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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4NSMmBjaiug?si=mN0djvkikE-1emfL
(브람스 - 피아노 협주곡 2번 / 폴리니)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b플랫 장조는, 2개의 알레그로 악장과 한개의 느린 악장, 마지막에 다시 알레그로 악장으로 돌아오는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후반에 일반적으로 유행하던 협주곡 작풍과는 달리, 피아노 독주부분(카덴차)의 기교적 난이도와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음이 돌출되지 않으며, 오케스트라에 완전히 융화되도록 쓰여진 교향악적인 풍미를 지닌 곡이다.
제1악장 멀리서 울려오는 듯한 나른한 호른의 소리로 시작한다. 그 밑으로 무거운 피아노의 아르페지오가 낮게 흘러들어와 주제선율을 펼친다. 피아노의 제1음만으로 무대 바닥이, 혹은 홀 전체가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짧은 선율이 끝나면, 느닷없이 피아노가 분출하듯 카덴차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무겁고 예리한 발톱이 땅바닥을 내리쳐 파헤치는 음이다. 거의 건반 좌측에 치우친 저음의 무게는, 대지를 직접 파낸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잡아 뜯으면서 날아 오르는 불의 발톱.
이런 피아노에 이끌리듯 오케스트라의 튜티(*tutti:총주)가 한꺼번에 몰아 닥친다. 산맥 능선을 따라 흐르는 구름 그림자 같은 장대한 오케스트라의 울림 아래, 주제를 펼쳐나가는 피아노의 초절기교는 헤아릴 수 없이 어두운 불길을 뿜어 내는 또 다른 세상의 신음처럼 들렸다. 그 신음소리가 넘쳐 오르다가 무너지고, 쏟아져 내리다가 다시 기어오르는 폭풍 처럼 회오리 치기 시작한다.
제2악장 알레그로 아파쇼나토(*appassionato:정열적으로)라고 표기되어 있다. 작가의 지시대로 피아노는 또 다시 초반부터 과감하게 일어섰다. 빛은 한층 더 멀어지고, 날카로운 발톱은 더욱 무겁고 거칠게 휘몰아치며, 그것을 바쳐든 현악이 애처로운듯이 한숨을 내쉬다 흔들렸다. 건반을 누르는 무게, 그 격력함은 피를 흘리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는 피아니스트의 영혼에서 울려나온 목소리이자, '리비에라(*소설의 주제, 정체불명의 스파이)'를 향해 토해내는 격정이었다. 숨이 막힐정도로 땅 깊숙이 내리치는 소리의 무게는, 20년이란 세월과 분노의 무게였다. 피아니스트는 눈부신 얼음의 미소를 띤 채, 미칠듯한 분노에 통곡하고 있었다.
싱클레어(*노먼 싱클레어:소설의 주인공, 천재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대담과 섬세함, 음산함과 아름다움의 천을 차례로 휘감는다. 이윽고 오케스트라의 울림과 구분하기 힘들만큼 하나가 되어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시모까지, 음의 입자는 분명 선명한 윤곽을 가지고 태어나는데도 불구하고 흘러나오자마자 서로 엉키고 성켜 결렬하게 뒤섞인다. 그렇게 땅을 향해 내리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을 향해 쭉 뻗어나가는 섬세한 탄식의 소리가 듣는 이의 가슴을 찟어 놓는다.
중간부의 마르카토(*marcato:한음한음 뚜렸하게)에서 싱클레어는 서정과 격정을 마술처럼 뒤섞는가 하면, 이어진 주제 재현부에서 다시 무겁게 신음하고, 곧이어 울려퍼지는 피날레를 향해 뛰어 오른다.
테지마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으며, 버킨(*킴 버킨:영국 정보부 MI5의 '리비에라'사건 총 책임자, 테지마의 친구)은 옆에서 들릴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쪽 좌석에 앉은 '리비에라'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의연해 보였다.
