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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愼鏞碩의 지구촌 이야기] 에센광산촌에 ‘광부기념회관’을 세운 派獨광부
라인강 추천 0 조회 7 10.08.25 22: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愼鏞碩의 지구촌 이야기] 에센광산촌에 ‘광부기념회관’을 세운 派獨광부들
 
派獨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朴正熙 대통령이 함께 통곡한 ‘함보른 광산’ 강당이야말로 오늘날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한국인들에게는 역사의 현장이요, 성지(聖地)라고 생각했다.
 
愼鏞碩
⊙ 1941년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駐파리특파원·논설위원, 한국인권재단 이사장 역임.
⊙ 저서: <현장에서 본 프랑스 교육> 등.
⊙ 상훈: 佛 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
愼鏞碩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부회장
에센에서 문을 연 ‘광부기념회관’ 입구.
 독일 라인 강변에 자리 잡은 에센(Essen)이라는 도시는 공업국가 독일의 심장부에 해당되는 곳이다. 지금은 인구 60만명의 쇠락한 중소도시쯤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중공업으로 유럽을 제패했던 루르 공업지대의 중심 도시이자 탄광 도시이기도 하다.
 
  금년 초 수원과 인천에서 발행되고 있는 <경인일보> 오피니언란(欄)의 기고문을 통해 에센에 ‘광부(鑛夫)기념회관’이 개관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기쁨과 감동을 느꼈다.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가 파견됐던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파리에서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에센을 위시해 루르 지방의 오버하우젠, 캄프린트포르드, 뒤스부르크 등 광산촌을 찾아가 취재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개인적으로 가까워진 광부 출신 친구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 중에는 파리에 와서 식당 등 자영업을 했던 사람들도 있고, 캐나다와 미국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거나 독일에 계속 남아 한인(韓人)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에센에 ‘광부기념회관’이 생겼다는 뉴스는 또 다른 의미로도 감동적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성장 과정에서 루르 공업지대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터키로부터 많은 근로자가 와서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근로자들이 스스로 만든 기념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한국인들, 특히 광부 출신 분들이 드디어 ‘뜻있는 일을 해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광부기념회관’ 뉴스를 접한 날부터 현지에 직접 가서 관람객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잠재적 목표’가 나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자리 잡았다.
 
  한국은 광부와 간호사를 수출하던 나라에서 이제는 첨단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수출하는 나라로 변모했다. 그 한국의 광부 출신 인사들이 기념관을 자신들이 일하던 에센에 세웠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들뜬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기념회관에 전시된 파독 광부들의 당시 기념사진.

 
  ‘7986명의 아름다웠던 그들’
 
뒤스부르크 함보른 지역에 위치한 광산회사 강당 앞에서의 필자.

  지난 4월 9일, 루르 지방은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였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겨울의 끝자리가 길던 올해 지구촌 북반부의 날씨는 서유럽 루르 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독일에서 1970년대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뒤셀도르프에서 내과의사로 이름을 날리던 김계수 박사와 ‘광부기념관’ 개관에 힘써 왔던 분 중 한 분인 유상근씨와 함께 에센의 주택가에 자리 잡은 기념관 앞에 섰을 때는 많은 감회가 솟구쳤다.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독일로 건너와 광부라는 중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몸을 던졌던 사람들이 45년이 지난 오늘날 에센 시내에 번듯한 기념관을 마련하고 간판을 걸어놓은 것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집념과 저력을 느꼈던 것이다.
 
  기념관을 마련하게 된 경위 또한 감동적이다. 한국 출신 광부들을 고용했던 독일 광산회사에서 퇴직 보험금으로 적립했던 돈이 있었다. 이 가운데 퇴직보험금을 찾아가지 않아 돈이 모였고, 이 돈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퇴직보험금 상환 마지막 시한이 지나자 독일 측은 우리 정부(노동부)에 기금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노동부에서는 이 자금을 광부 출신 관련 행사 비용 등으로 지출했고, 그 과정에서 재독(在獨) 광부들은 “이 돈으로 광부기념관을 건립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회(會)’에서는 일단 천주교회관으로 쓰이던 건물이 매물(賣物)로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전체 대금의 일부를 노동부에서 보내온 자금으로 지불해 회관을 확보했다고 한다.
 
  참고로 ‘글뤽아우프’란 광부들이 탄광 갱도(坑道)에 들어갈 때 교대하는 광부들과 나누는 ‘(깊은 갱도에서) 무사히 올라오라’는 뜻의 독일어 인사말이다.
 
  기념회관 건물에는 전시실과 회의실이 갖춰져 있었고, 주방 시설도 있어 단체 회식도 가능하다. 건물 뒤편에는 산책과 모임을 할 수 있는 넓은 녹지(綠地)도 있었다.
 
