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뒷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6)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
(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당신께서는 그 선하신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십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철부지들의 특징은 의탁입니다.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함께야)
그들은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보호가 절실한 이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부지는 어리광도 부리고, 떼도 씁니다.
그러다 품에 안깁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 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 10,15) 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정희성씨의 ‘교감’이라는 시입니다.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가 그를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내려와 위험해여’”
그런 순수함이 사라진 시대이라서 더욱더 어린이의 마음이 간절해지나 봅니다.
순진무구함으로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것을 해보기 전까진 남편을 알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의 어린이처럼 되셨기에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마태 11,27)
레프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죽기 전 두 딸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아버지를 죽였다.”
딸들은 대답하지 않고 울고만 있었습니다.
딸들은 어머니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불평과 비판과 잔소리를 해온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명작을 통해 이미 톨스토이는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명성과 재산과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자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피아도 이런 부족한 것이 없는 삶에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톨스토이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살인을 포함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버렸던 종교에 다시 귀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기로 합니다.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쓴 위대한 책들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화를 설교하고 전쟁과 가난을 없애자는 팸플릿을 쓰며 나머지 일생을 보냈습니다.
자기 땅을 무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청빈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밭에 나가 일하고 나무를 베고 건초를 쌓았습니다.
자기 신발을 만들고, 나무 그릇에 밥을 먹었으며, 원수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소피아는 사치를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명성과 사람들의 갈채를 갈구했습니다.
돈과 재산을 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아내의 생각과 반대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거의 죄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톨스토이에게 잔소리하고, 질책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녀는 저작권료를 받기를 원했지만 톨스토이는 책을 발행할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거저 주려 했습니다.
톨스토이가 자기의 뜻을 말하면 소피아는 거의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입에는 아편을 달고 바닥을 구르며 남편을 죽여버리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우물에 떨어져 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82세가 된 톨스토이는 더 이상 이 비극적이고 불행한 가정생활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1910년 10월 어느 눈 오던 밤, 톨스토이는 아내를 피해 추위와 어둠 속으로 나섰습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1일 후 톨스토이는 기차역에서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가 있는 곳에 그의 아내가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지 않겠느냐고 말하겠지만 결국 소피아가 잃은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모른 채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지막에 조금 후회는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 생각에도 전 미쳤던 것 같아요.”
[참조: ‘인간관계론-결혼 생활의 무덤을 파는 가장 빠른 방법’, 데일 카네기, 현대 지성]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이들처럼 되라는 뜻입니다.
이 밑에 이런 내용이 따라 나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멍에는 소를 순종시키기 위해 주인이 메어주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주인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아내가 만약 남편에게 순종하면 남편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마태 11,27)
이 말은 아드님이 아버지를 아시는 방식은 ‘순종’이고 아버지가 아드님을 아시는 방식은 ‘모든 것을 넘겨주심’입니다.
아내가 불순종할수록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의 것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을 영영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남편도 아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아내를 이해하게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순종을 배움이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려는 노력입니다.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에콰도르 열대 우림 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원주민들의 창에 무참히 살해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총이 있었지만, 그들을 향해 발사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직후 (미국) <라이프>지와 <타임>지는 이 사실을 보도하며 분노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쓸데없는 선교를 한 다섯 선교사에 대한 비판일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ste!)
한 기자가 짐 엘리엇의 아내에게 찾아가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꺼냈을 때 그녀는 그 기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낭비라뇨?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뿐입니다.”
이 다섯 젊은이의 아내들은 어린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자기 남편들이 갔던 길을 따릅니다.
자기 남편들을 죽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다행히 그 부족은 여성과 아이들은 죽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느 날, 와다니족 추장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써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나는 5년 전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다시 오게 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와다니족은 모두 신앙을 받아들였고 짐 엘리엇을 죽인 그 청년은 와다니족의 목사가 됩니다.
짐 엘리엇을 가장 잘 안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당연히 그의 아내였습니다.
