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불구경을 한 뒤로도 ....
내가 불구경을 처음했던 기억으로는 1950년대 초 대전에서 사시는 할아버지가 시골로 오시던 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때 동네에서 불이 났다. 흰 두루마기와 도포를 입고 검은 말총갓(탕건)*을 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서, 이웃집 두 채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은 네댓 살 촌아이의 눈에는 실로 장관이었다. 윗집(조병래 씨) 아랫집(조중래 씨) 두 채의 초가지붕에서 검붉은 화마(火魔)가 넘실거리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온통 가렸으며, 동네사람들이 아우성 치는 고함소리, 멍석을 지붕 위로 던지고 그 위에 바께스(양동이가 표준어)로 물을 퍼부으며, 쇠스랑으로 지붕의 이엉*을 마구 찍어 내리던 사내들의 숨가쁜 몸놀림, 물동이로 물을 이어 나르던 아주머니들, 발을 동동 구르며 살림채가 탄다며 울부짖던 아낙네의 울음소리, 왕대나무 울타리가 불에 타면서 탕탕 폭음을 냈다. 시끄러운 소리 매캐한 불냄새 그 모든 것이 마구 뒤섞여서 한데 어울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화기를 피해 멀리 떨어져서 할아버지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어도 어린아이의 새가슴은 벌렁벌렁 떨렸다.
할아버지가 대전에서 오시던 날 바로 그 즉시에 왜 불이 났는지 그 이유를 먼 훗날에서야 어머니한테서 들었다.
1893년생인 할아버지가 환갑(還甲)을 맞이해서 대전에서 시골로 올라오시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뿌래 화망(花望)마을* 입구로 들어섰단다. 조병래 씨 부인이 안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어수선거리는 소리에 놀라서 바깥으로 나와 이들 일행을 바라보면서 아궁이에서 불을 때던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단다. 아궁이의 불길이 나뭇단에 옮겨붙었고, 또 불길은 순식간에 왕대나무 울타리 아래에 있는 아랫집(조중래 씨)의 초가지붕으로도 불똥이 튀어서 졸지에 두 집에 불이 크게 번졌단다.
또 다른 이야기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1950년대 후반). 내 시골집 바로 야랫집(아랫집의 사투리), 조상래 씨네 돼지우리 초가지붕에서 발생한 불은 이내 본채로 옮겨붙었다.
시골 동네에서 불이 나면 누구나 하던 일을 팽개치고는 불을 잡을 수 있는 연장 즉 물동이 양동이 쇠스랑 등을 손에 들고 화재 현장으로 내닫는 동네인심이었다. 순식간에 많은 사내들이 몰려와 물을 끼얹으며 고함치는 소리, 살림채를 꺼내야 한다며 불길에 뛰어드는 주인댁 아낙을 붙잡던 사람들의 모습 등 화재진압 현장의 광경은 소년, 시골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전울이었다.
1960년 이른 봄.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에 전학 간 대전 시내 은행동에서도 불이 자주 났다.
고뿌래(화망마을)에서 살던 어머니가 시아버지의 생신을 맞이해서 대전으로 내려오셨던 것으로 기억되는 날의 저녘 무렵이었다. 대전 중교다리 건너편 동쪽의 편의점 포목집, 천막 포장집의 상가가 밀집한 원동시장에서 발생한 불은 또 하나의 장관이었다.
연이어 지은 2~3층 상가의 유리가 지글지글 타 녹아내리며, 더욱이 검은 기왓장도 적벽돌도 시뻘겋게 이글이글 타오르며, 불똥이 탁탁 튀면서 하늘로 튕겨오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수많은 구경꾼이 발 디딜 틈새도 없이 몰려들었다. 방화복을 머리까지 뒤집어 쓴 소방관들은 호르라기를 불며, 화재진압에 거리적거리며 우왕좌왕하는 구경꾼을 밀어내기에 안간힘을 썼다. 멋진 사각형의 빨간색 소방차들은 사이렌을 기세 좋게 울리고, 비좁은 시장 통로로 연속으로 진입진퇴하면서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화원(火源)을 겨냥하여 마구 쏘아댔다.
