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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미국 페리(Perry) 제독(提督)의 일본개국(日本開國) 사건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페리 제독의 함대(艦隊)가 향하였던 최종 목적지, 일본(日本)의 에도(江戸; えど)는 실제로 어디에 있었을까?
<대륙사관(大陸史觀)>을 주장하는 일부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 당시의 에도(江戸)는 지금의 중국대륙(中國大陸)에 있는 “남경”(南京; 난징)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을 검증(檢證)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먼저, 페리 제독이 일본으로 항해(航海)한 경로(經路)를 추적하기로 한다.
관련 자료를 아래에 일부 인용한다.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Matthew C. Perry, 1794년 4월 10일 ~ 1858년 3월 4일)는 미국 해군 군인으로 이리 호 전투에서 활약한 미국 해군의 영웅 올리버 페리의 동생이다. 쇄국을 하고 있던 일본의 에도 시대에 함대를 이끌고 내항하여 미일 화친 조약을 통해 일본을 개항하게끔 만든 사람이다. 내항 당시의 막부는 네덜란드어 통역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서에는 네덜란드 풍 발음의 '페루리(ペルリ, 한자로는 피리彼理)'로 표기되었다.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 전 북핵조정관은 그의 일가이다.
1852년 3월에 동인도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단, 발포는 금지되었다)을 부여 받았다. 동년 11월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했다. 프리깃함 미시시피호를 기선으로 한 4척의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ㆍ케이프타운ㆍ싱가포르ㆍ홍콩ㆍ상해ㆍ류큐(오키나와)ㆍ오가사와라 제도를 경유하여 1853년 7월 8일, 우라가(浦賀)에 입항했다. 7월 14일에 막부 측이 지정한 구리하마(久里浜)에 호위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도다 우지요시(戸田氏栄)ㆍ이도 히로미치(井戸弘道)에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지는 않은 채 개국의 요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만을 며칠간 측량한 후 식료 등 함대의 사정도 있어서 막부에 다음해까지 유예를 주어 류큐로 돌아가 기항했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미국에 극동사정이 전해지는 중이던 1854년 2월 13일에 기함 서스케하나호 등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현재의 요코하마 시 가나자와 구 앞바다에 육박해 조약체결을 요구하여, 3월 31일에 가나자와에서 미일화친조약을 조인했다. 또 그 후, 나하에 기항하여, 7월 11일에는 류큐 왕국과도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했다.
귀국한 후는 원정기 등을 썼다. 만년은 가발을 착용했다. 1858년 3월 4일에 64세로 뉴욕에서 죽었다. 묘소는 로드아일랜드 주의 아일랜드 묘지에 있다.
[출처=위키백과(한국어), http://ko.wikipedia.org/wiki/%EB%A7%A4%EC%8A%88_%ED%8E%98%EB%A6%AC_(%EA%B5%B0%EC%9D%B8)]
In 1852, Perry embarked from Norfolk, Virginia for Japan, in command of a squadron in search of a Japanese trade treaty. Aboard a black-hulled steam frigate, he ported Mississippi, Plymouth, Saratoga, and Susquehanna at Uraga Harbor near Edo (modern Tokyo) on July 8, 1853.
[출처=위키백과(영어), http://en.wikipedia.org/wiki/Matthew_Calbraith_Perry]
위 자료를 살펴 보면,
1852년 미국의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제독(提督)은 4척의 함대(艦隊) 즉 미시시피(Mississippi, 1841년, sidewheel steamer), 프리머스(Plymouth, 1844년), 사라토가(Saratoga, 1842년), 서스케하나(Susquehanna, 1850년, sidewheel steamer)를 이끌고 미국 동부 버지니아 주(州) 노퍽(Norfolk, Virginia)을 출항(出航)하여 태평양항로(太平洋航路)가 아니라 대서양(大西洋)을 건너 인도항로(印度航路)로 일본(日本)에 처음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4척 중에서 2척만이 증기선(蒸氣船)이었고 나머지는 범선(帆船)이었다.
즉 미시시피(Mississippi)와 서스케하나(Susquehanna)가 증기선이었다.
참고로, 페리 제독은 미국에서 “증기선해군(蒸氣船海軍)의 아버지(父)”<Father of the Steam Navy>라는 별명(別名)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해군교육(海軍敎育)의 선구자(先驅者)이기도 하다.
