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느 사이트 게시판에서 찾아내 지금까지 보관해온 자료입니다. 원래 2부작으로 되어 있었고, 제가 하나로 묶었습니다. 내용 중간에 연운 16주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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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의 길-나라가 임금보다 소중하니’(도나미 마모루 지음/허부문・임대희 옮김/소나무)에서 일부 내용을 뽑아 정리했음.
머리말
당나라 말기에서 오대까지의 100여 년은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벌어진 전쟁의 혼란으로 나날을 지새운 시대였다. 이런 난세를 살다간 흥미로운 인물이 바로 풍도馮道인데, 그의 자字는 ‘가도可道’였다. 우선 그에 대해 서로 엇갈린 인물 평가 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를 들어보자.
“정절을 지키는 여인은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고, 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정절을 지키지 않는 여인은 제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바느질 솜씨가 좋아도 정숙하다고 볼 수 없다. 충성스럽지 않은 신하는 제아무리 재능이 많고 공적이 빼어나도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소중한 절개를 잃엇기 때문이다. 풍도가 재상으로서 다섯 왕조와 여덟 성姓을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 지나가는 일과 매한가지다. 아침에는 서로 원수였는데 저녁엔 임금과 신하 사이로 변하자, 표정과 말을 바꾸면서도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큰 절개가 이랬으니, 설사 그가 착한 일을 몇 가지 했다고 한들 어찌 괜찮다고 말하겠는가”
“풍도는 스스로를 장락노자長樂老子라고 스스로 불렀는데, 과연 그 말 그대로였다. ‘(나라의)사직이 중요하지, 임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맹자의 말처럼 풍도는 그 두 가지를 잘 분별할 줄 알았다. 원래 ‘사社’란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고, ‘직稷’이란 백성을 먹여살리는 것이다. 백성이 편안하고 먹고살[安養] 수 있어야만, 임금과 신하는 비로소 책임을 다한 것이다. 만약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거나 먹여 살라지 못한다면, 신하라도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고 먹여 살려야 한다. 따라서 풍도는 신하라는 사람이 원래 해야 하는 책임을 완수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오대의 흥망을 살펴보니, 그때는 정치권력이 은밀한 묵계 속에서 이어졌고, 풍도가 비록 50년 동안 네 왕조를 거치면서 열 두 명의 임금과 야율耶律씨의 거란契丹에 봉사했지만, 백성들이 끝끝내 전란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풍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한 덕분이다.”
앞 문장은 11세기 송나라 때에 정통 사학의 우두머리였던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실린 평가이다. 그리고 뒷 문장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과격한 사상가로 알려진, 16세기 명나라 때의 이탁오가 ‘장서’ 뒷부분에서 풍도를 극구 칭찬하며 쓴 것이다.
풍도는 당나라 말기에 황소의 난이 한창일 때 태어났다. 그는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이어지는 중국사의 전환기 곧 오대십국으로 분열된 시기에, 다섯 왕조・여덟 성씨・열 한 명의 천자를 잇따라 섬기면서 고위 관리로 30년, 재상으로만 20여 년을 지냈다.
이 때문에 풍도는 예로부터 절개와 염치가 없는 인물의 대명사로 취급되어 왔다. 이런 평가는 신오대사新五代史를 편찬한 구양수가 처음 내렸고, 사마광이 그 글(자치통감)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 뒤로 이 두 사람의 평가가 대체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탁오처럼 그런 견해를 따르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파렴치한이라는 오명을 덮어씌웠다가, 때로는 지나친 칭송으로 포장되기도 했던 풍도란 인물은 대체 어떤 시대를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나(도나미 마모루)는 이 책에서 가능한 한 충실히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주전충과 이극용
황소의 반란으로 천하의 형세가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전에는 지방의 번진들이 비록 형식적이긴 했지만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르면서 세금을 바쳐왔다. 그러나 번진들이 새로이 강력한 군벌 정권으로 바뀌면서, 그들은 더 이상 중앙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들 신흥 군벌 중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지리적인 이익까지 취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지금의 하남성 개봉에 있던 변주汴州의 절도사 주전충이었다.