제3악장 안단테는 첼로가 연주하는 주제선율이 아름다웠다. 현악파트의 음색이 흐르는 동안, 싱클레어는 건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현악 선율 틈새에서 응축된 최상의 한방울이 떨어지듯 피아노 소리가 스며나오기 시작한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의 물방울에 놀란듯이 흠칫하고 몸을 떨며 더욱 나른한 선율을 자아낸다.
그 모습은 온 감각을 애무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싱클레어의 손가락에서 굴러 떨어지는 음은 틀림없는 물방울의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방울마다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며 흐미하게 떨어진다. 물방울은 서서히 겹쳐져 흐르는 물줄기로 변했으며, 현악의 곡선을 타고 위로 튀어 오른다. 현악이 짧은 비명을 외치자 그 아래로 피아노가 굽이치고, 다시 현악이 구슬프게 울부짓으면 피아노가 그 음을 담아 거두어 간다.
중간부에서 더욱 느린 아다지오가 전개되자, 피아노는 또 다시 물방울이 되었다. 예전보다 한층 더 조심스러운 한 방울이 선율 너머로 떨어진다. 다시 한방울. 이 음은 다른 음과 겹치거나 앞뒤로 이어지는 음이 없는 높은 단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제4악장 알레그로 그리하여 느린 악장이 사라지듯이 끝난 아주 짧은 순간 뒤에, 눈부신 빛의 입자로 돌변한 피아노가 창조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가, 빛을 발하며 쏟아져나와 최종악장인 알레그로의 질주로 이어진다. 어둠이 거둬지고 빛이 내려온다. 싱클레어의 손가락은 악마처럼 가벼웠다.
섬찍할 정도로 난이한 기교를 마치 즐기는듯한 가벼움이었다. 모든 소리가 늠름하게 일어서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살아 숨쉬지 않는 어느 존재와도 같은 청명함, 경쾌함과 빛에 감쌓인채 피아노도 피아니스트도 질주하고 있었다. 1악장에서 땅 속 깊이 파내려가던 손가락이 이번엔 하늘을 날아 오른다. 만일 이것이 사람의 손가락이라면 건반을 두드리기위한 수많은 장애물이 있어야 하는데도, 싱클레어의 손가락 앞에는 쓸데없는 것들이 일체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변함없던 싱클레어의 미소는 이제 천상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달리면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를 쉴 새 없이 잡아 당기고, 영원으로 이어진 문을 연달아 박차며, 문이 열릴 때 마다 그 빛은 더욱 강해졌다.
이윽고 피아노가 코다(*coda:종결부)의 문을 활짝 열자, 피아니스트는 한순간 그 곳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빛을 한 몸에 받아들였다. 교향악이라는 대지에 우뚝 서 있는 행복의 절정, 혹은 가장 높은 곳에 왕림한 임금과도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홀 전체가 흔들렸다. 2천명의 청중이 한꺼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진동으로, 그리고 박수의 폭풍 속에서 크게 떨렸다. 무의식 중에 버킨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 ‘리비에라’ 따위한테 이런 음악을 들려 줄 필요는 없었어…!"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2번
https://youtu.be/Iigsw9eBg4c?si=JaBnQvECWOxJc9fT
(Brahms: Piano Concerto No. 2 - Gilels, Reiner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 길렐스, 라이너)
고전파 전통으로 된 훌륭한 작품으로 스케르쪼풍의 제2악장을 덧붙여서 4악장으로 만들었으며, 그 형식을 교향곡에 접근시켰는데, 이것은 협주곡에 대한 그의 이념이 교향곡화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브람스는 이 협주곡에 스케르쪼 악장을 추가하여 하나의 혁명을 꾀하였으며, 이것은 대가적인 기교를 필요로 하는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피아노 교향곡’이라 불리우는 계기가 된다.
