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년 5월 4일 이탈리아와 당시 축구계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져옵니다. 불굴의 대기록을 달성하며 세리에A 5연패를 눈앞에둔 축구역사상 가장 강력한던 팀중 하나인 '그란데토리노'와 위대한 캡틴 발렌티노 마쫄라는 수페르가에서의 비행기사고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고 그들의 축구는 한줌의 재가 되어버립니다. 이 사고로 이탈리아 전역과 축구계는 눈물바다가 되었고 월드컵을 준비하던 이탈리아 대표팀은 주축이던 토리노 선수들을 잃으며 완벽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전설의 시작
기존의 유벤투스FC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나온 유베의 몇몇멤버와 1905년 해체되었던 FC토르네세의 관계자가 모여 1906년 12월 3일 토리노FC라는 이름으로 팀을 창단했으며 12월 16일 첫경기를 가지며 창단초기 이탈리아 대표팀의 전설적인 감독 비토리아 포조가 팀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홈경기장인 필라델피아가 완공된 그다음 시즌 리그에서 처음으로 우승하며 전설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러나 세리에A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1930년대에는 볼로냐와 유벤투스의 강세가 이어졌고 특히 연고 라이벌인 유벤투스는 리그 5연패를 달성하며 토리노FC를 무안하게했습니다. 한편 토리노는 점점 힘을 키워 40년대에 들어 세리에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성장했고 1942년 베네치아에서 한 젊은이를 영입하며 위대한 토리노의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합니다.

발렌티노 마쫄라
1938년 Alfa Romeo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마쫄라는 이후 해군에 징집되어 베네치아로 갔다가 베네치아를 연고로 하는 베네치아FC에 입단하여 처음으로 세리에A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핵심선수로서 맹활약하며 팀을 코파이탈리아 우승과 리그3위로 이끌었고 당시 두번이나 리그에서 준우승하며 세리에의 강호로 자리매김한 토리노FC로 이적합니다. 그의 전설적인 활약은 여기서 부터 시작됩니다. 토리노의 주장이자 상징인 마쫄라는 스피드,드리블,슈팅,뛰어난테크닉,파워,활동량,수비력까지 겸비해 센터포워드로서,윙으로써,조율의 임무를 맡는 플레이메이커로서도 손색이 없는 올라운드플레이어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기렐리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축구사'에서 발렌티노 마쫄라는 쥐세페메아짜,루이지 체베니니,아돌프 발론치에리 등의 캄피오네가 정의한 공격형미드필더란 포지션으로 세계의 정점에 올랐다고 평가했습니다그의 등장에 이탈리아의 축구계는 이탈리아축구의 전설 쥐세페메아짜의 재림이라며 열광했습니다. 마쫄라는 경기가 안풀릴때마다 소매를 걷어올리던 습관이 있었고 그가 소매를 걷어올릴때마다 관중들은 열광했어요.
발렌티노 마쫄라는 토리노에서 보낸 7년간 204경기에 출전했고 118골을 득점했습니다. 1947년 득점왕을 차지한 그는 수많은 도움을 기록하기도 했고 발렌티노 마쫄라와 함께한 토리노는 이탈리아 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란데 토리노(Grande Torino)
발렌티노마쫄라의 동료였던 베네치아의 에지오 로익마저 영입한 토리노는 당대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며 그 해 팀 역사상 2번쨰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토리노의 서막에 불가했고 전세계를 강타했던 제2차 세계대전 역시 토리노를 상승세를 꺽지못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리그가 중단된 2년동안 이탈리아 북부리그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며 1위를 기록했고 그 강력함을 그대로 유지한채 1945년 재개된 세리에A로 복귀합니다.
그란데 토리노를 막아낼 수 있는 팀은 없었어요. 발렌티노 마쫄라와 에지오 로익을 비롯해 기타 이탈리아국가대표팀 멤버로 구성된 토리노fc는 1948년까지 내리우승을 차지했고 1948/49시즌 역시 4경기를 남겨두고 우승을 거의 확신하는 단계로 접어듭니다. 싸워보기도 전에 두려움을 넘어 좌절감을 느끼게했던 토리노의 홈경기는 정말대단했는데 1945년부터 1949년까지 4년간 단한번도 홈에서 패않은 전무후무한 대기록(93경기 83승 10무)을 세웠고 1974/48시즌은 한번의 무승부를 제외한 나머지 홈경기에 모두 승리했습니다.
홈에서 알렉산드리아를 10:0 원정에서 AS로마를 7:0으로 대파한 토리노에게 5:0 정도의 스코어는 일반적이었고 1947/48 한시즌 최다득점(125골)을 비롯해 5년동안 무려 408골을 기록했습니다. 한시즌 최소실점역시 토리노의 몫이였는데 그들은 35경기에서 31실점을 허용했습니다.
토리노는 또한 전술적으로도 아주 뛰어난 클럽이였는데 기존의 WM혹은 헝가리의MM뿐만 아니라 50년대의 여러명장들의 의해 개발된 4-2-4를 10년전부터 자유자재로 구사했습니다.(이후 벨라구트만과 플라비우 코스타에 의해 정식적으로 424를 개발됬고 이를 도입한 브라질은 긴시간동안 424를 활용하여 세계 축구계를 제패하게됩니다.자갈루 펠레 바바 가힌샤를 공격진에 배치한 58년도의 월드컵이 가장 대표적.)
아주리 군단 역시 토리노 그자체였습니다. 당시 아주리의 주전 멤버중 대부분은 토리노 소속선수였으며 벤치멤버들 또한 토리노선수들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1947년 그란데 토리노가 최절정에 달했을땐 '매직마자르'헝가리 대표팀과 가진 A매치에서는 유벤투스 소속의 골키퍼를 제외한 필드플레이어 전원이 그란데 토리노의 일원이였을 정도입니다.
제노바에서 갖은 포르투칼대표팀과의 경기는 포르투칼 대표팀의 주장 페레이라의 은퇴를 얼마남지 않았을때 이루어졌습니다. SL벤피카 소속이였던 그는 발렌티노 마쫄라에게 자신의 은퇴경기에서 '그란데 토리노'와 맞붙어보고 싶다고 예기했고 발렌티노 마쫄라는 그의 제안을 흔쾌이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토리노는 리스본에서 날아가 벤피카와의 경기를 치뤘고 경기는 벤피카의 4:3으로 종류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리그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지만 그것은 그들의 몫이 아니였습니다. SL벤피카와의 경기는 이탈리아축구영웅들의 마지막 패배였습니다.
수페르가의 비극 그리고 그후
토리노의 영웅들을 실은 비행기는 토리노 인근 수페르가 언덕에 위치한 한 교회를 정면으로 들이받아벌입니다. 뮌헨참사,헤이젤참사와 더불어 축구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억되고 있는 수페르가의 비극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축구계에 충격적인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발렌티노 마쫄라,에지오 로익을 포함한 18명의 선수단뿐만 아니라 당시 감독 레슬리에 리에베슬레이를 포함 코치진 전원과 승무원 중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고 그란데 토리노의 최절정기를 이끌던 선수들의 나이는 대부분 20대중후반 이였습니다.