앞서 7세기 초반에는 수양제(604~617)가 황하와 양자강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운하를 뚫어, 중국의 대부분을 연결하는 운하체계가 완성되었다. 그때부터 대운하에 가까이 있는 지역들이 중국의 경제와 군사 분야에서 중요한 자리가 되었고, 그 주변에도 신흥도시가 발달하면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곳이 바로 황하와 대운하가 교차하는 지점인 변주였다. 당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는데, 강남의 재화를 수도로 실어 나르는 선박은 반드시 변주를 거쳐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대운하와 황하는 수면의 높이가 달라서, 대운하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간 선박은 변주에서 화물을 내린 다음에, 다시 다른 선박에 화물을 옮겨 싣고 서쪽의 황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주 절도사에 임명된 주전충이 이 지역을 차지한 다음부터 그의 세력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동료였던 황소의 옛 부하들을 불러들여 자기 아래에 둠으로써, 그는 재력과 무력을 모두 갖춘 지배자로서 당나라 황실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 주전충보다 더 큰 공적을 세운 인물은 산서山西 지방의 진양晋陽 절도사였던 이극용이었다.(당시 28세의 젊은 장수로 황소군을 격파하고 장안을 수복했다) 돌궐계의 사타沙陀 부족 출신으로 구성된 그의 부대는 아직 중국화되지 않은 채, 예전의 유목민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미개한 풍속을 지니고 있었지만, 전투에는 엄청나게 강했다.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는 확실히 주전충보다 이극용이 더 많은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반란이 끝나고 막상 외교적 수완이 요구되는 단계에 이르자, 젊어서 아직 세상 물정에 익숙하지 못했던 이극용은 노련하고 교활한 주전충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극용의 군대를 고립 상태에 몰아넣는 사이 주전충은 당 왕조를 무너뜨리고 따로 나라를 세울 준비를 조금씩 추진했고, 마침내 907년에 후량後粱을 세웠다. 그는 수도를 자신의 본거지였던 변주로 정했다. 변주는 대운하와 황하가 합쳐지는 곳이라, 대규모의 군대를 양성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당나라 황살의 부흥을 내세운 후당後唐과 후진後晋이 낙양을 수도로 삼은 것만 제외하면, 오대 시대에는 수도가 줄곧 변주의 개봉에 있었다. 이런 전통에 따라 나중에 북송北宋도 변주를 수도로 정했다.
당 왕조의 멸망은 중국 안팎으로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군벌과 이민족 등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안팍의 세력들이 앞다투어 자주 독립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북쪽에는 몽골계의 거란족이 추장 야율아보기를 중심으로 민족 통일을 이루어 요遼나라를 세웠다. 요나라는 이때 동아시아에서 최대의 강국이었다.
중국 내부도 남과 북으로 크게 분열되었는데,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은 진령秦嶺산맥과 회수淮水를 잇는 선이었다. 회수 이남에서는 동쪽에서부터 오吳,오월吳越,형남荊南,초楚 등의 여러 나라가 양자강 중하류를 차지하고 있었고, 양자강 상류에는 촉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 해안에는 민閩과 남한南漢이 들어섰다. 이 나라들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립 정권을 세운 군벌들이었다. 이 밖에도 독립 혹은 반독립 상태의 정권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가 모두 10개국에 달했다. 그래서 훗날 역사에서 이 나라들은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진한 시대 이후 중국은 여러 차례의 분열기 혹은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나 그때는 모두 중국의 북부만 분열된 것이었고, 남부는 항상 통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중국의 남부에 한꺼번에 여러 개의 정권이 어지럽게 세워진 적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때 세워진 남쪽의 여러 나라들이 지닌 역사는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일단 이 문제는 남겨두고, 우선은 이들 남쪽의 여러 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화북의 황하 유역, 곧 중원中原지대의 모습을 살펴보자.
당 왕조가 붕괴되고 나서 중국의 북부는 대략 3개의 큰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주전충이 세운 후량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후량은 당 왕조의 중심이었던 두 개의 수도 장안과 낙양을 포함해, 새로운 수도 개봉을 중심으로 형성된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세력보다 군사력이 강했다.
