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蔡濟恭)-선녀의 얼굴
惚惚冥冥苦未詳(홀홀명명고미상) 어렴풋이 보일락 말락 분명치 않아 괴로워라
天公戲我故迷藏(천공희아고미장) 하늘이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하는 숨바꼭질
憑樓一望堪惆悵(빙루일망감추창) 누각에 기대 바라보며 못내 상심하던 차에
玉女微呈半面粧(옥녀미정반면장) 선녀는 단장한 한쪽 얼굴만 살짝 보여주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이윽고 연무가 걷혔다 끼었다 하더니 중향의 천 개 봉우리가 얇은 연무 사이로 은근히 비추기에 나도 모르게 기쁜 마음으로 경탄하였다已而霞氣乍卷乍羃 衆香千峯隱暎輕紗中 尤不覺欣然叫奇 이이하기사권사멱 중향천봉은영경사중 우불각흔연규기]」『번암집(樊巖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양기정님은 “18세기 조선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번암(樊巖) 채제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짓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예닐곱 살 무렵에 집안 어른이 번암에게 ‘김 아무개 집안의 아이가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이 났는데, 그 아이가 ‘짙은 안개가 남산을 먹었네大霧食南山 대무식남산’라는 구절을 지었다더라. 너는 이 수준에 미칠 수 있겠니?”라고 물으니, 번암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토해 남산이 나왔네復吐爲南山 복토위남산’라는 구절을 지었다고 한다.
24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비교적 평탄한 관직 생활을 하던 번암은 1754년 정월에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하였다. 북평사는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으로 예로부터 글솜씨가 뛰어난 문관(文官)이 임명되는 자리였다. 육진(六鎭)의 변방을 순시하면서 강대국에 억눌린 약소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하기도 하고, 차가운 삭풍(朔風)을 무릅쓰고 업무를 수행하며 나그네의 쓸쓸한 회포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음력 4월에 이르러 비로소 임무를 마치고 귀경길에 오르는데, 돌아가는 길인지라 비교적 여유롭게 명승지를 찾아 유람할 수 있었다. 칠보산(七寶山)에 들어가 기암괴석을 감상하였으며, 안변(安邊) 바다에 배를 띄워 국도(國島)를 유람한 뒤에, 남쪽으로 내려와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를 둘러보고 금강산에 들어갔다.
번암이 금강산 입구에 도착한 것은 음력 4월 14일이다. 금강산의 동남쪽 백천교(百川橋)를 건너 유점사(楡岾寺)에서 하루를 묵고, 만경동(萬景洞) 계곡을 거쳐 마하연(摩訶衍)을 방문하여 하루를 묵으면서 보름달이 비치는 중향성(衆香城)의 절경을 감상한 뒤에 정양사(正陽寺)에 이르렀다. 정양사에 도착한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운무(雲霧)가 짙게 끼었다. 내금강(內金剛)의 전경(全景)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정양사에 도착했건만, 궂은 날씨로 일만 이천 봉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도움인가? 저녁 무렵 비가 그치고 운무가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이 시는 바로 이 순간, 모습을 살짝 드러낸 일만 이천 봉의 자태를 표현한 것이다. 일만 이천 봉을 보고자 하는 나그네의 애타는 심정, 보여줄까 말까 놀리는 듯한 조물주의 장난스러움, 낙담하여 포기한 순간 선녀의 얼굴인 양 살짝 드러내는 산의 모습, 이 모든 것이 절묘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와 운무로 심술을 부리던 날씨가 이튿날 맑게 개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번암은 정양사의 헐성루(歇惺樓)에 올라 일만 이천 봉의 전경을 마주한 감회를 ‘이튿난 아침 비가 개어 헐성루에 오르다 翌朝雨霽登歇惺樓익조우제등헐성루’라는 시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일찍 일어나 난간 기대니 비로소 시야 툭 트이고
早起憑欄始豁然(조기빙란시활연)
골짝 구름 피어오르는 드넓은 창공엔 해가 걸렸네
洞雲寥廓日輪懸(동운요곽일륜현)
맑고 밝은 본체가 일찍이 손상된 적이 있었던가
虛明本體何曾損(허명본체하증손)
변함없이 하늘로 높이 솟은 일만 이천 봉이여
依舊叢霄萬二千(의구총소만이천)
옛 사람들은 글이나 그림을 통해 유람을 간접 경험하는 것을 와유‘臥遊’라고 불렀다. 번암의 시를 통해 아름다운 누워서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본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 본관 평강(平康). 자 백규(伯規). 호 번암(樊巖)·번옹(樊翁). 시호 문숙(文肅).]- 조선 후기의 문신. 영조대의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중추부지사 응일(膺一)의 아들이다.