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치생모版齒生毛와 당두일구當頭一句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僧問趙州 如何是祖師西來意)
“판치생모니라.”(州云版齒生毛)
9년을 소실에 홀로 헛되게 머무르니,
어찌 당두하여 일구를 전수함만 하랴.
판치생모라 하니 또한 섬길 만하다.
석인이 사가선마저 답파했느니라.
九年少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板齒生毛猶可事 石人踏破謝家船
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 중에 첫째 조건은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위 게송에 허엄이나 당두일구 판치생모 가사 석인 답파 사가선이 모두 난해한 용어들이다.
먼저 초구부터 보자. 9년을 소실에 홀로 헛되게 머물렀다. 9년 면벽은 달마대사의 얼굴이다. 후학이 모두 달마대사의 9년 면벽을 찬탄하는데, 유독 투자산 의청스님은 홀로 인정하지 않는다. 면벽의 본질은 벽관이고, 각관이며, 지정각세간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세인의 찬탄을 권도로 덮어버린 것이다.
어찌 당두하여 일구를 전수함만 하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생모니라.” 전자는 당두이고, 후자는 일구이다. 당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머리 위에, 머리를 향해, 머리를 맞대고, 대면하여, 당초에, 직면하다, 당두하다, 가까이 닥치다, 눈앞에 닥치다, 제일로 하다, 수위에 두다 등이다. 사자지간師資之間에 얼굴을 맞대고 은밀히 법을 전수할 수도 있고, 법상에서 공개로 전수할 수도 있다. 당두일구는 그러한 조건이 없다. 학자의 의문에 직면하여 바로 현지를 드날리는 것이 일구이다.
부처님의 모든 법문은 수기설법隨機說法이다. 일류 조사도 또한 그러하다. 그 질문을 기다려 현기를 드날린다. 줄탁동시啐啄同時가 당두일구이고, 축착합착築着磕着이 또한 당두일구이다. 시간과 공간 인사 삼자가 딱 들어맞아야 일구가 된다. 어기면 삼구가 된다. 화엄경이 최고법문이 되는 이유는 법주가 법신불이고, 빈객도 또한 십지 이상 등각 묘각의 보살이기 때문이다.
판치생모라 하니 또한 섬길 만하다. 달마대사의 9년 면벽은 조주스님의 일구만 못하다. 판치생모는 일구로 전혀 손색이 없다. 군자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성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판치생모도 또한 그러하다. 판치생모여, 두려워할 만하며, 받들어 모시고 공경할 만하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석인이 사가선마저 답파했느니라. 이 말후구를 무심도인 의청스님의 경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석인은 의청스님이 될 것이다.
판치생모의 판치나 답파사가선의 사가선은 모두 상본화엄의 일사천하미진수품 중에 일품一品이고, 또한 정행품의 일체법 중에 일법一法이다. 그 일법은 무엇인가? 화엄경 정행품의 말미에 있는 그 결어를 인용한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 알면, 혜신을 성취하되 다른 법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知一切法卽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 아는 바로 그 일법으로 깨달은 것이다. 투자산의 의청스님은 이 경구를 보고 대오했다. 판치나 사가선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라. 원각경 청정혜보살장에도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이다.”(衆生國土 同一法性)라는 명구가 있다. 유정의 불성과 무정의 법성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유정의 중생이나 무정의 국토도 또한 심자성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정설법이고, 무정성불이다.
어떤 날 조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등도 없고 얼굴도 없다. 너희들은 또한 알겠는가?”
신회가 나와서 사뢰었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고, 신회의 불성입니다.”(一日師告衆曰 吾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無背無面 諸人還識否 神會出曰 是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
복우화상伏牛和尙이 마대사馬大師의 송서送書를 국사의 처소에 이르러 건네주니, 혜충국사가 물으셨다. “마사馬師는 어떤 법을 설하여 대중에게 보이는가?”
