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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양이 길을 잃어버리는 이유들
흔히 양은 똘똘 뭉치는 힘이 아주 강해서 그냥 두면 한 여름에도 너무 붙어있어 털끼리 엉겨 붙어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개들이 양 사이를 갈라놓아서 귀한 털이 엉겨 붙지 않게 하기도 하고, 피부에 병이 생기지 않게 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염소는 늘 혼자 돌아다니며 뿔을 들이대고 싸우기를 좋아한답니다. 양과 염소는 같은 종족이지만 그렇게 다르답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를 구별해서 성경에서는 많이 쓰이고 있는가봅니다. 똘똘 뭉쳐 있는 백 마리의 양 가운데 한 마리가 무리를 탈출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양을 찾아 나섭니다.
경영학적으로 보면 이 주인은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보면 이런 행동은 아주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칫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모두 잃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정말 무모한 것입니다. 손실이 기대하는 이익을 훨씬 능가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산성의 문제로 계산하더라도 1%의 생산효과이며, 투자 차원에서 보더라도 투자 수익률도 1%에 불과합니다. 승률로 계산해도 99대 1이라는 승률을 가지고 전쟁에 나가는 장수와 같아서 전혀 승산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길을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것을 택하신 것은 이익을 따지는 경영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랑경영에 관한 문제로 생산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투자수익에 관한 문제가 아니며, 기회비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양과 주인을 많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이 무리를 떠나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답니다. 어떤 경우가 길을 잃은 양인가 하는 것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고 있답니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다.>라는 뜻입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양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또 양자에게 하인을 청하여 양을 찾아가려 하였답니다. 그래서 양자가 궁금해서 물었답니다. “아니 양은 한 마리를 잃었는데 어찌 쫓아가는 사람이 많은가요?” 이웃 사람은 “갈림길이 많아서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이윽고 여러 사람이 돌아왔으므로 붙잡았느냐고 물으니,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더랍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쫓아갔는데 어찌 잃었단 말인가?”하고 물으니 그들이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고, 또 갈림길이 있어 양이 어느 길로 갔는지 알 수 없어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왜 양이 길을 잃을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갈림길이 많이 때문입니다.
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가지를 많이 칩니다. 큰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길이 아니라 가지를 많이 친 갈래 길일 수록 길을 잃기 쉽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와 떨어져 같이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갈라진 길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서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갈 길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어느 길로 가야 올바른 길인지 알지 못하고 있답니다.
2. 무리와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의 미움을 받아서 무리 안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리에서 왕따를 당해서 함께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은근히 도망해야 하는 서러운 처지에 있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떠나면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이 언제나 나를 유혹합니다. 혼자 있고 싶고, 아무의 간섭도 받기 싫고, 가족도, 친구도 모두 떨쳐버리고 그냥 혼자 있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기대가 나를 꿈에 부풀게 하고, 헛것에 정신을 팔리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마지못해 그 공동체에서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가슴에 원망과 서러움을 품고서 그렇게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3. 자신이 가는 길이 최고로 여기는 고집 때문입니다.
좋은 길이라고 고집을 피우고 혼자서 앞장서서 가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뒤따라오는 양이나 사람이 없으면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잘난 척하며 너무 앞장서서 나갈 때 사람들과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리고 혼자서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4. 무서운 동물을 만나면 뿔뿔이 도망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자나 표범과 같은 큰 동물들이 잡아먹으려고 덤벼들면 자연히 가던 길을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 동물들은 무리에서 떨어지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잡아먹고 공격하기에 적당한 환경을 만듭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런 위험한 때를 많이 만나기도 합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강한 적이 공격해오면 더욱 무리를 떠나지 말아야 하는데도 그 때는 그 것을 모르고 삽니다.
5. 길잡이를 잘못 만나서 엉뚱한 길로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어린 양을 잘 인도해 주는 대장이 엉터리로 양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철모르는 어린 양은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도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답니다. 부모도, 스승도, 선배도, 신부님도, 직장의 어른들도 모두 나를 이끌어 주시는 대장이랍니다.
