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비스님의 3대선시 특강
-2013년 12월 23일-25일, 동화사한문불전승가대학원-
證道哥
永嘉 玄覺 禪師
증도가는 신심명과 함께 선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시다. 한국 선불교에서는 신심명 증도가 대승찬까지는 익숙하게 외워서 비록 망상이어도, 이것이 자기의 견해, 사상, 선사상의 안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내가 어릴 때 효봉스님, 동산스님 같은 스님들이 법문하는 것을 듣고 노트도 하고 했는데, 나중에 신심명을 외우고 증도가를 외우고 보니 그것이 전부 신심명 법문이고 증도가 법문이었다. 그런 스님들도 신심명이나 증도가를 법문에 많이 인용 하였다.
옛날 스님들의 논서라든지 법어집에도 신심명이나 증도가나 대승찬을 많이 인용한다.
선불교의 고준한 견해를 세워주는 데는 이 3대선시를 지나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불교 최고의 안목이다.
1. 閒道人
(한도인)
증도가는 사이사이에 단락을 나눠서 제목을 하나씩 붙이는 구성으로 교재를 짰다. 처음 나온 것이 한가한 도인이다.
1) 君不見가
(군불견가)
그대는 알리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라는 말은 ‘그대는 아는가?’라는 말이다. 그대는 아는가 무엇을?
絶學無爲閑道人은 不除妄想不求眞이라
(절학무위한도인은 부제망상불구진이라)
배울 것도 없고 할일도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버리지도 않고 진심을 구하지도 않네.
절학무위한 도인은 구제망상불구진이라. 우리가 배우기를 좀 좋아하는가. 그런데 배우는 것을 다 끊었다. 그러자 아무 할 일이 없다. 한가한 도인이다.
지도무난(地道無難)으로 시작되는 신심명은 이어지는 구절마다 ‘지도(至道)’를 앞에 붙이면 해석하기가 아주 좋다. 증도가는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이 해석을 하는 열쇠가 된다. 구절마다 ‘절학무위한도인’을 붙여서 ‘절학무위한 도인은 이렇게 산다’‘절학무위한 도인은 이렇게 본다’‘절학무위한 도인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해석하면 해석이 쉬워진다.
첫 구절이 절학무위한도인은 부제망상불구진이라고 하였다. 절학무위한도인은 망상을 제하지도 않고 진심을 구하지도 않는다. 불구진할 때의 진(眞)은 망상의 대(對)가 되지만 진을 진상이라고 하지 않고 진심이라고 해석한다.
절학무위한 도인은 망상을 제하지 아니하고 진심을 구하지도 않는다.
*
학(學)은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유교에서는 아예 학을 ‘배운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그냥 ‘학한다’라고 쓰기도 한다. ‘배운다’라고 해석을 해버리면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것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학한다’라고 쓰면 해석은 덜 된 것이지만, 그래야 학이 심성을 단련하고 심성을 기르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양심(養心), 양성(養性)이라고 할 때 기를 양(養)자의 역할이 학의 역할이다.
여기 절학무위하고 할 때의 학도 글자를 배우는 학이 아니라 수행을 말한다. 수행인은 망상도 제하지 않고 진심도 구하지 아니한다.
無明實性卽佛性이요 幻化空身卽法身이라
(무명실성즉불성이요 환화공신즉법신이라)
무명의 실제 성품이 그대로 부처님 성품이며
환영 같은 허망한 육신이 그대로 법신이네.
이 구절은 내가 제일 잘 인용하는 구절이다.
무명실성이 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다.
우리는 불성과 번뇌 무명을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불성은 좋아하고 끊임없이 찾으려고 하고, 무명 번뇌는 싫어하고 배척한다. 무명 번뇌는 못쓰는 것, 나쁜 것이고, 불성은 좋은 것, 진여는 착한 것이니 어떻게 하더라도 불성진여를 찾아야 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무명실성이 즉불성이다. 그리고 환화공신은 즉법신이다.
환화공신은 우리 육신인데 육신은 허물이 많다. 유마경에도 육신의 허물을 수 백 가지 들어놓았다. 우리 육신은 바늘만 찔러도 아프고 피고름이 나온다. 늙고 병들고 쓰러진다. 그에 반해 법신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 영원한 평화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것은 전부 공갈이고 거짓이다.
허망하고 쓰잘 데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이 육신이 그대로 법신이며 이 육신을 빼놓고 법신은 없다.
*
육조단경에서도 십년 동안 열반경을 읽은 사람이 육조스님에게 와서 “육신은 허망하지만 법신은 상주하는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육조스님은 “야 이 멍청한 놈아, 지금 육신하고 법신을 나눠놓고 보는 것이냐?” 라고 물었다.
육신과 법신을 나눠놓고 보는 것이 그동안의 우리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법신이 그대로 육신이고 육신이 법신이다.
육신 빼놓고 달리 법신으로 등장해서 써커스를 한다든지 기상천외한 쇼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없다. 무명실성이즉불성이다. 번뇌 무명이 그대로 불성이다. 캄캄한 곳이 밝은 곳이다. 밝은 곳이 캄캄한 곳이다.
*
나는 옛날에 송광사 문수전에서 정진하면서 문수전 옆의 관음전 부전 소임을 보았다. 법당을 관리하는 일인데 70년대 초라서 송광사에 전기가 안들어왔을 때다.
캄캄한 밤, 관음전에 들어가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방향을 적당하게 잡고 느낌으로 몇 걸음 들어가서 손을 뻗자 탁자가 잡혔다. 탁자에서 손을 뻗으면 성냥통이 잡힌다. 칠흙같은 어둠이어서 눈은 감으나 뜨나 똑같았다.
어둠이 법당안에 가득히 있었는데 내가 성냥불을 탁 켜는 순간, 그 칠흙 같은 어둠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둠이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아니다. 관음의 전의 문은 다 닫혀 있었다.
어둠은 불을 켠 순간 사라진다. 문을 닫고 들어왔기 때문에 방에 있던 어둠이 나갈 시간도 틈도 없었고 누군가 그 어둠을 모아서 끌고 나가거나 들고 나가지도 않았다.
불을 켜는 순간 어둠은 사라지듯이 번뇌망상도 마찬가지다. 그때 내가 어둠과 밝음은 둘이 아니고 똑같은 것이구나, 번뇌망상과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구나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 후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이야기를 한다. 그런 경험을 견성이라고 하든지 오도라고 하든지 그까짓 거 이름 붙일 것은 없다.
어둠이 밝음이고 밝음이 어둠이고 무명실성이 즉 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라고 하는 이 사실 그것 뿐이다.이것이 사실이 얼마만치 우리의 가슴에 와 닿을지는 각자 우리들의 과제다.
2) 法身覺了無一物이요 本源自性天眞佛이라
(법신각요무일물이요 본원자성천진불이라)
법신의 실상을 깨닫고 나니 아무 것도 없고
모든 존재의 근본자성이 그대로 천진불이로다.
법신을 깨닫고 나니 아무 한 물건도 없고 우리 본원자성자리가 천진한 부처더라.
五陰浮雲空去來요 三毒水泡虛出沒이로다
(오음부운 공거래요삼독수포허출몰이로다)
오음의 육신도 뜬구름이라 할 일없이 오고가며
삼독의 번뇌도 물거품이라 헛되이 출몰하네.
깨달은 자성의 자리에서는 오온의 뜬구름이 헛되이 왔다 갔다 하고 탐진치 삼독이 물거품처럼 헛되이 출몰한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은 전부 유치원생들에게 공갈치는 이야기다.
절학무위한도인도 오음이 다 있고 삼독도 다 있다. 그런데 그 물결 따라서 출렁할 때는 없다가 썩 밀려가면 없어져 버리는 물거품과 같을 뿐이다
나를 형성하고 있는 색수상행식 오온이 뜬구름처럼 떴다 가라앉았다 없어졌다 있다 하므로 그것은 공거래다.
견성을 했다고 해서 탐진치 삼독이 아예 싹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색수상행식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음도 삼독도 그대로 있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헛되게 출몰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 역시 좋은 것을 보면 욕심이 나기도 하고 안좋은 것을 보면 안좋을 수 있다. 욕심도 나고 진심도 나고 어리석음도 있지만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뜬구름처럼 왔다갔다 하는 것이고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삼독의 물거품이 탁 떴다가 또 파도치면 사라지듯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오가는 것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보통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삼독의 물거품이 어떤 사람에겐 오래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겐 한 순간에 금방 사라지기도 한다.
사라지지 못하는 사람 중에는 끙끙 앓다가 속병을 앓고 위장병을 앓다가 나중에는 암까지 걸려서 돌아가시는 분도 더러 있다.
*
바닷가에 가서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깨달을 점이 많다. 특히 증도가 같은 이런 공부를 해 놓으면 바닷가에 놀러가는 것도 그대로 공부다.
헷세가 쓴 <싯다르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나중에는 뱃사공 노릇을 하는 것이 나온다. 물의 변화를 보면서 공부가 원숙해진다는 내용이 있다.
3) 證實相 無人法하니 刹那滅却阿鼻業이라
(증실상 무인법하니 찰나멸각아비업이라)
실상을 증득하니 나와 남의 분별이 없어지고
찰나사이에 무간지옥의 업이 사라지네.
실다운 모습을 증득하니 나다 남이다 하는 인법, 상대적인 견해가 없어지고 아비지옥에 갈 업도 찰나에 멸각한다. 실상을 증득하니 지옥에 가도 지옥이 아니고 천상에 가도 천상이 아니다.
황금으로 집을 지은 거부장자의 집에 있어도 황금으로 보이지 않고, 반대로 거죽대기를 덮고 논두렁을 베고 자도 절학무위한 도인의 마음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황금의 집이니 논두렁이니 거죽대기니 하는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증도가가 참 좋다.
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 교무스님과 겨울특강을 논의하면서 ‘이번엔 나 좀 빼줘라’하고 실랑이를 했다. 그런데 <삼대선시>라고 특강제목을 정해놓자마자 신심이 났다. 신기한 일이었다. 힘들어서 안오려고 얼마나 뺐는지 모르는데 여기 이렇게 오고 보니 참 좋다.
若將妄語誑衆生인댄 自招拔舌塵沙劫이로다
(약장망어광중생인댄 자초발설진사겁이로다)
만약 거짓말을 가지고 중생들을 속인다면
영원히 발설지옥에서 사는 업보를 자초하리라.
만약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혀를 뽑아서 밭을 가는 지옥에 들어가서 진사겁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을 보내는고통을 자초할 것이다.
지금까지 영가스님이 한 소리 중에 제일 기억할 소리는‘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이라고 하는 말이다.
이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거짓말이라면 발설지옥에 가서 진사겁을 지내도 영가스님이 충분히 감당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무명실성이 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라’라고 하는 말을 무턱대고 믿기 바란다. 잘 몰라도 그냥 그렇게 자꾸 말하며 다니시길 바란다.
영가스님이 다 책임진다고 하였다.
4) 頓覺了 如來禪하니 六度萬行體中圓이라
(돈각료 여래선하니 육도만행체중원이라)
여래선의 높은 경지를 순식간에 깨달으니
육도만행을 닦아 얻어지는 공덕이 마음 안에 다 있네.
여기서 여래선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선 조사선 할 때의 여래선이 아니다. 부처님이 터득하신 선, 최상선, 최고 가는 선을 말한다. 그 선을 깨닫고 나니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런 육도만행이 내 자신 속에 원만히 낱낱이 이루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육바라밀을 불자가 수행해야 할 최상의 덕목이라고 해서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그런데 증도가에서는 깨닫기만 하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그 차원이 굉장하다.
이런 강의는 총림에서나 할 수 있는 소리다.
해인총림, 영축총림에서도 요즘에 이런 소리를 못한다.
팔공총림 동화사이기 때문에 이런 강의가 행해진다.
夢裏明明有六趣나 覺後空空無大千이라
(몽리명명유육취나 교후공공무대천이라)
꿈속에서는 분명하고 분명하게 육취가 있으나
꿈을 깨고 나면 텅텅 비어 온 세상이 하나도 없네.
꿈속에서는 분명하고 분명하게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온갖 갈래의 삶이 있다. 그러나 꿈 깨고 나면 텅비고 텅비어서 삼천 대천 세계가 하나도 없다.
꿈을 깨고 나니 꿈속에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떨 때는 꿈에서 깬 것이 아까울 때도 있다. 돈을 많이 얻었다든지 벼슬이 높아졌다든지 아프던 병이 나았다든지 기분 좋은 꿈을 꾸었는데 깨보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다시 잠자면서 그 꿈을 계속 이어보고 싶지만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노력을 얼마나 해봤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된다. 다시 그 꿈이 안돌아온다. 그렇게 허망한 것이 우리 인생사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
5) 無罪福 無損益하니 寂滅性中莫問覓하라
(무죄복무손익하니 적멸성중막문멱하라)
죄도 없고 복도 없고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으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아무것도 찾지 말라.
죄도 복도 손해도 이익도 없다. 적멸한 성품가운 데서 묻지를 말아라. 적멸한 성품은 선불교의 안목이다. 선불교는 이거 하나 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적멸성을 누리면 육도만행이 다 그 속에 있다. 그렇게 아는 것이 선불교의 특징이다.
比來塵鏡未曾磨러니 今日分明須剖析이라
(비래진경미증마러니 금일분명수부석이라)
예전에는 때 묻은 거울을 미처 닦지 못했었는데
오늘에는 분명하게 거울을 쪼개어 버렸네.
비래는 지난날이고 진경은 먼지 낀 거울이다. 지난날의 때 낀 거울은 일찍이 그 때를 닦지 못했을새 오늘날 분명하게 내가 쪼개고 쪼갰다.
분명하게 쪼개고 쪼갰다는 것은 환하게 해결했다는 것이다. 영가스님도 과거에는 이런 차원으로 살지 못했다. 이런 차원으로 살기까지 상당히 고초가 많았고, 어려운 세월이 있었다.
영가스님은 육조스님에게 가서 인가를 받기 전에 참선하여 깨달은 분이 아니라 유마경을 읽다가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견해가 뛰어나니까 도반스님이 “니혼자 깨달았다고 잘난척 하지 말고 육조스님한테 가서 인가를 한 번 맞는게 어떠냐.”하였다.
“인가 맞으나 마나 내 기분 좋으면 됐지. 뭘 인가를 맞아?”하고 영가스님이 거절했는데도 도반스님이
“그래도 그게 아니야. 한 번 가자. 놀기 삼아 산천구경도 하고 한 번 가자.”해서 육조스님이 있는 보림사로 갔다.
영가스님은 육조스님을 만나서도 절도 안했다.
육조스님은 마침 도량에 나와 있었는데 “저 스님이 육조스님이야.” 라고 해도 “음 그렇구나.”하고 절도 안하고 그 앞에서 왔다갔다만 했다.
육조스님이 “어떤 수좌가 예의도 안갖추고 저렇게 건방스럽게 왔다갔다 하느냐?” 했더니 “인생이 무상한데 뭘 예의를 갖춘단 말입니까” 하고 영가스님이 대답을 해서 대화가 서로 오가고, 그 자리에서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에게서 인가를 받고 조계산을 내려오면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여러 날이 걸렸을 것이다. 그때 차도 없고 말도 없었으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텐데,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쓴 깨달음의 노래가 증도가다.
도를 증득한 노래, 도를 깨달은 노래가 증도가다.
영가스님이 유마경을 보고 이미 깨달았는데 도반이 ‘증(證)하나 받아놓으면 써먹을 때 많다’고 해서 육조스님에게 가서 인가를 받고 육조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인가받은 유래도 뒤에 가면 이 증도가 속에 다 나온다.
6) 誰無念 誰無生고 若實無生無不生이라
(수무념 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라)
누가 무념이라 하고 누가 무생멸이라 했던가.
만약 진실로 생멸이 없다면 생멸하지 않음도 없네.
오늘 지금 내가 그것을 다 털어버렸다. 무생은 누구고 무념은 누구냐.
만약에 진짜 무생이라면 무불생이다. 생하지 아니함도 없다. 그러니 전부 다 생하게 되어 있다.
수무생 할 때 생(生)자 속에는 생멸(生滅)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누가 생멸이 없다고 말하느냐? 진짜 생멸이 없다면 그 생멸 없는 것도 또한 없으니 전부 생멸이다.
이런 것은 중도이론이다.