명 피아니스트들에게 베토벤의 다음으로 많이 선택되는 협주곡 녹음 레파토리가 아마 브람스의 2곡일 것이다. 특히 2번은 협주곡으로는 이례적으로 4악장이고 연주 시간도 매우 긴 대곡이며 기교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데도, 명곡인데다 연주 효과와 일반적인 인기가 꽤 좋아서 웬만한 연주자들은 거의 하나 이상 녹음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쌓여 온 음반의 수만 해도 상당한데, 이 곡을 새로 녹음하는 연주자에게는 기존의 음반들에 대해 자신을 어떻게 부각시키는가가 큰 문제가 될 정도다.
1881년에 작곡된 피아노협주곡 2번은 1번을 작곡하고 20년도 더 지나서 만든 것이다. 이 엄청난 인터벌이 이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었음은 물론이다. 오케스트라적 구성미는 더욱 견고해졌고 그만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모두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아 연주하는 당사자에겐 여간 고역이 아닐 듯하다. 거대한 스케일이나 구성 등에서 단순히 피아노협주곡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그 존재감이 큰 작품이다. '피아노로 연주하는 교향곡' 또는 '피아노를 위한 교향곡' 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다.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angler 1886∼1954)
독일 지휘자. 베를린 출생. J.G. 라인베르거와 M. 실링스에게 배운 뒤 취리히·만하임 등을 거쳐 1922년 A. 니키시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과 베를린필하모니의 지휘를 맡았다.
나치스가 집권하게 되자 처음에는 저항하였으나, 35년 베를린국립오페라하우스의 총감독을 맡아 제 2 차세계대전 후 전범으로 몰렸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52년 베를린필하모니의 종신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 밖에 빈필하모니·빈국립오페라하우스·바이로이트·스칼라극장·런던필하모니 등의 지휘자도 겸하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음악의 정신적인 의미나 작곡자의 심리적 움직임을 깊이 파헤치고 연구한 20세기 전반의 최대 지휘자였다. 특히 L. 베토벤·W.R. 바그너·J.A. 부르크너·J. 브람스의 작품 연주에 뛰어났다.
음악을 몸 안에 지닌 사람
나는 그가 지휘한 오케스트라 단원의 인터뷰를 담은 비디오를 잠깐 볼 수 있었다. "그가 무대 위로 걸어 나오자 일순간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몸 안에 음악을 지닌 사람 같았습니다."
이 비디오에서는 그의 지휘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처음엔 비팅이 정확해 보이더니 점차 갈수록 알아보기 어려워진다. 그의 '팔을 내리고 부들부들 떨며, 어느 곳에서도 템포나 리듬을 지시하지 않는' 부정확한 비팅 때문에 그의 지휘를 처음 받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큰 고생을 했다고 전하며, 그의 손보다 오히려 얼굴을 보고 음악의 흐름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비팅으로 모든 것을 단원들에게 알려주는 조지 셸 같은 지휘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의 느낌'을 단원들에게 알려줄 목적으로 그의 얼굴에 주목하도록 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런 지휘 스타일은 당연히 단원들이 그에게 극도로 집중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는 이 스타일을 니키쉬에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니키쉬의 지휘를 받은 단원의 말은 "그는 그저 우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신들린 듯 연주한다"였다. 카라얀이 다음에 인용할 인터뷰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푸르트뱅글러가 니키쉬에게 배웠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어느 정도 심증이 간다. 그의 부정확한 비팅은 그의 의도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말은, "규격화된 지휘는 규격화된 예술을 낳을 뿐이다."
그의 리허설 방식은 아주 독특했으며, 일반적으로 그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처럼 리허설을 별로 안 하고 실황에서의 영감에만 의존하는 지휘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수백 번은 지휘해 본 곡을 연주하게 되더라도 악보를 다시 철저히 읽어 보았다고 한다. 그의 리허설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자세한 묘사는 바로 카라얀의 입에서 나왔다. 글의 내용에서 추정하면 약 1985년 정도에 가진 인터뷰로, 그의 연주 스타일과 음악, 리허설 방법, 지휘 테크닉 등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려 준다.
