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의 병맛 코드에 우리는 열광한다
지난해 야후코리아 선정 인터넷 신조어 3위를 차지한 '병맛'은 인터넷 폐인들의 집합소 디시인사이드 카툰 갤러리에서 촉발됐다. '병맛'은 '병신 같은 맛'의 줄임말로 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 없음'을 뜻하는 인터넷 신조어다. 주로 무언가가 수준 이하일 때 '병맛 같은 정치인' "이런 병맛 같은 ActiveX" 등으로 쓰이지만 찌질한 정서를 정의하는 코드로도 쓰인다. 어이없는 진행방식, 촌스러운 세트와 분장 등으로 아직도 방송계에 회자되는 MNET <재용이의 순결한 19> <전진의 여고생> <꽃미남 아롱사태>, 범우주적 페이크 다큐 <uv드롬>, 각종 폭로와 구박이 난무하는 MBC <라디오스타> KBS <개그콘서트> 등이 모두 병맛의 전형. 병맛 코드의 지상파 돌파를 선언한 것이 바로 MBC <무한도전>이다. "참 병맛(이상한) 진행" "ㅋㅋㅋ"라는 자막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권고를 받은 바 있는 <무한도전>은 평균 이하의 남자들이 벌이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포맷으로 PD와 출연진 모두 B급 정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를 작가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팬들로 일종의 두꺼운 마니아 층을 생성한 것이 사실. 방통위는 "원 펀치 파이브 강냉이 거뜬하다"는 반지 패션 자막, 맨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리는 장면에서의 '찰지구나' 등의 자막, 정준하와 박명수의 '치덕치덕' 불장난 춤 등이 시청자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지만 시청자들은 이에 열광한다. 드러내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속으로는 늘 바보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가. 무한도전은 아닌 척하면서 정부 정책의 부당함을 폭로하며 봅슬레이, 조정 등 비인기 종목을 센스 있게 홍보한다. 그 순간 프로그램은 더 이상 평균 이하가 아니다.
누가 우리를 잉여라 부르는가
매주 수요일 네이버 웹툰 페이지는 폭풍클릭을 하는 네티즌들로 몸살을 앓는다. 이말년(본명 이병건) 작가가 연재하는 <이말년 씨리즈> 때문. 말년 병장처럼 살고 싶어 '이말년'으로 지었다는 그의 만화는 디씨와 야후를 거쳐 2009년부터 네이버에 연재 중이다. 만화는 마치 중학생이 학습장에 장난치듯 헐렁하게 그려져 있다. 촛불 시위 당시 주인공이 담배를 돈통에 넣은 바람에 차에 불이 붙자 버스기사가 "이런 게 내 승객이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고 말하며 XX산성으로 차를 돌리는('불타는 버스' 편)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집에서 쓸데 없는 것을 갖고 오라'는 엿장수에게 37세 백수 삼촌을 데리고 가는 식('엿 바꿔먹기 대작전' 편)이다. 병맛 개그와 사회 패러디를 섞는 이말년 작가는 '기-승-전-결' 대신 '기-승-전-병', 병맛 게이지가 최대일 때는 '기-병-병-병' 구조를 재현한다. 특히 이말년 씨리즈 상에서만 존재하는 농촌체험 가상의 온라인 게임인 '두덕리온라인'은 네티즌이 실제 개발을 시도할 정도. 이렇듯 인기가 높다 보니 후유증도 생겼다. 올해 초 한 매체가 학교폭력의 주범으로 웹툰을 지목하자 해당 작가의 연재가 중단된 것. '방귀대장 뿡뿡이가 방귀만 껴도 초등학생에게 유해하냐'는 만화계 안팎으로 성명이 터져 나오고, 이말년 씨리즈가 초등학생에게 유해하다는 기사를 본 작가가 트위터에 '숨을 내뿜으면 지구에 유해하니 이제부터 숨을 쉬지 않겠다' 며 디스하기도 했다. 병맛 웹툰에는 폐인문화, 디씨문화에 익숙치 않다면 해석할 수 없는 숱한 은어들이 있다. '나는 저 뜻을 알지' 식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것이 퍼져 널리 쓰이는 관용어가 되는 것. tvN <코미디 빅리그> '라이또' 코너를 보지 않는다면 '찐찌버거'가 '찐따, 찌질이, 버러지, 거지'를 뜻함을, '세요나쁘레'가 방어기술 스킬임을 절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차도남' 만든 조석 <마음의 소리> 600회 연재 돌파
병맛은 과연 직업 없는 루저들의 문화일까? 인기 웹툰은 월 방문자수 수백만을 거뜬히 넘기며, 대부분의 웹툰은 포털 연재를 거쳐 단행본 출간과 함께 드라마나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웹툰 <골방환상곡>의 워니 작가가 '엄친아'라는 단어를 만든 것을 아는가?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 '끝판왕' 등 신조어를 일상적 관용어로 쓰게 만든 웹툰 작가 조석은 단 한 번의 펑크도 없이 <마음의 소리> 네이버 연재 5주년을 넘겼다. <마음의 소리>는 4월 현재 누적 조회수 13억을 돌파, 게임·팬시용품으로도 만들어졌다. "워싱 처리된 교복으로 저 소년의 시크함이 곳곳에 배어들어 극도의 핏을 끌어올리고 있다. 간지력이 계속 상승하고 있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줄여 입은 3통 스키니 교복 바지와 병맛 지드래곤 차림으로 떠도는 고교 패셔니스타들이 대거 등장했던 기안84의 <패션왕>(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은 '패션계를 반영한 극사실주의 병맛 웹툰'이라는 평을 얻었다. 