검토를 위해, 페리 함대의 항로(航路)를 자세히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페리 제독은 강경파(强硬派)인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으로부터 “부득이하면 유구(琉球; りゅうきゅう; 류-큐-)를 점령(占領)하라”는 말을 들었다.
1852년 11월 24일, 58세의 페리 제독을 태운 순양함(巡洋艦) 미시시피(Mississippi)를 기함(旗艦)으로 하는 동인도함대(東印度艦隊)는 대서양(大西洋)을 건너 일로(一路) 아시아(Asia)로 향하였다.
북(北)대서양의 포르투갈령(領) 마데이라(Madeira) 섬 <12월 11일~15일>
남(南)대서양의 영국령(領)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섬 <1853년 1월 10일~11일>
남(南)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Cape Town) <1월 24일~2월 3일>
인도양(印度洋)의 모리셔스(Mauritius) <2월 18일~28일>
실론(Ceylon) 즉 지금의 스리랑카(Sri Lanka) <3월 10일~15일>
말라카(Malacca; 満剌加) 해협(海峽)과 싱가포르(Singapore) <3월 25일~29일>
마카오(Macau; 澳門)와 홍콩(香港)을 경유하여 <4월 7일~28일>
상해(上海; 샹하이)에 <5월 4일> 도착하였다.
[출처=위키백과(일본어), http://ja.wikipedia.org/wiki/%E9%BB%92%E8%88%B9%E6%9D%A5%E8%88%AA]
우선 여기까지만 검토하여 본다.
위 자료에는 페리 제독이 방문한 장소(場所)와 일자(日字)가 나온다. <위키백과> 측에서 지금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거짓으로 날조(捏造)한 것이라면 더 이상 검토할 가치가 없는 내용이지만, 이를 반박(反駁)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일단 그 내용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요약하면, 페리 제독의 동인도함대(東印度艦隊)는 1852년 11월 24일 미국 동부 버지니아 주(州) 노퍽(Norfolk, Virginia)을 출항하여 1853년 5월 4일 상해(上海; 샹하이)에 도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가?
페리 제독은 무슨 이유로, 16세기에 새로 개척된 태평양항로(太平洋航路)를 이용하지 않고 대서양을 건너 인도항로(印度航路)를 선택하였을까?
증기선(蒸氣船)에는 석탄(石炭)과 물(水)의 공급이 필수이고 식량(食糧)도 마찬가지인데, 오랜 전통이 있는 인도항로(印度航路)를 이용하면 그 당시에 그런 일이 수월스럽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대서양(大西洋)과 대평양(太平洋)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Panama Canal)는 1914년에 완성되었다.
그럼, 페리 제독이 차례로 방문한 마카오(Macau; 澳門), 홍콩(Hong Kong; 香港), 상해(Shang Hai; 上海)는 지금의 그곳에 해당되는가?
페리 제독의 원정(遠征) 또는 탐험(探險) 이야기에는 “포르모사”(Formosa) 즉 지금의 대만(臺灣; Taiwan)이 등장하는데, 그곳의 석탄(石炭) 광산(鑛山)에 관한 지도(地圖)가 남아 있기에, 그것은 바로 그가 지금의 “대만해협”(臺灣海峽)을 통과한 흔적이라고 본다.
[참고=위키백과(영어), http://en.wikipedia.org/wiki/Matthew_Calbraith_Perry]
포르모사(Formosa)는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인데, 16세기경 포르투갈 선박이 동(東)아시아를 항해하는 도중에 유럽국가로는 최초로 발견한 섬이다.
<대륙사관(大陸史觀)>을 주장하는 일부 연구자에 따르면, 그 당시에 일본은 중국대륙의 동부와 동남부 지역 특히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푸찌엔셩)을 중심으로 존재하였으므로, 결국 페리 제독은 최종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것이 된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遲滯)할 필요 없이, 지금의 상해(上海)에서 약 250 km 떨어진 곳인 남경(南京) 즉 에도(江戸)로 곧장 달려가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페리 제독은 상해(上海) 도착 이후에 유구(琉球; りゅうきゅう; 류-큐-)로 향한다. 그 당시 그곳은 어디에 있었고, 그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 당시 페리 제독의 행적(行跡)을 아래 자료에서 자세히 살펴 본다.
상해(上海)에서 순양함(巡洋艦) 서스케하나(Susquehanna)로 기함(旗艦)을 옮긴 페리 함대는 5월 17일에 출항하여, 5월 26일에는 일본(日本)의 사츠마(薩摩; さつま) 번(藩)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유구왕국(琉球王國)의 나하(那覇; なは) 앞바다에 정박(碇泊)하였다.