일체 것이 생멸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생멸이 없는 입장도 있다. 우리는 그 두 입장을 다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생멸하면서도 어느 한 면은 생멸하지 않은 입장이 있다.
공인(空認)이나 법인(法忍)이라는 말을 쓰는데 뒤에 참을 인자가 붙은 것은 참는다는 것은 눈에 안보이기 때문이다. 있기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멸하지 않는 입장이나, 진리는 눈에 안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확연하게 있는 것이다.
喚取機關木人問하라 求佛施功早晩成가
(환취기관목인문하라 구불시공조만성가)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 사람에게 물어 보아라.
성불하기 위해서 공덕을 베푼들 언제 이루겠는가.
무로 만든 로봇을 불러서 물어봐라. 저 엉터리 바보에게 한 번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공을 닦는 것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물어보라는 것이다.
부처 되는 것은 공을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부처에 눈을 떠야지 참선해서 부처되는 것도 아니고 기도해서 부처되는 것도 아니고 경을 봐서 부처되는 것도 아니다.
구불시공 조만성가, 부처를 구하려고 공덕 베푸는 것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우리는 성불하려고 온갖 공을 다 베푼다. 성불하기 위해서 공을 베푸는 경우가 너무 많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부처는 금방 무너진다.
본래 있는 부처는 무너질 것도 없다. 그러니 본래 있는 부처에 눈을 뜨라는 것이다.
‘구불시공조만성가?’이 구절을 많은 사람들이 인용한다. 선불교의 안목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래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참선을 하라. 참선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믿고 참선하라. 그런 줄 알면서 참선을 한다면 그때는 참선을 해도 참선하는 것이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처이고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2. 大圓覺
(대원각)
대원각은 크고 원만한 깨달음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보통 ‘정각(正覺)’ 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냥 정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일이기 때문에 아주 위대하고 원만한 깨달음이라고 해서 대원각이라고 표현하였다.
1) 放四大 莫把捉하고 寂滅性中隨飮啄하라
(방사대 막파착하고 적멸성중수음탁하라)
사대를 놓아버려 붙들고 있지 말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인연 따라 먹고 마시라.
사대를 놓아버리고 집착하지 말라. 신심명에도 ‘몽환공화(夢幻空華)를 하로파착가(何勞把捉)가,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인 것을 어찌하여 수고롭게 잡으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영가스님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했다. 설사 오래 산다 해도 그 차이는 오십보 백보일 뿐이다. 도 닦는 사람으로서 사대에 너무 그렇게 연연할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적멸성중에 수음탁하라.
적멸성은 적멸한 성품인데 우리의 본성, 진성, 진여불성,자성, 불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모든 것이다. 불법에서 이 명제를 빼버리면 생명이 없어진다.
*
바닷가에는 바람이 불어서 물결이 요란하지만 물 자체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도 또한 탐진치 삼독과 온갖 팔만사천 번뇌를 일으키고 시시비비 하지만 그 본성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함없이 적멸한 그 자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되고 나아가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 그것이 불교인의 과제다.
수음탁은 마시고 먹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 본성자리를 잘 지키면서 생활을 영위해야지 너무 사대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다.
따지고 보면 제행무상이다. 일체가 공하다.
불교에는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이라고 하는 네 가지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가 사법인이다.
근래에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부탄의 켄체스님이 있다. 이 스님의 ‘바라’라고 하는 영화가 올해(2013)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이 되었었다.
요즘 특히 부탄이나 티벳쪽의 아주 똑똑하고 총명한 스님들이 옥스퍼드, 캠브리지, 영국쪽 또 미국쪽으로 유학을 한 스님들이 많다. 영화감독으로서 세계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켄체스님은 사법인으로 <우리 모두는 부처다>라는 책을 썼다. 스님들이 기회가 있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총명하게 많은 사례들을 이끌어서 잘 썼다.
諸行無常一切空이 卽是如來大圓覺이니라
(제행무상일체공이 즉시여래대원각이니라)
제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한 것이
그것이 곧 여래의 크고 원만한 깨달음이니라.
공한 그 자리, 적멸한 성품 그 자리가 즉시 여래의 대원각이다. 해인사의 장경각 앞에 팔만대장경을 대표하는 구절을 양쪽에 주련으로 써서 붙였는데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라는 감동적인 구절이다.
‘부처님께서 원만하게 깨달으신 그 장소가 도대체 어디냐? 그것이 팔만대장경이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현금생사다. 이렇게 생사가 출렁거리며 우여곡절과 시시비비 하는 삶 속에 원각도량이 있다고 하는 표현을 팔만대장경의 대표구절로 뽑아서 써 붙였다. 내가 늘 ‘대표구절’이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대표니까 해인사 법보전의 기둥에 그 구절들을 써붙였을 것이다. 그런 구절도 우리가 음미해 볼만한 의미심장하고 좋은 가르침이다.
2) 決定說 表眞乘을 有人不肯任情徵하라
(결정설 표진승을 유인불긍임정징하라)
분명하고 확실한 가르침과 진실을 나타낸 법을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껏 물어보라.
결정설은 결정적인 설명, 아주 분명한 해설이다. 진승이라고 하는 참다운 가르침을 표한 것이 표진승이다. 여기 증도가에서 이야기 하는 내용은 분명한 해설로써 참다운 가르침을 표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의문이 있거든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봐라.
임정진하라, 각자 자기의 마음, 정에 맡겨서 생각해 보아라. 누구에게 따지고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아니지 않느냐. 스스로 생각해보고 거기에서 이해하고 깨달아야 된다.
直截根源佛所印이요 摘葉尋枝我不能이라
(직절근원불소인이요 적엽심지아불능이라)
근원을 바로 깨달은 것은 부처님이 인가한 바요
잎을 따고 가지를 찾는 일은 나는 능하지 못함이로다.
근원을 바로 꺽어 들어가는 것은 부처님이 인가한 바이고 영가스님인 내가 근본자리, 근본취지를 터득한 것은 부처님도 인가한 바다.
아주 당당한 말씀이다. ‘나는 지엽적인 소리는 모른다. 설사 글을 잘 못 새기면 어떻고 글자를 좀 모르면 어떻고 법수 좀 못 외우면 어떤가, 그까짓 것은 다 지엽적인 소리다. 근본종지만 제대로 거량할 수 있으면 최고 아니냐. 그것이야 말로 부처님이 인가한 바다.’
자기가 아는 바, 자기가 깨달은 바에 대한 확고한 소신을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하고 있다.
*
영가스님은 본래 천태종 계통의 스님이었다. 공부를 천태종 쪽에서 하였다. 유식에도 밝고 천태학에도 밝은 대단한 분이었는데 유마경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육조 혜능 스님에게 가서 인가를 받고는 바로 선종으로 종파를 옮겼다.
중국에는 한 때 종파불교가 상당히 특색이 두드러졌다. 지금도 율종스님 옷이 다르고 선종스님들 옷, 교종스님들의 옷이 다르다. 특히 현재는 염불종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데 입는 옷도 약간씩 다르다. 본래는 분명하게 옷이 달랐는데 근래에는 그렇게까지 다르게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영가스님도 천태종 계통에서 똑똑하고 총명하고 학식이 깊은 전도 유망한 스님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선종으로 돌아서서 옷도 바꿔입었으니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증도가에는 비난 받는 것을 어떻게 소화하는가에 대한 내용도 많이 나온다. 그 사람을 알고 그가 쓴 글을 읽으면 이해가 빠르다. 신심명을 공부하면서 신심명을 지은 승찬스님에 대한 말씀을 내가 배경으로 많이 이야기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3) 摩尼珠 人不識하니 如來藏裡親收得이라
(마니주 인불식하니 여래장리친수득이라)
여의주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여래의 창고 속에 친히 감추어 두었도다.
마니주는 우리 심성, 일심자리를 말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 ‘내가 이미 깨달음을 터득해서 하나의 여의주, 보배 구슬로써 활용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 여래장속에는 친히 거둬들인 보물이있다, 마니주다.’ 라는 말이다.
스스로 그 자성을 깨달았음에 대한 표현이다.
六般神用空不空이요 一顆圓光色非色이라
(육반신용공불공이요 일과원광색비색이라)
여섯 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아니하고
한 덩어리의 둥근 광명은 빛이면서 빛이 아니로다.
안이비설신의가 신통묘용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움직이고 감촉하고 코로 냄새맡고 하는 이러한 여섯 가지 작용이 신통묘용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찌보면 텅 비어 공하다.
공한 것이면서 또한 공하지 아니한 도리가 있다. 그래서 공불공이다.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고 한덩어리의 원만한 광명은 색이지만 색이 아니다.
일과원광이란 마음자리다. 일심에 대해서 선가에서는 한덩어리의 원만한 광명, 구슬, 일주(一珠), 여의주, 마니주 등등의 표현을 많이 한다.
일과원광 역시 그 표현이다. 제대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원만한 광명을 발하는 구슬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색이지만 색이 아니다. 어찌 보면 사물같이 너무 뚜렷하지만 사물은 아니다. 사물이 아니면서 분명히 사물의 역할을 한다.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형체가 있고 무슨 냄새가 있는가? 아무 것도 없지만 그 작용은 제일 크게 한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전부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그야말로 제일 큰 작용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치가 묘한 이치다. 이러한 묘한 이치를 불교에서는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
4)淨五眼 得五力은 唯證乃知難可測이라
(정오안 득오력은 유증내지난가측이라)
다섯 가지 눈을 갖추고 다섯 가지 힘을 얻는 것은
오직 증득해야 알 바요 헤아리기 어려움이라.
오안은 금강경에 나오는 불안(佛眼), 법안, 혜안 등등 다섯 가지 눈이고 오력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갖고 있는 힘이다. 원래 부처님은 십력이라고 해서 열 가지 힘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오력을 말했다.
오안을 깨끗이 하고 오력을 얻는 것은 오직 증득한 사람만 알뿐이지 가히 측량하기 어렵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에도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 이라는 말이 있다. ‘증득한 사람이 알 바이지 다른 사람의 경계는 아니다’라는 뜻이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작은 기능에 있어서도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의 경지는 그 사람만이 알 뿐이지 다른 사람은 모른다. 그런 상황들이 너무 많다.
鏡裡看形見不難이요 水中捉月爭拈得가
(경리간형견불난이요 수중착월쟁점득가)
거울 속에 있는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물속의 달을 건지는 것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거울속에서 그림자를 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거울 앞에 서면 자기 얼굴이 비친다. 그러나 거울 속에 그 그림자가 실재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현상에서 이런 몸을 가지고 작용을 하는 것은 다 거울속에 비친 그림자다.
수중착월쟁점득가. 물속에서 달을 어찌 건져낼 수 있겠는가. 물속의 달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옛날에 오백 원숭이들이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께 온갖 과일 따다 바치는 것을 보았다. ‘망고나 시시한 과일 같은 공양은 사람들이 많이 하니까 우리는 물속에 있는 달을 건져다가 부처님께 바치자’고 원숭이들이 서로 의논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물속에 비친 달은 그림자일 뿐이다. 그 달을 건지려다가 오백 마리 원숭이들이 전부 빠져죽고 그 갸륵한 마음으로 원숭이들은 나중에 오백 아라한으로 환생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5) 常獨行 常獨步하야 達者同遊涅槃路라
(상독행 상독보하야 달자동유열반로라)
나는 항상 홀로 일하고 항상 홀로 다닌다.
그러나 통달한 사람끼리는 열반의 길에 함께 노닌다.
상독행 상독보 달자동유열반로 좋은 말이다.
항상 홀로 다닌다. 통달한 사람만이 홀로 열반의 길에서 함께 노닌다.
당시에 영가스님에게는 천태종 도반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調古神淸風自高요 貌悴骨剛人不顧라
(조고신청풍자고요 모췌골강인불고라)
곡조는 예스럽고 기운은 맑으며 그 기풍은 저절로 높으며
얼굴은 초췌하고 뼈는 앙상하여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네.
곡조는 아주 예스럽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다 있다는 뜻이다. 내 정신은 너무나도 맑다. 그 가풍은 스스로 아주 고준하고 너무나도 높다.
조고신청풍자고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다.
곡조는 예스럽고 부처님의 깨달음이 다 있다. 그러나 내 몰골은 초췌하게 뼈만 남아 있어서 길거리에 걸어가든지 대중에 섞여 있어도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다.
아마 형편이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그렇게 표현한다.
3. 無價珍
(무가진)
1)窮釋子 口稱貧이나 實是身貧道不貧이라
(궁석자 구칭빈이나 실시신빈도불빈이라)
궁색한 부처님의 제자들은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
실은 이 몸이 가난하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닐세.
궁석자 구칭빈 실시신빈도불빈빈즉신상피루갈이요 도즉심장무가진이라
내가 어릴 때 이 구절을 읽고는 마음의 넉넉함을 느끼고 ‘아 참 근사하구나.’하고 중노릇의 외로운 점이라고 할까, 세속적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 한 구절에서 다 보상을 다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은 스님들이 가난하지도 않지만, 가난한 석자가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 실로 몸이 가난하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도가 가난해서는 안 된다. 몸은 얼마든지 가난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가난할수록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청빈한 것을 자랑하고 무소유를 자랑한다. 그러나 불법에 대한 이해가 자랑할 거리가 없으면 그건 곤란하다. 스님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이런 구절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된다.
貧則身常被縷褐이요 道則心藏無價珍이라
(빈즉신상피루갈이요 도즉심장무가진이라)
가난한 면으로는 몸에 항상 누더기를 입었고
도의 입장으로는 마음에 무가보를 지니고 있네.
가난한 입장에서는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있고, 도의 입장에서는 마음속에 무가진보를 갖추고 다닌다. 그야말로 누더기 속에 온갖 넉넉한 마음과 지혜와 지식이 풍부해서, 세상 사람들이 길거기에서 누더기를 입은 사람을 보면 두려워 하도록 되어야한다.
먹물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두려워서 ‘야 먹물옷 입은 사람 겁난다. 마음속으로는 도가 있고 지식으로도 일반사람들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다.’라고 되어야 된다. 그래야 속인들이 스님들을 달리보고 또 소중하게 여긴다. 스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불법까지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법과는 상관이 없는데 불법까지도 소중하게 보는 것이다.
2) 無價珍 用無盡하니 利物應機終不恡이라
(무가진 용무진하니 이물응기종불린이라)
그 무가보를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으니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근기를 따라 베푸는 일에 끝내 아끼지 않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진보를 사용하는데 아무리 사용해도 사용하는 것에 다함이 없다.
지식도 어떤 경지를 터득해 놓으면 그것을 아무리 퍼주고 글로 쓰고 말로 표현해도 오히려 더 빛난다. 그런데 깨달은 도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용부진이다. 아무리 사용하고 사용해도 다함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도리다.
중생을 이롭게 하고 시대에 응해 맞추어도 마침내 인색한 바가 없더라. 아낀 바 없이 마음껏 나눠줘도 남는 도리다.
三身四智體中圓이요 八解六通心地印이라
(삼신사지체중원이요 팔해육통심지인이라)
삼신과 사지가 내 마음 가운데 원만히 갖춰져 있고
팔해탈과 육신통도 본래로 마음 땅에 모두 있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고 하는 삼신과 네 가지 지혜인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등은 신체 가운데 원만히 갖추었다.
해탈도 여러가지로 표현하는데 팔해탈과 육신통도 내 마음 땅의 도장이다, 마음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上士一決一切了하고中下多聞多不信이라
(상사일결일체요하고 중하다문다불신이라)
상근기는 한 가지를 해결하면 일체를 다 해결하고
중근기와 하근기는 그렇게 많이 들어도 믿지를 않네.
근기가 뛰어난 상근기들은 한 번 해결하면 일체를 다 해결한다. 그런데 중근기 하근기는 많이 듣고 아무리 보아도 믿음이 잘 생긴다.볼 때 뿐이고 들을 때 뿐이고 거기에 대한 소신과 믿음이 생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다.