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 배웠다. 1735년(영조 11) 15세에 향시에 급제한 후 1743년에 문과정시를 통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8년 영조의 특명에 의해 탕평책의 제도적 장치인 한림회권(翰林會圈)에 뽑혀 예문관 사관이 됨으로써 정통 관료로 성장하였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묘소를 빼앗았다 하여 삼척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753년에 균역법 운영상황을 조사하는 충청도 암행어사, 1755년에 나주괘서사건을 조사하는 문사랑(問査郞)으로 활동하였고 부승지 ·이천부사·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58년 도승지가 되었는데,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다. 그 후 대사헌·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등 언론과 학문의 관직, 경기감사·개성유수·안악군수·함경감사·한성판윤 등의 지역 행정직, 비변사당상과 병조·예조·호조의 판서 등 중앙 정치·행정직을 두루 역임하는 한편 1771년에는 동지사로 중국에도 다녀온 후, 1772년부터는 세손우빈객으로 세손의 교육에 참여하고, 공시당상(貢市堂上)으로 경제활동을 관할하였다. 이후 호조판서·좌참찬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처리한 후,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목을 마련하는 등 국왕의 정책을 보필하였다.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를 역임하였으나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그와 친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 정조의 특명에 의해 우의정이 되었으며 2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3년간 혼자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1793년에 한때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로는 주로 수원 화성 축성을 담당하였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에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에 영남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되었다. 영조대에 활동한 스승 오광운을 이은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서 사도세자를 신원하여야 한다는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일이 계기가 되어,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金縢)〉을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두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노론 출신으로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김종수(金鍾秀) ·윤시동(尹蓍東)의 상대역이라 할 수 있다.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정파를 나누면 시파(時派)로 분류된다. 전반적인 사상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당시의 주도세력인 서인·노론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주장을 하였다. 정치체제는 노론들이 남송(南宋)을 내세웠던 것에 비해 강력한 왕권에 의한 통일국가를 유지한 전한(前漢)을 모범으로 하였다. 천주교 ·불교 등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으나 정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정조 중반 이후 여러 차례 처벌받고, 죽은 뒤 관작을 뺏긴 데는 천주교를 두둔했다는 것이 큰 구실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 모순들을 깊이 인식했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상업보다 농업을 강조하였으며 1791년에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한편, 사족 우위 및 적서(嫡庶) 구별을 엄히 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꾀하려는 보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이어졌으며, 사후에도 남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가 유지되어 19세기 순조 연간 세도정치 아래에서 남인들의 정치적 발언은 그를 신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문집으로 《번암집》이 있다.
*惚(홀) : 황홀할 홀, 1.황홀하다(恍惚ㆍ慌惚--: 미묘하여 헤아려 알기 어려운 상태이다), 2.흐릿하다, 3.확실(確實)하게 보이지 않는 모양
*冥(명) : 어두울 명, 어두울 면
*惆悵(추창) : 실망, 낙담하는 모양, 슬퍼하는 모양
*玉女(옥녀) : 1.옥(玉)과 같이 몸과 마음이 깨끗한 여자(女子), 2.선경(仙境)에 있는 여자(女子). 선녀(仙女), 3.남의 딸의 높임말.
*微(미) : 작을 미, 1.작다, 자질구레하다, 2.정교하다(精巧--), 정묘하다(淨妙--), 자세하고 꼼꼼하다, 3.적다, 많지 않다
*呈(정) : 드릴 정/한도 정, 1.드리다, 2.웃사람에게 바치다, 3.나타내다
*半面粧(반면장) : 얼굴의 반면만 화장(化粧)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