푸르트뱅글러의 추도 연주회를 거부할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그를 싫어했던 카라얀이, 이 인터뷰에서는 "푸르트뱅글러는 나에게 온 세상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볼 수 있을 때는 그의 모든 리허설을 지켜 보았다"고 말하는 것만 봐도 카라얀에게 미친 그의 영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1994년 4월호 '레코드리뷰' 56∼60 페이지에서 인용한다. 이 인터뷰에서 질문은 생략하고 카라얀의 대답만을 정리했다.
저는 그의 연주회를 아마 13세 아니면 14세 때 접했고, 그 후 그는 늘 나의 음악 인생과 함께 했습니다. 제가 아헨에 있을 때, 쾰른에서 그의 연주회가 있었는데 프로그램에 슈만 4번과 차이코프스키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직 모르던 슈만은 그의 연주에 의해 너무나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너무나 감동하여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서 연주회 직후 아헨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를 데려갔던 친구는 연주회 후 그를 만났는데, 슈만의 감동적인 연주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길, "아, 그러면 차이코프스키는 별로였나 보죠?"
(중략) 그건 아마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스타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스타일은 그가 스스로 정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는 갑자기 이렇게 외쳤습니다. "좋았어요, 하지만 그건 그냥 '그렇게' 울리면 안 돼요. 그건 더욱 더 '그렇게' 울려야 해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정말 그가 말한 대로 '그렇게' 음이 울리면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기술적 지시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오케스트라가 그와 함께 어우러져 마치 한 인간과 영혼 같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테크닉상으로도 훌륭했지만, 푸르트뱅글러는 무엇보다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느낌이 오케스트라로 전달되어 사람들에게 옮겨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찾아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부터 솟아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푸르트뱅글러는 분명 의문의 여지 없이 오케스트라를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언제 주도해야 할지, 언제 하지 말아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건 그 스스로에게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도 세게 박자를 치는 일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그 자신 특유의 언어로 두 음악의 거점인 베를린과 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입니다.
(중략) 누군가가 리누스 빌헬름이라는 베를린 필 더블 베이스 주자에게 물었습니다. "마태 수난곡처럼 서두가 무척 느린 곡을 당신은 언제쯤 어떻게 연주하기 시작하는지요?" 그는, "지휘자가 내 보면대 모서리를 슬쩍 스치는 듯 칠 때 제가 신호를 살짝 보내면 오케스트라가 연주에 들어갑니다" 같은 질문이 빈 필 주자에게도 반복되었습니다. "푸르트뱅글러씨는 언제 지휘를 시작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우리가 갈피를 못 잡을 때지요" 물론 다소 심한 표현이지만, 이것이 그가 단원들과 조화를 이루는 스타일입니다. 그는 때때로 오케스트라를 마치 아르페지오처럼 흩어 놓았는데, 하프 협주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교할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는 정말 지독하게 반복해서 연습을 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매번 연주 여행 때마다 족히 백번도 넘게 해 본 것을 오후 5시면 정확히,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아도 재차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케스트라에서 기분 나쁜 긴장감이 (그를 향해) 전해져 올 때까지 오랫동안 연습을 시켰습니다. 이것은 그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나에게 얘기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오케스트라가 지쳐서 화가 날 때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그는 연습을 중단시키고 "자 이젠 됐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의 연주회의 분위기를 여기서 정확히 묘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의 연주회를 본 사람들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텐데, 역시 카라얀의 말은;
어느날 당시 빈 필하모니의 유명한 오보이스트인 분더러 교수(필자주; 카라얀이 빈 음대에서 수학할 당시 지휘과 교수였다)에게 오후 3시 연주회장에 있었던 60세 내지는 65세 할머니들 중의 한 분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 교수님, 정말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푸르트뱅글러씨와 당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를요. 우린 너무도 행복해요. 우린 푸르트뱅글러씨를 너무도 존경하게 되었어요. 느끼셨다시피 아! 그가 뿜어대는 열기가 오케스트라로 옮겨 가는 광경이란... " 그러자 분더러는 대답하기를 "아, 우리는 그 열기를 느끼지 못한답니다. 왜냐하면 그 열기는 곧장 관객에게로 향하거든요."