페리 제독은 수리성(首里城) 방문을 타진(打診)하였지만, 유구왕국 측은 거부하였다. 무장(武裝) 해제(解除)한 후에야 입성(入城)하여 접대를 주고 받았다. 유구왕국은 겉으로는 우호적(友好的)인 모습을 보였기에 미국의 무력제압(武力制壓)을 피할 수 있었다.
페리 제독은 함대의 일부를 나하(那覇)에 주둔(駐屯)시키고, 자신(自身)은 6월 9일에 출항하여, 6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아직 영유(領有)가 확실하지 않았던 오가사와라(小笠原; おがさわら) 제도(諸島)를 탐험(探検)하였다. 이 때 페리 제독은 오가사와라(小笠原)의 영유(領有)를 선언(宣言)하였지만, 즉시 영국으로부터 항의(抗議)를 받았고, 러시아 선박(船舶)도 항의를 위해 오가사와라(小笠原) 근해(近海)로 남하(南下)하였기 때문에 그 선언은 유야무야(有耶無耶)로 되었다.
이후에 일본(日本)은 하야시시헤이(林子平; はやし しへい)의 저서(著書)인 “三国通覧図説”(さんごくつうらんずせつ)<에도(江戸) 시대의 지리서(地理書)>의 기술(記述)을 근거로 하여 그 영유(領有)를 주장하였고, 하치죠-지마(八丈島; はちじょうじま) 주민(住民) 등을 적극적으로 이주(移住)시키는 것으로, 열강(列強)으로부터 영유권(領有権)을 승인(承認) 받았다.
[출처=위키백과(일본어), http://ja.wikipedia.org/wiki/%E9%BB%92%E8%88%B9%E6%9D%A5%E8%88%AA]
위 자료를 살펴 보면,
페리 제독은 오가사와라(小笠原; おがさわら) 제도(諸島)의 영유권(領有権)을 선언(宣言)하기 위해 유구(琉球)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오가사와라(小笠原)와 유구((琉球)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주 먼 거리에 있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위 자료에는 지명(地名)은 나와 있지만, 항해(航海)의 방향(方向)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가정(假定)을 하기로 한다.
페리 제독의 항해기록(航海記錄)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만약 페리 제독이 지금의 상해(上海)에서 동남쪽으로 항해하였다면, 지금의 난세이(南西; なんせい) 제도(諸島)에 속한 오키나와(沖縄; おきなわ)에 도착하는데, 그곳이 유구(琉球)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항해하였다면 지금의 오가사와라(小笠原) 섬들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지리적 위치와 일치하게 된다.
만약 페리 제독이 상해(上海)에서 남쪽으로 항해하였다면, 지금의 주산군도(舟山群島; 조우샨췬따오)에 도착하게 되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지금의 대만(臺灣; Taiwan)이 나온다. 그렇다면, 그 중에 어디가 유구(琉球)에 해당되는가?
역사기록상 대만(臺灣)은 소유구(小琉球)라고 불리운 적이 있지만, 그 섬 자체가 매우 커서, 여러 작은 섬들로 구성된 유구(琉球)의 특성상 본도(本島)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에는 유구(琉球) 섬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중국 대륙 해안에도 작은 섬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유구(琉球)라고 보기는 어렵다.
혹자(或者)는 지금의 필리핀이 대유구(大琉球)이고, 지금의 대만(臺灣)이 소유구(小琉球)라고 주장하는데, 문제가 있다.
필리핀은 역사기록상 여송(呂宋; 루손; Luzon)이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오랫동안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필리핀은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나오는 유구(琉球) 섬들의 특징과 부합(符合)되지 않으며, 여송(呂宋)이라는 명칭이 별도로 등장한다.
그 역사기록이 왜곡/날조되었다고 반박(反駁)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다만, 그 증거를 제시하길 바란다. 그것도 심증(心證)이 아니라 물증(物證)이어야 한다.