但自懷中解垢衣언정 誰能向外誇精進가
(단자회중해구의언정 수능향외과정진가)
다만 스스로 마음 가운데서 때묻은 옷을 벗어버릴지언정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자신의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
다만 스스로 품속에서 옛 때 묻을 옷을 풀어헤칠지언정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내 자신의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 자신의 정진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 속에서 번뇌망상이 다 떨어져 나가고 구태의연한 사고가 다 떨어져 나가는 것을 해구의라고 표현했다. 때묻은 옷을 풀어헤쳤다. 벗어버렸다,
이런 말 속에도 천태종에서 촉망받는 인물로 있다가 선종으로 가서 어떤 깨달음을 성취했는데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는 영가스님의 처지가 드러난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
어떤 기록에 의하면 영가스님은 어느 큰 절 옆에 조그마한 오두막을 지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랫동안 살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공부는 아주 깊은데 대중생활이 여의치 못하니까 대중들로부터 상당히 핀잔을 많이 받고 비난도 많이 들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3) 從他謗 任他非하라 把火燒天徒自疲로다
(종타방 임타비하라 파화소천도자피로다)
다른 사람들이 비방하고 헐뜯는데 맡겨 두어라.
마치 불로써 하늘을 태우는 일이라 스스로 피로할 뿐이로다.
비방하든 그르다고 하든 잘못됐다고 하든 다 그들이 비방하고 그르다고 하는데 그냥 맡겨 두어라. 나를 비방하고 잘못됐다고 하고 외도라고 하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횃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똑같다. 횃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려고 해봐야 하늘을 태우려는 그 사람만 한갓 피곤할 뿐이다. 이런 소리를 글로 남겼을 때는 영가스님 자신이 얼마나 그런 비방을 많이 들었겠는가. 절 생활이 그랬었고, 천태종에서 전통 선종으로 넘어온 것 때문에도 평소에 많은 비난을 들으면서 살았다.
그러나 영가스님은 육조스님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제자로서 훗날 선종사에서는 길이 빛나는 분으로 이해된다.
我聞恰似飮甘露하야 銷融頓入不思議로다
(아문흡사음감로하야 소융돈입부사의로다)
나는 비방하는 말을 들으니 흡사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깡그리 녹아서 모두 사라지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도다.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 흡사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다. 비난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업장이 소멸하고 내 복이 자라난다. 비난하는 사람은 손해지만 비난을 듣고 내가 잘 소화하니까 나는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슴을 찌르는 비난의 소리도 전부 녹아서 몰록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불가사의 하다.
아함경 같은 데 보면 부처님도 비난의 문제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다. 이런 것을 제대로 소화할 줄 알아야 된다. 비난을 소화 잘하는 것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관건이다.
내가 잘못해서 비난을 들으면 당연히 잘못해서 비난을 받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또 잘못이 없는데도 비난을 받았다면 나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상대가 비난하든 말든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계산하고 있지만 정작 나를 비난하는 것과 맞닥뜨리면 소화가 잘 안된다. 그래서 울화통이 터지고 반발을 일으킨다.
여기 이런 이야기를 써 놓은 것을 보면 영가스님은 참 많은 비난을 듣고 살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4) 觀惡言 是功德이니 此則成吾善知識이라
(관악언 시공덕이니 차즉성오선지식이라)
악한 말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것이야 말로 공덕이라
이렇게 되면 악한 말을 하는 이가 곧 나의 선지식이로다.
악언을 관하는 것이 공덕이다. 나를 악하다고 하는 말을 공덕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내 업장이 소멸되니 고맙다 정말 고맙다’고 하는 것이다.
나를 악하다고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나의 선지식을 이룬다. 나에게 무슨 선지식이 또 있겠는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나에게 큰 선지식이다. 대단한 말씀이다.
경전에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한 대목은 잘 없다.
부처님이 나를 비난하는 것은 마치 입에다 피를 물고 상대를 향해 뿌리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것이라든지 먼지를 한 주먹 갖고 바람을 향해서 날리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먼지를 쥐고 바람을 향해 뿌리면 그 먼지가 어디로 가겠는가.
피를 입에 물고 뿌려봐야 상대에게 그 피가 닿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입에는 피가 한 입 물려 있게 된다. 결국 비난하는 사람만 손해다.
不因訕謗起怨親이면 何表無生慈忍力가
(불인산방기원친이면 하표무생자인력가)
비방을 인해서 원수와 친한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면
생사를 초월한 자비와 인욕의 힘을 어찌 나타낼 수 있으랴.
비방할 산(訕)자 비방할 방(謗)자, 비방함을 인해서 원친을 일으키지 아니함이니 그것을 통해서 나의 공부와 도력을 표현한다. 아무리 비방을 해도 원수라는 생각을 안 일으키니 그것을 통해서 생멸이 없는 자비와 인욕의 힘을 표현한다.
당신들이 나를 비방 안 해주면 내 속에 들어있는 무생자인력을 어찌 표현할 길이 있겠나? 아주 고맙고 감사하다.
내가 도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시험해 보려고 했는데 시험한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당신들이 나를 비방하고 비난을 해주니 내가 어느 정도 그런 비방의 말을 소화내는가를 가늠 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하표무생자인력가
내가 터득한 무생 생멸이 없는 자비와 인욕을 힘을 어디다 표현해 보는가.
‘너희가 나를 비방하는데 내가 그것을 내 마음에 비춰보니 충분히 소화도 잘 되고 오히려 나에게 공덕도 되고 진정 선지식으로 다가온다. 내 도력을 시험해 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고맙다.’
이런 구절을 우리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으면 참 큰 소득이다.
5) 宗亦通 說亦通하여 定慧圓明不滯空이로다
(종역통 설역통하여 정혜원명불체공이로다)
근본종지도 통달하고 설법도 또한 통달하여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고 밝아서 공에 막히지 않도다.
내가 종지로도 통했고 설법에도 또한 통했다. 설명, 설법, 글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 설이다.그래서 나는 종통 설통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불교를 이야기 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종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고, 종지를 알되 그 뜻을 제대로 이해시키는 능력을 가지기는 또 쉽지 않다.
여기는 종역통 설역통 해서 정과 혜가 원명하고 공에 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혜가 원명하다는 것은 선정과 지혜가 너무나도 뚜렷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에 떨어져 있지 않다.
非但我今獨達了라 恒沙諸佛體皆同이로다
(비단아금독달요라 항사제불체개동이로다)
비단 나만 지금 홀로 통달해서 마친 것이 아니요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모든 깨달은 이들의 마음이 다 같도다.
비단 지금 나 홀로 통달하는 것만이 아니다, 황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의 심체가 다 똑같다. 내 깨달음이나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똑같다. 자기의 공부를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야말로 육조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을 만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6) 師子吼 無畏說이여 百獸聞之皆腦裂하고
(사자후 무외설이여백수문지개뇌열하고)
사자후와 같은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백가지 짐승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뇌가 찢어지고
내가 이 깨달음을 성취해서 진리에 입각한 이런 엄청난 말들을 하는 것은 그 무엇도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아무도 두려울 것이 없다. 엄청난 설법이어서 그야말로 사자후다.
香象奔波失却威하고 天龍寂聽生欣悅이로다
(향상분파실각위하고 천룡적청생흔열이로다)
코끼리는 분주하게 위엄을 잃고 달아나며
천신들과 용들은 가만히 듣고 법희선열에 충만하네.
사자가 으르렁 부르짖으면 그 옆에 작고 시시한 백 가지 짐승들은 전부 뇌가 찢어지고 기절초풍을 한다. 그런데 향상분파실가위다. 절에서 소임자들을 공지하는 방을 용상방(龍象榜)이라고 한다. 용은 전설의 동물이기는 하지만 용이나 사자. 코끼리는 불교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동물들이다.
코끼리는 사자에게는 상대가 안되기 때문에 사자가 한 번 부르짖으면 자기의 위엄을 잃어버리고 정신없이 도망을 간다. 천용은 고요히 듣고서 기쁨을 낸다.
영가스님이 도를 증득하고 부르는 노래인 이 증도가가 당당한 사자후라면 하근기들은 백수가 되겠고, 좀 나은 근기들은 코끼리고, 영가스님과 도가 같은 유는 천용이 된다고도 나눠 볼 수 있다.
영가스님과 도가 같은 이들은 ‘맞아 맞아 당신의 도를 증득한 노래야말로 정말 도에 계합하는 말씀이다’ 하고 기뻐한다는 말이다.
4. 禪
(선)
다음은 영가스님 당신이 오랫동안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공부한 이야기다.
1) 遊江海 涉山川하야 尋師訪道爲參禪이러니
(유강해 섭산천하야 심사방도위참선이러니)
강과 바다를 건너 온갖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스승을 찾고 도를 물어 참선에 열중 하다가
강과 바다로 노닐고 산천을 거닐면서 스승을 찾고 도를 묻고 그래서 참선을 했다.
自從認得曹溪路로 了知生死不相關이로다
(자종인득조계로로 요지생사불상관이로다)
조계의 길에서 인가를 받음으로부터
생사가 나하고는 관계없는 사실을 깨달아 알았도다.
내 스스로 조계 육조스님을 친견함으로부터 생사가 아무 관계없다는 사실을 요지했다. 이제 나와 생사는 아무 문제가 안된다. 확실한 생사 해탈을 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가스님은 육조스님을 만나 건방스럽게 법거량을 하면서 인가를 확실하게 잘 받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육조스님을 친견해서 내 삶은 죽어도 이제 죽음이 아니라고 하는 생사불상관을 알게 되었다.
2) 行亦禪 坐亦禪이니 語黙動靜體安然이라
(행역선 좌역선이니 어묵동정체안연이라)
걸어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있어도 참선이니
말을 하든 묵묵하든 움직이든 고요하든 마음은 부동이라.
그래서 걸어다녀도 또한 선이고 앉아있어도 또한 선이고 누워있어도 선이고 잠을 자도 선이다. 그대로 선(禪) 속에 사니까 어묵동정에 내 마음은 너무나도 편안하다.
좌선을 해야만 선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여기 이런 사례들이 있지 않느냐,나도 그런 경지다 하면서 예를 든다.
縱遇鋒刀常坦坦이요 假饒毒藥也閑閑이라
(종우봉도상탄탄이요 가요독약야한한이라)
비록 창과 칼을 만난다 하더라도 항상 태연하며
가령 독약을 먹더라도 또한 동요 없이 편안하도다.
비록 칼날을 만난다 하더라도 항상 마음에 아무 변화가 없다. 구마라습의 제자인 승조법사(僧肇法師)가 어떤 법난에 휘말려서 사형을 집행당하게 되었다.
그 때 사형장에서 그가 한마디 한다.
‘장두임백인(將頭臨白刃)유여참춘풍(猶如斬春風)’‘머리를 시퍼런 칼날 앞에 들이대도 마치 따스한 봄바람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사형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어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도가 높지 않고, 그런 경계를 터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정신이 없는데 내 머리를 푸른 칼날 앞에 갖다 들이대도 마치 춘풍을 베는 것과 같다, 봄바람을 베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표현을 했다.
가요독약(假饒毒藥)이라 하더라도 야한한(也閑閑)이다. 설사 독약을 마신다 하더라도 또한 한가하고 한가할 뿐이다.이것은 달마스님의 경지다. 승조법사나 달마스님 경우와 같이 영가스님 자신도 또한 그렇다는 말이다.
我師得見燃燈佛하사 多劫曾爲忍辱仙이로다
(아사득견연등불하사 다겁증위인욕선이로다)
우리 스승 석가모니는 연등부처님을 친견하고
수많은 세월동안 인욕선인이 되었었다.
우리 스승 부처님께서는 연등부처님을 친견해서 다겁동안 일찍이 인욕선인이 되었었다.
3) 幾回生 幾回死 生死悠悠無定止라
(기회생 기회사 생사유유무정지라)
몇 번이나 태어났고 우리가 몇 번이나 죽었던가.
태어나고 죽고 다시 또 태어나는 일이 멈추지 않네.
몇 번이나 태어났고, 몇 번이나 죽었던가.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유유히 흐르고 흘러서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교를 아는 사람은 자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살을 해서 금생의 삶을 끝낸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과 사는 유유히 흐르고 흘러서 정지 하지 않는다.
이런 데 대한 것은 우리 불자들이 기본적으로 확신을 갖고 살아야 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삶도 중요하겠지만, 이웃 또는 도반들, 친척들 이런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사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영원히 산다. 다만 형태만 변하고 얼굴만 바꿔가면서 계절따라 옷을 바꿔 입듯이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산다. 선가에서도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고 대승불교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대승불교에서도 끊임없이 과거생이야기, 과거부처님 이야기, 미래 부처님 이야기, 과거에 살아온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다. 마음만이 아니고 육신도 마찬가지다.
육신도 불생불멸이고 마음도 불생불멸이다.
생멸하는 입장으로 보면 마음이 육신보다 훨씬 더 자주 생멸한다. 육신은 그래도 한 십여년이나 지난 뒤에 만나면 ‘아유 조금 늙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마음은 생멸이 더 빨라서 조석지변(朝夕之變)이다. 조석지변보다도 어찌 보면 더 빠르다.
불교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음이 소멸한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육신도 똑같다. 마음이나 육신이나 한결같이 다 불생불멸이다.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면 마음이든 육신이든 모든 존재의 실상은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불생불멸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법화경에도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라고 하였다. 세간상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다. 우리 얼굴이다. 그것이 상주한다는 것은 불생불멸한다는 뜻이다. 화엄경도 마찬가지다.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 약능여시해(若能如是解)제불상현전(諸佛常現前) 모든 것이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의 이치를 알면 바로 모든 부처님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자기가 이미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식이다. 중요한 이야기다.
自從頓悟了無生으로 於諸榮辱何憂喜아
(자종돈오요무생으로 어제영욕하우희아)
진리를 몰록 깨달아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하였으니
모든 영광과 오욕에 무슨 근심이 있고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내가 무생의 도리, 생멸이 없는 도리를 몰록 깨달아 마치니, 모든 영광과 오욕에 있어서 무엇이 근심되고 무엇이 기쁘겠는가.
불생불멸의 도리를 깨달았는데 영광과 오욕 그까짓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
불생불멸의 자리에 안주하고 있는데, 누가 나를 훌륭하다 하든지 나를 못났다고 하든지 그런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왕이 거지옷을 입어서 사람들이 거지라고 취급한다고 한들 왕은 그런 일들이 재미있게만 느껴질 뿐이다. ‘내가 거지 옷을 입었으니까 나를 거지라고 하는구나’ 하고 왕은 속으로 얼마나 고소하고 재밌겠는가.이치가 그와 같다.
불생불명의 이치를 터득하고 나면 그외에는 아무 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4) 入深山 住蘭若하야 岑崟幽邃長松下로다
(입심산 주란야하야 잠음유수장송하로다)
깊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적정한 곳에서 살고 있으니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어서 낙락장송 숲속이로다.
깊은 산에 들어가고 아란야에 주해서 아주 높고 깊은 큰 소나무 밑에
優遊靜坐野僧家하니 闃寂閑居實蕭灑라
(우유정좌야승가하니 격적한거실소쇄라)
한가롭고 편안하게 야승의 움막에 조용히 앉았으니
호젓하고 쓸쓸하게 한가로이 사니 맑고 깨끗하기 이를 데 없다.
넉넉히 야승의 집에 정좌하고 있다. 영가스님은 정상적인 절에도 살았겠지만, 이런 구절만 봐도 어머니를 모시고 조그마한 초가에 살면서 절에서 밥을 얻어서 어머니를 먹이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요하고 고요해서 한가하게 머물고 있으니 실로 소쇄하더라.
광주에도 소쇄원이라고 하는 집이 있다.
소쇄는 세속적인 티가 아무것도 없고 시끄러움도 없고 깨끗하고 상큼한 환경, 그런 정신이다. 그것을 여기서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자기 삶의 어떤 상황들을 우유정좌야승가 격전한거실소쇄라고 표현한다.
5. 何所爲
(하소위)
1) 覺卽了 不施功이라 一切有爲法不同이로다
(각즉요 불시공이라 일체유위법부동이로다)
깨달으면 곧 다 끝나고 더 이상의 노력을 베풀지 않는다.
일체 유위의 법은 모두가 다 차별하고 다르니라.
깨달으면 끝이다. 더 이상 공을 베풀 일이 아니다.
앞에서도 ‘구불시공조만성(求佛施功早晩成)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베푼들 그 공 베풀어서 부처 되는 것이 어느 때 이루어지겠는가.’라고 하였었다.
각즉요 불시공이다. 더이상은 할 일이 없다.
일체 유위법은 법이 같지가 않다. 다 같을 수가 없고 절대적인 것이 없다. 전부 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한다.