다시 말해서, 관객 전체를 사로잡아 버릴 수 있는 영향력이 인간에게서 뿜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푸르트뱅글러의 지휘 스타일에 대해 얘기한다면, 분명한 것은 그가 지휘자 니키쉬와도 같은 자유로움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즉 "그에게 무언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그 어떠한 것도 장애가 되지 못할 그런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연주회를 본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빼놓지 않는 말이 '살아 움직이는 음악', 그리고 연주회장 및 청중을 완전히 압도하는 뜨거운 열기이다. 실황 녹음에도 이런 매력이 그대로 포착된 연주들이 상당히 많은데, 특히 그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는 대표작은 바이로이트의 1951년 실황인 유명한 '합창' 교향곡과 1948년 베를린 필을 지휘한 브람스의 교향곡 4번(모두 EMI)이다. '합창'교향곡의 4악장 끝 부분의 맹렬한 질주를 처음 듣고 놀랐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며, 지금도 경이롭기만 하다.
브람스의 4번은 문자 그대로 레코드가 감상자를 모든 면에서 압도하는 명연주다. 1악장 코다의 격렬함은 상상을 초월하며, 4악장은 전체적으로 그 강력한 힘, 각 부분의 선명한 대조, 특히 코다에서 보여 주는 압도적인 가속도가 이 음반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음악이 듣는 사람의 머리 위에 그대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을 주는 연주이다. 음질이 별로 좋지 않은 레코드가 이 정도의 느낌을 준다면, 연주회장에 앉아 있었을 청중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는 아마 말이 필요 없을 줄 믿는다.
악보에서 해방된 곡의 의미
그의 음악의 본질은 '그가 발견한 곡의 의미를 악보에서 해방' - 이 이상 다른 어구를 찾지 못하겠다 - 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템포와 긴 프레이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만 들은 사람들은 그가 느린 템포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처럼 극히 빠른 템포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즉, 그의 음악의 가장 큰 외면적인 특성은 '곡의 내용 및 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템포를 사용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에 비해 그의 음악의 내면적인 특성(표현 방향)은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성향을 띤다. 특히 그에게 잘 맞는 곡들은 다소 심각한 낭만파의 곡들인데, 베토벤에서는 그의 구성을 파악하는 능력이 지휘를 성공시키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는 데 대해, 브루크너, 브람스 등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에서는 그 외에 그의 내면이 베토벤에 비해 다소 전면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 '비창'의 연주는 아마 그의 내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연주가 아닌가 한다. 반면에 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에서는 그의 연주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의 표현 양식과 심각한 표정이 맞지 않는 곡이 많은 탓이다. 바흐는 그의 낭만주의적 스타일로 볼 때 양식상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어느 애호가의 의견인즉, "그는 남의 곡을 빌려 자기의 할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바흐에서도 이런 식이었으니, 기호(耆好)가 갈라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의 레파토리는 상당히 넓어서 바흐 및 헨델에서 베를리오즈, 프랑크 등의 프랑스 음악, 힌데미트,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까지 걸친다. 녹음이 얼마 없을 뿐이지(20세기 중반까지는 적극적으로 현대음악을 녹음하기엔 레코드 시장이 아직 좁았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현대음악에 대해 무관심한 지휘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힌데미트의 음악 및 작곡자의 좋은 옹호자였고(앞을 참조),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은 12음 기법으로 된 규모가 큰 야심적인 작품인데 그와 베를린 필을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다고 한다.