“곧 마음이고, 바로 부처이다.”(卽心卽佛)라고 했습니다.
국사가 말씀하셨다. “이는 무순 말인가?” 또 물으셨다. “다시 무슨 말이 있었는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했고, 또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不是心 不是佛 不是物)라고 했습니다.
국사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조금은 견주어볼 만하다.”(猶較些子)
복우가 반대로 질문했다. “여기는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국사가 말씀하셨다. “삼점三點은 유수流水와 같고, 곡선曲線은 벼를 베는 낫과 같으니라.”(三點如流水 曲似刈禾鐮)(伏牛和尙與馬大師送書到師處 師問 馬師說何法示人 對曰 卽心卽佛 師曰 是什摩語話 又問 更有什摩言說 對曰 非心非佛 亦曰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師笑曰 猶較些子 伏牛却問 未審此間如何 師曰 三點如流水 曲似刈禾鐮)
육조스님은 “나에게 한 물건이 있다.”라고 하고, 마대사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하니, 서로 그 말은 어긋난다. 그렇지만 그 뜻을 취하면 어떠한가? 마사의 불시물不是物을 선사先師의 오유일물吾有一物과 대비하면 “오히려 조금은 견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국사가 점검한 유교사자猶較些子의 본의가 그러하다.
물건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군더더기인데,
허다한 명상名相인들 다시 무얼 하겠느냐?
첩첩한 산봉우리에 싸인 유거幽居 안에서 늘 보노라.
머리 없는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거꾸로 올라가는구나.
鏡虛集 35쪽 題智異山靈源寺 不是物兮早騈拇 許多名相復何爲 慣看疊嶂煙蘿裏 無首猢猻倒上枝
위 게송은 육조스님의 오유일물과 마대사 또는 남전스님의 불시물 공안에 대한 경허스님의 염송이다. 마대사는 오유일물을 긍정하지 않고, 경허스님은 불시물을 긍정하지 않는다. 첩장疊嶂은 지리산 연봉連峰이고, 연라煙蘿는 유거幽居나 또는 수진修眞하는 처소를 지칭하기도 하며, 바로 영원사를 일컫는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판치생모니라.”
“판치생모 의지가 무엇이냐?”
“수염 없는 늙은 원숭이가 거꾸로 나무를 올라간다.”(無鬚猢猻倒上樹)
이상은 전강스님의 법문 중에 자문자답이다. 경허스님의 게송을 인용하여 판치생모의 의지를 천명했다. 시구의 운율상韻律上 도상수倒上樹보다는 도상지倒上枝가 더 옳은 듯하다. 그러나 무수호손無首猢猻의 무수無首는 경허집의 편집자 착오가 아닐까 한다. 이에 경허집의 원문을 “수염 없는 원숭이가 거꾸로 나뭇가지를 올라간다.”(無鬚猢猻倒上枝)라고 수정해도 좋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
“판치생모니라.”
“어떤 것이 조사의 서래의인가?”
“석인이 사가선마저 답파했느니라.”(石人踏破謝家船)
“사가선마저 답파한 경계는 어떠하냐?”
“대교大敎의 그물을 펼쳐서 인천人天의 어룡魚龍을 건졌느니라.”(張大敎網 漉人天魚)
“다시 일러라.”
“여전히 모태를 여의지 않고, 이미 중생을 제도하여 마쳤느니라.”(未出母胎 度人已畢)
판티생모가 조주스님의 면목이라면, 답파사가선은 의청스님의 골수이다. 통상 답파踏破를 발로 배를 밟아서 파괴시켰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파破자를 조사助辭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망혜답파芒鞋踏破나 답파철혜踏破鐵鞋라는 사자성어가 또한 그러하다.
온종일 봄을 찾았지만 봄을 보지 못하고,
죽장망혜로 잿마루의 운무만 답파했노라.
돌아와 우연히 매화의 향내를 맡는데,
봄의 소식은 매화가지 끝에 이미 활짝 만개했더라.
