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직필(洪直弼)-過善山義狗塚(과선산의구총)(선산 의구총을 지나며)(주인의 목숨을 구한 개)
義狗捐生地(의구연생지) 의로운 개가 목숨을 바친 곳
停鞭覽碣文(정편람갈문) 발길을 멈추고서 비문을 보네
醉眠人不起(취면인불기) 술 취해 잠든 주인 깨지 않고
風猛火將焚(풍맹화장분) 바람에 불이 번져 태우려 하자
救主由全性(구주유전성) 주인의 목숨 구해 온전케 하니
殉身豈要勳(순신기요훈) 공을 바라 목숨을 바쳤겠는가
草間偸活輩(초간투활배) 세상에 구차하게 사는 사람들
寧不愧斯墳(영불괴사분) 이 무덤 본다면 부끄럽겠지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매산집梅山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양기정님은 “이 시는 홍직필(洪直弼)이 선산(善山)의 의구총(義狗冢) 옆을 지나다가 감회가 있어 지은 시이다. 지금도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무덤과 ‘의로운 개義狗’이라고 쓰인 비석이 남아 있고, 무덤 뒤로는 당시의 일을 그림으로 새긴 석판(石版)이 둘러져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길가에 누웠는데, 개가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이 나서 주인이 누운 자리까지 번져왔다. 개가 짖으며 주인의 옷을 끌었으나 주인은 끝내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개가 강으로 달려가 자신의 몸을 적셔 와서는 몸을 흔들어 사방의 풀을 적셨다. 불이 꺼질 때까지 이렇게 하기를 수십 번, 마침내 탈진하여 죽고 말았다. 개 덕분에 죽음을 면한 주인은 깨어나 곁에 죽어 있는 개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고이 묻고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도 전한다.
아이들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부모를 대하던 태도와 사뭇 달라진다. 한없이 큰 자리를 차지하던 부모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친구, 음악, 게임 등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맹자(孟子)는 ‘어려서는 부모를 사랑하다가도, 이성이 좋은 줄 알게 되면 예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자연의 이치가 그런 것이니, 서운해도 어쩔 수 없다. 요즘은 퇴근해 들어오는 나를 반기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두 마리 강아지다.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서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팔짝팔짝 뛰는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세상 근심을 잊을 수 있다.
서로 더 잘 소통해보자는 목적으로 SNS가 발전하였지만, 현대인들은 오히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가고 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사이버 세상에선 다양한 방식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보니, 얼굴을 마주하며 인간적인 정을 쌓거나 유대를 돈독히 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이렇게 삭막해져 가는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정서적 위안을 얻으려는 것이리라.
그런데 키우던 개를 버리는 일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집 근처 광장에는 주말마다 천막이 설치된다. 그곳에는 자신을 입양해 주기를 기다리는 유기견들이 있다. 이 개들은 일정 기간 안에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안락사를 당한다고 한다. 가끔 그 앞을 지나다가 개들과 눈이 마주친다. 애잔하게 바라보는 그 눈빛을 뭐라 형언하기 어렵다. 우리 집 개들도 여기서 입양했지만, 새끼 때부터 키우던 개들 못지 않게 키울수록 애정이 간다. 입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든다.
개는 의리의 친구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변함없이 주인의 곁을 지켜주고, 위험이 닥쳤을 때에는 목숨을 바쳐 도와준다. 주위에 이만한 친구가 있는가? 하지만 인간은 자기 필요에 의해 키우다가 귀찮아지거나, 늙거나 병들어 돌보기 어려워지면 의리를 저버리고 친구를 버린다. 개들은 주인을 위해 죽기도 하는데, 주인을 믿고 따르는 개를 사람이 저버려서야 되겠는가.”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홍직필[洪直弼, 1776년(영조 52)~1852년(철종 3), 자 백응(伯應), 백림(伯臨), 호 매산(梅山), 시호 문경(文敬), 본관 남양(南陽)]-조선 후기에, 익위사세마, 경영관, 지평, 집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매산집』 등을 저술한 학자. 초명은 홍긍필(洪兢弼). 서울 출신. 병마절도위 홍상언(洪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홍선양(洪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이간(洪履簡)이다.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한자로 문장을 지었다.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원로 명사인 송환기(宋煥箕) · 이직보(李直輔) · 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1810년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814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제배되었다. 이 때 동궁(東宮 : 뒤의 翼宗)이 새로 세자에 올라 당시의 유명인사들을 뽑아 매일 서연(書筵)을 열 때 발탁되었다. 1822년 장흥고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물리쳤다. 1838년(헌종 4)에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장악원주부 · 황해도도사에 임명되고,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음해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집의에 이르렀다. 1844년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다시 동부승지에 제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좨주를 비롯해 1851년(철종 2)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배되고, 이듬해에는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7월 형조판서에 제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또 천지음양귀신(天地陰陽鬼神)의 묘와 역대흥망치란(歷代興亡治亂)의 자취와 산천풍토인물족계(山川風土人物族系)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성리학에서 정자(程子)의 심본설(心本說)을 극력 지지하고,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였다.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주리파(主理派)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 52권이 있다.
*碣(갈) : 비석 갈, 1.비석(碑石)., 2.우뚝 솟은 돌, 3.문체(文體)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