[참고로, 크게 나누면 필리핀(Philippines)은 루손(Luzon), 비사야(Visayas) 제도(諸島), 민다나오(Mindanao)로 구성되어 있다. 1517년 포르투갈의 항해가(航海家)이자 탐험가(探險家)인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스페인 국왕에게 ‘태평양항로(太平洋航路)’항로를 개척하자고 설득하였고, 드디어 1520년 11월 마젤란 함대는 대서양(大西洋)을 횡단하여 남(南)아메리카대륙 남단(南端)의 해협(지금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였다. 이로써 유럽국가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1521년 3월에 필리핀 비사야(Visayas) 제도(諸島)의 세부(Cebu) 섬에 도착하였다. 그 후 1565년에는 스페인 출신의 정복자(征服者) 미겔 로베스 데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가 필리핀 비사야(Visayas) 제도(諸島)의 세부(Cebu) 섬에 거점을 확보하였고, 1570년부터 1571년에 걸쳐서 필리핀 루손(Luzon) 섬의 마닐라(Manila)를 점령하였다. 이후 미겔 로베스 데 레가스피는 초대(初代) 필리핀 총독(總督)이 되었다. 스페인은 마닐라를 본거지로 하여 일본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루손 섬은 멕시코(Mexico)의 지배를 받게 되어 멕시코와 중국을 중계하는 ‘가레온(Galleons)무역’ 또는 ‘아카푸르코(Acapulco)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마닐라 가레온(Manila Galleons), 아카푸르코 가레온(Acapulco Galleons)은 스페인 무역선(貿易船)을 가리킨다.]
한편, 상해(上海)의 서쪽과 북쪽은 그럴 듯한 섬들이 없고, 그 동북쪽에는 지금의 제주도(濟州島)가 있는데, 페리 제독이 그 방향으로 항해하였다면, 제주도(濟州島)가 유구(琉球)에 해당되는가?
만약 페리 제독이 상해(上海)에서 줄곧 동쪽으로 항해하였다면, 지금의 일본 큐-슈-(九州; きゅうしゅう) 남부 지역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이 유구(琉球)였는가?
아무튼, 지금의 제주도(濟州島)와 일본 큐-슈-(九州) 지역은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나오는 유구(琉球) 섬들의 특징과 부합(符合)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여러 방향으로 가정(假定)하여 검토하였지만,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것은, 페리 제독이 동남쪽으로 항해하여 지금의 오키나와(沖縄)에 도착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에도(江戸)는 어디에 있었는가?
드디어, 페리 제독은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의 친서(親書)를 가지고 최종목적지인 일본의 에도(江戸)로 향하게 된다.
아래의 자료를 살펴 본다.
페리 제독은 1853년 6월 23일에 유구(琉球)에 귀환(帰還)한 후에, 또 다시 함대의 일부를 남겨둔 채 7월 2일 일본으로 출항하였다.
1853년 7월 8일 에도(江戸) 만(湾)의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모습을 보인 미국 해군(海軍) 동인도함대(東印度艦隊) 4척의 순양함(巡洋艦)을 일본인들은 쿠로후네(黑船; くろふね; Black Ships)라고 불렀다. 그 당시 미국의 순양함은 타르(Tar)로 칠하여 선체(船體)를 흑색(黑色)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페리 제독은 일본의 개국(開國)에 관하여 에도바쿠후(江戸幕府; えどばくふ)에 다음해까지 유예(猶豫)를 주고 유구(琉球; 류-큐-)로 돌아가 기항(寄港)하였다.
1854년, 페리 제독은 유구(琉球)를 경유하여 반년(半年)만에 다시 우라가(浦賀; うらが)에 내항(来航)하였다.
1854년 2월 11일에는 수송함(輸送艦) 사우샘프턴(Southampton)<범선(帆船)>이 나타났고, 2월 13일까지는 기함(旗艦) 서스케하나(Susquehanna), 미시시피(Mississippi), 포-하탄(Powhatan, 1850년)<이상, 증기선(蒸氣船)>, 마세도니안(Macedonian), 반다리아(Vandalia), 렉싱톤(Lexington)<이상, 범선(帆船)> 등 순양함(巡洋艦) 6척이 도착하였다.
페리 제독이 에도(江戸) 만(湾)에 도착한 후에는 기함(旗艦)을 포-하탄(Powhatan)으로 옮겼다. 그 후에 사라토가(Saratoga), 서프라이(Supply)<이상, 범선(帆船)>가 도착하여 모두 9척의 대함대(大艦隊)가 에도(江戸) 만(湾)에 집결하여 에도(江戸)는 패닉(Panic) 상태가 되었다.