하늘마저 태우려는 불기둥을 향해 포물선을 그으며 내뿜던 시원스러운 물줄기는 또하나의 감동이었다.
아! 그렇게 밤새토록 장관을 이루었던 불길이 사그러진 뒤 뒷날 이른 새벽에 가 보니 시장 주변이 몽딴 불 탄 목재로 나뒹굴었다. 뼈대만 남은 건물 골격의 을씨련한 검으죽죽한 잔재이며, 산더미같이 쌓여져 내버린 검게 탄 옷가지들이 물에 훔뻑 적셔진 채 마구 흩어져 있었다. 불내(불 탄 냄새)는 주변을 온통 매캐하게 했다.
그 난리 중에서도 잡도둑이 날뛰며, 타다 남을 물건을 훔쳐갔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1960년대 초 내 중학교시절이었다.
대전역의 객차 보관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는 또하나의 장관일 수도 있었으나 일반인의 접근통제로 역 구내로 출입하지 못했다. 시꺼먼 연기가 유류 기름통을 태우는지 동편의 하늘을 온통 시꺼멓게 뒤덮었다.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도라무통(드럼통이 표준어)이 탕탕 소리를 내며 하늘로 치켜올라 불길을 잡기 어려웠다는 뒷소문만 무성하였다.
불구경은 나보다도 아버지가 더 극성이었다고 여긴다.
모신문의 대전지사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몇 명의 기자들의 기사거리로 챙겨주어야 할 의무가 아닌... 희한한 불구경 그 자체였다고 생각된다.
1982년 봄. 아버지는 폐암으로 서울대학교병원 내과병동에서 입원하셨다. 아버지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어 드리려고 나는 누구한테선가 들었던 아버지의 열댓살 적의 기억을 회상시켜 드렸다.
충남 보령군 웅천면 구룡리 화망마을* 입구에는 '장승배기'*이란 지명이 있고, 그 부근에는 몇 아름드리의 암수 고목(古木)이 있었다고 한다. 개구쟁이 청소년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중 한 그루의 거목 구멍 속에 지푸라기를 쑤셔넣어서 불을 질렀다. 고목의 썩은 구멍 속으로 번진 불길을 잡지 못하여 사흘간이나 불탔으며, 화가 난 동네사람들은 홀로 남은 나무마저 베어버렸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회상시켜 드렸다. 중환자인 아버지 입가가 얼핏 실룩거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왜 산골마을 머스마는 당산나무에 불을 질렀을까? 그것은 아버지 혼자만의 비밀이었으며, 이제는 영원히 밝혀질 수도 없는, 잊혀진 옛이야기였다. 그런 청소년기를 겪었기에 아버지는 장년시절에도 화재 현장으로 가셔서 불구경을 유난히 즐겨하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
대전시 재래시장이 있는 원동, 은행동 일대에서는 걸핏하면 불이 자주 났다. 몇 개월이 지나면 불 탄 자리에는 그럴듯한 새 건물이 반듯하게 지어지는 현상이 이어졌다. 화재보험금을 노리고 일부러 불을 질렀을까 하는 의구심은 아직껏 지워지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아! 불길은 가슴을 떨리게 하는 그 무엇이 숨겨져 있다.
1999. 7. 글 씀.
* 말총갓 :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로 만든 갓
* 이엉 : 초가집의 지붕이나 담을 이기 위하여 짚이나 새 따위로 엮은 물건
* 장승(長丞) : 통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목상이나 석상을 가리키는 신목(神木)
장승배기 : 장승이 서 있는 곳(언덕)
* 고뿌래 : 충남 보령군 웅천면 구룡리 화망(花望). 고뿌래(곶바래)는 꽃을 바라본다는 옛말
////////////////////////////////
짚으로 이엉을 엮는 노인....
초가지붕 꼭대기에 이엉을 얹는 작업
오래 전에 프린트한 글이 남아 있기에 다시 자판기를 눌러 글 썼더니만 40분이나 걸렸다.
글 다듬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2023. 9. 4. 월요일.
하늘이 맑다.
마음은 또 서해안 산골마을로 내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