만약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남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면 남편의 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남편을 따랐기에 남편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만나면 남편도 아내에게 모든 것을 줄 것입니다.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철부지 어린이처럼 순종해야 남편을 알 수 있고, 남편은 아버지처럼 다 내어줄 수 있어야 아내를 알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을 눈여겨보십니다>
비교 대조의 달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제대로 된 비교 대조를 통해 큰 가르침 하나를 우리에게 건네주고 계십니다.
비교 대조의 대상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철부지들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마태오 복음 11장 26절)
철부지란 철이 들지 않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 여러 측면에서 미성숙하고 결핍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분위기 파악에도 더딥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이 지닌 장점도 없지 않습니다.
미성숙하고 개념이 없지만,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지 않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하더라도 그리 깊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만족할 줄 압니다.
반면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은 어떠합니까?
나름 학덕과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서 품위와 예의를 지킬 줄 압니다.
많이 배웠기에 세상과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름 배웠다고 어깨에 힘 좀 주는 사람들, 정신이나 내면이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 내려다보고 깔봅니다.
겸손이 겸비되지 않은 지혜, 신앙이 배제된 슬기로움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예수님 시대 많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딱 그랬습니다.
그들의 허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제대로 포착되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모습 용인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의 단골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을 최고라고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제안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독선과 오만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모릅니다.
오늘 이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가 강력합니다.
겸손이 결핍된 지식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볼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외치십니다.
우리 인간은 나이 먹어가면서 대체로 자기만의 특별한 안경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안경, 고정관념의 안경, 자기 잣대의 안경, 고집의 안경, 나만의 틀의 안경, 자기중심주의 안경...
특별히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통의 안경, 선민의식의 안경, 율법주의의 안경을 즐겨 썼는데, 그 결과 자신들의 코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아버지의 선하신 뜻>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5-26)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입니다.
‘철부지들’은 ‘소외계층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은 기득권층 사람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드러내 보이시니” 라는 말씀은 소외계층 사람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소외계층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기득권층도 없고 소외계층도 없는 나라입니다.
누구 한 사람 소외되는 일 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바람”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빠짐없이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6-7)
그렇지만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올라가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마리아의 노래’와 비슷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 1,51-53)
‘마리아의 노래’는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을 실현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기득권층 사람들’은 구원받을 길이 없는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스스로 내려놓지 않으면 빼앗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다가 멸망을 향해서 간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헤로데입니다.
'헤로데는 ......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 2,16)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인 것은 세상에 오신 메시아 때문에 자기의 왕권이 위험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로데의 왕권을 위협하신 적이 없습니다.
헤로데는 왕으로서 죽었지만, 끔찍한 병에 걸려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천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의 악행들을 모두 단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와 ‘마리아의 노래’가 소외계층 사람들이 무조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찾지 않고 세속의 재물만 찾는다면, 또 기득권층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만을 바란다면, 그러면 기득권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고, 역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마태 11,27)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요한 14,6).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한과 권능을 넘겨주셨다는 뜻입니다.
뒤의 28장을 보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28,18).
예수님께서 모든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은 동등한 분이시라는 뜻이기도 하고,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과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은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하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요한 10,30).
그 일치는 폐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배타적인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일치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그렇게 해 주셔야만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임의대로 아무에게나 그 권한을 사용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의 충실한 신앙생활이 ‘헛일’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님의 권한이고 자비이고 은총인 것은 맞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을 이유 없이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고(마태 12,20),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라도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파스카의 꽃같은 삶 - “오늘 지금 여기”>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뵈오리다.
깨어나 당신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
(시편 17,15)
약 2주간에 걸친 배 봉지 싸는 일이 엊그제 7.11일로 끝났습니다.
다섯분의 자매가 아마 15만 봉지쯤 쌌을 것입니다.
거의가 배 봉지 싸기 30년은 됐을 것입니다.
30대 중반의 어머니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6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고,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머니란 호칭이 더 어울립니다.
끝나는 날 ‘하늘에 별을 다는 어머니들’이라는 시를 선물했습니다.