한편, 우라가(浦賀)에는 구경꾼들이 다수 모여들어 마치 관광지(觀光地)와 같았다. 또한 마음대로 배를 대고 미국인(美國人)과 접촉하려는 시민(市民)도 있었다. 요시다쇼-인(吉田松陰; よしだ しょういん)이 외국유학(外國留學)을 위해 밀항(密航)을 꾀하고 포-하탄(Powhatan)에 접촉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요시다쇼-인(吉田 松陰, 1830년~1859년)은 일본의 무사(武士) 즉 쵸-슈-(長州; ちょうしゅう) 번(藩)의 무사였고, 나중에 메이지(明治) 유신(維新)의 정신적 지도자로 알려진 사상가(思想家), 교육자(敎育者), 병학자(兵学者)이다.
[출처=위키백과(일본어), http://ja.wikipedia.org/wiki/%E9%BB%92%E8%88%B9%E6%9D%A5%E8%88%AA]
위 자료에서 에도(江戸) 만(湾)의 우라가(浦賀)는, 지금의 카나가와(神奈川; かながわ) 현(県) 요코스카(横須賀; よこすか) 시(市)의 동부 지역을 가리킨다고 한다.
<대륙사관(大陸史觀)>의 일부 주장에 따르면, 에도(江戸) 만(湾)은 지금의 중국 대륙에 있었으므로, 에도(江戸)의 위치 비정 후보지인 남경(南京; 난징) 근처에서 찾아야 한다. 그럴 듯한 장소가 있을까?
페리 제독이 배를 타고 남경(南京)으로 들어가려면, 양자강(揚子江) 하류(下流)의 상해(上海)에서 강물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페리 제독의 함대(艦隊) 4척 즉 기함(旗艦)이었던 순양함(巡洋艦) 서스케하나(Susquehanna), 미시시피(Mississippi), 프리머스(Plymouth), 사라토가(Saratoga)는 과연 양자강(揚子江; 양쯔찌앙)을 거슬러 올라갔을까?
혹시 그 당시 에도(江戸) 만(湾)이 지금의 항주만(杭州灣; 항조우완)이었다면 그럴 듯한데, 그곳은 이미 페리 제독이 지나간 장소였다. 만약 항주(杭州)가 에도(江戸)였다면, 그는 더 이상 항해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의 친서(親書)를 에도바쿠후(江戸幕府)에 곧장 전달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다만, 페리 제독은 에도(江戸)로 들어가기 전에, 그 당시에 아직 영유(領有)가 확정되지 않았던 오가사와라(小笠原; おがさわら) 제도(諸島)로 먼저 가서 미국의 영유권(領有権)을 선언(宣言)하려고 시도(試圖)하였지만 실패(失敗)하였다.
오가사와라(小笠原; おがさわら) 제도(諸島)는 1875년(明治 8년)에 일본의 영유(領有)로 확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으로 시정권(施政權)이 넘어갔지만 1968년에 반환(返還)되었다.
지금의 일본열도(日本列島) 토-쿄-(東京) 만(灣)은 지금의 오가사와라(小笠原; おがさわら) 제도(諸島)에서 북쪽으로 항해하면 도착할 수 있다.
지금까지 페리 제독의 항해(航海) 경로(經路)를 살펴 보면,
결론적으로 지금의 지리적 위치를 기준으로 삼아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륙사관(大陸史觀)>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은 일본열도사(日本列島史)에 맞추어 모두 날조(捏造)된 것인가? 앞으로는 그 날조의 증거(證據)라도 하나씩 찾아 보아야 하겠다. 심증(心證)이 아니라 반드시 물증(物證)을 찾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회원 여러분도 다시 한 번 검토하여 보길 바란다.
그리고 필자(筆者)의 주장에 어떤 오류(誤謬)가 있는지 알려주길 바란다.
특히, 위에 인용된 <위키백과>의 자료에 오류가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길 바란다.
(이하, 보충 자료)
페리 제독은 처음 일본으로 가기 전에 독일 의사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년~1866년)가 작성한 여러 자료를 참고하고 직접 자문을 받으면서 사전에 일본을 철저히 연구하였다고 한다.
특히 페리 제독은 처음 일본으로 갈 때 독일 의사 시볼트가 미리 제공한 일본지도(日本地圖)를 지참(持參)한 것으로 보인다. 그 지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무척 궁금하다.