요즘은 교통이 편리해져서 남방불교다 북방불교다 온갖 새로운 방법들이 많이 계발이 되어서 그야말로 백가쟁명으로 떠들고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도 옳은 것도 없고 그저 임시 땜발림 식이다.
또 요즘은 힐링이 대세라고 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계발을 해서 들고 나오는데, 얄팍한 생각으로 계발한 것이 며칠이나 가겠는가.
정답은 고전에 있다. 불교의 영원한 정답은 변치않는 경전 어록에 있다. 이 사실을 알아야 된다. 경전과 어록을 항상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얄팍한 생각으로 머리 좀 굴려서 짜깁기 식으로 방법을 써내는 것이 며칠이나 가겠는가.그런데 그게 한창 또 이 시대에 유행하고 있다. 참고할 거리는 되겠다.
住相布施生天福이나 猶如仰箭射虛空이라
(주상보시생천복이나 유여앙전사허공이라)
상에 집착하여 베푸는 일을 하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는 복은 되지만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아서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주상보시생천복 유여앙전사허공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무주상 보시’를 얼마나 많이 노래하는가.
상에 머물러서 보시하는 것은 천상에 나는 복이다.
물론 상을 내면서 보시해도 복짓는 것은 복짓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면 화살 뿐만 아니라 총을 쏴도 마찬가지다. 그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는 동안은 한껏 올라간다. 십 미터도 올라가고 몇 십미터를 올라간다 한들 그 올라가는 힘이 끝나면 내려올 수밖에 없다. 화살이 됐든 총알이 됐든 대포가 됐든 내려올 때는 땅에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려오는 힘 때문에 오히려 땅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간다.
주상보시는 그런 것이다.
주상보시가 천상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말은 꼭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천상처럼 좋은 복락을 받는다는 말이다. 주상보시는 그 복이 끝나면 현재보다 더 못한 상황이 된다. 잘 살던 사람이 망하면 그걸 감당을 못해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2) 勢力盡 箭還墜라 招得來生不如意로다
(세력진 전환추라 초득래생불여의로다))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도리어 떨어지느니라.
오는 세상에 뜻과 같지 못함을 초래하게 되리라.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더욱 떨어져서 다음생이 여의치 못하다. 지금 사람 몸 받고 있는데 사람 몸 보다도 더 못한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爭似無爲實相門에 一超直入如來地리요
(쟁사무위실상문에 일초직입여래지리요)
어찌 아무런 작위가 없는 실상의 도리에서
한 번 뛰어 올라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과 같겠는가.
실상은 무위다. 무위라야 실상이 되는 것이다.
무위는 ‘그냥 그대로’라는 뜻이다. 조작없이, 억지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 그것이 실상이다.
거기서 한번 뛰어서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3) 但得本 莫愁末하라 如淨琉璃含寶月이로다
(단득본 막수말하라 여정유리함보월이로다)
다만 근본을 얻고 지말적인 것을 근심하지 말라
마치 깨끗한 유리구슬 안에 보배의 달을 머금고 있는 것과 같도다.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지말적인 것은 너무 근심하지 마라.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깨끗한 유리병속에 달이 들어있는 것과 같다.
달도 좋고 유리도 좋은데 유리 속에 보월이 들어 있으니 얼마나 더 근사하겠는가.
깨달음의 경지, 깨달음의 정신세계가 이와같다는 것이다.
我今解此如意珠하니 自利利他終不竭이라
(아금해차여의주하니 자리이타종불갈이라)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풀어놓았으니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나는 지금 여의주를 한껏 풀어놓았다. 내 자신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것을 아무리 해도 다하지가 않는다. 끝도 없이 남을 이롭게 할 수가 있고, 끝도 없이 내 자신도 이롭게 할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어떤 유위법보다 법과 진리로써 안녕을 추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진리의 내용으로써 자기 삶을 구축한 사람은 여의주를 얻은 것과 같다. 첫째 자기가 편안하다. 자기가 편안한 이치를 남에게 늘 나눠줄 수 있으니까 나눠주면 나눠줄수록 더 빛이 난다.
물질은 줘버리면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썩 기분 좋게 내놓지도 못한다.
그러나 깨달음의 여의주를 나누는 것은 줄어들지 않는다.
4) 江月照 松風吹한데 永夜淸霄何所爲아
(강월조 송풍취한데 영야청소하소위아)
강에 달은 비치고 소나무에 바람은 부는데
긴 밤 맑은 하늘에 무엇을 할 바인가.
나는 이 구절을 참 좋아한다.
강월조 송풍취 영야청소하소위아.
강에는 달이 훤히 비치고 소나무에는 바람이 불어온다.
영야청소하소위아 긴 밤 푸른 하늘에서 무엇을 할 바인가.
강에는 달이 비추고 소나무 숲에는 솔바람이 싹 불어오는 그 풍경을 그려보길 바란다.
한밤에 나와보니 청신하고 맑고 맑은 하늘이다. 거기 뭘 더 보탤 것이 있겠는가. 무슨 경전이 거기에 해당되겠으며 무슨 어록이 거기에 해당이 되겠는가. 그냥 그대로가 최고이고 완벽하다. 강월조 송풍취 영야청소가 완벽하다. 그것만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면 끝이고 최고다.
그보다 못한 것이 경전 읽고 어록 읽고 선행 하는 것이다. 그런 말이다.
강월조 송풍취 영야청소 하소위, 깨달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자연 풍경에 빗대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佛性戒珠心地印이요 霧露雲霞體上衣로다
(불성계주심지인이요 무로운하체상의로다)
불성이라는 계의 구슬은 마음 땅의 도장이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본체 위의 옷이로다.
불성의 계의 구슬은 마음 땅의 도장이다.
계라는 것도 불성계가 되어야 진짜 계다. 그래서 보살계는 그야말로 불성계다. 다른 어떤 소승계, 비구계나 여타 사미십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불성을 깨닫게 하고 불성을 이해시키게 하는 계가 보살계이고 불성계다.
안개 이슬 구름 이런 것들은 몸 위의 옷이더라. 이 말은 자연현상을 표현한 것 같지만, 우리가 불성을 터득하고 있는 것 외에, 지엽적인 지식이라든지 능력 이런 것들을 무로운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 것이 있으면 금상첨화로 좋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성계주다.
5) 降龍鉢 解虎錫으로 兩鈷金鐶鳴歷歷은
(항룡발 해호석으로 양고금환명역력은)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호랑이의 싸움을 말린 석장으로
두 고리에 달린 여섯 고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은
항룡발은 용을 항복받은 발우다. 이것도 부처님 말씀에 있는 이야기다.
해호석은 호랑이 싸움을 말린 지팡이다. 호랑이끼리 싸움이 붙었는데 어떤 도인이 지팡이로 호랑이 싸움을 말렸다는 것이다. 호랑이 싸움을 말리고 용을 발우대에다 잡아넣어 항복을 받는다. 그쯤은 되어야 한다.
요즘은 그런 것을 볼 수가 없는데 우리 어릴 때 청담스님이 여법하게 육환장을 짚고 다니는 것을 직접 봤다. 육환장은 지팡이 위에 긴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두 개로 갈려지고, 한쪽에 세 개씩 작은 고리가 여섯 개 달린 것이다.
내가 청담스님을 따라다닐 때가 있었는데 육환장 뿐만 아니라 청담스님은 항상 장삼을 입고 다니셨다. 또 목에는 늘 카메라를 걸고 다녔다. 택시에 타니까 육환장이 길어서 문이 닫혀지지 않았다. 청담스님이 육환장 머리만 택시에 들이밀고는 문이 안닫혀서 택시문을 잡고 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양고금환은 육환장의 그 여섯 고리를 말한다. 이것은 육바라밀을 상징한다. 육도만행을 하면서 세상을 다니라는 뜻이지 육환장을 짚고 다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육환장을 짚고 다니면 육도만행을 몸소 실천하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좋을 것이다.
두 고리에 쇠로 만든 고리 여섯개가 쇠로 만들었으니까 짚을 때마다 철렁철렁 한다. 그 울림이 역력하다.
不是標形虛事持라 如來寶杖親蹤跡이로다
(불시표형허사지라 여래보장친종적이로다)
모양을 나타내자고 헛되이 가진 것이 아니라
여래의 보배 주장자를 친히 본받음이로다.
이것은 폼을 내려고 헛된 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래께서 보배의 지팡이로써 친히 내리신 종적이다.
굳이 육환장을 두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영가스님께서 형식적인 육환장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면 좀 그렇다. 그것이 아니라 안으로는 일심을 깨달은 도를 가지고 있고, 밖으로는 육바라밀을 행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참 표현이 대단하다.
육환장 이야기를 하려고 아까운 종이를 써가면서 하진 않았을 것이다.
6. 眞實相
1)不求眞 不斷妄하라 了知二法空無相이라
(불구진 부단망하라 요지이법공무상이라)
진리도 구하지 말고 망상도 끊지 말라.
두 가지 법이 공하여 형상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알았도다.
진도 구하지 아니하고 망도 끊지를 않는다. 우리는 진과 망을 늘 나눠놓고 살기 때문에 진은 구해야 되고 망은 끊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법이 공하야 무상한 것을 요지했다.
無相無空無不空이여 卽是如來眞實相이로다
(무상무공무불공이여 즉시여래진실상이로다)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않음도 없음이여
그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아니함도 없어서 이것이야 말로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다.
공하면서 또한 공하지 않다.
여기서 중도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다. 현상만 보면 현상에 치우친 것이 되고 공으로만 파악하면 공에 떨어지는 것이 된다. 실상은 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상은 공이면서 상이고 상이면서 공이다. 그것이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다. 여래라고 하면 또 얼른 부처님을 떠올리고 심한 경우에는 자기 절의 불상까지 떠올린다. 그런 것이 아니다. 여래의 진실상은 다른 말로 진리의 진실한 모습이다.
2) 心鏡明 鑑無碍하야 廓然瑩徹周沙界로다
(심경명 감무애하야 확연영철주사계로다)
마음의 거울은 밝고 비치는 것이 걸림이 없어서
확연히 밝게 사무쳐서 무한한 세계에 두루 하도다.
마음의 거울은 환하게 밝고, 환하게 밝으니 비춰보는 것이 걸림이 없다. 감(鑑)은 거울 감(鑑)자다. 마음이 어두운 것은 어떤 집착이 있고 치우침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판단력이 제대로 안 선다. 어두우면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다. 반드시 그 판단도 치우치게 되어서 보는 것이 걸림없는 무애가 안된다.
어두우면 말만 제3자의 입장이지 3자의 입장이 안된다. 분명히 편견이 나온다.
심경명해야 살피는 것,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걸림이 없다.
확연히 툭 터지게 밝게 사무쳐서 사계에 두루한다.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많고 많은 세상과 세계에 그 밝은 마음을 작용하고 활용하는 것이 두루한다.
萬象森羅影現中이요 一顆圓光非內外로다
(만상삼라영현중이요 일과원광비내외로다)
삼라만상이 거울속의 그림자처럼 나타나 있고
한 덩어리 원만한 광명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그 때는 삼라만상을 돌아봐도 전부 그림자처럼 본다.
꿈에서 꿈인 줄 알고 꿈을 꾸는 것과 같다.
간혹 정신이 맑을 때 ‘이것은 꿈이다’ 하면서 꿈을 꾸는 경우가 있다. 그런 꿈은 얼마 안가서 깬다. 그만치 정신이 맑아 있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이 전부 그림자처럼 비치는 가운데 일과원광은 비내외로다. 거기에 내 마음자리 하나는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다.
도를 증득한 사람은 나와 경계, 경계와 나, 나와 대상, 대상과 나에서 그 상황이 어떠한가에 대한 답이다.
그 사람은 만상삼라영현중에 일과원광비내외다.
삼라만상은 그대로 있지만 그림자처럼 본다. 보면 보는 대로 집착하고 들으면 듣는 대로 걸리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꿈인 줄 알고 꿈을 꾸듯이 본다. 꿈인 줄 알고 꿈을 꾸면 재미있다. 그러는 한편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고 내 육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 바깥 경계 산천초목도 아닌 그 모든 것에 다 포함되는 일과원광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도 다 가지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생명이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표현도 여러 가지가 있다. 진여불성이라도 해도좋고 자성이라도 해도 좋고 법성이라도 해도 좋고 일과원광이라고 해도 좋다.
증도가에는 일과라는 말이 종종 나왔다.
일과원광이 비내외라. 얼마나 근사한가.
그것이 이 삼라만상과의 관계 속에 이렇게 어우러져서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일과원광과 삼라만상이 혼연일체가 되고 융화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하고 있다.
3) 豁達空 撥因果하니 茫茫蕩蕩招殃禍라
(활달공 발인과하니 망망탕탕초앙화라)
아무것도 없이 텅 비워 인과를 부정하니
어둡고 아득하여 재앙을 불러오도다.
활당공은 아무것도 없이 공하다는 것이다.
발인과의 발(撥)은 쓸어버린다는 뜻인데 인과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인과를 쓸어버리면 망망 탕탕해서 앙화를 불러온다.
인과는 인과대로 분명히 있다. 공한 이야기만 자꾸 듣고 공이 좋아서 ‘전부가 공한데’ 하고 마음대로 살면 큰일나는 일이다. 그런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불교를 모르더라도 유교적인 도덕율을 지키고 사는 것이 낫다.
아예 인과까지 공하다고 무시해버리고 망망탕탕해서 앙화를 불러오면 정말 잘못된 일이다.
棄有着空病亦然이니 還如避溺而投火라
(기유착공병역연이니 환여피익이투화라)
있음을 버리고 없는데 집착하면 그 병도 또한 같으니 물속에 빠지는 것을 피해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유를 버리고 공에 집착하는 것도 유에 집착하는 병과 똑같다. 공도리를 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지만, 공도리에 집착하고 있으면 유에 집착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 허무주의자나 추악한 현실주의자나 결국 똑같은 것이다.
유는 전부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있는 것에 목숨을 매다니까 아주 추악한 현실주의자다.
착공은 허무주의자다. 이 둘은 병력으로 치면 똑같다.
마치 비유하자면 물에 빠질 것을 두려워해서 불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영가스님의 표현이 너무 극단적이다.
그러나 아주 명확하다. 표현이 극단적인 반면에 우리 뇌리에 팍팍 심어주는 명확한 점은 있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을 피해서 불속에 들어가면 어쩌자는 것이냐, 유를 버리고 공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그와 같은 것이다.
이런 표현으로 사실을 확실하게 짚어준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이 증도가를 좋아했다.
나도 선방에 살 때 도량석을 할 차례가 돌아오면 증도가를 외우면서 도량석을 하였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증도가와 신심명은 선방생활과 아주 잘 어울린다.
4) 捨妄心 取眞理여 取捨之心成巧僞로다
(사망심 취진리여 취사지심성교위로다)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는 것이여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는 도다.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한다. 신심명에서도 취사선택, 간택이 제일 나쁘다고 하였다.
여기도 취사지심이 성교위라고 하였다. 교위는 거짓을 이루는 것이다.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한다는 것은 다 취사지심이다. 취사의 마음이기 때문에 엉터리이고 거짓이다.
學人不了用修行하니 眞成認賊將爲子로다
(학인불요용수행하니 진성인적장위자로다)
공부하는 사람이 그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수행을 하니
참으로 도적을 오인해서 아들을 삼음이로다.
공부하는 사람이 진심과 진리에 대한 취사지심이 그렇게 나쁘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취사지심에 매달려서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도적을 오인해서 아들을 삼는 것과 같다.
밤에 도적이 들어와서 밖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소리가 나고 떨거덕 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아들이 목이 말라서 물을 찾는 줄 아는 것과 같은 경우다. 도둑이 와서 훔쳐가는데 그 도적을 오인해서 아들을 삼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5) 損法財 滅功德은 莫不由斯心意識이니
(손법재 멸공덕은 막불유사심의식이니)
법의 재산을 손상시키고 공덕을 소멸하게 하는 것은
이 심·의·식을 말미함지 아니함이 없으니
법의 재산을 손상시키고 공덕을 소멸하는 것은 심의식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다. 전부 심의식, 사량분별, 자기 감량대로 헤아리는 의식 때문에 법의 재산을 손해보고 공덕을 까먹는다.
是以禪門了却心하고 頓入無生知見力이로다
(시이선문요각심하고 돈입무생지견력이로다)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심·의·식을 떨쳐버리고
생멸이 없는 지견의 힘에 몰록 들어가도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불교에서는 마음을 깨달아서 무생지견력에 몰록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선불교의 특색이다.