“하늘에 사랑의 별을 다는구나
사다리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배나무 가지 배열매 봉지를 쌀 때 마다
하늘에 떠오르는 하얀 별들
낮에도 환히 떠오른 별들
하늘에 사랑의 별을 다는 어머니들이다
몸은 고단해도
얼굴은, 눈은, 음성은 별처럼 빛나는
하늘에 별을 다는 ‘주님의 전사戰士’ 어머니들이다”
벌써 세 번째 인용하는 시詩이지만 늘 새롭고 기분이 좋습니다.
말 그대로 파스카의 어머니,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두 어머니의 답신입니다.
“신부님, 시 너무 감동했어요. 너무나 감사합니다.”
“신부님, 만드신 시가 제 마음에 와 닿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다음은 어제 써놨던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라는 시입니다.
정주의 삶을 살다보면 계절이 지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무수히 폈다지는 한 때의 꽃이지만 사람은,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쓴 시입니다.
“꽃들은 때되면 폈다 지지만
사람은
참으로 믿는 사람은
끊임없이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 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다”
그래서 어제 정했던 '자아초월의 여정-참나가 되기' 강론 제목을 '파스카의 꽃같은 삶-오늘 지금 여기'로 바꿨습니다.
파스카의 꽃같은 삶의 원조는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온전히 자기를 비운 겸손하신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늘 맑은 물 샘솟는 우물이 되어 사는 삶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늘 주님의 배움터에서, 샘터에서, 쉼터에서 머무는 삶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배움터에, 샘터에, 쉼터에 머물러 주님을 공부하며, 맛보며, 심신을, 영육을 새롭게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아 순수하고 겸손한 철부지들입니다.
세상 지식이나 지혜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삶의 지혜, 천상적 지혜를 지닌 분들입니다.
감격에 벅찬 예수님의 감사기도, 찬양기도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를 두고 드리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감사기도인지요!
참기쁨은 참행복은 주님의 철부지들이 되어, 겸손과 순수의 사람이 되어 주님의 기쁨에, 행복에 참여하는 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날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기쁨, 참행복의 삶입니다.
참으로 아버지와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고백하는 예수님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새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의 은혜가 깊어지면서 아버지를 알게 되는 복된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유일한 답은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음을 봅니다.
나이들어 노년에 접어들수록 최고의 관심사는 건강일 것입니다.
옛 친구들에게서 오는 메시지도 온통 건강에 관한 것들입니다.
매력 자본을 갖춘 멋쟁이 노년을 위한 다섯가지 지침이란 메시지입니다.
1. 얼굴에서 웃는 모습이 떠나지 않아야 한다.
2. 항상 마음에 여유를 가져라.
3. 품격을 지켜라.
4. 자신의 마음 마당을 항상 사랑으로 가득 채우라.
5. 오늘 하루를 만끽하며 살아라.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이 쏙 빠졌다는 것이며 순전히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온 마음으로 섬길 때 위의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인데, 이런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있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정말 영육靈肉의 식食이자 약藥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기쁨, 평화, 감사, 희망입니다.
이런 주님의 선물로 영혼이 튼튼하면 참기쁨에, 참행복이요 육신은 저절로 영혼에 순종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영혼이 육신에 끌려가지 말고 건강한 영혼이 되어 육신을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과 그리고 철부지 제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이사야서의 ‘자기 중심’의 오만과 무지와 독선의 아시리아 임금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임을 까맣게 잊고 있는 아시리라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가차없는 심판이 예고됩니다만 이런 심판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버리리라.”
비대함은 건강과 힘의 표징입니다.
하느님 빠진 건강과 재산의 우상은 얼마나 덧없고 위태한지요!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一紅 權不十年),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예전 듣던 노래도 생각납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아마도 자기 중심의 아시리아 임금이 이랬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라면 첫 절은 “섬기세, 섬기세, 젊어서 주님을 섬기세, 늙어지면 못 섬기나니” 이렇게 바꿔 노래할 것입니다.