  광부기념관 관계자는 “전(全)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광부 출신 인사들에게 기념관에 전시할 만한 자료들을 제공해 달라고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며 “국내 언론사와 관련 기관을 통해서도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기념회관에는 1960~70년대 광부 생활 사진들과 신문기사 등이 전시돼 있고, ‘7986명의 아름다웠던 그들이 대한민국을 비춥니다’라는 글과 함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의 모습을 담은 대형 동판(銅板)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광부기념회관’은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회’ 등 관련 단체들과 함께 건물의 잔금(殘金)을 치르기 위한 모금 활동을 계속 벌이는 한편, 관련 자료를 더 확보해 명실상부한 기념회관이 되도록 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어렵사리 마련한 기념관이 재독 광부 출신 인사들뿐 아니라 교민사회, 그리고 유럽을 찾은 한국인들의 뜻있는 방문지가 되기 위해 보다 많은 관심과 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폐광된 함보른 광산
 
1964년 12월 독일의 함보른 탄광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광부 간호사들을 위로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작은 네모진 사진은 광부 간호사들이 박대통령 연설을 듣고 눈물을 연신 닦아내는 모습.

  오랜만에 루르 지방을 찾은 김에 뒤스부르크 함보른 지역에 있는 당시 함보른 광산회사의 강당을 둘러보기로 했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西獨) 공식방문을 마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본국에서 파견한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나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던 곳이다.
 
  당시 박 대통령의 연설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9일로서 사실상 공식 일정을 마친 박정희 대통령은 10일 오전 10시55분 자동차 편으로 함보른 광산회사로 향했다. 반 마일이나 되는 차량 행렬이 라인강을 따라 달릴 때 약 300여 명의 한국 교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함보른 회사에 도착하자 박 대통령은 이곳에서 일하고 있던 약 600여 명의 한국 광부와 간호사를 격려, 선물도 나누어 주면서 이들의 향수를 달랬다. 태극기의 물결에 휩싸인 박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자리에 앉으며 감개무량한 눈물을 보였고, 광부와 간호사들도 여기저기서 눈시울을 적셨다…(하략).”
 
  ‘글뤽아우프회’에서 2009년에 펴낸 <파독 광부 45년사(1963~2008)>에 이런 대목도 등장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 순간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 목이 멘 소리로 변해 갔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歌詞)를 대신해 버렸다.
 
  대통령 내외와 300여 명의 광부와 50여 명의 간호사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나갔다. “여러분, 만리타향(萬里他鄕)에서 이렇게 상봉(相逢)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연설 원고를 옆으로 밀쳐 버렸다.
 
  “광원(鑛員)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번영의 터전만이라도…(닦아 놓읍시다).”
 
  결국 박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대통령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광부들에게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광부들의 개인 기숙사를 일일이 방문해 격려하며 차에 올랐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루르 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바로 이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동행했던 김계수 박사와 유상근씨도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 장소를 알고 있었지만, 탄광은 폐광(廢鑛)되고 함보른 광산회사도 과거 강당으로 썼던 건물을 뒤스부르크시(市)에 양도했기 때문이다.
 
 
  추억의 강당은 스포츠팀의 연습장으로 활용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한 강당 내부. 지금은 체육관으로 쓰이고 있다.

  에센 지역에 거주하는 ‘글뤽아우프회’의 부회장 박진건씨를 광부기념관에서 만났다. 박 부회장은 인근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 함보른 광산회사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옛것을 소중히 하고 기억하는 독일인들의 덕을 톡톡히 본 순간이었다.
 
  함보른 광산회사 강당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잡화점 주인에게 “46년 전 한국의 대통령이 연설했던 장소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기억을 되살려 강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80세를 넘긴 한 할머니는 한국 대통령이 탄광촌에 왔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은 그 강당이 체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 왔다 간 사실을 기억하는 독일인들도 대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연설하고 함께 울었던 강당은 뒤스부르크시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뒤스부르크시는 이 강당을 스포츠팀들의 연습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토마 씨는 “금년 초 KBS 제작팀이 들렀던 적이 있다”며 “한국인들이나 미디어에서 46년 전 일에 아직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궁금하다”고 했다.
 
  필자는 토마 씨에게 “한국 사람들도 독일 사람 못지않게 역사를 소중히 생각한다”며 “1964년 당시 이곳을 방문해 광부, 간호사들 앞에서 연설했던 한국 대통령의 경제발전 집념이 오늘날 한국 국력의 바탕이 됐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이곳 함보른 광산 회사 강당이야말로 오늘날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한국인들에게 역사의 현장이요, 성지(聖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루르지방을 찾아 에센의 ‘광부기념관’과 뒤스부르크의 ‘함보른 강당’을 찾은 것은 개인적으로 큰 소득이었다. 작고한 모친(李聖子 화백)은 재불(在佛) 화가로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했었고, 필자 또한 오랫동안 파리 특파원을 지내 유럽과는 각별한 인연을 지녔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이번 루르 지방 방문은 유럽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됐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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