바르토크도 자주 연주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작곡자와 함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세계 초연했으며(연주는 작곡자에게는 아주 불만스러웠다고 전하지만... ^^), '현악기와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이 초연된 후 불과 몇 개월 안 되어 독일 초연을 베를린 필의 연주회에서 했다는 말이 있다. 1953년에는 메뉴힌과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EMI)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와 악보를 검토하는 사진도 있으며, 발레곡 '요정의 입맞춤'은 실황녹음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가 가장 장기로 삼았던 레파토리는 베토벤에서 브루크너까지 이르는 독일 고전과 낭만파임이 틀림없다. 베토벤은 자그마치 천 회 이상 그의 콘서트 프로그램에 올랐다고 하며, 곡의 숫자를 감안한다면 브람스도 베토벤만큼이나 많이 연주했다고 한다.
바그너도 물론 그의 장기였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 및 관현악곡 모음집은 지금까지도 타의 모범적인 해석으로 꼽힌다. 브루크너의 녹음은 베토벤만큼 많지는 않지만,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곡가의 한 사람이 틀림없다. 생전에 브루크너 협회장이었으며, 자신이 작곡한 완성된 2곡의 교향곡이 모두 브루크너 스타일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1947년 베를린 필 복귀 실황에서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연주(DG, 5월 27일)에서 보면, 1악장에서 설정한 기본 템포가 셋임을 알 수 있다. 주요주제(♪♪♪ ∼)가 명확히 나타날 때는 극히 느리며, 제시부에서 보듯이 주요주제 다음의 카논적으로 주요주제의 동기가 겹쳐 쌓일 때는 아주 빠른 템포를, 그리고 서정적인 제 2주제에 대해서는 중간의 템포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템포를 자주 바꾸는 것은 사실 큰 모험인데, 이 연주를 듣는 느낌은 이 '모험'이 강력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전개부의 끝 무렵에서 빠르게 진행하다가 급하게 템포를 바꿔 주요주제가 느리고 음 하나하나를 강조하면서 등장하는 순간에 곡의 구성이 확실해지며, 이 뿐 아니라 주요주제에 - 이 교향곡 전체를 하나로 잇는 초석이다 - 베토벤이 부여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 해석은 놀랄 만큼 인상에 오래 남는데, 템포의 적절한 변경(이것이 아고긱 Agogik 이다)이 얼마나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가를 명확히 예시한다.
그의 표현의 깊이와 매력을 보기 위해서 1938년 베를린 필과 스튜디오 녹음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EMI)을 주목하자. 이 연주는 푸르트뱅글러의 많은 녹음 중 가장 개성적인 것의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느린 템포를 취했는데, 오히려 긴장도로서는 유명한 므라빈스키의 스테레오 녹음(DG)보다 더 강하다. 1악장 전개부 끝 무렵에서 서서히 사그러들었던 음악이 점차 고조되는 모습이 전형적인 푸르트뱅글러의 개성이다.
재현부에서 밝은 2주제가 재현되기 직전에 한없이 떨어져내리는 표현은 얼마나 다음의 2주제를 돋보이게 하는가. 1악장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3악장으로, 상당히 느리게 시작한 '빠른 행진곡'이 나중에 엄청난 '초고속 열차'로 바뀌는 과정은 청중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중간에는 일단 처음보다도 더 느려졌다가 코다 전의 동형진행 악구에서 가속이 붙어서 코다에서는 엄청나게 질주하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므라빈스키의 음반보다 한 배 반 정도는 느리게 시작해서 더 빠른 속도로 끝나는 정도니, 정말 압도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4악장 정점의 절규하는 호소도 극히 설득력이 크다. 참고로 말하면, 어느 음악학자가 '비창'의 10여 가지 녹음들을 프레이징, 강약 등의 여러 관점에서 철저히 분석했는데 악보를 가장 잘 지켰다고 판정한 음반이 바로 이 1938년의 EMI 연주였다고 한다. 이 점만 보아도, 그가 악보를 내내 무시한다는 비판은 좀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황 연주에서 하나만 더 살펴보자. 1951년 바이로이트의 베토벤 9번 연주인데, 개인적으로는 3악장이 가장 인상이 깊다.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어조로 시작하여 바이올린이 주제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금새 베토벤과 푸르트뱅글러의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이 느린 템포에서도 주제 전체가 완전히 파악되어 있으며, 그의 프레이징 솜씨가 얼마나 탁월한지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동료 음악가 및 예술가들은 그의 음악을 어떻게 보았을까? 물론 이런 개성적인 지휘자에 대해 의견이 꼭 일치할 수는 없으므로 찬반 양론을 모두 소개하는데, 마지막에 카라얀의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를 다 알고 영향을 많이 받은 그라면, 결론을 내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 클라우디오 아바도 ; 푸르트뱅글러는 젊은 시절의 내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지휘자이며, 베토벤 연주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지휘자는 단연 그입니다... 베토벤 음악의 '논리적 중요성'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바로 그죠....