예전 피정지도때 자주 드린 말씀도 생각납니다.
노년은 물론 인간 품위 유지를 위한 3대 조건, “1. 하느님 믿음, 2. 건강, 3. 돈”이며, 절대로 이 우선순위가 바뀌어선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대부분의 불행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중심이 아닌 예수님을 닮은 하느님의 중심의 파스카의 꽃같은 삶만이 참기쁨, 참행복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겸손과 순수의 철부지 같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신망애信望愛와 지혜의 천상 선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마태 11,2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수녀님들과 함께 LA로 피정을 갈 때입니다.
수녀님들이 짐을 부친다고 해서 제가 도와 드린다고 했습니다.
보통은 체크인으로 가면 직원들이 안내해 줍니다.
짐을 부치려고 하는데 직원은 없었고, 자동 체크 인 기계만 있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렇게 짐을 부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계에 인적사항을 입력하니 짐을 부칠 수 있는 표가 출력되었습니다.
표를 가방에 부착하고 짐을 놓은 곳으로 갔더니 짐을 부칠 수 있었습니다.
짐을 부치는 데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우리는 클릭과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점차 사람과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를 만드는 것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명 편하고, 쉽고, 간편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클릭과 검색의 시대에는 이웃의 눈물을 보기 어렵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보기 어렵습니다.
꽃을 찾아 날아가는 나비를 보기 어렵습니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는 것도 어렵습니다.
예전에 직업 선택의 기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최상의 선택은 의미 있는 일이며 재미도 있고, 급여도 많은 직업입니다.
차선의 선택은 급여는 조금 적지만 의미 있고, 재미있는 직업입니다.
차악의 선택은 급여는 조금 되지만 의미 없고, 재미없는 직업입니다.
최악의 선택은 급여도 적고,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직업입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선택 기준은 어떠해야 할까요?
신학생 때, 천마산엘 갔었습니다.
본당의 청년들과 함께 갔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의 의견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비가 곧 그칠 태니 그냥 저녁을 먹고, 텐트를 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산에서는 폭우가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서로의 의견이 분분할 때, 모두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신학생이니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비가 조금 내릴 거라고 생각하고 머물자고 하면 짐을 옮기지 않아도 되고, 밥을 먹으면 되는 선택입니다.
폭우로 변할지 모르니 일단 짐을 다 옮기자고 하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비가 금세 그치면 일만 번거롭게 한 선택이 됩니다.
사제가 되고 나서,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였습니다.
어떤 선택은 참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선택은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대부분의 신자분들이 저의 선택을 존중해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하신 결정이니 믿고 따르자!’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늘 최선,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러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그런 저의 선택을 믿고 따라주는 신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큰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는 말 주변도 없고, 오랜 동안 도망을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능력과 인품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모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 모세가 하는 모든 결정과 선택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용기는 없습니다.
이제 모세는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 서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걷다가 길가에 나온 수많은 지렁이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이 부분이 늘 궁금했습니다.
왜 비만 오면 지렁이가 땅 밖으로 나올까 싶었던 것이지요.
친한 친구가 지렁이는 비를 너무 좋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비를 싫어하면 굳이 비가 떨어지는 땅 밖으로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렁이는 피부 바로 아래에 있는 모세 혈관으로 호흡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흙과 흙 사이를 통하는 공기를 마시며 호흡하지만, 비가 오면 흙 사이가 모두 물로 가득 차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지렁이가 비가 오면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살기 위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살기 위해 땅속을 박차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어렸을 때의 저처럼, 타인의 고통과 시련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판단하기에 앞서 몇 번이고 더 바라볼 수 있는 신중함이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도 겸손의 모범을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높으신 하느님의 뜻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치고 감격에 겨워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찬미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의 기도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하여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골칫거리였던 악의 세력이 꺾인 데 대한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권력을 휘두르는 권세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가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혜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참 지혜는 철부지와 같다고 스스로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교만함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할까요?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