7. 大丈夫
(대장부)
제목이 대장부다. 세속적으로는 다른 뜻이 있지만 불교에서 대장부란 불법을 자기 생명으로 아는 사람, 불법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거기에서 좀 더 욕심을 낸다면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다. 깨달음을 이룬 영가스님 입장에서는 대장부를 그런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다.
1) 大丈夫 秉慧劍은 般若鋒兮金剛焰이로다
(대장부 병혜검은 반야봉혜금강염이로다)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은 것은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은 것은 반야의 칼날위에 금강의 불꽃이더라. 표현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누가 감히 범접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섬찟하기도 한다. 고준한 지혜의 경지를 이렇게 말한다.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은 것은 반야의 칼날 위에 금강이 타오르는 불꽃이다.
非但能摧外道心이라 早曾落却天魔膽이로다
(비단능최외도심이라 조증락각천마담이로다)
비단 능히 외도들의 마음을 꺾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천신들과 마구니들의 간담을 떨어트리게 하네.
비단 그것은 외도의 마음을 능히 꺾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천마의 담을 떨어뜨리게 한다.외도의 마음도 꺾어버리고 마구니의 가슴도 떨어뜨려 버리는 경우다.
영가스님이 깨달은 경지는 마치 그와 같은 것이다.
2) 震法雷擊法鼓여 布慈雲兮灑甘露로다
(진법뢰격법고여 포자운혜쇄감로로다)
법의 우레를 떨치고 법의 북을 두드림이여
자비의 구름을 펼치고 감로의 법 비를 뿌림이로다.
법의 우레를 떨치고 법고를 두드리고 자비의 구름을 펼쳐서 감로를 뿌린다. 깨달은 사람이 세상에 노니는 것, 세상에 영향을 끼지는 것은 마치 이와 같다.
법의 우레를 떨치고 법고를 둥둥 치면서 자비의 구름을 펼치고 감로를 뿌리는 것과 같다. 세상에 그런 역할을 해야하는 삶이다.
龍象蹴踏潤無邊하니 三乘五性皆惺悟로다
(용상축답윤무변하니 삼승오성개성오로다)
용과 코끼리가 차고 밟고 지나가서 윤택함이 넘쳐나니
삼승들과 오성들이 모두 다 깨어나네.
용과 코끼리가 씩씩하게 걸어가는데 그 윤기가 가히 끝이 없더라. 삼승이나 오성들이 다 깨우치더라.
삼승오성이란 여러가지 근기를 말한다.
雪山肥膩更無雜이라 純出醍醐我常納이라
(설산비니갱무잡이라 순출제호아상납이라)
설산의 비니초 밭에는 잡된 풀이 하나도 없어
그것을 먹은 소의 제호를 내가 항상 마시도다.
능엄경에는 흰소가 비니초만 먹고 설산에서 살았다는 표현이 있다. 설산에는 비니초가 있는데 비니초가 있는 그 숲에는 잡초가 없다. 그래서 설산의 소는 비니초만 먹었기 때문에 항상 제호만 낸다.
보통 우유하고는 다른 순수한 제호만 냈는데 그 제호만 아상납한다, 내가 항상 마신다.
순수한 경지, 궁극적 경지, 불교의 여러 가지 차원들 가르침 중에서 나는 최상, 최궁극의 경지만 먹고산다,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간다는 의미다.
3) 一性圓通一切性이요 一法徧含一切法이로다
(일성원통일체성이요 일법변합일체법이로다)
하나의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통하고
하나의 법이 일체의 법을 두루 포함하도다.
한 성품이 일체 성품에 원만히 통한다. 한번 통하면 그 통하는 것은 일체통으로 된다.
한 법이 일체 법을 다 두루두루 포함하고 있다.
一月普現一切水하고 一切水月一月攝이로다
(일월보현일체수하고 일체수월일월섭이로다)
하나의 달이 일체의 물에 널리 나타나고
일체 물에 있는 달은 하나의 달에 모두 포섭되도다.
비유하건데 하늘에 달이 하나 있으면 천강유수천강월이라, 일체수에 다 나타난다.
천강에 있는 달이 전부 하늘에 떠있는 달 하나에 포섭이 되는 것이다. 일월섭이다.
4) 諸佛法身入我性이요 我性還共如來合이로다
(제불법신입아성이요 아성환공여래합이로다)
모든 깨달은 사람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또 여래와 함께 합하도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온다.
이쯤 표현 할 수 있어야 된다.
모든 부처님의 성품이 나의 성품 속에 다 들어온다.
나의 성품도 또한 여래와 함께 한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그 사실 하나만 명확하게 알면 당당하게 이런 표현을 할 수가 있다.
一地具足一切地하니 非色非心非行業이라
(일지구족일체지하니 비색비심비행업이라)
하나의 지위가 모든 지위를 다 갖추고 있으니
육신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다.
우리가 보살계위를 52위 지위점차라고 하는데, 한 지위에 52위 점차를 다 구족한다.
그래서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고 말한다. 처음 발심한 그 자리에 나머지 모든 지위가 다 포함된다. 한 지위에 일체지를 다 구족한다. 색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다.
5) 彈指圓成八萬門이요 刹那滅却三祇劫이로다
(탄지원성팔만문이요 찰나멸각삼지겁이로다)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온갖 수행을 원만하게 이루었고
찰나 사이에 삼 아승지겁의 죄업을 소멸하였네.
손가락을 튕기는 그 순간에 팔만사천 만행 팔만 사천의 문을 원만히 이룬다. 몰록 깨달음을 얻는다는 돈오(頓悟)의 뜻도 이런 데에 다 포함이 된다.
팔만사천 수행문이 손가락 튕기는 1초도 안되는 사이에 원만히 다 성취된다. 이것이 선불교의 특징이다. 선불교는 깨달음을 이렇게 본다.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 어디에서 하나하나 주워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일찰나 사이에 삼아승지겁의 죄업을 다 소멸한다. 삼아승지겁을 닦아야 할 수행도 죄업도 전부다 소멸해 버린다. 보통 소승교에서는 삼아승지겁을 닦아서 팔만사천 수행문을 성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선문과 보통 소승불교와의 차이점이 바로 이런 데 있다.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팔만사천 수행문을 다 원만히 성취하고 삼아승 지겁이라고 하는 길고 긴 세월을 찰나 사이에 소멸해 버린다.
법성게에 나오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 하는 말과도 통하는 구절이다.
一切數句非數句여 與吾靈覺何交涉가
(일체수구비수구여 여오영각하교섭가)
일체의 여러 가지 법문들이 법문이 아님이여
내 신령스런 깨달음과 무슨 교섭이 있을 것인가.
일체수구는 수구가 아니다. 화엄경을 볼 것 같으면 한 보살이 나와서 노래를 열 곡을 부르고 열 보살이 나오면 백 곡을 부른다. 그런 것이 전부 수구다. 수로 된 구절이다.
불교에는 법수라고 해서 삼귀의, 사무량심, 사홍서원, 육바라밀, 칠각지, 팔정도 등등 숫자가 들어간 법구인 법수만 가지고도 두꺼운 사전을 이룬다.
펼치면 그렇게나 많은 수구지만 거머지면 그것이 내 신령스러운 깨달음으로 더불어 무슨 교섭이 있을 것인가?
내 마음 자리와 수많은 법수, 수 많은 교리, 수행점차가 아무 상관이 없다.
평소에 영가스님은 일체교리라든지 수구, 법수, 이런 것에 대해서 박식하였고, 이런 데에 박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조스님에게 가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을 인가받고 도를 증득한 노래를 부르는 마당에서 그런것은 그야말로 소소한 방편설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는 방편설을 논할 자리가 아니다. 나의 신령스러운 깨달음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렇다고 공부하는 학인들이 법수를 안외우면 안된다. 공부하는 학인들은 열심히 법수를 외워야 된다. 나는 옛날에 그 법수를 종이에 적어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서 밭일을 하면서 외웠다. 우리 어릴 때 강원 학인 생활할 때는 하루에 두 시간씩은 꼭 울력을 했다. 농사를 우리들이 직접 다 지었으니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난자도 밭 매면서 외우고 법수도 밭 매면서 외웠다. 영가스님처럼 그런 것을 이미 다 외우고 마스터 한 뒤에 이런 소리를 해야 된다. 마스터 하지도 않고 이런 소리를 하면 정말 건방진 사람이고 넘치는 소리고 자격 없는 소리가 된다.
8. 摩訶般若力
(마하반야력)
마하반야력, 거대한 위대한 반야의 힘이다.
1) 不可毁 不可讚이여 體若虛空勿涯岸이라
(불가훼 불가찬이여 체약허공물애안이라)
훼방할 수도 없고 찬탄할 수도 없음이여
심체는 허공과 같아서 가장자리가 없다.
훼방할 것도 아니고 찬탄할 수도 없는 그 자리다. 체는 허공과 같아서 경계가 없다. 그야말로 몇 백억 광년 그 끝에 갔다손 치더라도 그 끝에는 또 무언가가 있어서 끝이 없다. 애안이 없고 한계가 없다. 우리 심체는 그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다. 체약허공물애안 할 때 체는 심체다. 심체는 허공과 같다. 우리가 마음을 그토록 썼지만 마음 작용은 어떤 한계가 있거나 모자라지 않는다.
못난 중생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하루종일 써도 피곤하지도 않고 그 이튿날 또 그렇게 써도 또 끝이 없다. 마음은 그야말로 허공과 같아서 애안이 없더라.
不離當處常湛然이나 覓則知君不可見이리라
(불리당처상담연이나 멱즉지군불가견이리라)
당처를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항상 맑고 깨끗하나
찾으면 분명히 알리라, 그대가 볼 수 없음을.
당처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담연하다. 바로 이 순간 이 자리가 당처다.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깨끗이 있다.
지금 이자리가 지옥이든 지옥과 같은 삶이든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말쑥하게 깨끗하게 청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물결이 아무리 쳐도 물은 여여부동이다. 물은 여여부동이면서 바람따라서 물결은 끊임없이 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런 이치만 제대로 정리해서 알고 있으면 불교를 어지간히 이해했다고 할 수가 있다. 금의 비유라든지 허공 비유라든지 물의 비유라든지 달의 비유라든지 이런 비유를 통해 이해를 돕는다.
멱즉지군불가견이다. 찾은즉 그대는 볼 수 없음을 알리라. 그렇게 온 우주를 감싸고도 남을 만치 확실하게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찾아보고자 하면 그대는 볼수 없음을 알 것이다. 아무리 무수한 세월을 찾아봐도, ‘이뭣고’를 해도 ‘이뭣고’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또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말쑥하게 그렇게 있다.
2) 取不得 捨不得이니 不可得中只麽得이라
(취부득 사부득이니 불가득중지마득이라)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서 또 그렇게 얻는다.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다. 가히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그 가운데서 그렇게 얻어 쓰고 있다. 우리 마음자리는 그렇게 많이 작용하고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찾으면 찾을 수가 없고 버릴 수도 없다.
잡을 수도 없지만 여전히 그 작용을 하고 활용을 하고 있다. 그렇게 얻고 작용한다.
조사스님의 어록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흔치 않다.
신심명이나 증도가 대승찬을 익히 알고서 조사어록을 보게 되면 도처에 이 삼대 선시가 인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黙時說 說時黙이요 大施門開無壅塞이라
(묵시설 설시묵이요 대시문개무옹색이라)
묵묵하면서 말하고 말하면서 묵묵하니
크게 베푸는 문이 활짝 열리니 옹색함이 없다.
묵묵할 때 이야기 하고 이야기 할 때 또 묵묵하다.
물결이 쳐도 물은 그대로고 물은 그대로면서 끊임없이 물결이 친다.
크게 베푸는 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옹색함이 없더라. 이것은 그대로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꼭 도를 깨쳐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도를 못 깨친 사람도 거의 이 수준에서 살고 있다.
4) 有人問我解何宗고하면 報道摩訶般若力이라 하리라
(유인문아해하종고하면 보도마하반야력이라 하리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나에게 누가 도대체 어떤 종지를 이해하고 있느냐, 네가 아는 근본취지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말하겠다. 위대한 지혜의 힘이다. 나의 힘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도대체 무슨 종파에 소속이 되어 있기에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증도가를 노래 부르냐고 묻는다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하겠다.
或是或非人不識하고 逆行順行天莫測이라
(혹시혹비인불식하고 역행순행천막측이라)
혹 옳기도 하고 혹 그르기도 한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역행도 하고 순행도 하는 것을 천신도 측량하지 못함이라.
혹 옳다고 하고 혹 그르다 하는 것, 내가 하는 행동이 남 보기에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그런데 남은 그것을 잘 모른다. 인불식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다.
역행도 하고 순행도 한다.
나는 예전에 강원을 졸업하고 만행을 할 때 어느 사찰에서 나무를 베어 형무소에 끌려가 재판을 받는데 ‘내가 나를 변호하지 누가 변호하겠느냐’고 하면서 스스로 변호흘 했다는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스님은 재판관에게 ‘스님들은 세속법은 어기게 되어 있다. 스님들이 세속법 따르려면 세속에 살지 뭐할라고 출가해서 사느냐. 우리 절의 우리나무를 베어서 우리 절 좀 짓는데 무슨 상관이냐. 이게 세속법에 걸리면 나를 형무소 집어넣어라. 그런 법은 백번 어겨도 부처님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부처님에게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을 나는 했다.’고 변호를 했다는 것이다.
스님들 사이에는 그런 일화들도 있다.
여기도 보면 그야말로 혹시혹비를 인불식하고 역행순행을 천막측이라고 하였다.
법에는 맞지만 세속의 안목으로 보면 역행도 되고 순행도 된다. 천신들의 눈으로도 측량할 길이 없다. 도인들의 경지를 어찌 천신들이 측량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불교에서도 자신의 소신이 확실하다면 세속적인 법에 걸리는 것을 괘념할 필요가 없다. 자기 양심과 부처님 법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크게 관계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요즘은 하도 세속법이 강해서 그렇게 실천하기는 또 어렵다.
吾早曾經多劫修라 不是等閑相誑惑이라
(오조증경다겁수라 불시등한상광혹이라)
나는 일찍이 다겁을 지내면서 수행하였기에
등한히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일찍이 다겁을 지내면서 수행했다. 등한히 그대들을 속인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다. 그대들의 계산으로 하면 수많은 세월 수억겁동안 내가 수행해서 지금 나온 소리다.
그냥 심심풀이로 쉽게 그대들을 속이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런 소리들은 뿌리가 깊어서 수억만 년의 세월이 이 속에 젖어있어서 나온 소리라는 것이다.
유인문아해하종고 보도마하반야력(有人問我解何宗 報道摩訶般若力) 혹시혹비인불식 역행순행천만측(或是或非人不識 逆行順行天莫測) 이렇게 당당하고 그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표현들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깊고 깊은 뿌리가 있는 소리다. 그것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냐. 세속법으로 가두려면 가둬라.
9. 傳燈
(전등)
전등은 조사의 법등을 점점이 이어온 내용이다.
1) 建法幢 立宗旨는 明明佛勅曹溪是로다
(건법당 입종지는 명명불칙조계시로다)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드날리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부처님의 법이며 조계 육조가 바로 그것이로다.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세운 것은 분명하고 분명하게 부처님의 분부로써 내려준 법도인데 그것은 바로 조계다.
부처님으로부터 가섭존자, 아난, 상나화수, 우바국다 이런 식으로 죽 내려와서 동토에 와서는 달마스님 혜가스님 승찬스님 도신, 홍인 이렇게 해서 조계 6조 스님에 이르기까지 전법의 계통을 밟아온 바로 것이다. 조계가 이것이다. 부처님의 법칙, 준칙, 명령으로써 내려온 조계 육조스님의 법이 바로 이것이다.
第一迦葉首傳燈하사 二十八代西天記라
(제일가섭수전등하사 이십팔대서천기라)
제일 먼저 가섭존자가 그 등불을 전해 받으사
28대 달마스님까지가 서천의 기록일새
제1은 가섭존자가 등불을 전했고 28대가 서천의 기록이다.
2) 法東流 入此土하야 菩提達磨爲初祖
(법동류 입차토하야 보리달마위초조)
법이 동쪽으로 흘러서 중국에 들어와서
보리달마가 초조가 되었네.
