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우는 사람 (외 2편) 장석주 어딘지 모를 곳에서 겨울엔 눈 많은 파주로 넘어와서 꿈속의 꿈에서 홀로 울다가 눈사람 몇 개를 만들다 떠나겠지. 지난여름 장마에 맹꽁이가 울 때 시장통에서 사 온 편육을 먹고 고요한 음악에 귀를 쫑긋 세우면 고양이들은 구석에 몸을 숨기고 비탄과 유머도 모르는 채 졸고 있겠지. 피로가 몰려오는 저녁 사랑은 우리의 쓸쓸한 관습, 우리는 등을 켠 거실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눈 키스를 하다가 잠이 들겠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 우리는 파주에 산 적이 없는 이들에게 추억을 리본처럼 매달아주는 저녁들, 식탁에는 귀신들도 와서 밥을 먹겠지. 한밤중 늑골 아래서 누군가 말을 거는데 그건 귀신의 말, 알 수 없는 외계인의 말, 겨울마다 눈이 참 많이도 내렸지. 파주에서 인사도 잘하고 잘 웃는 당신, 사랑이 늘 크고 단단할 필요는 없었지. 우리는 작은 사랑을 하며 눈사람을 몇 개나 세우고 고양이를 보살폈지. 제발, 제발,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줘. 파주엔 눈이 많이 내렸지. 눈 쌓인 그곳에서 우리가 죽고 나면 눈썹을 가늘게 그린 딸들이 와 꿈속에서 꿈을 꾸듯이 살겠지. 우리의 기일엔 눈썹 검은 세월이란 하객들이 모였다 흩어지겠지. 술래잡기 뒤꼍 석류가 알알이 무르익고 부엌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남자가 문가에서 염소를 맞는다. 염소가 남자를 찾은 건 참 이상한 일, 우연은 꿀벌인 듯 붕붕거리고 남자는 염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염소들이 몰고 온 가을이 깊어진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귀가가늦은 날, 어린 누이가 술래잡기를 하다가 잠들더라도 우리의 배고픔은 슬픔이 되지 않는다. 염소는 염소의 말을 하고 파초는 파초의 말을 하는 가을밤의 초입에서 별들을 헤아리며 생각한다. 나는 커서 무엇이 되나? 하늘에서 별들이 후두두 떨어지고 눈과 얼음의 계절이 성큼 다가온다. 여름의 끝 2 공중에 태양의 깃발이 나부낀다. 아버지의 이름은 명예로 빛난다. 우리의 청춘은 영화로웠다고 옥상 빨랫줄에서 빨래들이 마른다. 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어느 해 헬싱키행 기내에서 먹은 음식 냄새가 나는 새 계절엔 멜랑콜리가 기습한다. 나는 긴 머리칼을 자르고 돌아온다. 여름이 가고 새 여름은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내 안의 한 광인이 몸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을 칠 때. 잡범들 사이 잠이 든 감옥에서 왜 내가 나오지 않는 꿈을 자주 꾸었던 걸까. 이번 생에서는 무지를 더 키우고자 한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등에 칼을 꽂는 행성에서 무명 여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여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시집 『꿈속에서 우는 사람』 2024.3 --------------------- 장석주 / 1955년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그리운 나라』 『어둠에 바친다』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붉은 호랑이』 『절벽』 『몽해항로』 『오랫동안』 『일요일과 나쁜 날씨』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