토리노FC는 몰락했고 주축들을 모조리 잃은 아주리군단역시 와해되었습니다. 수페르가의 여파로 월드컵2연패에 빛나는 아주리군단은 1950년 월드컵을 비롯해 1970년 월드컵이 시작되기전까지 본선조별라운드를 통과하지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한 이탈리아 기자는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이탈리아 축구는 10년 이상 퇴보했다"고 평했습니다.
우승까지 눈앞에 두고 갑작스렇게 붕괴해버린 토리노였지만 결코 포기하지않았습니다. 유소년팀을 끌어올려 치룬 남은 4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세리에 5연패의 대업을 마무리지었고 상대팀 감독들은 2군의 선수들을 내보내며 수페르가 참사에 대한 유감을 표했습니다. 토리노를 위한 리버플라테의 감동적인 친선전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그들은 더이상 위대한 토리노가 아니였습니다. 토리노의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그란데 토리노의 부활을 꿈꾸던 네레오 로코 역시 실패했습니다. 토리노는 세리에B와 세리에A 하위권을 전전하는 클럽이 되었고 70년대 팀을 재정비해 세리에를 제패하며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만 이후 연이은 하락세에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였습니다.


(왼)수페르가의 비극을 추모하기 위한 에르마로 에안디의 작품입니다. 토리노의 상징인 황소에서 피눈물이 흐르고있네요.
(오)수페르가의 비극을 추모하기 위해 발행된 엽서입니다.
전설의 후예들
그라나타의 영웅들은 모두 이탈리아를 떠났습니다. 아주리군단은 1950년 월드컵에서 완벽하게 무너졌고 이탈리아 축구는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토리노FC는 끝장났지만 이탈리아축구는 다시 일어났고 또다시 전설을 만들어내며 1970년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부활을 알립니다. 세리에A에서는 토리노의 뒤를 이어 엘레니오 에라라의 지휘아래 60년대를 지배하는 새로운 전설 '그란데 인테르'가 탄생했고 놀랍게도 그 중심엔 전설 발렌티노 마쫄라의 아들 산드로 마쫄라가 있었습니다.
지아신토 파케티,자이르,루이스수아레즈,산드로 마쫄라 등이 주축이된 '그란데 인테르'는 카테나치오 전술을 도입하여 전유럽을 2차례나 제패하는등 구단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와 함께 이탈리아 축구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서서히 부활의 낌새를 보여주던 이탈리아 대표팀은 발렌티노 마쫄라의 아들 산드로 마쫄라를 비롯해 지아니 리베라,루이지 리바,지아신토 파케티,디노조프 등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로 기억되는 선수들로 전력이 주축이되어 발카레지 감독의 지휘아래 1970년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기록하게됩니다.

축구역사상 최고의 라이벌 중 하나였던 지아니 리베라와 산드로마쫄라

1970년 월드컵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린 아주리군단 (밑에줄 가운데가 산드로마쫄라?)
토리노의 축구는 끝나지않았다
토리노의 빈자리는 인테르가 대신했고 세월이 흘러흘러 아주리대표팀역시 제 위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토리노FC만큼은 아니였어요. 약팀으로 전락한 토리노는 결국 60년대에 들어 세리에B로 떨어졌고 팀을 재정비해 70년대 중반 세리에A를 우승하며 부활을 알리는가 싶었지만 더이상은 아니였습니다. 90년대들어 또다시 세리에B로 강등된 토리노FC는 이후 세리에A하위권과 세리에B에 전전했고 '그란데 토리노'의 위업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토리노의 축구는 아직 끝나지않았습니다.
수페르가 언덕에 비행기가 추락한지 60여년이 훨씬 지난지금 토리노FC는 또다시 도약을 기원하고 있습니다.비록 선배들의 위치에는 한참 못미치지만 더이상 세리에의 클럽들은 토리노FC를 만년하위권팀이라고 부르지않아요. 연고 라이벌 유벤투스FC에게 완벽하게 토리노와 세리에무대를 빼앗겼으며 더이상 발렌티노 마쫄라나 에지오 로익같은 스타플레이어는 없지만 알레시오 체르치와 치로 임모빌레를 필두로 한 그란데 토리노의 후예들은 세리에A에 돌풍을 가져오며 또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65년전의 비극을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