법이 동쪽으로 흘러서 중국에 들어왔다. 그래서 보리 달마가 동토의 초조가 되었다.
六代傳衣天下聞이라 後人得道何窮數라
(육대전의천하문이라 후인득도하궁수라)
육대까지 내려오면서 옷과 법을 전한 것을 천하가 다 아네
후인들이 득도한 것을 어찌 다 헤아리랴.
그래서 여섯 분이 법의를 전한 것을 천하가 다 알고 있다. 뒷 사람들이 도 얻은 것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육조스님 이후에 내려오면서 ‘도인들이 깨 쏟아지듯이 쏟아졌다’ 는 표현을 한다.
후인들이 도 얻은 것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으랴, 자기의 뿌리를 이렇게 밝힌 것이다.
영가스님의 저술로 직접 쓰신 영가집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저술도 있지만, 세상에 가장 많이 알려지고 인구에 최고로 회자되는 영가스님의 법어는 바로 이 증도가다. 증도가는 게송으로 되어서 어지간한 공부께나 관심있는 수좌들은 이것을 다 외운다.
3) 眞不立 妄本空하고 有無俱遣不空空이라
(진불립 망본공하고 유무구견불공공이라)
진도 세울만한 것이 아니고 망도 본래 공한 것이라
유와 무를 함께 버리니 공하지 않으면서 공하네.
진도 세우지 아니하고 망은 본래 공하다.
유와 무를 함께 버려버리면 공하지 않으면서도 공한자리다. 불공하면서도 공한 것은 우리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또 공으로 볼 줄 아는 것을 말한다. 현실은 불공이지만 또 공의 측면도 놓쳐서는 안될 일이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잘 이뤄야 된다. 어느 하나도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계속 있다고만 고집할 일도 아니고 없다고만 고집할 일도 아니다. 있는 데서 병이 났을 때는 없음을 가지고 치료하고, 없음에서 병이 났을 때는 있음을 가지고 치료 해야 한다. 공과 불공이 그런 관계이고 유와 무가 그런 관계다.
二十空門에 元不著하니 一性如來體自同이라
(이십공문에 원불착하니 일성여래체자동이라)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하나인 성품의 여래는 그 본체가 저절로 동일함이라
공이라고 하면 하나도 많다. 공인데 공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 뭐가 있는가. 종공배공(從空背空)이다. 공은 쫓아갈수록 공의 이치와는 등을 진다. 그런데 하도 공을 말하니까 내공, 외공, 아공, 법공, 구공 등등 사전에도 이십공이 나온다. 사실 공은 이야기 할 게 아닌 것이 이야기할수록 공과는 멀어진다.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아니하니 한 성품에 여래와 체가 스스로 같다.
4) 心是根法是塵이니 兩種猶如鏡上痕이라
(심시근법시진이니 양종유여경상흔이라)
마음은 뿌리가 되고 법은 티끌이 되어
두 가지는 마치 거울에 낀 때와 같다.
마음은 근본이고 법은 경계다. 마음과 법, 근과 진 이 두 가지는 마치 거울에 있는 때와 같다. 거울에 때가 있으면 제대로 못 비친다.
痕垢盡除光始現이요 心法雙亡性卽眞이라
(흔구진제광시현이요 심법쌍망성즉진이라)
때가 다 했을 때 그 광명이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이 함께 없어지면 성품이 곧 진실함이라.
거울에 묻은 때가 다할 때 거울에 빛이 비로소 나타난다. 마음이다 법이다 하는 것이 쌍으로 다 없어지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바탕이 참다운 것, 진실한 것이다.
거울에 때가 다 없어져 버리면 그 거울의 빛이 저절로 드러나듯이, 심이니 법이니 하는 것이 다 사라지고 그 밑바탕이 그대로 참다운 것이다.
5) 嗟末法 惡時世에 衆生薄福難調制로다
(차말법 악시세에 중생박복난조제로다)
아 슬프다. 이 말법시대 악한 세상에
중생들이 박복해서 다스려 조복받기 어렵도다.
슬프다 말법 악세시에 중생들은 박복해서 다스리기가 어렵구나.참 골치아픈 존재라는 말이다.
去聖遠兮邪見深이요 魔强法弱多怨害로다
(거성원혜사견심이요 마강법약다원해로다)
성인에게 가기가 시간적으로 멀어서 삿된 소견은 깊어지며
마구니는 강하고 정법은 약해져 미워하고 훼방하는 일이 많도다.
성인에 가기가 멀고 멀며 삿된 견해는 깊고 깊어서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다. 그래서 원망과 해침도 많다.
聞說如來頓敎門하야도 恨不滅除令瓦碎로다
(문설여래돈교문하야도 한불멸제령와쇄로다)
여래의 돈교법문 설하는 것을 듣고도
없애지 못하고 도리어 와해됨을 한탄하노라.
여기서 돈교문은 돈교, 점교 할때의 돈교가 아니다. 증도가에서 밝히는 것처럼 바로 한 방에 모든 것을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올라가는 바로 이 도리가 여래의 돈교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도 멸제하지 못하고 와쇄되어 버리는 것이 한스럽다. 봄날에 눈 녹듯이 그 좋은 가르침이 그냥 스치고 지나가 버린다. 이 귀로 들어가고 저 귀로 흘려버리고 하룻밤 자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더라. 우리도 이 좋은 감로법문을 들어도 듣자마자 그냥 사라져 버린다.
6) 作在心 殃在身하니 不須怨訴更尤人이어다
(작재심 앙재신하니 불수원소갱우인이어다)
짓는 것은 마음이 하고 재앙은 몸이 받으니
모름지기 남을 원망하고 하소연하고 허물하지 말지어다.
우리가 어떤 업을 지으면, 짓는 것은 마음이 짓는데 받는 것은 육신이 받는다. 참 신기하다.
재앙은 몸에 있다. 모름지기 원망하고 소송하고 자기가 부당하다고 하는 게 소송이다. 원소해서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말지어다. 전부 자업자득이다. 그러니 결코 부모를 원망하거나 시대를 원망하거나 국가제도를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欲得不招無間業인댄 莫謗如來正法輪이어다
(욕득불초무간업인댄 막방여래정법륜이어다)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을 초래하지 않고자 하거든
여래의 정법을 비방하지 마라.
무간지옥에 떨어질 그 업을 불러오지 아니하려면 여래의 정법륜을 비방하지 말라. 영가스님 당신이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은 전부 여래의 정법륜이다. 전부 여래의 정법이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데 내 주장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정없이 비방해왔다 거기에 대한 답이다.
‘나를 비방하면 틀림없이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내가 하는 여래의 정법륜을 절대 비방하지 마라.’ 이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된다.
영가스님은 천태종에서 촉망받던 인물인데 세속적인 안목으로 보면 어느 순간 배신해서 선종으로 가버렸으니 얼마나 비방을 많이 받았겠는가.
당시는 종파의 대립이 치열한 시대였고, 달마스님으로 부터 한 300년 쯤 상당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그렇게 선종이 득세를 할 때가 아니었다.
초기에 선종은 율종이나 교종의 한쪽 구석에 방하나를 얻어서 명맥을 유지했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세가 확대되면서 전문적인 선종 사찰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종파의 색깔이 분명해지면서 비난이 가속화되고 다른 종파에 위장하여 숨어들어가서 그 종파의 법을 배워오기도 하는 사례들도 무수히 많았다.
영가스님이 천태종에서 선종에 갔으니까 수많은 비방을 받아서 이런 소리가 나온 것이다.
‘작재심 앙재신(作在心 殃在身) 불수원소갱우인(不須怨訴更尤人) 욕득불초무간업(欲得不招無間業)인댄 막방여래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하라’
학인 때는 이 구절을 외워서 잘 써먹었다. ‘나보고 욕하지 말라, 잘못하면 무간지옥 떨어진다.’하는 소리다.
10 栴檀林
(전단림)
전단림이라.
1) 栴檀林 無雜樹하니 鬱密深沉師子住라
(전단림 무잡수하니 울밀심침사자주라)
전단향나무의 숲에는 잡된 나무가 없으니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지라.
전단나무 숲속에는 잡된 나무가 없다. 진짜 전단나무는 워낙 그 향이 독하고 성향이 독특해서 다른 나무와는 같이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잡수가 없다. 아주 빽빽한 숲속에 사자가 머물고 있다.
境靜林閒獨自遊하니 走獸飛禽皆遠去라
(경정림한독자유하니 주수비금개원거라)
경계는 고요하고 숲속은 한가하여 내 홀로 노니니
짐승과 새들은 다 멀리 멀리 가버리고
경계는 고요하고 숲은 한가하며 그 속에서 홀로 스스로 거니는데 달리는 짐승들, 날아가는 새들은 다 멀리 도망을 간다.
‘막방여래 정법륜하라’ 라고 하는 말 뒤에 이런 구절이 나왔다.
‘나는 정법의 숲속에서 이렇게 순수하게 정법만으로 거닐고 있다. 그러니까 나하고 이야기 해봐야 다 게임이 안 되고 상대도 안된다. 처음에는 나에게 와서 비난도 하고 쟁논도 벌이고 토론도 하고 하다가 나중에는 안되니까 전부 도망가버린다’고 하는 표현이다.
‘저 스님은 못말릴 스님이고 도저히 상대가 안될 스님이다’라는 것이다.
안 그렇겠는가. 처음에야 멋도 모르고 상대를 하지만, 영가스님은 지식이 아주 뛰어나고 성질이 불같고 날카롭다. 거기에 깨달음이 투철하다. 갖출 건 다 갖춘 것이다.
종역통 설역통이다. 종지도 다 통했고, 이론도 정연하고 뛰어나다.
깨닫기 전, 천태종에서 온갖 팔만대장경을 다 봤고 교리적인 이론무장이 잘 된 분이다.
교리로 무장이 잘 되었으니까 경전은 아무도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다 알려지니까 나중에는 상대를 안하고 이 스님이 가까이 오면 다 피해버리고 도망가 버린다.
2) 師子兒 衆隨後하야 三歲便能大哮吼로다
(사자아 중수후하야 삼세변능대효후로다)
사자새끼 무리들만 뒤를 따르며
세 살만 되면 곧 크게 포효를 할 줄 안다.
사자새끼 대중들은 그 사자의 어미의 뒤를 따른다.
그러면서 세 살만 되면 사자후를 한다. 포효를 하는 것이다.
변능대효후라고 하는 것이 크게 포효를 하는 것이다. 사자새끼는 어려도 사자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若是野干逐法王인댄 百年妖怪虛開口로다
(약시야간축법왕인댄 백년요괴허개구로다)
만약 들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백년이 되어도 요괴인지라 헛되이 입만 벌리도다.
만약에 여우같은 놈들이 백년동안 쫓아다녀봐야 요괴밖에 안된다. 야간은 여우다. 요괴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헛되게 입을 벌리는 소식이다.이런 말 속에는 가시가 무수히 박혀 있다.
영가스님의 당시 상황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3) 圓頓敎 沒人情이니 有疑不決直須爭이어다
(원돈교 몰인정이니 유의불결직수쟁이어다)
원만한 가르침은 인정이 없으니
의심이 있어 해결하지 못하거든 곧바로 따져볼 지어다.
원만하고 한꺼번에 다 해결하는 가르침은 인정이 없다. 여기 나오는 원돈교는 교리상의 원교니 돈교니 하는 것이 아니다. 방편교가 근기를 맞추고 수준을 맞추느라고 인정이 있지, 이렇게 선종의 근본 종지를 드날리는 데는 인정이 없다.
의심이 있고 해결하지 못하거든 바로 한 번 나하고 투쟁을 벌여보자. 직수쟁이란 나하고 한 번 투쟁을 벌여보자는 말이다.
不是山僧逞人我라 修行恐落斷常坑이로다
(불시산승영인아라 수행공락단상갱이로다)
산승이 아상 인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는데 단멸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해서니라.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얼핏보면 아상을 세우는 것같이 보이지만 산승이 아상 인상을 드날리고 높이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상갱은 있다고 하는 유에 치우치는 것이고 단갱은 없다고 하는 무에 치우치는 것이다. 유에 집착하거나 무에 집착하거나 수행하는데 제일 금기 사항은 그렇게 치우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은 상갱이나 단갱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염려하여 이런 험악하고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너희에게 경고를 한다는 말이다.
4) 非不非 是不是여 差之毫釐失千里라
(비불비 시불시여 차지호리실천리라)
그름과 그르지 아니한 것과 옳음과 옳지 아니함이여
호리만치만 어긋나도 천리를 잃어버린다.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르다 하는 것이 처음에는 전혀 표시가 안 날 정도의 적은 차이가 나지만 그것이 사실은 천리로 벌어진다. 길도 어떤 지점에서 남북으로 갈리기 시작하면 처음에야 남쪽 북쪽이라는 것의 차이가 일밀리미터도 안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서로 상반된 길을 가게 되면 천리나 벌어질 수 있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처음에는 그 차이가 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자꾸 주장하다 보면 그렇게 천리나 어긋나게 된다.
사실은 그르다 하더라도 그른 것이 아니고 옳다하더라도 옳은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그른 것도 그른 것이 아니고 옳다고 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니거늘 호리만치 잃어버리는데 천리를 잃어버린다.
是則龍女頓成佛이요 非則善星生陷墜라
(시즉용녀돈성불이요 비즉선성생함추라)
옳은 입장으로는 용녀도 순식간에 성불을 했고
그른 입장으로는 선성비구도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네.
옳은 길로 가는 입장에는 용녀가 성불을 한다.
이것은 법화경 제바달다 품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바달다품을 둘로 나누면 앞부분은 제바달다가 성불하는 악인성불의 장이고 두 번째는 용녀성불의 장이다.
용녀는 상상의 동물이기는 하지만 용이라고 하는 축생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용씨의 딸이라고 하든지 해석은 분분하다.
대개는 축생이라고 보는 것이 그 내용을 극대화 한다. 용씨 집안의 딸이라고 하면 보통 여자로 생각하는데 여자가 성불하는 것 보다는 축생이 성불했다고 하는 편이 훨씬 더 극적이다.
옳은 입장으로서는 용녀도 성불을 한다. 그것도 순식간에 한다. 그른 입장에서는 선성비구가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이것은 옛날 경전에 있는 이야기다. 계율도 잘 지키고 모범으로 수행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견이 잘 못되어 그 잘하던 모범비구인 성선비구도 산 채로 생함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5) 吾早年來積學問하야 亦曾討疏尋經論이로다
(오조연래적학문하야 역증토소심경론이로다)
나는 일찍부터 학문을 많이 쌓아서
소초도 찾고 경론도 찾아 헤맸다.
영가스님 자신의 이야기다. 내가 일찍이 오랜 세월동안 학문을 쌓았었다. 그래서 또한 일찍이 소도 찾고 경론도 찾으면서 아주 오랜 세월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소는 경을 좀 더 자세히 부연해서 설명한 것이고 소를 또 부연해서 설명하면 초가 된다.
경은 부처님 경전이고 또 논에는 종론이 있고 성론이 있다. 성론이라고 하면 소와 다를 바 없는데 화엄론 같은 것이 소와 맞먹는 논이다. 경전을 부연설명하는 것들을 아주 오랜 세월동안 열심히 공부 했었다.
分別名相不知休라 入海算沙徒自困이라
(분별명상부지휴라 입해산사도자곤이라)
명상을 분별하기를 쉴 줄을 모른 것이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를 세는 격이라 스스로 피로할 뿐이었네.
경학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공부를 했었는데 그것이 결국은 명상을 분별하느라 쉴 줄 몰랐다.
불교를 공부해도 학문하는 입장에서 공부를 하면, 이런 이론, 저론 이론을 따지고, 이 이론은 어디에 어떻게 부합되는가, 다른 이론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낱낱이 따지면서 공부한다.
그런데 사찰에서 경학을 공부하는 것은 수행과 연관된 경학 공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진 않는다. 경전의 뜻을 음미하고 그 뜻을 깨달으려고 하는 의도가 더 크다. 그래서 학문의 길은 아니다.
우리도 경학을 공부한다고 상당한 시간을 했었지만 학자는 아니다. 학자의 태도도 아니고 학자적인 연구도 하지 않는다. 한 구절이 좋으면 하루고 이틀이고 그냥 음미하고 그 속에서 빠져서 즐기고 마음에 계합되는 바가 있으면 ‘아 신기하다’ 하고 무릎도 치고 즐길 뿐이다.
