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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1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사도 14,5-18
복 음 : 요한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시절, 중고등부 학생들과 방학 때 캠프 갔던 기억을 해봅니다.
그때는 식사를 다 직접 해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로 밥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버너를 이용해 코펠에 밥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밥물을 자기 생각보다 더 넣어야 맛있는 밥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집의 밥솥을 생각해서인지 물이 적어 설익거나 태울 때가 많았습니다.
또 많이 먹겠다는 욕심에 코펠 가득 쌀을 넣고서 밥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익지 않은 밥이 코펠 밖으로 넘치고 맙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밥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관계가 틀어지고, 때로는 가슴을 새까맣게 태우기도 합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위해서는 알기 위해 노력해서 관계를 잘 지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뜸 들이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고, 생각보다 물을 더 넣는 ‘조금 더’의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즉, 내 마음의 크기도 알맞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을 때 최고의 주님을 내 안에서 만날 수가 있게 됩니다.
무조건 알아서 해달라는 식의 무책임한 떠넘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다면 불평불만을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사랑의 일치를 통해서 함께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을 떠나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라서 그분과 아버지께 사랑받는 이들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예를 우리는 많은 성인성녀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의 집에서 죄의 더러움을 씻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호자, 곧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더 두텁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진리의 영이기도 한 성령을 받아들여서 주님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노력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줘서,
내 삶을 최고의 삶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흔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은 이를 답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이가 아니라,
설령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넘어 그를(그의 인격을) 받아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 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인 그 말을 지키는 이,
곧 실행하는 이가 진정 그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버리고 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곧 그를 믿고 신뢰하고 마음으로 결속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는 말씀은 뒤에 나오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말씀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곧 내적 일치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전제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저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울 것입니다.
설령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킬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이 되어 오소서. 저를 사르는 빛으로 오소서.
함께 살며, 불살라 태우소서.
저를 태워 세상을 밝히소서.
제가 빛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주님!
말씀이 되어 오소서. 살아있는 쌍날칼로 오소서.
함께 살며, 저의 살과 뼈를 가르고, 생각과 속셈을 가르소서.
진정 당신께서는 제 안에 계시고 제 곁에 머무시고 저와 함께 사시오니
제가 말씀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자유를 주는 사랑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만 남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내적 일치의 사랑,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박병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원하는 바를 분별 있게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사랑은 온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야 하며 형제들의 온갖 필요에 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 사람에게 이르는 길은 그 사람이 나에게 바라는 뜻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동방으로의 여행」 줄거리입니다.
이 소설은 동방국가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순례자 집단은 동방으로 여행을 함께 떠납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레오라는 사람은 순례자 집단의 서번트
즉, 하인으로서 그들을 따라 함께 여행합니다.
레오는 여행길에서 순례자들의 모든 일을 보살핍니다.
그는 하찮은 일을 도맡아 할 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의 지친 영혼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불평이나 하소연을 마다치 않고 들어주며, 순례자들이 이상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줍니다.
레오는 드높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소설에서 레오는 순례자들이 여행에 차질이 없도록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그래서 레오와 함께하는 동방으로의 여행은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 레오가 순례집단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동안 레오는 한낱 하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그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레오가 사라진 순간부터 순례자들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동방으로의 여행은 엉망이 되어 버렸으며, 순례자들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레오는 그들에게 있어서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레오는 순례자들의 여행 과정에서 필요한 욕구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주었고,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순례자들은 레오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순례자 중의 한 사람이 어느 교단의 후원을 받아 자신들의 하인이었던 레오를 찾아 나섭니다.
그는 몇 년을 헤매던 끝에 드디어 레오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색작업을 후원했던 교단으로 인도됩니다.
그 교단에서 그는 순례집단의 봉사자였던 레오가
실제로는 교단의 최고 책임자이자 정신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출처: 헤르만 헤세, 「동방으로의 여행」, 김종민 시인 블로그]
레오는 순례자 집단에서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교단의 정신적 지도자가 순례자들을 맞으려 찾아온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상대의 욕구를 채워주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누군가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싶은데 물만 주면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만 강요하는 그 사람을 밀쳐내고 말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순례자 중에서 레오를 만나러 온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이 레오의 욕구를 채워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레오를 만나러 가는 길은 레오의 욕구를 채워주는 길입니다.
즉, 자신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기와도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레오의 욕구를 채우는 공동체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이것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욕구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공기요, 양식이 되어 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분의 봉사를 원치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그분을 만나려면 그분의 뜻을 따라주어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나러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산 것처럼 사는 것이 끔찍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계명의 길로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면 당신을 만날 것이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며 자기 뜻만 따르기를 강요한다면 그 사람을 떠나십시오.
