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YUdIyev7w?si=CccRJl3nJOKHzcRG
미완성 칸타타 <독일의 부활>로 나치 체제에 대한 양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아직도 용서받지 못하고 있는 슈미트는 오스트리아의 첼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르크너와 말러 이후 가장 중요한 오스트리아의 교향곡 작곡가입니다. 오페라는 2개를 남기고 있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 1904년 완성되어 1913년에 초연된 <노트르담>으로 빈 필의 파리 순회 연주 때 얻은 영감의 주제에 의한 것으로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은 작품이지만 12번 곡 인터메조만이 유명 연주자들에 의해 간혹 연주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음반은 따로 녹음 하지 않고 1975년 공연실황을 녹음 한 것이라 기침소리등 잡음과 박수가 가미되있어 공연장에서 듣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잊혀진 작품이라기에는 참으로 멋진 곡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1막 서곡은 오래된 영화 '노틀담의 곱추'에서 배경음악으로 많이 익숙한 듯도 합니다. 3번곡은 마치 사랑의 세레나데같이 감미롭습니다. 연주는 독일어로 하였지만 영어와 독일어 대본이 같이 들어있어 가사내용을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가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말러의 계승자이자 힌데미트 등의 신고전 주의로 가는 가교로서의 슈미트 작품은 앞으로도 재평가가 절실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나 그 움직임이 일지 모르겠습니다.
제1막
Scene One :
중세의 파리 근처의 ‘베르크 그레베’ 거리.
카니발 축제에서 볼 수 있는 의상과 가면을 쓴 사람들이 광장을 가로지른다.
경관은 엄숙한 태도로 왕의 경호대장인 페뷔스에게 잔소리를 하였다.
생각을 새로 찾은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에 대한 사랑으로 채운 젊은 남자는 대답한다.
경관은 에스메랄다가 그녀의 질투 많은 남편 그랭구아르에게 감시당한다고 친구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페뷔스는 자신에게 아무런 걱정거리도 안 되는 그랭구아르는 형편없는 자 라고 그에게 말한다.
이때 그랭구아르가 들어와서, 나중에 에스메랄다의 춤을 보려는 군중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집시걸이 들어오자 페뷔스는 넋이 빠진 듯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그를 지나가며 젊은 대장에게 사랑스런 눈빛을 길게 흘린다.
별안간 군중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에스메랄다와 그녀의 친구들은 안전을 찾아 왼쪽으로 뛰었다. 그들은 역시 몰려오는 군중들로부터 달아나던 그랭구아르와 즉시 결합하였다.
사람들은 콰시모도(노틀담의 종치기 꼽추)를 광대들의 우두머리로 만들었다. 종치기는 이 굴욕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괴롭히는 자로부터 도망쳐서 그들과 싸움을 시작했다.
노틀담의 부사제가 들어와 소란을 가라 앉혔다.
그는 콰시모도에게 돌아서며 군중들의 소란을 중지하려고 험악하게 채찍질을 하였다.
군중과 콰시모도가 퇴장한다.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에게 다가가 부사제가 무섭다고 하소연한다.
피버스는 저녁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시소녀는 처음에 거절하지만 페뷔스의 감동적인 변론에 마지막에 생각을 바꾼다.
부사제는 돌아서다 이전의 제자 지금은 집시인, 그가 문밖에서 들은 것에 분노하여 절망으로 몇 걸음 못 가 주저앉는 그랭구아르를 발견하고 놀란다.
장황한 설명으로, 그랭구아르는 어떻게 그가 어느 날 저녁 어두운 거리에서 그녀를 따라와 에스메랄다의 사랑에 함락되었는지 부사제에게 말한다. 그가 교수형에 처할지도 모를 집시도둑을 잡았을 때 그녀가 그의 구조를 위해 자신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그가 그녀처럼 집시가 된 그때 이후 지금, 그의 행복은 왕의 경호대장이 저녁모임에 에스메랄다와 만나려는 계획에 의해 사라졌다.
그는 페뷔스를 죽이려고 그도 역시 거기에 갈 것이라고 부사제에게 말한다.
부사제가 그러면 안 된다고 간청하자, 결국 사제의 말에 동의하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Scene Two :
허름한 여인숙의 방 안 ; 페뷔스와 에스메랄다의 랑데부.
그랭구아르는 부사제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2명의 연인을 감시하기 위하여 온다.
방 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그랭구아르는 옷장에 숨는다.
페뷔스와 집시 여자는 여인숙의 늙은 부인 팔로드의 안내로 들어온다.
대장은 노파를 내 보내고 에스메랄다와 홀로 남는다.
