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天路(차천로)-靜夜思(정야사)(고요한 밤의 그리움)(잊지 마세요)
相思無路莫相思(상사무로막상사) 생각할수록 만날 길 없으니 생각을 하지 말자
暮雨朝雲只暫時(모우조운지잠시) 저녁 비와 아침 구름의 만남도 잠깐뿐이고
孤夢不知關塞遠(고몽부지관새원) 외로운 꿈속의 나는 국경이 먼 것도 모르고
夜隨明月到天涯(야수명월도천애) 밤마다 달빛 따라 먼 하늘을 헤맨답니다
*위 시는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시 김용택의 한시산책1(김용택 엮음)(화니북스)”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김용택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랑의 마음은 절실했군요, 꿈속에서도 잊을 수 없어 달빛 따라 먼 하늘을 헤매는 마음, 애처롭군요, 쉽게 만났다가 쉽게 헤어지는 컴퓨터 새대에게 드리고 싶은 시입니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차천로[車天輅, 1556년(명종 11) ~ 1615년(광해군 7), 자 : 복원(復元) 호 : 오산(五山), 난우(蘭嵎), 귤실(橘室), 청묘거사(淸妙居士), 본관 연안(延安), 개성(開城) 출신]-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차식(軾)의 아들, 운로(雲輅)의 형. 삼부자(三父子) 모두가 일세에 이름 높은 문사(文士)였고, 세인(世人)들로부터 ‘삼소(三蘇)’라 불리웠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1577년(선조10)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다. 1586년 과거(科擧) 부정 사건에 관계되어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1588년 문재(文才)가 있어 용서되어 이듬해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문장에 뛰어나 선조가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전담케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서한도 썼다.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봉상시 첨정(僉正)을 지냈다. 그는 시와 가사(歌辭)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능했다. 특히, 한시에 뛰어나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또 속작(速作)으로도 유명했는데, ≪동야휘집 東野彙輯≫과 ≪제호시화 霽湖詩話≫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芝蕃)을 평양에서 맞아 하룻밤에 <기도회고시 箕都懷古詩> 수백 구를 읊고, 명필 한호(韓濩)가 그것을 받아써서 모두들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시적 창조력이 왕성하여 만리장성은 끝이 있어도 나의 시구는 끝이 나지 않는다고 호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는 그의 시가 웅건기장(雄健奇壯)한 대신 다듬어지지 않은 흠이 있어 마치 큰 강과 같은 감이 있다고 하였으며, 김택영(金澤榮)의 ≪소호당집 韶濩堂集≫에서도 그의 시가 호건(豪健)에만 그치지 않고 섬연(纖姸)한 면도 있으나 평숙(平熟)의 병이 있다고 평했다. 그에 있어서 왕성한 시적 재능이 장점인 동시에 단점도 되었던 것이다. 저서에는 ≪오산집 五山集≫, ≪오산설림 五山說林≫이 있다. 작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채로 ≪청구영언 靑丘永言≫에 실려있는 가사 <강촌별곡 江村別曲>이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퇴관(退官) 후에 전원에서 한가한 생활을 하며 자연을 노래한 것이며, 일률적으로 4자씩 된 한문구를 나열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작자에 대해서는 성운(成運), 또는 조식(曺植)이라는 설도 있으나 차천로의 작품임이 거의 확실하다. ≪교주가곡집 校註歌曲集≫에는 <낙빈가 樂貧歌>란 제목으로 실려있고, ≪(대학본) 청구영언≫에 같이 실려있는 <처사가 處士歌>나 또 한 사본(寫本)의 <별어부사 別漁父詞>와도 가사 내용이 비슷하다.
*關塞(관새) : 나라의 국경(國境) 지방(地方)에 베푼 관문(關門). 또는 요새(要塞)
첫댓글 지금보다 훨씬 애틋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밤마다 달빛 따라 먼 하늘을 헤매는 마음에 가슴은 무너지고.....
ㅎ, 회장님 말씀처럼 애틋한 사랑이 점점 사라져가는 듯 합니다.
멋진 댓글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