終日尋春不見春 踏破芒鞋岭頭雲 歸來偶把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당대唐代 무진장無盡藏 비구니의 오도송悟道頌이라 하며, 송대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鶴林玉露 6권에 기재記載되어 오늘날에 전한다. 이는 그 정경이 “봄을 찾으려 꼭 동쪽으로 가지는 말라. 서원에 한매가 이미 눈을 뚫고 나왔느니라.”(尋春莫須向東去 西園寒梅已破雪)라는 시구와 유사하다. 또 원대 묘담妙湛 비구니의 작품이라 전하기도 한다. 제2구와 3구가 조금 다르다. 아래와 같다.
온종일 봄을 찾았지만 봄을 보지 못하고,
죽장망혜로 언덕 위 운무만 두루 답파했노라.
돌아와 웃으며 매화를 비틀고 향내를 맡는데,
봄의 소식은 매화가지 끝에 이미 활짝 만개했더라.
盡日尋春不見春 芒鞋踏遍隴頭雲 歸來笑捻梅花嗅 春在枝上已十分
공동산에 도사를 방문하고 상호湘湖에 이르렀도다.
만권의 시서詩書를 볼수록 점점 더 어리석어졌구나.
무쇠신발로 답파해도 승처勝處를 찾지 못했는데,
심득心得함에 온전히 시간을 허비할 것이 없도다.
南宋 夏元鼎 崆峒訪道至湘湖 萬卷詩書看轉愚 踏破鐵鞋無覓處 得來全不費工夫
이 답파踏破는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역방하는 것처럼 무수한 경계를 밟아왔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달리 석인은 조주스님으로 볼 수 있고, 사가선은 구경사究竟事 제불친증처諸佛親證處 또는 달마의 본분사本分事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주 무심도인이 달마대사의 본분사를 파설破說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연은 조주스님이고, 조연이 달마대사이다.
통현장자는 화엄경의 사구게를 광몀각품의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의 게송으로 본다. 아래와 같다.
일념에 두루 한량없는 겁을 관찰하시니
가고 옴이 없으며 또한 머무름도 없도다.
이와 같이 삼세의 일을 분명히 아시므로
모든 방편을 뛰어넘어 십력을 성취했도다.
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 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
비로자나불이나 문수보살은 일념에 두루 한량없는 겁을 관찰할 수 있다. 범부도 가능할까? 그러하다. 어떤 범부인가? 오로지 십신만심의 대심범부라야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보광명관이다.
범부의 일용수日用數 중에 기본수는 1이다. 비로자나불의 일용수 중에 기본수는 아승지수에서 밝힌 바와 같이 1구지이다. 이 1구지는 10의9승이고, 1불국토이며, 1대천세계 또는 1불국토 중에 소세계의 수로 10억이다. 이 10억을 광명각품에서는 백억이라 말한 것이다. 이전의 글에서 자세히 밝혔다. 일념을 1구지에 대비하면 무량겁은 불가설불가설전 또는 불가설불가설전불가설 불찰미진수가 될 것이다.
선가에서 제이구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라 말하지만, 위 사구게 중에 제이구가 바로 제일구이다. 가고 옴이 없으며 또한 머무름도 없도다. 어째서 그러한가? 십신만심이 십주초심이고, 초발심에 찰나제삼매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판치생모니라.”
당두일구에 줄탁동시하고 축착합착하면 이것도 또한 찰나제삼매이다. 화엄경의 수많은 게송이 모두 위 게송과 동일하게 대방광의 현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1천7백 공안에 대하여 무수한 송구가 있지만 단연코 조사서래의에 대한 투자청 선사의 판치생모 송구는 압권壓卷이다. 만고절창萬古絶唱으로 일체 송구의 사구게라 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2022년 6월 7일 길상묘덕 씀, 2024. 10. 29. 17:20, 甲辰 甲戌 丙寅 丙申 만리강산 일부 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