사실은 경을 보아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 신앙과도 연관이 되고 경속에서 깨우치고자 하는 이치와도 부합되는 길이다. 교리를 따진다든지 어떤 이론적인 면으로 다른 것과 연관시켜서 그 출처를 세세하게 찾아가면서 하는 학문적인 태도는 전혀 아니다. 출가한 수행자가 경학을 공부하는 것은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학자들처럼 논문을 쓰기 위해서 경을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고 따지고 하는 것은 출가한 수행자로서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입해산사도자곤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학문적으로 따지는 것은 마치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를 세는 것과 같아서 한갓되이 스스로 피곤할 뿐이다.
사찰에서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강의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 뜻과 속에 담겨 있는 맛의 의미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그대로 글만 가지고 천착하는 사람들이 또 적지 않다. 저 사람이 과연 평생을 강사를 했는데 불교를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느낌이 전달되지 않는 강의를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입해산사도자곤이다.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를 세는 격이다.
6) 却被如來苦呵責하니 數他珍寶有何益가
(각피여래고가책하니 수타진보유하익가)
도리어 여래의 아주 호된 꾸지람을 듣고 보니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는 격이라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도리어 여래의 모진 꾸지람을 들었으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는 격이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경을 봐도 항상 깨달음과 도에 관심을 가지고 경을 보는 것과 그야말로 글 줄이나 세고 그 이치나 따지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길이라는 것이다.
從來蹭蹬覺虛行하니 多年枉作風塵客이로다
(종래층등각허행하니 다년왕작풍진객이로다)
예전에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여 헛되게 행했음을 깨달으니
오랜 세월동안 잘못되게 풍진객이 되었더라.
그동안 갈팡질팡하면서 허행했음을 깨달았다. 헛되게 갈팡질팡 ‘이게 맞는가 저게 맞는가,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한참 빠져서 공을 들이다 보면 순전히 방편으로 펼쳐 놓은 교리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차원이 분명히 있는 줄로 착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보살수행계위다 해서 52위 또는 42위를 펼쳐 놓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이 거기에 마음을 많이 쓰고 공을 들이다보면 우정 이론을 만든 것에 불과한데도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든 이론이다. 그런데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오랜 세월동안 그릇 풍진객을 지었다. 바람맞고 먼지 뒤집어 쓰면서 나그네가 되어서 잘 데도 없는 노숙자가 되어 세월을 사는 것과 같은 생활을 했었다. 과거의 소회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요즘 상황을 살펴보면, 출가해서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그렇게만 살아도 사실은 잘 사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삶마저도 그리운 시대가 되었다. 문자에 빠져서 문자나 논하는 수행도 그리운 시대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든다.
11. 觀自在
관자재라.
1)種性邪 錯知解여 不達如來圓頓制로다
(종성사 착지해여 부달여래원돈제로다)
종성이 삿되고 그릇 알고 있었음이여
여래의 원만한 법을 통달하지 못했더라.
종성은 성품이다. 우리들의 성품이 삿되고 그릇 이해를 해서 여래의 원교 돈교의 법도를 통달하지 못했더라.
二乘精進勿道心이요 外道聰明無智慧라
(이승정진물도심이요 외도총명무지혜라)
이승들의 정진은 도의 마음이 아니요
외도는 아무리 총명해도 지혜가 없는지라
성문이나 연각들이 정진하는 것은 도심이 아니다. 그리고 외도가 총명해봐야 지혜가 없는 것이다. 그런 사례들도 많다.
2) 亦愚癡 亦小騃니 空拳指上生實解로다
(역우치 역소애니 공권지상생실해로다)
어리석고 어리석고 또 어리석으니
빈주먹에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잘 못 알았네.
또한 우치하기도 하고 또한 소애라고 해서 아주 작고 어리석기도 하다.
빈주먹 안에 뭔가 실다운 것이 있다고 하는 이해를 낸다.
예를들어서 어린아이들을 속일 때 아무 것도 없는 빈 주먹을 내밀면서 ‘여기에 동전이 몇 개 있는지 맞춰봐라’라고 하면 틀림없이 동전이 있다고 착각하고 몇 개인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런 식으로 다리를 몇 개 걸쳐 놓으면 거기에는 누구든지 걸려들게 되어 있다.
‘동전이 몇 개가 들었는지 맞춰봐라’ 하면 그 몇 개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어리석게도 방편에 걸려든다는 것이다.
執指爲月枉施功하고 根境法中虛捏怪로다
(집지위월왕시공하고 근경법중허날괴로다)
손가락을 집착하여 달을 삼으니 그릇 노력을 하고
육근과 육경의 법 가운데서 헛되이 눈을 비비도다.
손가락을 집착해서 달을 삼아서 그릇 공을 베푼다.
모든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달은 실법이다.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본다. 손가락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경전이나 어록에 방편의 이야기가 너무 많다.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무엇에 눈을 떠야 하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방편설에 너무 익숙해 놓으면 그 방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근경법중에 허날괴라. 근경과 법이라고 했다.
육경이니 육근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그런 법 가운데서 헛되이 눌러서 괴이하게 되니라. 멀쩡한 눈도 두 눈을 누르고 허공을 보면 허공에서 꽃이 생겨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있지도 않은데 허공에 꽃이 생긴 것처럼 본다. 꽃으로 보는 것도 잘못 보는 것인데 더 나아가 그 꽃이 어떻게 생겨났냐 하는 데까지 관심을 갖게 되면 몇 겁으로 잘 못 보는 것이다.
3) 不見一法卽如來니 方得名爲觀自在라
(불견일법즉여래니 방득명위관자재라)
한 법도 보지 않는 것이 곧 여래이니
바야흐로 이름을 관자재라고 한다.
한 법도 보지 아니한 것이 곧 여래의 경지인데 바야흐로 이름을 관이 자재하다고 한다.
관이 자재하다는 것은 관점이 자재하다, 관찰함이 자재하다는 것이다. 형식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형상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다.
了卽業障本來空이나 未了還須償宿債라
(요즉업장본래공이나 미요환수상숙채라)
깨달으면 업장이 본래로 공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묵은 빚을 갚아야 한다.
깨닫고 보면 업장이 본래 공이다.
천수경에도 ‘죄업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만약에 마음이 사라지면 죄업또한 사라진다[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진정한 참회라는 것이다.
업장이 본래 공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못할 것 같으면 또한 모름지기 묵은 빚을 갚아야 한다. 공함을 모르면 그 업장의 굴레에 이끌려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임제록 같은 데도 보면 본래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만 알면 인연따라서 구업이 저절로 녹는다’고 하였다.
우리가 평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업장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할 것인가?
문제가 없다고 하는 이치만 알면 인연 따라서 구업이 녹는다. 아무리 음지에 눈이 쌓였다 하더라도 봄이 저절로 녹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업장도 이치만 제대로 알면, 세월이 가면 저절로 녹게 되어 있다. 억지로 업장을 녹이려고 삼천배를 무릎이 닳도록 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을 하는데 그런 것은 새로운 업을 쌓는 일이지 업장을 녹이는 방법이 아니다.
과거에 아무리 많은 업장을 지었다하더라도 본래로 공한 도리를 알면, 더 이상 업을 지을 일도 없다. 시간이 가면 그 업마저도 저절로 녹게 되어 있다.
이치를 아는 것, 근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飢逢王饍不能飡하니 病遇醫王爭得差아
(기봉왕선불능손하니 병우의왕쟁득차아)
배는 고픈데 왕의 음식을 만났으나 먹지를 않으니
병든 사람이 의왕을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주린 사람이 왕의 음식을 만났는데 감히 겁이 나서 먹지를 못한다면 병이 들어서 의왕을 만났다고 한들 어찌 그 병을 나을 수 있겠는가.
증도가는 우리의 심성을 깨닫고 도를 증득하는데 있어서 아주 지름길이다. 최고가는 첩경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그거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동안 배워온 불교와는 다르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병이 들어서 의왕을 만났는데 병을 고치지 않는 경우와 똑같다.
예컨대 배가 고프면 왕의 음식이든 거지의 음식이던 무조건 먹어야지 왕의 음식이라고 겁을 내고 ‘그건 내 수준에 안맞다’ 이렇게 되면 참 곤란한 일이다.
그러니까 영가스님 당신의 주장, 당신의 불법에 대한 이론을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在欲行禪知見力하니 火中生蓮終不壞로다
(재욕행선지견력하니 화중생련종불괴로다)
욕심의 상태에 있으면서 선정을 닦는 것은 지견의 힘이니
비유컨대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파괴되지 않도다.
대단한 이야기다. 욕망의 상황에 꽉 쩔어 있으면서 선을 행하는 것은 지견의 힘이다. 욕심 다 버리고, 업장 다 버리고 깨끗해진 뒤에 참선한다고 하는 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이치는 없다.
사실 선사들이 욕심이 제일 많다.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욕심의 힘으로 정진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거기서 한소식을 하면 그 지견의 힘이 크다.
아무 욕심도 없고, 꿈도 없고, 다른 어떤 의욕도 없이 깨끗이 비워진 정신 상태에서 설사 눈이 밝아지고 어떤 경계를 터득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의욕이 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수호지의 노지심같이 하루에 사람을 수십명씩 때려죽여도 전단강 강가에 턱 앉아서 물결치는 소리를 듣고는 그만 눈이 환히 떠져서 순식간에 대도인이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소설이지만 소설도 그냥 소설도 아니라 선불교에서 바람직한 사례가 있는데 그런 것을 소설화한 것이다.
하루에 수십명씩 때려죽이던 백팔 호걸의 하나인 사람이 그야말로 한 순간 턱 깨달아 버린다.
그런 것이 재욕행선지견력이다. 욕심에 가득 차서 욕심의 경계 속에 살면서도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견의 힘이 된다. 이런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라면 어려운 점인데 정말 이런 경지를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다.
탐진치 삼독이니 하는 것에 신경쓸 일이 없다. 욕심 버리고 공부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냥 다 가지고 공부해야지 버리는 공부 따로 하고 그다음 깨닫는 공부 따로 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욕심이 있으면 있는 대로 두고, 그 욕심을 바탕으로 해서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도리다. 불속에서 연꽃이 피면 끝내 무너지지 않는다. 종불괴다. 선불교의 안목은 이렇다.
박력이 넘치고 다이나믹하다. 선불교는 사실 아주 파워가 있는 가르침이다. 보통 경전의 이론하고는 아주 다르다. 이런 점이 참 좋은 점이다.
수식관 한다고 걸음을 하나하나 옮겨 디디면서 그 걸음을 일일이 관찰하고 숨이 나가는지 들어가는지 일일이 관찰하고 내가 무슨 반찬을 먹는지도 일일이 관찰하는 남방불교와는 영 다르다.
중국이나 한국의 소위 전통 선불교의 기백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남방의 위파사나도 선이고 북방불교의 간화선 조사선 여래선이 전부 선이다.
그런데 남방불교는 아주 조용하고 점잖고 교양있고 편안하고 화가 나도 절대 화를 밖으로 표현 안하는 것이 전형이라면 이 북방불교는 다이나믹하고 파워풀하고 재욕행선으로 욕심을 가득 가지고 선을 하는 것이다. 하루에 수십 명을 때려죽이는 노지심 같은 사람도 어느날 물결치는 소리를 듣고는 그냥 깨달아 버리는 길이고 그야말로 불속에서 연꽃이 피어나서 끝내 무너지지 않는 것이북방 선불교의 본모습이다.
요즘은 남방불교가 들입다 섞여서 지금 선방에서는 예를 들어서 100명이 앉아있으면 거의 50명 내지 40명이 남방불교를 하고 있다. 종정스님께서도 어느 법문에 그것을 염려하셔서 ‘요즘 선방에 앉아서 위파사나 하고 있다는데? 수식관하고 있다는데?’하는 법문을 하셨다.
선방의 수좌들이 첫째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에 대한 분별이 없고, 어떤 성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미얀마에는 우리 한국의 수좌들이 몇 백명이나 가 있는 정도라는 것이다. 남방불교를 배워와서 정식으로 선방을 열고 수련원을 만든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돌아가는 상황은 불가항력이니 어떻게 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는 해야 된다는 것이다.
‘재욕행선지견력 在欲行禪知見力하니 火中生蓮終不壞로다 화중생련종불괴’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그 구절만 가지고도 그냥 힘이 넘친다.
욕심 다 버리고 공부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세계적인 큰스님이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서 다른 사람들은 짐을 밀고 뛰다시피 하고 서로 밀치며 나오는데 삼, 사십명씩 법사단을 데리고 다니면서 땅이 꺼질까 천천히 걸어나오는 모습들이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그런 모습은 그 상황들과 조화가 깨진 모습이다.
뛰면 다같이 뛰고, 천천히 걸어가면 다같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상황에 맞춰서 적절하게 조화롭게 행동하는 바람직한 행동이다.
나는 전통적으로 북방선불교를 익혀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것을 보고는 ‘도대체 저게 수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욕심을 잔뜩 가지고 참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런 구절에서 우리가 눈을 확 떠야 된다. 그것이 지견의 힘이다.
화중생련종불괴다. 불꽃에서 연꽃을 피우는 소식이 북방 선불교의 정신이다.
勇施犯重悟無生하니 早時成佛于今在로다
(용시범중오무생하니 조시성불우금재로다)
용시비구는 중죄를 범하고도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았으니
일찍이 성불하여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용시보살은 중죄를 범하고도 무생의 이치를 깨달아서 일찍이 성불해서 지금까지 경전상에 기록이 남아있다.
4) 獅子吼 無畏說이여 深嗟懞憧頑皮靼이로다
(사자후 무외설이여 심차몽동완피달이로다)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어리석어서 마치 완악한 가죽과 같음을 슬퍼하도다.
영가스님의 이 증도가의 가르침은 천하의 둘도 없는 사자후다. 그 무엇에도 두려움이 없는 당당한 설법이다.
심차라 깊이 애닲다. 내가 이런 소리 해도 도대체 눈도 깜빡 안하니 이것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 마치 다루지 아니한 가죽과 같구나.
소가죽을 벗겨서 약품처리를 하고 무슨 처리를 해야 가죽이 부들부들해져서 옷도 만들고 구두도 만든다. 그것을 그냥 잘라서 생으로 말려버리면 쇠나 돌보다도 더 단단해진다. 쇠도 깨지고 돌도 깨지지만 쇠가죽이 그냥 그대로 말라버리면 깨지지도 않아서 어떻게 할 길이 없다. 완피달이라고 하는 이렇게 다루지 않은 가죽이다. 뭔가 다른 제품을 써서 부드럽게 만들지 않고 그냥 내버려 버리면 그렇게 될 수가 있다.
只知犯重障菩提하고 不見如來開秘訣이로다
(지지범중장보리하고 불견여래개비결이로다)
다만 중죄를 범하면 보리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만 알고
여래가 열어놓은 그 비결을 보지 못하더라.
다만 무거운 계를 범하면 보리를 장애한다.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는 것만 알고 여래의 비결 연 것은 보지를 못했다. 여래 비결은 도대체 모른다.
그렇다고 행도행음무방반야(行盜行淫 無妨般若) 음주식육 불애보리(飮酒食肉 不碍菩提)를 조장하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치가 분명히 그렇다. 그래서 여기 사례를 들어놓았다.
有二比丘犯淫殺에 波離螢光增罪結하고
(유이비구범음살에 파리형광증죄결하고)
두 비구가 있어서 음행과 살인을 범하고
우바리존자의 반딧불 같은 소견은 죄의 매듭만 증장시키고
유마경에 있는 이야기다. 두 비구가 한 비구는 음계를 파하고 한 비구는 살생도 아닌 살인계를 파했다. 두 사람이 공부 열심히 하자고 토굴을 만들어 놓고 정진을 하다가 양식이 떨어져서 한 비구는 탁발하러 나가고 한 비구가 남아 있다가 잠이 들었다. 이것은 인도상황이다.
마침 이웃 동네에서 나무하러 왔던 여자가 낮잠이 들어있는 비구를 강간했다. 탁발에서 돌아와 상황을 알게된 비구가 그 여자를 추궁하려고 쫓아가는데 여자는 겁이 나서 도망가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어버렸다. 그러니 한비구는 음계를 범하고 한 비구는 살인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두 비구가 우리가 큰 죄를 지었으니 참회를 하자 해서 지계제일 우바리 존자에게 가서 참회를 하였다.