현재 일반적으로, 그 지도의 원본(原本)은 일본 에도바쿠후(江戸幕府) 후기 시대의 상인(商人)이자 측량가(測量家)였던 伊能 忠敬(いのう ただたか; 이노- 타다타카, 1745년 ~ 1818년)가 토쿠가와바쿠후(徳川幕府)의 명령으로 1800년부터 1816년까지 일본에서 처음으로 ‘실제 측량(實測)’을 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참고=九州大學, http://record.museum.kyushu-u.ac.jp/nihonzu/top.html]
그 지도의 정식 명칭은 “大日本沿海輿地全圖”(だいにほんえんかいよちぜんず; 다이니혼엔카이요치젠즈) 또는 “大日本沿海實測地圖”(だいにほんえんかいじっそくちず; 다이니혼엔카이짓소쿠치즈)이며, 통칭 “伊能圖”(いのうず; 이노-즈)라고 한다. 伊能 忠敬(이노- 타다타카)는 단순히 “地圖”(ちず; 치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지도는 1821년에 최종 완성되었으며, 독일 의사 시볼트가 1828년 일본지도 밀반출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에서 추방되었던 일(이른바 ‘시볼트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일본지도이다.
그 지도는 계층적 구조이며, 大圖 (1里=3寸6分, 축척1/36,000; 총214매), 中圖 (1里=6分, 축척1/216,000; 총8매), 小圖 (1里=3分, 축척1/432,000; 총3매), 기타 지도로 구성되어 있다.
‘原本’(원본)은 1873년 메이지(明治) 황거(皇居) 화재로 소실되었고, 伊能(이노-) 가문(家門)이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제출, 보관한 ‘副本’(부본) 또한 1923년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 소실되었다. 지금은 다른 유력 다이묘(大名) 가문들이 토쿠가와바쿠후(徳川幕府)에 요청하여 ‘中圖’를 복제한 것이 약간 남아있고, ‘小圖’와 ‘大圖’의 일부가 현존한다.
1861년 일본 근해(近海)를 측량(測量)하러 왔었던 영국 해군(海軍)의 요청에 따라 토쿠가와바쿠후(徳川幕府)가 전해주었던 ‘小圖’가 그 이후에 영국 해군성(海軍省)에 남아있었으나 일본의 요구에 의해 반환되었다.
2001년 미국 의회도서관(議會圖書館)에서 ‘大圖’ 寫本(사본) 207매(枚)가 발견되어 “伊能圖”(이노-즈)의 복원(復元)에 사용되었다.
복원된 “伊能圖”(이노-즈)가 원본(原本)과 전혀 다른 ‘가짜’라고 반박(反駁)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참고=筑波大学, http://www.tulips.tsukuba.ac.jp/exhibition/kochizu/gazou/lime/3-8.html]
독일인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년~1866년)는 의학자, 박물학자이다.
1823년 일본 나가시키(長崎)의 데지마(出島)에 있었던 네덜란드 商館(상관)에서 근무할 의사로서 일본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1828년 일본지도 밀반출 사건(이른바 ‘시볼트 사건’)이 발생하여 1829년 국외로 추방되었다.
1832년부터 “일본(日本)” 간행
1833년부터 “일본동물지(日本動物誌)” 간행
1835년부터 “일본식물지(日本植物誌)” 간행
1859년(63세)에 다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들어왔다가 1862년에 일본을 떠났다.
[참고=九州大學, http://record.museum.kyushu-u.ac.jp/nippon%20neo/]
Perry's expedition to Japan was preceded by several naval expeditions by American ships:
- From 1797 to 1809, several American ships traded in Nagasaki under the Dutch flag, upon the request of the Dutch, who were not able to send their own ships because of their conflict against Britain during the Napoleonic Wars. Japan limited foreign trade to the Dutch and Chinese at that time, under the policy of sakoku.
- In 1837, an American businessman in Canton named Charles W. King saw an opportunity to open trade by trying to return to Japan three Japanese sailors (among them, Otokichi) who had been shipwrecked a few years before on the coast of Washington. He went to Uraga Channel with Morrison, an unarmed American merchant ship. The ship was attacked several times, and sailed back without completing its mission.
- In 1846, Commander James Biddle, sent by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to open trade, anchored in Tokyo Bay with two ships, including one warship armed with 72 cannons, but his requests for a trade agreement remained unsuccessful.
- In 1849, Captain James Glynn sailed to Nagasaki, leading at last to the first successful negotiation by an American with "Closed Country" Japan. James Glynn recommended to the United States Congress that negotiations to open Japan should be backed up by a demonstration of force, thus paving the way for Perry's expedition.
[출처=위키백과(영어), http://en.wikipedia.org/wiki/Matthew_Calbraith_P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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