)에게 보고(報告)하니 그 당(黨)인 김준(金俊) 등이 사사로이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과 대제(待制) 유능(柳能)에게 이르기를,
“송길유는 나와 친한 사이인데 듣건대 안찰(按察)의 탄핵하는 글이 이미 도당(都堂)에 이르렀다하니 갑자기 발표되면 형세가 구원키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장차 틈을 타서 영공(令公)에게 아뢰면 아마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원컨대 이를 도모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영공(令公)은 최의(崔)을 가리킨 것이다. 유경 등이 김준의 형제(兄弟)가 최의와 친하므로 부득이 슬그머니 당리(堂吏)에게 말하여서 그 일을 왕에게 보고하지 못하게 하였다. 최의의 장인인 거성(巨成) 원발(元拔)이 이를 듣고 최의에게 고하니 최의가 노하여 송길유를 추자도(楸子島)에 유배(流配)하고 유경, 유능, 김준 등을 꾸짖기를,
“내가 너희들을 복심(腹心)으로 삼았는데 어찌 천단하기를 이와 같이 하느냐.”
하니 모두 엎드려 대죄(待罪)하였다. 김준이 최의를 죽임에 미쳐 송길유가 송언상을 김준에게 고소(告訴)하여 살해하려 하였으나 왕이 송언상은 일찍이 공(功)이 있었으므로 그를 용서하도록 명하였다. 송길유는 벼슬이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으나 갑자기 발에 창(瘡)이 나서 <상처가> 헐고 썩어서 죽었다.
§ 심우경(沈于慶)
심우경(沈于慶)은 의령현(宜寧縣) 사람으로 성품(性品)이 매우 각박하였으며 신우(辛禑) 때에 계림 판관(鷄林判官)이 되었다. 진주인(晋州人) 중랑장(中郞將) 정담(鄭覃)이 자식이 없으므로 양주 목사(養州牧使) 이인민(李仁敏)의 아이를 양자(養子)로 삼았는데 나이 60세에 우물에 떨어져 죽으매 이인민이 정담의 친척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드디어 계림(鷄林)에 소송(訴訟)하였다. 심우경이 정담의 조카 정여해(鄭汝諧)와 정희범(鄭希範)을 얽어 이를 국문하였는데 발을 갈라 기름을 붓고 단근질[烙]을 가하매 극히 참혹하였다. 부윤(府尹) 윤승순(尹承順)이 심우경에게 이르기를,
“이들을 고문한 지 1년이 넘었으나 오히려 자복하지 않으니 마땅히 다시 국문할 것이라.”
하니 정여해와 정희범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제 죽었구나.”
하고 드디어 도망가므로 옥리(獄吏)가 이를 잡았는데 심우경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허물이 없으면 어찌하여 도망하느냐 너희들이 반드시 이 아이를 죽였구나.”
하고 다시 국문하기를 더욱 참혹케 하니 정여해와 정희범이 거짓으로 자복하기를,
“종자(從姉) 강을공(姜乙恭)의 처(妻)가 진실로 이를 안다.”
하므로 심우경이 강을공의 처(妻)를 잡아 심문하는데 혹독히 하여 혹은 돌을 가죽 주머니에 담아 입과 귀를 함부로 치니 이빨이 모두 부러지거늘 심우경이 윤승순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제 실정을 알았다.”
하고 강을공(姜乙恭)의 처(妻)를 죽였다. 또 밀직(密直) 박천상(朴天常)이 일찍이 계림(鷄林)을 지나가는데 윤승순이 술을 베풀어 이를 위로하자 진사(進士) 이계분(李桂芬) 등 두 사람이 있어 빈객(賓客)이 둘러앉았음을 보고 기롱하기를,
“향도연(鄕徒宴)이로군.”
하였더니 윤승순(尹承順)의 문사(門士)가 이 말을 고하니 윤승순(尹承順)이 노하여 이계분 등을 가두었는데 체임(遞任)될 때 그 일을 심우경에게 위촉했더니 심우경이 발을 찢고 단근질하는지라. 두 사람이 얼마 있지 아니하여 죽었다. 윤승순(尹承順)이 이를 듣고 참혹히 여겨 그의 문사(門士)를 모두 쫓아버렸다. 우리 나라에는 계(契)를 모아서 분향(焚香)하는 풍속이 있는데 그 구성원을 향도(香徒)라 불렀으며 서로 번갈아 연회(宴會)를 베풀고 남녀(男女) 소장(少長)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차례대로 함께 술을 마심을 향도연(鄕徒宴)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