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예술가藝術家 <예술작품藝術作品 인생을 만듭시다>
2024.10.21.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에페2,1-10 루카12,13-21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당신앞에 나아가라.”(시편100,2)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교황님 강론 내용의 소제목이 마음에 와닿아 나눕니다.
“섬김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명의 길이다.”
(Service is Christian way of life)
“스포츠는 생명의 찬가다”
(Sports are the hymn to life)
얼마나 적확하고 멋진 표현인지요!
요즘의 우리나라 가을은 참 아름답습니다. 곳곳이 모두가 아름답기에 아예 요즘은 사진찍기를 접었습니다. 어제도 전형적인 아름다운 가을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도 유난히 밝고 맑습니다. 엊그제 자캐오의 집, 피정집 3층 제의방에서 바라보는 불암산은 참 장관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9.>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하는 이 시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때마다 한눈 가득, 가슴 가득 안겨 오는 산앞에 서도 주님앞에 서듯 행복합니다. 어제 찾아온 "이 희망에 산다"라는 시입니다.
“가을 단풍의 장엄함
끝이 아니다
겨울후
생명의 봄이듯
죽음후
새생명의 부활이다
이 희망에 산다”<2024.10.20.>
바로 하느님 희망에 산다는 고백입니다. 겨울이, 죽음이 끝이 아니요 봄이, 새생명의 부활이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희망이라는 것이며 이런 깨달음 역시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탐욕만 있었지 이런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희망은, 사랑은 전무했습니다. 탐욕의 어리석은 부자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탐욕에 눈멀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참으로 지당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모든 불행과 재앙의 진원지가 무지의 탐욕입니다. 돈이 하느님이 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냐? 하느님이냐?”는 참 힘든 선택입니다. 돈이 현실이라면 하느님은 이상입니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면 땅의 돈같습니다. 이래서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란 고백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입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제 지론입니다. 또 하나 자주 드는 극단적 예도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느님 믿음이야말로 탐욕에 대한 근본적 대책입니다. 인간 누구나의 내적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온갖 두려움속에 포위되어 불안중에 살아가는 참 허약한 사람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수도원 십자로 예수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는 여전히 "지혜의 빛"을 발하며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바로 이런 근원적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소유욕에 탐욕입니다. 바로 탐욕의 뿌리에는 이렇듯 두려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두렵기에 돈을 모으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바로 어리석은 부자가 택한 길이요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거대한 착각입니다.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재물이, 돈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무리 모으고 쌓아도 기쁨은, 평화는,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모으고 쌓아도 두려움과 불안은 여전할 것입니다. 재물이 아닌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의 선물이 희망, 기쁨, 평화, 행복임을 어리석은 부자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지녔어도 그 마음에 희망이, 기쁨이,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부자의 독백과 하느님의 응대가 실감나게 표현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아무리 부자도 세끼면 족하고 화장하면 한줌의 재만 남고 죽어도 가지고 갈 것은 빈손일 뿐입니다. 땅에 싸놓은 보물은 전혀 쓸모없을 뿐, 참으로 이때 빛을 발하는 꾸준한 선행과 자선으로 하늘에 쌓은 보물들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Ama et fac quod vis)”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바로 하늘에 보물 쌓은 첩경의 길을 제시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참 어리석은 사람의 실상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무지의 탐욕을 일깨우는 회개를 촉구하는 예화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어 땅에 보물을 쌓다보니 온통 관계가 차단되어 스스로 자초한, 고립단절된 자기감옥에 갇힌, 닫힌 수인이 된 부자입니다. 도대체 좌우사방 문들은 없고 온통 벽뿐이니, 도대체 빛이, 희망의 빛, 기쁨의 빛, 평화의 빛, 행복의 빛이 전무한 어둠뿐이니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복음의 부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답을 줍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기감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합니다.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 육과 감각이 원하는 바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 은총의 성령에 따라 자유롭게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바오로가 제시하는 이런 차원을 까맣게 몰랐지만 우리는 이렇게 알게 됐으니 우리는 행운아들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치명적 과오는 주님 없이 혼자 자기인생작품을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예술가들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온갖 선행과 자선의 노력으로 협조해드리며 각자 또 더불어 주님과 함께 완성해가야할 예술작품인생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각자 예술작품 완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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