그녀는 페뷔스와 함께 방에 있음에 아주 당황하여, 몇 번씩 떠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대장은 그녀를 너무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그녀는 결국 굴복하여 그의 팔에 안긴다.
그때 그랭구아르가 옷장 밖으로 나와 페뷔스를 뒤에서 찌르고, 창밖을 넘어 강으로 뛰어들었다.
에스메랄다의 비명에 노인이 온다.
그녀는 대장이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집시여인이 움직이지 않는 그의 몸 넘어 서있었고, 즉각 에스메랄다의 범죄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야간 경비가 내는 소리에 노파는 방 밖으로 튀어나간다.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의 몸 위로 힘없이 주저앉는다.
제2막 :
Scene One :
지하 감옥; 에스메랄다는 밀짚을 깐 바닥에 잠들어 있다.
부사제가 들어와 잠든 여인의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마법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매혹은 신으로부터 멀리하고 결코 전에는 몰랐던 정욕을 타오르게 한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러나 새벽에 죽을 그녀와 함께 소멸할 마법적인 매혹은 곧 끝날 것 같은 그의 사랑의 감정을 덮는 것을 계속했다.
에스메랄다가 깨어난다.
그는 그녀의 고백을 듣기 위하여 온 것이라 말한다.
그녀는 고백할 죄가 없다고 말한다. : 페뷔스를 죽인 자는 내가 아니고 그랭구아르라고.
부사제는 페뷔스가 위중하지만 살아있다고 말한다.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에게 데려가 달라고 간청한다. : 대장은 그녀를 구해줄거라고.
부사제는 그녀가 유죄로 사형을 선고받아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애처로운 눈물로 사제를 움직여 마지막으로 간청하였다.
그가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자, 그녀는 그의 가슴으로 쓰러졌다.
그는 별안간 사탄의 촉감을 느껴 집시 여인을 밀어내며 지하 감옥 밖으로 밀어 제친다.
Scene Two :
노틀담 성 앞 광장
집시 여자의 처형을 보기 위하여 군중들이 모였다.
에스메랄다는 죄수복 차림에 대성당의 계단에 선다.
노틀담으로부터 애처로운 노래가 들린다.
사제가 문안에 나타나고 에스메랄다에게 고백할 다른 죄가 있냐고 다시 묻는다.
그녀는 없다고 말하고 페뷔스에게 데려다 달라고 요청한다.
사제는 그녀의 탄원을 묵살하고, 신에게 그녀의 자비를 요청하고, 대성당안쪽으로 들어간다.
형 집행자가 그녀의 손을 놓고 준비하려는 찰나, 콰시모도가 난데없이 나타나, 마당에 집행자를 치고, 노틀담 안쪽 성역으로 에스메랄다를 끌어 데려간다.
군중은 종치기의 용감한 행동에 갈채를 보낸다.
Scene Three :
대성당과 탑 사이 연단.
에스메랄다는 지하감옥, 사제의 침울한 노래, 광장의 밝은 빛, 실패한 처형 등의 전날 일을 곰곰이 생각하며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에스메랄다를 딸처럼 좋아하는 콰시모도가 조심스레 가까이 온다.
집시 여자는 그가 그녀에게 보인 관대함 및 친절에 깊게 감사한다.
종치기는 대성당 안에서는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 오래 안전하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게다가 법률상 권한으로 그녀를 체포하려고 노틀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한다.
부사제 및 몇몇 군인이 탑문을 통해서 갑자기 나타났다.
부사제는 군인에게 에스메랄다를 강제로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콰시모도는 그의 주인에게 성역의 권리를 그에게 일깨우며 자비를 위해 항변한다.
부사제는 권리를 취소하는 문서를 들어 보인다. 에스메랄다는 멀리 끌려갔다.
잠시 후 아래 광장의 군중으로부터 집시여인의 죽음에 대해 울부짖는 큰소리가 들렸다.
콰시모도는 비탄과 절망으로 제정신을 잃고 부사제에게 덤벼들어 그를 사방으로 빙글빙글 돌려 던져버렸다. 부사제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 성무일과 서에 기록된 에스메랄다의 춤을 보는 것처럼 느꼈다.
그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하여 신에게 기도한다. : "그녀는 죽고 내 영혼 너는 마지막에 자유다. 위대한 신이시여, 당신은 나의 제물을 보지 못하십니까?
그일은 콰시모도에게 너무 심했다. 그는 주인에 대한 혐오에 가득 차 부사제를 공격하고 지상 난간 아래에 내 던진다.
군중들이 멀리서 에스메랄다의 죽음을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흐느껴 우는 콰시모도는 세상에서 이제까지 그가 유일하게 좋아한 두 사람, 집시여인과 전 주인을 위해 몸을 던져 죽음의 종소리를 낸다.