● 클라우디오 아라우 ; 거의 70년의 음악 인생 후, 존경하게 된 음악가 중 푸르트뱅글러를 첫손 꼽고 싶다.
●마리아 칼라스 ;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연주에 대해) 그는 내게 바로 베토벤이었습니다.
●파블로 카잘스 ;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지휘자다.
●클리포드 커슨; 내가 슈나벨에게 배우던 베를린 유학 시절의 가장 생생하고 지속되는 기억은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한 베토벤 9번이다. 그 연주의 품위와 장엄함의 깊은 인상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다... 나는 그의 동시대의 명지휘자 4명의 연주와 함께 그의 9번을 라디오로 들었는데, 30년 후에도 그 느낌은 변함이 없었으며, 다른 4명과 비교하여 훨씬 영감이 넘치는 지휘였다. 푸르트뱅글러의 이름은 내게 젊을 때의 음악적 열광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이런 경우에 아주 드문 일이지만, 시간에 따라 퇴색하지 않는다.
● 엔리코 마이나르디 ; 그의 음악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그 템포이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긴 프레이징, 대상과 하나가 된 정열이다. 그의 지휘에서 작품의 숨은 의미가, 그 실체가, 나아가서는 표정까지도 환하고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이들은 그만 푸르트뱅글러의 지휘만이 유일 절대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고 만다.
● 예후디 메뉴힌 ; 그가 지휘하면 음악이 악보에서 살아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맥박치는 광대한 공간의 인상에 가장 압도당했어요.
● 오스카 코코시카(화가) ; 그는 그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다른 세계에서 온 대사이다. 그는 단지 그가 남겨야 할 메시지를 자유로이 풀어놓기만 할 뿐이다...
● 스피아토슬라프 리히테르; (푸르트뱅글러가 남긴 녹음들에 대해)
베토벤 교향곡 4번 ; 이 교향곡의 가장 뛰어난 연주임이 확실하다. 누가 이론(異論)이 있겠는가? 베토벤 '피델리오' ; (마젤, 카라얀, 푸르트뱅글러의 연주를 차례로 들은 뒤) 세 번째 해석이 오늘의 승자였다. 이것이야 사실 이 위대한 지휘자의 상례다.
브루크너 교향곡 8번 ; 내가 오랜 동안 알아왔고 또한 사랑해온 - 개인적으로 그의 최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 브루크너의 아름다운 8번을 다시 들었다. 푸르트뱅글러는 매우 느린 템포를 취하는데, 너무 느려서, 사실 당신은 작곡가의 의도에 반하여 방황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너무 장엄하고 확신이 있어서 논의의 여지가 없다. 개성있고 기적과도 같은 무엇이다.
바그너 '반지' ; 언젠가 우리는 나흘 저녁을 푸르트뱅글러의 53년 '반지' 녹음에 바친 일이 있다. 그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없는 만(灣)이 있다는 것 외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므라빈스키와 로스트로포비치의 대화
므라빈스키 ; 현재 가장 뛰어난 지휘자는 누구라고 생각해?
