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나이 차 극복한 , 과도기의 이중혼
1911년 10월10일 ‘쌍십절’에 신해혁명이 성공해 1912년 1월1일 새해 첫날 중화민국이 탄생한다.
쑨원은 임시총통에 취임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특히 베이징을 장악하고 있던 실권자는 위안스카이(원세개)였다.
서구 열강들도 원세개에 힘을 실어줬다.
쑨원은 하는 수 없이 위안스카이가 청 정부를 물러나게 하고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줄 수 있다고 말한다.
쑨원은 위안스카이가 ‘마지막 황제’ 푸이를 폐위시킨 다음날(1912년 2월13일) 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다.
총통으로 취임한 지 43일 만이다.
쑨원에게서 총통직을 넘겨받은 위안스카이는 독재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공화제를 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새로운 황제가 되려한 것이다.
이에 저항하는 국민당 인사들을 과감하게 제거했다.
쑨원은 자신도 체포와 처형의 대상이 되자 1913년 일본으로 도망한다.
혁명은 실패하고 일본으로 도망와 절망적 상황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쑨원에게 경령이 다가왔다.
언니 애령 대신 쑨원의 비서를 자임한 경령은 쑨원의 혁명을 누구보다 지지하고 신봉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만나 사랑이 싹텄다. 1915년 10월25일 둘은 일본에서 결혼을 했다.
쑨원이 49세, 쑹칭링이 23세였다. 나이 차가 26년이다 .
당시 중국에선(조선도 마찬가지) 이런 식의 결혼이 유행했다.
남자들은 대개 집에서 부모가 정해주는 배필과 전통방식으로 일찍 결혼을 했다.
그런 뒤 학교를 다니고 유학을 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사람과 연애를 했다.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룬 남자가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을 선택하는 이중혼이다.
아무리 자유연애가 유행이고 미국문명의 혜택을 받은 쑹자수도 딸의 이런 결혼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상하이 언론이 두 사람의 관계를 대단한 스캔들로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데다,
쑨원은 엄연히 본처가 있는 이중혼이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쑨원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칭링을 중국으로 불러들여 집에 가둔다.
하지만 칭링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도망친다.
뒤늦게 결혼식장에 나타난 아버지가 “이 결혼식은 무효야”라고 외치지만 소용없다.
그것으로 부녀 사이도, 쑹자수와 쑨원이 나눈 오랜 우정과 동지애도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송씨 집안이 ‘황조’가 되는 결정적 계기로,
돈과 나라, 권력이 세자매와 연결되면서 이들은 장차 전 중국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장제스와 쑨원
셋째 딸 송미령과 결혼한 장개석도 이중혼이다.
장제스는 본처와 이혼한 뒤 기생 출신의 새 아내를 맞은 상태였다.
게다가 고향에도 기생 출신의 작은집도 있었다.
하지만 야심을 가진 메이링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11년 연상이며
3번의 결혼 경력을 가진 장제스와 결혼 한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쑨원의 사진 앞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1927년 12월1일이다.
결혼하기 전, 메이링은 장제스에게 세 가지 다짐을 받는다.
첫째, 메이링만을 사랑하겠다.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하고 작은집을 두고 있고,
기생집 출입이 잦은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장제스다.
둘째, 기생 출신인 지금의 부인과 이혼하겠다.
셋째, 기독교인이 되겠다, 장제스는 메이링을 따라 기독교도가 된다.
그뒤 10년 간 메이링은 장제스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그의 외교 고문이자 개인비서로 활약했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시작된 뒤에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국제 사회에 중국의 입장을 알렸고,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장제스가 남부의 군벌 장쉐량(張學良)에 의해 감금되는 이른바 시안(西安)사변이 일어나자,
메이링은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담판을 벌여 남편을 구출해내는 배짱을 과시하기도 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