6. 내 욕망이나 목표에 따라서 길을 볼 수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이라는 말이 있지요. 잘 아시는 것처럼 <사슴을 쫓는 자 산을 보지 못하고 길을 잃는다.>라는 말입니다. 사슴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건너편에 있는 풀이 더 맛있어 보이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분수를 알고 사는 것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7. 세상이 모두 암흑천지라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잃고 헤맬 수 있습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어둠이 판치며 정의가 숨어버려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이라서 길을 찾지도 못하고 무리가 보이지도 않는 경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런 어둠 속에 있는 듯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있답니다. 그걸 바로잡아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0,1-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축일 12월 6일 성 니콜라오 (Nicholas)
신분 : 주교
활동 지역 : 미라(Myra)
활동 연도 : 270?-341년경
같은 이름 :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오늘날 지중해 연안 터키 남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리키아(Lycia) 지방의 항구 도시인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뛰어난 행적으로 인한 전설과 비공식 전기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교회 안팎에서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파타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성 니콜라우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가난한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사제가 될 마음을 가질 정도로 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성 니콜라우스가 사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미라(Myra, 오늘날 터키의 뎀레 Demre)의 주교가 선종했다. 후임자를 찾기 위해 주교들이 열심히 기도하자 어느 날 밤,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성당에 맨 먼저 들어오는 ‘니콜라우스’라는 자를 뽑아라.” 다음 날 아침 성당에 기도하러 왔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주교로 축성되었다. 얼마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성 니콜라우스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10여 년의 옥고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교회 재건과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고, 당시 성행하던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항해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325년)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미라의 주교로서 뛰어난 성덕을 바탕으로 교구 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 활동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놀라운 기적을 통해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구해주었다.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과 기적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로는 어떤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출가시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들을 매춘부로 넘겨야 할 곤경에 처했을 때의 일이다. 이를 안 성 니콜라우스는 그때마다 몰래 창문으로 금이 든 자루를 넣어 주어,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정당하게 혼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기근이 든 어느 해에 고약한 푸주한이 아이 셋을 살해한 후 소금에 절여 먹거리로 팔려고 할 때, 성 니콜라우스가 이들 세 어린이를 구해 소생시킨 일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던 어느 해에 식량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가 폭풍우에 밀려 미라 해안으로 떠밀려왔다. 이때 성 니콜라우스는 각 배의 선장에게 얼마간의 식량을 기증해 달라고 간청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출항 후에 식량을 살펴본 선원들은 그 양이 이전과 비교해서 전혀 줄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그 외에도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사형에 처한 세 명의 청년을 구해주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 나타나서 모함을 받아 위기에 처한 고관들을 구해준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선원들을 여러 번 기적적으로 구해주기도 했다.
이렇듯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생전에 소외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341년경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명성은 더 멀리 전 서방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도 일어났다. 그의 유해는 원래 그가 주교로 있던 미라에 있었는데, 이 도시가 아랍의 침략을 받자 1087년 5월 9일 이탈리아 상인들이 미라의 주교좌성당에서 이탈리아의 바리(Bari)로 옮겨와 경당을 세우고 그곳에 모셨다. 그러자 많은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찾아와 점차 유럽 최대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래서 유해가 이장된 해에 바로 대성당 건축에 들어가 110년간의 건축 기간을 거쳐 1197년 성 니콜라우스 대성당을 완성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보통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로 불리게 되었다.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그의 행적과 여러 기적으로 인해 어린이와 누명 쓴 죄수, 폭풍우에 갇힌 뱃사람, 항해사, 어부, 여행자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성탄절 때 어린이들에게 성 니콜라우스의 자선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성 니콜라우스는 네덜란드에서는 ‘신터 클레스’(Sinter Claes), 영어권에서는 ‘산타 클로스’(Santa Claus)로 불렸다. 중세 후기 유럽 전역에서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 행사가 성대히 거행되면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성 니콜라우스가 산타클로스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옷도 사실은 주교가 입는 빨간색 복장에서 유래했다. 현대에 와서 성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로서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이는 네덜란드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관습을 소개하고 이를 성탄 전야 행사와 함께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 니콜라우스는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시칠리아, 풀리아(Puglia), 로렌(Lorraine), 러시아 등 여러 지방과 나라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도 성 니콜라우스는 그의 행적이나 기적과 관련해서 보통 주교 지팡이를 들고 주교관을 쓴 채 한 손에 세 개의 황금 구슬이 놓인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세 아이를 소생시키거나 무죄한 세 사람을 구하는 장면, 그리고 기적적으로 선원들을 구하는 모습 또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니콜라오 (Nichola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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