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가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 어떤 분은 '젊은 청춘이 노인을 부축하고 있어서,
효도하고 공경하는 지성을 갖춘 것이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두 발로 걸어가는 것을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두 발로 걷는 짐승도 있다.
이것은 변상(邊相)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인생을 알려면,
부처님처럼 육년고행,
참선을 통해서 자각해야만 한다.
역대 성인이나 조사스님께서도 인생을 알기 위해
생명을 걸었고 노력한 결과
깨달은 뒤에야 확실히 알았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12인연법을 깨달았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인연이 모여
하나의 육신인 형단을 이루었는데,
육신을 받쳐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은 지혜가 있고 없음에 있다.
사람이 짐승보다 좀 높은 차원에 있지만,
본성을 깨닫지 못하여
우치우매(愚癡愚昧)하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생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물으면,
왜 사는지를 잘 모르고 대답을 하지 못한다.
물론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하지만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 한다.
대답은 간단하다.
'중생은 단지 살기 위해서 산다'
이 한 마디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생 죽지 않으려고,
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쓰면서 버둥거리며 산다.
단순히 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남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며,
음해하고 배척한다.
이 목숨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일생동안 이 몸을 애지중지 아끼고 시봉한다.
생명의 근본실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승가의 불자 자신도
자각하고 개선해야 할 점이 너무 많다.
속가의 신도들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부처님께 요구하는 기복적인 것이 너무 많고,
승단의 출가자들은 부귀와 공명을
헌신짝처럼 버려라 했거늘
재물과 권력, 명예에 치중함이 농후하다.
이 산승은 어려서 출가하여
대처·비구 정화할 때,
투쟁하는 용사로 일부 참여하였지만,
정화의 이념은 도퇴되고 말았다.
눈을 다시 뜨고
뼈를 깎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시 정화해야 한다.
중생은 살기 위해 살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어떠한 모양을 보여주고 가느냐가 중요하다.
사찰성지에 하루 수십만 관람객이 들어와도
제대로 포교하나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너무 아쉽다.
종단 내분과 갈등이 끝이 없으니
언제 적나라 적쇄쇄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련지 아득함을 느낀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는가?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알기 위해
육년고행 끝에 깨달으시고
최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기이하다.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의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다만 망상에 집착해서
능히 깨달아 증득하지 못했을 뿐이다."
또,
인생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인연에 의한 존재라고 설파하셨다.
화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나라는 것도 없고,
중생도 없고,
죽는 것도 또한 없나니
만일 이렇게 그 모양을 알면
그는 곧 위없는 사람이 되리.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마음 다 비추고
두려움 다 없애고 깊은 법 연설하네.
시방(十方)의 한량없는 일체 중생들
모든 바른 법의 문(門)에서 모두 편안히 머물게 하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제 우리도 모든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새로운 참모습을 보여 주어야 되겠다.
이 산승이 어려서 출가하여 공부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공양주 5년 동안 일주문 밖을 나가지 않았고,
떨어진 옷에 내복도 없이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공양주를 해야만 했다.
주지스님께서 쌀 두말을 주시면서 5일 동안 먹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절집안의 대중이 일정하지 않아,
들쑥날쑥 정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절사정이었다.
5일을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3일 혹은 2일만에 쌀을 얻으러
주지스님께 말을 들고가면,
'이틀치 쌀을 어디에다 감추었는지 가져오라' 하시며
크게 야단을 치고 문을 닫으면 추운 겨울에
내복도 입지 않고 한시간 두시간을
밖에서 떨고 기다려야 했다.
전신(全身)이 톱으로
잘려나가는 아픔을 견뎌야 했고,
수도 없이 반복되는 고행을 참아야 했다.
주지 스님께 다시 묻지를 못했다.
변명을 대면,
스님께서 대꾸한다고 꾸짖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스님께서 '사라'를 가지고 오라 하셔서,
무엇인지 알지 못해 묻지도 못하고,
무조건 채공간(菜供間)에 가서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가지고 간다.
네 번의 꾸지람을 듣고서야
한 생각이 나서 '알았다'하고 스님께 갔다.
'사라 가지고 왔느냐' 하시기에 '예'하고 대답했다.
