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李集)-送李生員愚覲母羽溪(송이생원우근모우계)(어머니 뵈러 우계에 가는 생원 이우를 전송하다)(어머니 뵈러 가는 벗을 보내며)
流離數歲足憂傷(유리수세족우상) 여러 해 떠돌이 생활만으로도 서글픈데
況復連年見二喪(황부연년견이상) 설상가상 잇따라 부모상까지 당했다오
堪羡君今兄弟具(감선군금형제구) 너무나 부러운 건 그대가 지금 형제들과 함께
春風綵服覲高堂(춘풍채복근고당) 춘풍에 색동옷 입고 어머니 뵙는 거라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遁村雜詠둔촌잡영)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김성애님은 “고려말 공민왕 때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둔촌 遁村 이집의 작품이다. 둔촌은 1368년 42세 때 신돈을 논핵한 일로 화를 당하게 되자 부친과 함께 경상도 영천으로 피신하여 최원도의 집에 얹혀 살았는데, 이 시기에 잇따라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후 둔촌은 1371년 신돈이 축출된 뒤에야 돌아와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시를 지으며 여생을 마쳤다. 이 시는 신돈을 피해 도망다니던 때에 지은 작품으로 보인다. 시의 첫 구에서는 화를 피해 떠도는 생활의 서글픔을 서술하였고, 둘째 구에서는 잇따라 부모상을 당하였다는 말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읊었다. 객지 생활에 친상을 연달아 치르게 된 둔촌으로서는 어머니를 문안하러 떠나는 생원 이우가 한없이 부러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우는 형제들도 모두 무고하여 이제 돌아가면 형제들과 함께 노모를 뵙고 마음껏 효도를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둔촌 자신은 효도하고자 하여도 이젠 더 이상 부모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상황이므로 풍수지탄을 금할 수 없는 처참한 심정인 것이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와 이우의 상황이 전후로 대비되면서 시인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구절의 춘풍이나 채복은 효도를 주제로 하는 시에 자주 언급되는 단어다. 춘풍은 부모의 큰 은혜를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날에 비기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채복은 중국 천추전국시대 효자였던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이 넘어서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갖고 놀며 일부러 넘어지기도 하는 등 어린아이처럼 굴었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이 들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은 언제나 가슴을 저민다. 그중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죽을 때까지 품고 살아야 하므로 종신지통終身之痛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를 뵈러 가는 이우를 부러워하며 전송하는 둔촌의 가슴에도 그런 아픈 그리움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가 옆에 있을 때는 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날마나 숨쉬는 공기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 그러다 그 존재를 잃은 뒤에야 비로소 그 존재의 무게를 깨닫는다. 부모는 바로 내 실존의 근원이 되기에 평생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한 살씩 나이를 먹어 가며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 안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모님에 대하여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 많이 알고 이해하면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부모님이 아직 내 곁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이집[李集, 1327년 ~ 1387년, 자 호연(浩然), 호 둔촌(遁村), 본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고려후기 『둔촌유고』를 저술한 학자. 문인. 광주 향리 이당(李唐)의 아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堪(감) : 견딜 감, 1.견디다, 2.참다, 참아내다, 3.맡다, 감당하다(堪當--: 능히 견디어 내다)
*羡(선) : 고을 이름 이, 부러워할 선
*綵(채) : 비단 채, 1.비단(緋緞), 2.채색(彩色), 3.무늬
*覲(근) : 뵐 근, 1.뵈다, 알현하다(謁見--), 2.만나다, 3.보다
*高堂(고당) : 1.높은 집, 2.부모, 3.양당(兩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