여러분은 이용만 당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누군가를 만날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진정으로 만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서 부모가 원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아기 때는 부모를 만나고 있지만, 진정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원하는 어른이 되어 부모가 원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진정으로 부모를 만납니다.
예수님도 그분의 뜻을 완전히 따라주기 전에는 그분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 행복입니다.
참 행복 자체이신 분을 만나는 행복을 원한다면
그분의 계명인 사랑부터 자신 안에서 완성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그분께서 보내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랑의 열매가 맺히고 그렇게 주님을 만날 길이 열립니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것이다.(요한 14,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싱싱한 생명의
오월입니다.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는
우리 삶의
보호자가 계십니다.
가장 좋으신
보호자
성령께서는
우리 삶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생생히 가르쳐주십니다.
이렇듯 성령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인생길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생명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성령의 보호를 받는
소중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까지
성령의 수많은
담금질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다시
새로운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길의 시작과 끝에는
우리 삶을 끌어안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살아야 이유가
사랑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봅니다.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과, 주님을 모르고, 모르기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이스카리옷이 아닌 유다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구세주가 세상에 오셨지만 모두가 다 그분을 맞아들인 것은 아니지요.
아예 관심이 없는 부류도 있고, 출신과 배경을 들어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분을 긍정하는 제자들 안에서도
진정한 앎과 믿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고 하십니다.
사랑한다는 증거는 계명의 준수로 드러나지요. 그런데 그 계명의 골자가 곧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다니,
결국 그가 사랑의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얼마나 아름답고 충만한 약속입니까?
사랑하는 이에게 성 삼위 하느님께서 친히 임하시고 거하십니다.
사랑의 발걸음을 시작한 이들, 사랑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이들은 그래서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성 삼위 하느님과 함께이니 홀로면서 홀로가 아닌 존재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 여정이 극적으로 펼쳐집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사도 14,15).
바오로가 일으킨 치유 기적을 보고 리스트라 사람들이
두 사도를 신으로 여겨 경배하려 하자 그들이 만류하며 외칩니다.
모든 일에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사도들은 잘 알고 있기에
영광을 제 것으로 편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 ... 다만 복음을 전할 따름"
맞습니다! 리스트라 사람들이나 두 사도는 생물학적으로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의 차이는 오직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지요.
복음, 곧 사도들이 먼저 만나고 전하는 기쁜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사도 14,11)는
리스트라 사람들의 외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어느 정도 시사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비와 절기와 양식과 마음의 기쁨으로 당신을 드러내신 주님께서
이제 두 사도를 통해 당신 이름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경배해온 신이 이제 이름과 얼굴을 보이는 겁니다.
그 신의 이름이 곧 사랑입니다.
이제 리스트라 사람들 중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부류에서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부류로 건너갈 것입니다.
이 사건 뒤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펼쳐지지만, 훗날 바오로가 리스트라에 갔을 때
그곳에 있는 제자로 티모테오가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리스트라에 복음의 꽃이 피었으리라고 짐작해 봅니다(사도 16,1-5 참조).
다시 유다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아버지는 이스라엘에 먼저 아드님을 드러내셨지만
그것으로 구원의 문을 닫아걸고 종료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무신론, 회의주의, 불가지론, 물신주의, 이기주의, 신앙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으로 점철된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더 이상 공허하고 위선적인 말만으로는 복음이 타인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 삼위 하느님과 더불어 사랑이 될 때 기쁜 소식이 전달되고 퍼져나갑니다.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됨으로써 모두 함께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완성됩니다.
모두 사랑으로 이어지고 엮어져 하나의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그 사랑이 완성되기를 희망하며 오늘도 힘껏 사랑하는 하루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누군가라도 우리 작은 사랑으로 위로 받고 쳐진 어깨를 추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아니, 훌륭합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Whoever loves me will keep my word,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우리는 주님을 어디서 만나는가?
요한복음 서두(1, 38)를 보면,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난후에
자신들이 찾던 "메시아를 뵈었다." 라고 고백한다.
요한 14, 20에 보면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 나타내 보이시고,
예수님을 찾을 때에 나타내 보이신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나타내 보이면 그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순명하게 되고 하나가 된다고 하신다.
23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라고 하신다.
주님은 어디에 묵고 계시는가?
"와서 보아라" 고 하시는데
그분 안에 내가 머무르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에서 주님을 찾는가?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나의 내면의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와서 보라고 하시는데
나는 내 안에 머무는 주님을 보고 있는가?
내 안에 머무시는 주님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성령이여,
저를 가르치소서.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소서.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주님 말씀을 지키게 해주소서.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홈페이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