제2의 강풀이라는 평을 얻고 있는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는 얼마 전 영화 판권 계약을 맺었으며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짚은 <쌉니다 천리마마트>도 시트콤 계약을 맺었다. 병맛 웹툰은 이제 소수 디씨폐인들의 사교장이 아니라 대중문화가 원하는 탁월한 스토리텔러이자, 문화 창작자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B급 저예산 악취미 영화들이 쏟아진 1980년대 헐리우드에 샘 레이미나 피터 잭슨 등 재주 있는 감독들이 등장한 것을 보라. 병맛 코드는 단순히 저급함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짚는다. 웃기기만 하는 것 같지만 제대로 된 온갖 패러디, 대충 그린 기상천외한 개그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꿰뚫고 있는 것.
왠지 등신 같지만 멋있어… 재미있으면 그만
네티즌 사이에 '왠지 등신 같지만 멋있어'라는 웹툰 이미지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 인기에 힘입어 티셔츠로도 만들어질 정도. 주로 20~30대인 웹툰 작가들은 사람들 사이에 신조어를 만들고 유행시킨다. 무책임한 사회 현실에 분노한 것이 영국의 '펑크문화'라면 이말년씨리즈는 '섹스피스톨즈'라고 부를 정도다. 최근에는 '병맛'을 분석한 논문과 책도 등장했다.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이파르 펴냄)에 실린 '너희가 병맛을 아느냐?-웰컴 투 더 <이말년월드>'라는 논문에서 김수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는 20대의 정체성을 이말년월드의 병맛 웹툰 코드로 설명한다. "이말년에 와서야 비로소 잉여들의 '문화적 플랫폼'이 가시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며 '인터넷'과 '잉여'의 만남이 '병맛'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느닷없는 패러디 등 아는 사람만이 아는 잉여짓을 통해 '너도 아는구나' 식의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 어처구니 없는 소재와 엽기적 결말에 사람들은 '덕후'처럼 열광한다. <지붕뚫고 하이킥>이 느닷없이 교통사고로 끝났을 때 사람들은 '병맛' 결말이라 불렀고, <무한도전>에서 알래스카로 김상덕 씨를 찾으러 간 것도 병맛 코드로 분석한다. 사람들은 잘 만들어진 완벽함에는 답답함을 느끼며, 무언가 조악하고 어설픈 그림과 영상이지만 결핍과 패배를 아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기호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의미나 맥락이 없어도 재미 있으면 그만이다. 주부들이 욕을 하면서 막장 드라마를 보듯, 병맛이라고 칭하면서도 계속해서 즐기게 되는 것.
완벽하지만 획일적인 문화 대신 병맛 언더그라운드로
영화 <반드시 크게 들을 것>에서 인디밴드 타바코주스 멤버가 한 말 때문에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시리즈는 루저와 잉여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술로 시간을 탕진하는 등 한심하게만 여겨지던 이들이 무대 위에 올라가자 에너지가 폭발한다. 뭔가 대단한 메시지 없이 힘을 빼고 툭 던진 말이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몰린 10~30대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됐다. 병맛 문화는 때로 과격하고 놀랍도록 저질스러울 때도 있지만 루저들의 집단이 만든 수준 낮은 B급 저질 문화가 전문인력에 의해 생산된 콘텐츠를 종종 압도하곤 한다. 잉여인간, 저질, 루저라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창의적인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이들은 기성시대의 정형화된 역사와 질서에 정색하는 대신 어떠한 의미도 이유도 담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긴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99%의 대중을 사로잡는 것. '병맛'은 쓸모 없이 남아있는 인터넷 유저가 사회를 향해 짠 스크럼을 초월해, 잠재력을 가진 컬처코드가 됐다. 완벽한 스펙의 엄친딸 같은 웰메이드 영화나 만화 대신 병맛 코드를 함께 즐기고 SNS로 공유하며 드라마나 영화, TV 프로그램으로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일등만 대접받는 막장 같은 세상을 대중은 어떤 거대한 담론도, 실용성도 없는 '병맛'으로 대항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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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보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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