로스트로포비치 ; 아마 푸르트뱅글러겠지? (다음에 므라빈스키는 바츨라프 탈리히라고 대답했긴 합니다만... ^^)
●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 그의 템포는 참 푸근하고 따뜻했습니다.
●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그는 천재다.
● B.H.Haggin(음악 평론가, 1937년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공연을 듣고 난 뒤에 쓴 글)푸르트뱅글러는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피아니시모를 위해 과도한 디미누엔도를 사용하였고, 폭발적인 포르티시모를 위해 미칠듯이 채찍질하는 크레센도를 들려주었다. 이것은 음악적 구조의 실현이 아니라 그 자신의 파동치는 감정 상태의 과시였다. 더구나 이것은 디미누엔도에서의 넋을 잃은 듯한 그의 황홀한 표정과 크레센도의 격렬한 제스추어를 통한 시각적 효과에 의해 한층 더 청중들의 감정을 고양시켰는데, 종국에 가서는 거의 히스테리적인 청중들의 환호를 끌어내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내가 만난 독일의 엘리트 음악가들과의 솔직한 대화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노골적으로 "그것은 최악의 연주였다"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렸는데, 그는 리듬의 구조에 손상을 입혀가면서까지 지나치게 로맨틱하고 랩소딕한 경지의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남발하였으며 명쾌하지 못한 지휘 동작은 여러 군데에서 각 파트의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 후고 부르크하우저(1920~50년대의 빈 필 버순 주자, 빈 필 의장을 역임)
그의 지휘는 부정확하고 희미한 경우가 많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의 지휘하에 음악을 정확하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육감을 발달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서 호른으로 시작하는 5도 음정의 두 음표가 정확하게 동시에 울린 적은 거의 없었다. 그가 빈 필에서 객원 지휘한 브람스 교향곡의 해석은 음악의 낭만화의 경향에 그가 얼마나 완벽하게 지배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베토벤의 홀수 교향곡들에서조차 이러한 경향을 보임으로써 바인가르트너가 확립해 놓은 고전적 전통으로부터 매우 동떨어진 해석을 들려주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서는 실제로 대중들을 미칠듯이 열광하게 만들었다. 이 음악 전체에서, 특히 느린 3악장에서 그는 너무나 로맨틱하게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에 음악가들은 그 연주가 고전악파의 음악이 아니라 슈만을 연상케 하는 낭만파적인 음악처럼 들린다고 불만을 표현했다. 그의 연주에 깊이 빠져든 청중들은 그야말로 가장 위대한 지휘자라고 믿기도 하였으나 독일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음악가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다.
대중의 광적인 숭배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최후의 몇 년 간 그와 같이 일했던 연주자들은 그가 앓고 있는 병 때문에 한쪽 귀의 기능이 마비되어(옮긴이 주; 이것은 1952년의 심한 폐렴의 후유증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무대와 객석의 사이를 조정할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느꼈다. 이것은 비평가들에게는 심각한 불만의 대상이었으나 아무도 감히 그의 연주에 대한 불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말이 그의 광적인 팬들에게 퍼지면 그것이 불씨가 되어 일대소동을 일으킬 것이고 그 소동에 자신이 휘말리게 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이었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가 자신의 생의 말년을 보낼 때 가장 기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불확실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결심'을 음악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베토벤 제 5번에서는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느끼다시피 말입니다.
물론 여러 비평에서는 그가 그렇게 표현하는 데 대해 비판이 높습니다. 그가 특히 앞에 말한 부분에서는 거의 다섯 배나 느리게 지휘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평가는 부디 삼가 주십시오. 그건 그의 스타일이고 음악이지 우리가 평가할 몫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Jbzf-n4LqQ?si=E6xGSZ57wsavr9V8
(Furtwängler, Edwin Fischer most lively: Brahms Piano Concerto No.2 live 1942.Special transfer)
글출처: 하늘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