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로 여자에게 종교적 법통을 넘긴 증산 강일순,
오랜만에 한국 산서회 박기성씨를 비롯한 그 일행들과 증산 강일순의 행적을 찾아 모악산 자락을 답사했다.
1908년 1월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있는 차경석車京石의 집에서 30대 후반의 남자였던 증산甑山 강일순과 고판례라는 여자가 ‘천지굿’이라는 큰 굿판을 열었다. 차경석은 동학농민혁명의 십대 접주중의 한사람이었고 평민두령으로 이름을 떨쳤던 차치구車致九의 아들이며 강일순의 후처인 고판례高判禮와 이종간이자 강일순의 제자였다. 강일순은 그 굿을 인류가 생긴 이래 그때까지 온갖 사회적 질곡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던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해방을 상징하며, 후천이 개벽開闢이 되는 가히 혁명적인 의식의 굿이라 명명하였다. 그는 그 굿을 통하여 그 당시 사회의 밑바닥 민중이었으며 천대받은 천민여자였고 보쌈을 해서 업어가도 관계치 않을 무당이자 과부에게 인류역사상 종교지도자의 법통을 넘기고자한 것이다. 강일순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방바닥에 길게 누운 채 하루 전에 혼인을 한 그의 부인 고판례에게 자신의 배에 올라타 칼을 휘두르며 “천지대권을 내게 내 놓으라”협박하게 했다. 강일순은 고판례에게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예 모두 드리겠습니다”맹세하였다. 그는 그 굿을 천지굿이라 하였고, 천지개벽 즉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뒤집어지는 큰굿이라 하였으며 삼계[색계色界, 욕계欲界, 무색계無色界] 대권이 이곳에서 저 곳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대 전환의 굿이라 하였다.
그는 이어 추종자들에게 마당에 멍석을 깔게 하고 온갖 유학, 불교, 기독교, 도교의 책과 술서들 그리고 기타 모든 채권 계산서들을 찢어 발겨 놓게 한 다음 고판례로 하여금 이것들을 밟고 칼춤을 추라고 말하였다. 여성을 억눌러온 온갖 형태의 왜곡된 선천사상과 선천의 풍습 및 제도를 담은 이 책들을 밟고 뛰면서 춤을 추는 사이 그는 둘러멘 장구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이것이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才人이요 너는 천하 일등 무당巫堂이니 앞으로는 네가 천지개벽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며 음개벽 즉 ‘여성주체의 후천개벽’을 엄숙히 선언했고 고판례는 그날 모든 여성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수부首婦’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게 된다.
모악산 대원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증산 강일순이 1900년에서 1909년까지 세상의 모든 사람의 병을 다 고치겠다며 광제국을 열고 거처했던 구릿골에서 금산사에 이르는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증산을 믿었던 사람들의 성지였다. 이곳 용화동과 청도리 일대에만 들어오면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향, 제임스 힐턴이 말한 샹그리라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던 이곳이 바로 청도리다. 그 한가운데에 용화동이 있다.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비산비야 엄택곡부非山非野 奄宅曲阜의 지형이다. 이곳에는 보천교 총무원장을 지내며 증산의 말과 행적을 기록한 <대순전경>을 완성한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세운 증산교 본부가 있다.
그 아래로 내려가 금평저수지를 따라 들어간 금산면 청도리 구릿골에는 증산甑山 강일순이 머물렀던 김준상의 집이 있다.
천대받는 민중이 한울님이라고 설파한 증산은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그것도 그 시절엔 누가 업어가도 개의치 않을 과부였고 무당이었던 여자에게 법통을 넘긴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여인(고판례)이 굶으면 온 천하 사람이 굶을 것이며, 이 여인이 먹으면 천하 사람이 다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 천하 사람이 눈물을 흘릴 것이요, 한숨을 쉬면 천하 사람이 한숨을 쉴 것이다. 이 여인이 기뻐하면 천하 사람이 기뻐할 것이요, 이 여인이 행복하면 천하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여인의 눈이 빛나면 천하 사람의 눈이 빛날 것이다. 이 여인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워하면 모든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워할 것이며, 이 여인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온 세상을 따뜻하게 할 것이다.
강일순의 말이다. 강일순이 고판례를 예찬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를 예찬하는 말이기도 했고, 남녀평등시대의 미래를 열어 보인 일종의 예언이기도 하였다. 그가 예찬했던 고판례는 차경석의 이종 누이였는데, 증산의 제자인 차경석은 증산 사후에 보천교를 세워 자칭 차천자車天子가 된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었고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던 뿌리 뽑힌 민중들이 증산교로, 보천교로, 원불교로 귀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악산 자락에서만 증산교 교파가 50여 개를 헤아릴 정도로 우후죽순 솟아나게 한 주인공 강일순은 죽기 전에 세상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절망을 자신이 다 짊어지고 가노라고 하였다. 그는 한 달여를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고 가끔 소주 한두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온갖 병을 다 앓으면서 피골이 상접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채 그렇게 갔다. 그의 관에는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느니라”라는 말만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조동일은 <한국문학통사>에서 강일순의 후천개벽과 천지공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강일순은 후천개벽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한다면서, 우선 상극, 억압, 원한을 특징으로 하는 선천시대의 폐단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나라는 충忠 때문에, 집은 효孝 때문에, 몸은 열熱 때문에 망했으니, 충, 효, 열의 헛된 구속에 미련을 두지 말고, ‘망亡하는 세간은 아낌없이 버리고, 새 배포를 꾸미라’고 했다. 그 동안 귀신이나 하늘에까지 쌓인 원한을 두루 풀고, 다가오는 시대인 후천에는 천대받고 억눌린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기를 펴고 살도록 하는 것이 자기가 이루어야 할 최상의 과업이라고 했다.“
강일순은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유독 해원解寃을 강조했는데, 해원은 개인적인 원한의 청산으로 달성되지 않고, 천지운행의 도수부터 고쳐야 철저하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런 해원을 통하여 ‘내세나 피안이 아닌 현세의 삶에서 화해와 조화로 가득 찬 선경을 만들어야 한다.‘ 고 강조한 것이다.
구릿골에 증산 강일순의 외손자가 세운 청도대향원淸道大享院이 있고, 그 건너편 산이 제비산帝妃山이다. 조선 중기의 혁명가인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천일기도를 드리고 제천문을 썼다는 제비산을 돌아가면 나오는 오리알 터에 증산의 외동딸 강순임이 세운 증산 법종교法宗敎 본부가 있으며, 강일순과 그의 아내가 이곳 시멘트 무덤 속에 안치되어 있다. 강일순의 추종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법정 싸움까지 벌였던 증산의 유해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 팔 하나가 없어진 채로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강일순이 천지굿을 벌였던 차경석은 훗날 보천교를 창시했고, 조선총독부 집계로 170만명, 보천교 집계로, 6백에서 8백만명을 헤아렸다. 건물이 36동이 있었다는데, 36년에 차경석이 죽자,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하고 건물들을 불하했고 십일전을 옮겨가 지은 것이 서울의 조계사 대웅전이다.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증산교 본부에는 강일순과 고판례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
역사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2023년 1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