그때 생각에는
그릇을 전부 가져가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사라사라 시리시리'라는
진언이 있는데, '사라사라', 이 대목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라사라 시리시리가 아닙니까' 하니,
스님께서 노발대발 하시면서
'저 놈이 미쳤다' 하시면서
다시 가지고 오라 하시므로
다섯 번째 쟁반을 가지고 가서 합격했던 경험이 있다.
5년동안에 행자들 500여명 정도가 도망을 갔었다.
행자가 없을 때는
혼자서 공양주(供養主),
채공(菜供),
갱두(羹頭)까지 도맡았다.
그 당시 인천의 보각사 조실로 계셨던
만옹 대선사께서 조실을 그만 두시고
남장사(南長寺)에 주석하셨다.
저를 보고 대근기(大根機)라고 칭찬하시고,
어느날 저를 보고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탕탕' 땅을 두드리시며,
묻기를 '이것이 무슨 법문을 하느냐'고 물으셨다.
관세음보살만을 일념으로 염불했었는데,
만옹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는
의심이 크게 불길처럼 일어났다.
청솔가지를 때고 밥을 짓는데,
여러 개의 나무가 활활 타는데,
한무더기의 불길이 솟아 법계에
충만한 광명을 보는 순간,
밥솥에서 밥물이 끓어
'푸르르 뻐시시' 하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대교(大敎)를 본 스님이 한분 계셔서,
이렇게 깨달았으니 한 글귀 좀 적어주시길
간청했더니 '퉁'만 주고 무시하길래, 이렇게 말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행자지만
저도 이력종장(履歷宗匠)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으니 무시하지 마시고,
저의 깨달은 바를 글귀로 옮겨 적어주시오' 라고
간청했더니 마지 못해 저의 뜻을 불러 주는대로 적어주었다.
부엌 안의 한 무더기 빛나는
둥근 불빛 천지를 덮고
솥안에서 끓는 한 소리
옛과 이제를 벗어 났음이라
무정설법이 별 것 아니니
목전에 역력하여 다못 이것이다
만옹 큰스님께서 보시고 극찬을 하셨다.
일생 절집안에 살아도 이런 말을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시면서
더욱 정진하기를 당부하셨다.
그후 10년이 지나 혼해 큰스님을 모시고
특별 선어록 강의를 듣고
용맹정진을 하던 도중에 혼해 스님께서,
'前百丈은 不落因果라 대답하여,
야호몸에 떨어졌고,
後百丈은 不昧因果라 답하여
다시 前百丈을 야호몸에서 벗어나게 했는데,
不落因果라 답한 것이
어찌하여 야호몸이 되었는고'라 하문(下問)하시매,
망연소지(茫然消知)하여,
전후제단하고 3일을 홀연히 지나감을 몰랐다.
3일 후에 혼해 큰스님께서 좌선하고 있는 저를 보고
큰 소리로 한 말씀하시기를
'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느니라' 하시는 말씀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올렸다.
크게 한말씀 하시는 소리에
하늘땅이 무너지고
해와 달과 별빛이 빛을 잃었네
거연히 한걸음 나아가
머리를 돌이켜 보니
산은 드러나고 시냇물은
곡 밖으로 흐르도다
이렇게 한 게송을 올리니 혼해 큰스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선방으로 가서 다시 더 정진하기를 경책해 주셨다.
그후 1973년 저의 법사스님이신 고암 대종사께서
종정으로 계시면서 해인총림의 방장을 역임하시고 계실 때,
제가 삼경에 방장실에 들러 참문하는 도중,
큰스님께서 '아직도 庭前栢樹子 화두를 참구하는가?
자네에게 화두를 일러준지가 여러 해 지났는데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가?'
물으셔서, '그러합니다'고 대답했더니,
큰스님께서 애석하다 하시면서,
'여기에는 입과 손발을 붙이면 입과 손발이 다 타네.
잣나무 꼭대기 위에서 손을 놓고 한 걸음 나아갔을 때,
이때를 당해서 어떠한고.
어느 것이 그대의 면목인지 일러라.'
하문하시는 데서 크게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큰스님께서 모든 조사의 공안으로 문답점검하고,
오도송을 올려라하셔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올렸다.
자성불(自性佛)
출처 ;매사와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