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 1874~1939
1874년 12월 22일 프레쓰부르크에서 태어나서 1939년 2월 11일 페르히톨드스도르프(비엔나 근교)에서 사망함.프란츠 슈미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헝가리 왕국 출신으로, 특히 소년 시절에 리스트의 연주를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영향은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하면서 그 곳에 눌러앉게 되었는데, 이사 후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워진 탓에 무용 학교의 반주자 등 자질구레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학을 해야 했다.우여곡절 끝에 빈 국립음악원에 입학한 슈미트는 피아노, 첼로와 작곡을 배웠는데, 그의 스승 중에는 레셰티츠키를 비롯해 브루크너도 있었다. 졸업 후에는 1896년부터 1911년까지 빈 궁정 오페라 관현악단의 첼로 주자로 재직했는데, 이 때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바로 말러였다. 슈미트는 말러 밑에서 일하면서 마찬가지로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후 모교인 빈 국립음악원의 교수와 학장직을 맡으면서 작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14년 피아노교수가 되고 대위법과 작곡도 가르침. 1925-27년에는 비엔나의 음악아카데미학장을 지내고, 당시 무조 음악과 12음 기법으로 훗날 음악사에 길이 남는 쇤베르크가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기도 했고, 1927년에는 요제프 마르크스의 후임으로 빈 음악학교 교장으로 승진해 1931년까지 재직하면서 마지막 낭만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의 양식은 심포니적으로서 낭만주의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음았다. 특히 일시적으로 그의 선생으로 있었던 브루크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 까지 교향곡이라는 영역에서 가장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두 대가가 안톤 브루크너와 구스타프 말러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끝으로 독일어권 국가에서 유명 교향곡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스 베르너 헨체 같은 예외는 있지만, 일단 대중성에서 많이 밀리므로 열외) 다만 오스트리아에서는 말러를 잇는 1급 교향곡 작곡가로 꼽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프란츠 슈미트다.늦깎이 작곡가였던 슈미트는 작품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곡 하나 하나가 거의 대작이다.
두 곡의 클라리넷 오중주-A장조 작품은 거의 한 시간 분량이다-와 네 곡의 교향곡, 오라토리오 '일곱 봉인의 책', 경기병 노래에 의한 변주곡(관현악), 베토벤 주제에 의한 변주곡(피아노+관현악), 피아노 협주곡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데, 이 곡들 중 피아노와 관현악의 협주 작품 두 곡은 1차 대전 때 오른팔을 잃은 유명한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더 덧붙이자면 유명한 철학자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형제 관계임-을 위해 왼손용으로 작곡했다(훗날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뷔러가 양손 용으로 편집해 재발간하기도 했음).
슈미트의 작품은 소년 시절 접했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민요, 브람스의 변주 양식과 (한 살 위였던) 막스 레거의 영향을 모두 받아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말년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슈미트는 작곡 활동에만 전념했는데, 때마침 유럽을 휩쓸던 파시즘과 나치즘에 의해 '진정한 독일 전통의 수호자' 로 떠받들어 지면서 별로 달갑지 않은 정치적 명성을 얻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특히 성서에 기초한 만년의 대작인 오라토리오 '일곱 봉인의 책' 은 초연 시기가 오스트리아 합병과 맞물리면서 나치의 찬사를 받았는데, 정작 내용은 종말론 색채가 짙은 무거운 것이어서 차라리 예언적 색채를 띠는 곡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부인의 정신 질환 발병과 하나뿐이었던 딸의 유산 등으로 고통 받았는데,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4번 교향곡(1933)은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슈미트의 명성은 여전히 독일어권 국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교향곡도 솔직히 한 시간도 넘는 브루크너나 말러의 후기 작품 보다는 좀 더 '경량화' 된 곡이고, 나름대로 형식미와 선율미도 꽤 풍부한 작품인데 연주 빈도가 바닥을 기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4곡의 심포니와 2개의 오페라 여러 실내악 등을 작곡했지만, 현재까지 레퍼토리로 살아남은 작품은 ‘일곱 봉인의 책’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일곱 봉인의 책’은 2부의 오라토리오로서 성서 내용 중 ‘요한계시록’을 바탕으로 작곡가 자신이 직접 편집하여 오라토리오로 만들었다.헨델의 ‘메시아’에도 역시 성서의 이 부분을 텍스트로 한 몇몇 곡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전반적으로 인류 최후의 날, 심판의 날을 음악화한 작곡가는 프란츠 슈미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자료참조 : 프란츠 슈미트 협회: http://www.franzschmidtgesellschaft.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