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운암 봄 -
봄볕이 내려앉자 설법하시는 항아리
금낭화 할미꽃 옹기종기 둘러서서
가득 든 말씀도 듣고
텅 빈 말씀도 듣는다
- 병산서원 배롱나무 -
내 옷을 내가 벗고 내 옷 내가 만들지
햇볕 수틀에서 바람 실로 한 잎 한 잎
손끝에 핏방울로는
꽃잎들을 수놓지
이렇게 벌거벗은 건 입기 위한 기다림
눈 붙일 새 없이 수천 잎 놓아가도
곁가지 부러지지 않을
그만큼만 한 땀 한 땀
- 짐볼 -
아무리 굴려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
모양대로 구르며 벽으로 간 공은
스스로 길을 내가며 돌아올 줄 안다
밀어도 기울지 않는 동그란 결정체
모서리란 말을 가져본 적이 없어
상처를 선물하거나 받을 줄도 모른다
- 절망을 뜯어내다 -
우리를 탈출한 고릴라가 돌아다닌다
어떻게 나갔어?
대체 비결이 뭐야?
철망을 하루에 한 칸씩 나도 몰래 뜯었지
절망을 뜯어냈다고?
철망을 뜯어냈다고!
오타를 고치려다 눈이 주운 어휘 한 잎
절망을 하루에 한 줌 몰래 뜯어내야지
- 달무리 -
비우기만 하면 될까
아프기만 하면 될까
간절한 바람 모아 연꽃 향 터트리는
깊은 산 범종 소리가 허공에 머문다
요즘 별 일 없냐
하는 일은 잘되고 있냐
뭍으로 보내고는 잠시도 날 놓지 못하는
어머니 먼 메아리가 달 가에 어린다
- 메밀꽃 -
물질하고 돌아온 엄마 손에서 짠맛 난다
바다를 드나들며 일흔 해 절여진 섬
초저녁
누운 숨소리
메밀꽃처럼 밀려온다
- 엄마의 일기 -
어둠이 가둔 길에 등불처럼 떠오르는
섶다리 건너서라도 그런 사람 있었으면
어느 날
내가 나를 몰라도
기억하는 그 이름
- 지갑 -
엄마가 놓고 간 엄마에게 향기가 나요
허물 벗는 체크무늬
귀퉁이 뜯어진 실밥
날마다 여섯 남매가 드나들던 아랫목
그 아랫목
한 번이라도
당신에게 온기였을까
돈도 가족사진도 시나브로 빠져나가고
희미한
옛이야기처럼 얼룩만 남았어요
- 아버지 -
첫 줄을 뽑으며 허공을 나는 거미
범람하는 파랑계곡
밧줄 풀며 길을 내는
맨 처음
다리가 된 당신
나는 타고 건넙니다
- 엄지손톱 -
빗소리 잘 들리는
툇마루 끝에 앉아
이따금 발톱만
손질하시던 아버지
손톱은 깎지 않아도
길어지지 않았다
흙에서도 맨손이
물에서도 맨손이
돌멩이가 돌아가며
손톱 곱게 갈았다
지문도 죄다 지웠다
아버지 아! 아버지
- 따뜻한 항아리 -
민무늬 목관이 화구로 들어갑니다
망설임 하나 없이 문은 굳게 닫히고
아흔 해
숨 막히던 시간 불꽃으로 피어납니다
덜 삭은 유골을 공이로 내리칩니다
쌓인 만큼 더 곱게 분쇄기로 갈아내어
이승의
뜨거웠던 삶을 항아리에 담습니다
항아리가 따뜻하여 눈물이 뜨겁습니다
낯선 먼 국경 넘을 수 없는 함
어디로
가야 하나요 당신이 보고 싶을 땐
- 꽃송이 올린 풀처럼 -
어디서 왔을까 날아든 씨앗 한 톨
파랑이 밀려오고 번개 내리꽂히듯
이럴 때 넌 꼼짝없이 젖거나 맞아야 한다
뜻밖에 받은 한 줄 공손히 받들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세상 한복판에
꽃송이 올린 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 계곡을 건너다가 -
큰물에 휩쓸린 돌탑들이 일어납니다
큰 돌이 작은 돌을
선 돌이 앉은 돌을
서로가 일으켜 세워
다시 우뚝
섭니다
물발질에 주저앉은 나도 일어납니다
노란 후회도
보랏빛 서늘함도
도마뱀 긴 꼬리처럼
뚝, 끊어
버리고
- 그 소리가 좋아서 -
통명전 빈 댓돌을 불빛이 바라본다
그날 그 헛기침도 창틈으로 내다본다
댓돌에
벗어 놓은 건
떨어지는
솔잎소리
- 밀물썰물 -
섬에는 하루 두 번 약속하듯 장이 섭니다
파도는 힌번도
거르지 않고 나가
왁자한 뭍 소문들을 갯바위에 팝니다
모래톱 발자국도 흥정 끝에 넘기고
좌판에 펼친 소식
바람의 웃음소리
보자기 잔뜩 꾸려 이고 갯가로 돌아옵니다
- 시리아의 밤 -
사막의 하늘에는 습도 높은 별들이 산다
날마다 올라가는
아기 별 별
어른 별 별
별들아 참혹한 대낮 물을 수가 없구나
- 가자 지구 -
심심한 일상에서 지루한 생활을 하며
TV 보다 잠들고 싶다, 싸우고 싶지 않다*
무관심
비겁으로 뭉친
세상 향해 외친다
지구에서 가장 큰 야외수용소 가자
날아가던 총탄도 두 눈 감아버린다
세상에
아무렇게나 핀
꽃이 어디 있을까
* 팔레스타인 칼레드 흐룹 교수 말.
[넌 무작정 온다, 고요아침]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넌 무작정 온다 (김양희)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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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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