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축구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미드필더/공격수 야리 리트마넨(33)이 친정팀 라흐티와
1년 계약에 합의하여 고국 무대로 돌아왔다.
12년간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프로 첫 소속팀이었던
라흐티로 돌아온 그는 스타로서 특별 대우를 받기 보다는
팀의 일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리트마넨: "라흐티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잘 유지되어 왔다.
나는 팀에서 동료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팀의 일원으로 대접받길 원한다. 팀에 대한 느낌은
이미 파악됐으며 팀원들 역시 나의 플레이가 어떤 것인지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시즌 최선을 다해 팀의 성적에 보탬이 되겠다."
지난시즌 11승 8무 7패 40득점 31실점 승점 41점의 성적으로
리그 5위에 오른 라흐티는 상위권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수비력 보강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시즌 우승팀인 HJK 헬싱키와 친선경기가 예정되어 있는
라흐티는 다음달 7일부터 2004시즌에 임한다.
핀란드 1부리그는 5월부터 10월까지 총 14개팀이
28경기를 치루며 하위 2개팀이 2부리그로 강등되는 구조이다.
1987년 만 16세의 나이로 핀란드 1부리그 레이파스(라흐티의 전신)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리트마넨은 네시즌동안
리그 86경기 28골을 기록하며 선수 생활의 초창기를 알차게 보냈으며
이후 자국 명문인 HJK 헬싱키, 밀리코스켄 팔로-47(약자 MyPa)에서 각
각 한시즌간 활약하며 여섯시즌동안 핀란드 리그에서
131경기 51골이라는 기록을 남긴 후 네덜란드 에레디비지를 대표하는
아약스 암스테르담으로 이적하면서 12년간의 해외리그 생활을 시작한다.
자타가 인정하듯 그의 전성기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의
아약스 1기라 할 수 있다. 그가 유럽 정상급의 선수로
성장할 수 있던 것에는 세컨드 어태커로서 대성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세컨드 어태커의 산실로 불리는
네덜란드 리그에서도 아약스는 리트마넨 외에도
70년대의 세계적인 스타 요한 크라위프, 오렌지 3총사 중 한명으로
80~90년대 유럽을 풍미했던 뤼트 휠리트, 데니스 베르캄프 등
동포지션에 숱한 스타들을 배출한 경험이 있었고
핀란드 리그 시절에도 적잖은 득점을 올리긴 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전방의 공격을 지원하는
역할을 우선시했던 리트마넨은 아약스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와 최전방 공격수의 역할을 절반씩 겸하는
세컨드 어태커의 역할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일곱시즌동안
리그 224경기에서 무려 126골을 기록하는 비약적인 득점력의
향상으로 지원능력과 결정력을 겸비한 팀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되었다.
리트마넨의 입단과 때를 같이하여 아약스 유스팀에서 쏟아진
파트릭 클라위베르트, 에드하 다비즈, 클라렌세 세도르프,
마르크 오베르마르스, 데보어 형제, 에드빈 반더사르 등
1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네덜란드 대표팀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스타들이 성인팀에 가세하면서 그들은 1995년 무적을 자랑했던
이탈리아의 AC 밀란을 격파하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유럽 정상에 선 후 그해
인터콘티넨탈컵 (유럽/남미컵, 도요타컵으로도 불린다.)
마저 제패하며 명실상부한 최고 구단으로 올라섰다.
물론 여기에는 명실상부한 팀 공격의 중심으로
유럽클럽대항전에서 24골이나 뽑아낸 리트마넨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에레디비지에서도 네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로서
거의 모든 것을 이룬 리트마넨은 그의 은사라 할 수 있는 라
위스 반할 아약스 감독이 스페인의 거함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자 함께 이적을 결정했으나
빅리그 입성의 부푼 꿈과는 달리 이후
그의 선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시즌 반가량의
바르셀로나 생활동안 그는 부상과 주전 확보 실패로 인해
첫시즌 21경기(선발 14경기) 출장에 그친데 이어
두번째 시즌에서는 단 한경기도 뛰지 못하였고
이때 입은 부상은 이후 그의 기량 쇠퇴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결국 두시즌도 채우지 못한 채 2001년 1월 겨울 이적시장의 시작과 함께
소년시절부터 서포터를 자부했던 잉글랜드의 명문
리버풀로 이적하게 되었고 그는 평생의 꿈을 이뤘다며
뛸 듯이 기뻐했지만 그에게 부여된 역할은 주전이 아닌
교체 전문 선수였다. 세컨드 어태커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리트마넨에게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전 투톱이었던
오웬과 헤스키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뚫기란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고
팀은 창조성이 필요할 때마다 그의 마술을 기대하여 투입했을 뿐
공수 전환이 빠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미드필드 플레이가 소외된 대표적인 팀 중 하나인 제라드 울리에
감독의 리버풀에서 리트마넨의 자리를 찾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였다.
결국 리버풀에서도 두시즌을 채우지 못한 채
2002/03시즌 시작과 함께 부상을 당했던
네덜란드의 신성 라파엘 반더바르트의 대체요원으로서
4개월 단기 계약을 맺으며 아약스로 돌아온 리트마넨은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챔피언스리그과 유럽무대에서
합격 판정을 받으며 계약 연장에 성공한다.
리그에서 14경기(선발 9경기) 5골을 기록하며 조커로서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낸 그는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득점에 성공하며
아약스 역사상 챔피언스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된다.
그러나 반더바르트가 팀의 중심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감과 동시에
베슬레이 스네이더, 스티븐 피에나르 등 기존 어린 선수들의
기량이 나날이 성장하고 민완 공격수 베슬레이 송크가 영입되는 등
나날이 좁아지는 그의 팀내 입지를 지켜본 구단 측은
결국 90년대 팀의 영광을 함께 했던 과거의 스타에게
재계약 불가를 통보함과 동시에 2004년 여름까지였던 계약를
아무 조건없이 해지하여 봄에 시작되는 핀란드 리그로
복귀하도록 배려하였다. 자유를 얻은 리트마넨이
자신의 프로 생활을 처음 시작한 라흐티는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후회없이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다크호스로 꼽히는 핀란드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본선 진출을 노렸던
유로 2000,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아쉽게 조 3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던 그가 핀란드 올해의 선수 9회 수상(1990, 1992~1998, 2000)이라는 영예를 안겨준 고국팬들앞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