그러자 반딧불과 같은 지혜의 빛을 가진 우바리 존자는 “너희들은 음계를 파했기 때문에 불통참회야. 도대체 참회가 안되는 계율을 파했기 때문에 너희는 이제 죽었다. 그리고 지옥에 떨어진다.”하고 죄의 매듭만 증폭시켰다. 우바리 존자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양심이 너무나도 고운 사람들이었던 두 비구는 ‘우리는 이제 끝났는가 보다’하였다. 그런 사람들은 수행에 있어서도 자포자기 하고 보통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자포자기하고 막가는 인생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증죄결이다. 죄의 매듭만 더해지는 것이다.
維摩大士頓除疑가 還同赫日銷霜雪
(유마대사돈제의가 환동혁일소상설)
유마대사는 몰록 의심을 제거한 것이
뜨거운 태양이 서리나 눈을 녹이는 것과 같네.
그러다가 이 두 비구가 마지막으로 당시 부처님과 맞먹는 법력을 가진 분인 유마대사에게 가서 사연을 이야기 하고 문제해결을 해보자고 해서 유마대사를 찾아갔다.
유마대사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희들이 그 중죄를 지었다니까 죄업을 가져와봐라. 그렇게 무거운 죄 때문에 고민을 하고 어찌 할 바를 모른다면 그 무거운 죄를 가져와봐라. 죄무자성종심기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 내가 한 생각 일으킴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죄다.”
라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천수경 수준의 이야기다.
죄는 자성이 없으므로 마음이 멸할 때 죄업 또한 소멸하는 것이다. 죄도 없어지고 마음도 없어져 두 가지가 다 공할 때 이것이야 말로 진짜 참회다. 진짜 참회는 죄성이 본공한 도리를 턱 봐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유마대사가 이야기 해주니까 두 사람이 거기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했다.
그야말도 두 사람은 죄를 짓고 도통한 것이다. 죄를 안지었다면 도를 못통할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우바리 존자를 만나서 죄에 대한 죄책감을 더 느끼다가 다음에 유마대사를 만나서 시원하게 해결해버렸다.
환동혁일소상설이 되었다. 마치 아주 뜨거운 태양이 서리와 눈을 녹이는 것과 같았다. 여름 태양과 같은 태양이 막 떠 버리면 음지에 눈이 좀 있다한들 그 눈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와 같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이 사람들은 죄짓고 도를 통하는 큰 소득을 얻은 것이다.
불교에는 이런 이론들이 있다. 서로 상반되고 상충되는 이론이 부지기수다. 이것을 제대로 깊이 공부하고 이해를 못하면 그 상충되는 점에 걸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이 말이 옳은지 저 말이 옳은지, 이 말도 옳은 것 같고 저말도 옳은 것 같고 그런 것이 너무 많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지금 한창 강원에서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 혼란이 많을 것이다.
이것은 경험이 축적이 되고 사유가 축적이 되고 불교의 경전과 이론 같은 것들이 축적이 되어야 알 수 있다. 많은 설법을 들어서 서로 비교 검토해서 ‘이치가 이렇게 되어있구나’‘이런 저런 혼란스러운 이치가 많은데 그렇더라도 그것을 천착해 보니 결국 이렇게 결론이 내려지는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
남에게 물어서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
참 얼마나 근사한가. 증도가는 비록 영가대사 개인이 도를 증득한 노래지만 이것을 즐기고 자꾸 음미하고 반복해서 읽고 쓰다보면 읽는 사람의 살림살이가 된다.
12.解脫力
(해탈력)
1) 不思議解脫力이여 妙用恒沙也無極이라
(부사의해탈력이여 묘용항사야무극이라)
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이여
묘한 작용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아 다함이 없네.
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은 그 미묘한 작용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아서 또한 다함이 없더라.
지금 우리 각자의 상황은 평범한 보통 사람의 입장이지만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해탈의 경지를 맛보게 되면 정말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작용이 나온다.
모든 분야에 다 그러한데 우리 마음의 작용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四事供養敢辭勞아 萬兩黃金亦銷得이라
(사사공양감사로아 만냥황금역소득이라)
네 가지의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고 사양할 것인가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쓴다 하더라도 다 녹일 수 있다.
사사공양은 음식, 의복, 탕약, 주거를 말하는데 이 네 가지 공양으로써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바치는 공양이다. 절이나 토굴 하나 지어주고, 옷주고 약주고 밥주고 하는 것은 신도가 수행자에게 바치는 기본인데 그것을 수고롭다고 사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에 만냥 황금을 쓴다 하더라도 다 녹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밥 몇 끼, 옷 한두 벌 얻어 입은 것이 뭐 그렇게 무거운 시주 은혜라고 벌벌 떠는가, 그럴 것 없다는 말이다. 대단한 소리다. 또 그런가 하면 그 반대 로 시주의 은혜는 한 방울의 물도 녹이기 어렵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불교이론은 이런 것만 봐도 뭔지는 모르지만 신기하고 대단하다.
粉骨碎身未足酬요 一句了然超百億이라
(분골쇄신미족수요 일구요연초백억이라)
분골쇄신한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면 족히 갚을 수가 없으나
한 구절에 환히 깨달으면 백억 배를 초과하여 은혜를 갚으리라.
여기 바로 나온다. 시주의 은혜는 한 방울의 물이라도 분골쇄신해도 다 갚을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이 있는가 하면 은혜를 갚는 입장으로는 또 일구에 깨달으면 백억을 뛰어넘는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만냥 황금도 충분히 녹일 수 있다는 것이다.
2) 法中王最高勝이여 恒沙如來同共證이라
(법중왕최고승이여 항사여래동공증이라)
법 가운데 왕이 가장 뛰어나니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여래들이 다 함께 증득하였네라.
불교에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제일 왕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을 법중왕이라고 한다. 법 가운데 왕이 되어야 진짜 왕이다. 우리 부처님은 가장 수승하다.
항사여래동공증이다. 이것은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황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여래가 다 같이 증득한 바다. 나 혼자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깨달은 사람은 공히 이러한 도리를 증득했다.
我今解此如意珠하니 信受之者皆相應하리라
(아금해차여의주하니 신수지자개상응하리라)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풀어 놓았으니
믿고 받아 가지는 사람들은 다 상응할 것이다.
내가 지금 여의주를 풀어놨다. 마당에 여의주를 한 트럭 풀어놓았으니 믿고 이해하는 사람은 다 상응할 것이다. 이 증도가의 가르침이 그야말로 여의주를 한 트럭 풀어 놓은 것과 같은 도리다. 한 걸망씩 그것을 마음껏 지고 가면 된다.
이 이치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부 다 계합하여 마음에 다 들어갈 것이다.
당시 이러한 이치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갖고 비난을 했던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지금은 세월이 오래 되어서 선불교의 가르침도 상당히 축적이 되었고, 이후에 많은 조사스님들이 자신이 깨달은 바를 한껏 더 표현을 해서 이보다도 더한 가르침도 많다. 특히 임제스님은 후에 깨달은 분으로서 이 분의 어록은 임제록은 영가스님의 증도가와 또 차원이 다른 가르침이다. 어찌보면 그 표현에 있어서는 증도가를 능가한다.
임제록에 ‘흠소십마(欠少什麽)오, 부족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표현이 있다. 또 증도가에도 ‘육반신용(六般神用)’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안이비설신의 여섯가지로 신통묘용을 부린다는 말인데, 임제록에도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것은 후대의 이야기고, 영가스님 당시에는 이런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을 것이다.
3) 了了見 無一物이여 亦無人兮亦無佛이라
(요요견 무일물이여 역무인혜역무불이라)
밝게 보고 밝게 보아 한 물건도 없으니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더라.
환하게 보고 또 환하게 보니 한 물건도 없다.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다. 사람이니 부처니 하는 것도 다 그저 편의상 펼쳐 놓은 하나의 명제, 하나의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요요견 무일물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도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大千沙界海中漚요 一切聖賢如電拂이라
(대천사계해중구요 일체성현여전불이라)
삼천대천세계가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요
일체의 성현들도 번갯불이 번쩍하는 것이로다.
나는 이런 말을 어려서 듣고는 너무 큰 소리고 너무 근사한 소리라서 참 좋아했었다.
삼천대천 세계가 바다 가운데 떠도는 물거품이요, 일체 성현들도 번갯불이 번쩍하고 지나가는 것이로다.
모든 성인과 현인들이 이 세상에 나와서 참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영가스님의 안목으로 바라 볼 때 번갯불이 번쩍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더라.
아무튼 말은 크다. 대단히 큰 소리가 아닌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떵떵거리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일단은 겁도 나지만 또 한편 마음이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삼천대천세계가 물거품 같다.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서산스님 같은 이들도 묘향산에 올라가서 읊은 시에 평양 시내를 굽어보니 만국도성이 마치 개미집과 같더라 라고 읊어서 그 시로 인해 고초를 겪은 일이 있다.
그 당시 온갖 호걸들, 장군이니 정승이니 그런 사람들이 다 화장실에 있는 구더기와 같더라 라고 읊어버린 것이다. 세상을 깔아뭉개도 그렇게 까지 깔아 뭉갤 수 있는가.
서산스님을 시기 질투하는 유생들이 그 글을 빌미로 상서를 올려서 아우성치자 서산스님이 귀양살이를 좀 하기도 하였다. 도를 깨달은 분들은 귀양갈 때 가더라도 이런 소리 한 번 시원시원하게 내뱉고 싶은데 어쩔 것인가. 만국도성이란 한국의 평양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천하의 장안천지도 역시 개미집이 아니고 뭐냔 말이다.
불교 안에 이러한 세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정신세계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스님들은 세상사고 명예고 부귀고 온갖 부귀공명이고 팽개쳐 버리고 이것이 좋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 정신이 지금도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 불교의 뼈대다.
假使鐵輪頂上旋이라도 定慧圓明終不失이라
(가사철륜정상선이라도 정혜원명종불실이라)
가령 쇠바퀴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가서 산산조각이 난다하더라도
내가 깨달은 정과 혜는 원명해서 마침내 잃지 않도다.
쇠로된 바퀴가 정상을 휘돌고 지나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KTX열차가 내 몸을 깔아뭉개고 지나간다면 내가 어떻게 되겠는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깨달은 바 정과 혜는 원명해서 마침내 잃어지지 않는다. 그대로 역력히 살아있다는 이야기다.
영가스님 같은 이는 이러한 사실을 확연히 봤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어찌 거짓말로 하겠는가. 스스로 체험하지 않고는 이런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서도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4) 日可冷 月可熱이언정 衆魔不能壞眞說이라
(일가냉 월가열이언정 중마불능괴진설이라)
해가 차갑게 되고 달이 뜨겁게 되는 그런 세상이 온다하더라도
뭇 마구니는 능히 이 진리의 설법을 능히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설사 저 태양이 차갑게 되고, 또 반대로 저 달이 태양처럼 뜨겁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온갖 마구니들은 참다운 주장인 진설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이 주장을 아무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다 역대로 내려온 법의 인가를 받은 내용들이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으로부터 자신의 깨달음을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영가스님이 홀로 깨닫고는 처음에는 인가를 받으러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책이라고 하는 스님과 서로 주고 받은 편지가 <치문>에 나오는데, 그 스님이 자꾸 권유를 하여서 요즘말로 치면 ‘증하나 받아놓는 것도 괜찮다’ 싶어서 육조스님에게 간 것인데 의외로 큰 것을 건졌다.
가섭존자로부터 달마대사에게 이르고, 달마대사로부터 오조 홍인에게 이르고, 오조 홍인으로 육조 혜능으로 내려오는 역사를 알고 보니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법을 영가스님이 이어받았다. 그 법을 이어받고 보니 그야말로 호랑이 어깨에 날개를 단 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와 같은 근사한 증도가가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고 무수한 사람들이 이 글을 읽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증도가를 대승의 의심을 해결하는 경이라고 해서 대승결의경(大乘決疑經)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높이 숭앙을 한다. 증도가는 그런 정도의 가르침이다.
증도가만 하나 우리가 제대로 소화를 해도 불교를 만난 가치와 보람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온갖 마구니들이 능히 그 진설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象駕崢嶸漫進途라 誰螳螂 能拒轍가
(상가쟁영만진도라 수당랑 능거철가)
코끼리에 수레를 메어 위풍당당하게 끌고 가는데
어떤 당랑이가 능히 그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코끼리에 멍에를 메서 아주 뽐내며 잘난 듯이 길에 나아가는 것이다. 축제 같은 데 코끼리가 높이 장엄을 한 모습을 간혹 화면으로도 본다. 그렇게 코끼리에 멍에를 메서 잘난 듯이 높이 쩔렁이며 나아간다. 만진도의 만자는 아주 자신감 넘친다는 뜻이다.
코끼리가 그렇게 가는데 당낭이라고 하는 버마재비가 능히 어찌 그 수레의 바퀴를 거부하려고 다리를 벌리고 있겠는가. 그래봤자 그 바퀴에 깔리면 버마재비는 가루가 되어 버린다. 당낭이라고 하는 버마재비는 그렇게 작은 존재인데 그 큰 수레바퀴가 오는 데도 그걸 못가게 막는 것이 당치도 않는 짓이다.
누가 당낭이 수레바퀴를 거부하는 것을 보았던가. 다 가루가 되지 않느냐. 영가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그야말로 코끼리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이고 내 이론을 막는 것은 당낭이가 수레를 막는 격이다. 막아봤자 수레에 깔려서 가루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大象不遊於兎徑이요 大悟不拘於小節이라
(대상불유어토경이요 대오불구어소절이라)
큰 코끼리는 토끼의 길에 놀지 않고
크게 깨달은 사람은 작은 절개에 구애받지 않는다.
큰 코끼리는 토끼의 길에 놀지 않고 크게 깨달은 사람은 작은 절개에 구애받지 아니한다.
몇 번 말씀드렸듯이 영가스님은 당신이 처하고 있는 여러가지 상황에 아주 어려움이 많았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선종이 크게 득세를 하지도 못했고, 그저 다른 종파의 곁방살이를 겨우 할 정도였었고 거기에 당신의 처지가 어머니를 모시고 야승의 집에 살았었다. 절에 살았다는 소리도 아니고 암자에 살았다는 소리도 아니다. 그랬으니 깨달음의 지견과 깨달음을 표현하는 표현력과 문장은 참으로 뛰어난데 그 상황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게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큰코끼리는 토끼길에서 놀지 않는다. 크게 깨달은 사람은 소소한 절개에 구애받지 않는다.
莫將管見謗蒼蒼하라 未了吾今爲君訣이로다
(막장관견방창창하라 미요오금위군결이로다)
좁은 소견을 가져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깨닫지 못했으니 내가 지금 그대들을 위해서 해결해 주노라.
대쪽 같은 소견을 가져서 창창히 비방하지 말아라. 입에 거품을 물고 비방을 하도 심하게 하는 것을 창창히 비방한다고 한다.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대쪽 같은 좁은 소견을 가지고 나를 비방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 괜히 그대들 스스로 구업만 짓는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를 못하니까 내가 지금 그대들을 위해서 해결해 주노라. 비결을 내리노라.
자꾸 그런 쪽으로 해석을 해서인지 몰라도 다른 글과 달리 증도가는 영가스님 개인의 입장을 많이 담고 있다.
이 점이 어떻게 보면 순수하게 도만 거량하는 다른 오도송들과 다르다.
그 대신에 맛이 있다. 여러 가지 맛이 혼합이 되어 있는 것을 느낀다.
*
증도가는 내가 많이 애착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과 다시 한 번 이렇게 음미해 보니 참 위대한 가르침이고 세상에 둘도 없는 도를 증득한 노래다.
이런 노래가 어디 있는가.
도를 증득한 노래, 도를 깨닫는 노래, 또 도를 깨닫게 하는 노래다. 내가 스스로 깨달은 노래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르면 그 사람이 깨달을 수도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다 해당이 된다.
증도가(證道哥), 아주 근사하다.
(끝)
|
첫댓글 늦은 밤까지... 지금 쯤은 부산에 가느라 길을 떠나셨겠습니다. 먼~길 잘 다녀오세요. 고맙습니다. _()()()_
_()()()_
_()()()_
고맙습니다. _()()()_
_()()()_
고맙습니다._()()()_
염화실 慧 기자님 팔공총림 대선시 특강 소식에 감사 드립니다. _()()()_
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