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오륙도에서 만난 해파랑길 길과 남파랑 길,
몇 년만에 다시 찾은 오륙도, 그 사이 남파랑의 끝과 해파랑 길의 첫 지점이라는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2007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해파랑 길을 완주하고, 남파랑 길을 걸어서 도착한 오륙도에서 나는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여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형제여”
멀리 북녘을 향한 첫 발걸음을 떼기 위해 찾은, 부산 앞바다에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읊조리며 먼 듯 가까운 듯 보이는 오륙도를 바라다본다.
아름답고, 신기하다. 1972년 6월 26일에 문화재청에 의해 명승 24호로 지정된 오륙도는 용호동 바닷가에 있는 섬으로, 영도구의 조도를 마주 보면서 부산만 북쪽의 승두말로부터 남동쪽으로 6개의 바위섬이 나란히 뻗어 있다.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이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이므로 오륙도라고 부르게 됐다.” 고 <동래부지>에 실려 있는 이 섬에는 당나라 상수 만세덕萬世德의 비가 있었다고 한다. 섬 주변은 조류가 매우 빨라 뱃길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항해할 때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해신에게 공양미를 바쳤다고 한다.
나라 곳곳에서 모인 우리 땅 걷기 도반들이 오륙도가 한눈에 보이는 남해와 동해의 분기점인 스카이워크에서 해파랑을 길 완주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이곳에서 출발하여 통일전망대를 지나 두만강까지 가게 될 우리 일행의 발길을 그 땅위에 들여놓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허락해 주십시오“ 간절히 원하고 발원하고서, 함께 가는 도반들의 마음이 시종여일하기를 기대해 본다.
”마음만 맞으면 삶은 도토리 한 알로도 시장을 면한다“는 옛말이 맞기를 바라면서 걸어갈 것이지만 사람의 마음만큼 예측할 수 없는 대상이 어디 있던가.
그래서 다산 정약용 선생도 사람의 마음을 <다산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침에는 온화하다가도 저녁에는 냉정해진다.(朝溫暮冷)“고
기대는 그저 기대일 뿐, 모든 것은 운명에 맡길 수 밖에.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걸어갈 동해 해파랑 길, 매일 매일 해 뜨는 동해를 걷고 지는 해를 바라볼 여정, 문득 떠오르는 시가 영국 계관 시인 존 메이스필드의 <바다 열병>이다.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
그 외로운 바다와 하늘로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돛대 높은 배 한척
길을 안내해 주는 별 하나 그리고
물을 밀어내는 바퀴와 바람의 노래,
펄럭이는 하얀 돛
해변에 어린 뽀얀 안개와 훤히 트이는 동녘 하늘 뿐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
붙잡지 못할 우렁찬 물결소리는
나를 향한 거세고도 분명한 부름
내가 원하는 건 바람 세차고 흰 구름 떠 있는 날
튀는 물보라, 날려가는 물거품, 울어대는 갈매기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
정처없이 떠도는 집시처럼
바람 칼날 같은 갈매기의 길로,
고래 헤엄치는 곳으로
내가 원하는 건 낄낄 웃는 친구들의 신나는 얼굴과
긴 당번 시간이 끝난 뒤의 고요한 잠과 달콤한 꿈.
그래, 푸르고 푸른 바다와 바닷가의 풍경 그리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들으며 걸어가다 보면 마음도 몸도 가뿐해지는 순간을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머나먼 여정에 오른다.
부산 오륙도에서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가를 따라가는 해파랑길,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발길 닿는 곳마다 그곳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수많은 우여곡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길은 초입부터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산길, 이기대 길이다. 그 길이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 지명총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용당동 남쪽 바닷가에 있는 산이 신선대라는 산인데, 병풍대屛風臺와 의기대義妓臺가 있으며, 봉우리에 무제동이라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신선과 백마의 발자국이 있었고, 바위 가까이 가면 풍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맞서서 싸웠다는 ’두 명의 기생’에서 유래했다는 이기대 길은 오륙도에서 농바위를 지나고 어울마당, 동성말로 이어지는 4,7km에 이르는 구간이다. 부산의 명물인 광안대교와 해운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확 트인 바다를 바라보면서 조각 전시장을 방불케 할 만큼 기암괴석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그래, 지금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이 부산이로구나.
옛 이름이 동래였던 부산의 그 이전 나라 이름은 장산국萇山國이었다.
그 동래부에 부산면이 생긴 것은 1914년이었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기록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조선 초였다. “동평현 남쪽 부산포富山浦에 있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고,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도 부산포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당시의 ‘부’ 자는 지금의 ‘가마 부釜’가 아니고 ‘넉넉할 부富’를 써서 부산富山이었다. 이렇게 이름이 바뀐 것은 대체로 15세기경으로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 아래가 바로 부산포이니, 늘 살고 있는 왜호倭戶가 있으며 북쪽으로 현까지의 거리는 21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정일의 해파랑 길 인문기행>에서
곧 다시 걷게 될 이 길들은 나에게 어떤 상념을 줄지,
2023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