두 번째 세력은 ‘하북 삼진’의 군벌 집단이었다. 이들은 당나라 중기에 정부에 대항했던 반란군이나 안록산의 잔당들이 형성했던 세력으로, 하북성의 중앙에서 독립 태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후량에게 복종하고 있었지만, 언제 반기를 들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존재였다.
대표적으로, 하북 삼진의 북쪽에 있던 노룡군의 유수광은 이미 ‘대연’이란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위험한 세 번째 세력은 산서성의 진양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사타족의 이씨 정권 곧 후진이었다.(나중에 후량을 누르고 후당이 됨) 따라서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이들 3대 세력의 흥망성쇠가 그대로 후량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극용의 뒤를 이어 진왕晋王이 된 이존욱은 나중에 후당을 건국하고 장종莊宗이 되었음)
주전충의 후량 왕조는 고고한 귀족 출신의 고위 관리들을 황하의 탁류에 던져 넣는 사건으로 출발했지만, 그렇다고 후량 왕조에서 과거의 귀족 계급이 모두 없어졌다고 성급하게 단정해서는 안된다.
왕위를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는 이른바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앞 시대의 왕조를 계승했기 때문에, 비록 소수일지라도 예전 왕조의 옛 신하들을 남겨 놓아야 했다. 더군다나 왕조 정치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일부를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후량 왕조에서 제상을 지낸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전의 귀족이었고, 그들은 주전충이 데리고 있던 참도들과는 엄격하게 구별되고 있었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귀족계급을 극단적으로 배격했던 주전충이었지만, 그의 의식 속에는 이처럼 또 다른 면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이렇게 구별한 다음, 그가 실제적인 권한을 부여한 쪽은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있는 사신私臣들이었다. 재상은 단지 자리만 지킬 뿐, 병사들과 접촉조차 못하게 했다. 다시 말해 주전충의 후량 왕조에는 이중 구조가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새로 등장한 문신들이 앞 시대의 귀족들을 대신해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음에 등장할 후당의 명종明宗 시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주전충의 정권은 다분히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923년에 장종 이존욱은 대량성大梁城(변주)으로 들어가 후량을 멸망시킴으로써 아버지(이극용)의 시대부터 가져온 오랜 야망을 달성하자, 후량의 모든 정책을 고쳐 당나라 시대의 것으로 복원시켰다.
수도도 개봉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낙양은 원래 당나라의 동도東都였다. 당나라의 서도西都인 장안은 변주汴州에서 너무 멀어서 불편했기 때문에, 동도만이라도 부활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낙양은 강을 이용한 수송 사정이 바로 옆에 있는 개봉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예전에는 낙양처럼 지형이 견고한 곳이 수도로 적당했지만, 점차 시대가 변해 수많은 병력이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낙양처럼 교통이 불편한 곳은 수도로서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장종이 무리하게 수도를 개봉에서 낙양으로 옮긴 것은 시대 착오적인 판단이었다.
이사소가 지닌 재물의 힘
당나라 왕조가 망하고 후당이 세워진 16년 동안, 북쪽의 진晉나라와 남쪽의 후량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했다.
오래 전에 주전충의 군대가 산서 지방에 침입해, 파죽의 기세로 이극용의 근거지인 태원까지 포위하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부하 장교들 가운데서 누구는 북쪽의 운주雲州로 달아나자고 했고, 누구는 멀리 거란으로 달아나 재기를 도모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때 이사소만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태원을 굳게 지키자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유격 전술로 적을 괴롭혔고, 마침내 침입군을 모두 물리쳤다. 901년의 일이었다.
장기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 군자금이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책에서는 이극용과 이존욱 부자가 2대에 걸쳐 후량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위기의 상황 때마다 항상 이사소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했다고 씌어져 있다.
이사소의 처 양씨楊氏는 재물을 쌓는 데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집안의 재산이 무려 100만 관에 달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이사소가 이존욱을 도우면서 후량과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양씨가 모은 재산의 위력이 있었다.
[정치인들은 돈 문제가 나오는 것을 꺼려하지만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원소나 조조는 가문이 부유했던 탓에 자금을 모으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유비는 몰락한 가문의 후손입니다. 그런 그가 고비마다 군사를 일으켜 다시 일어서곤 했는데, 그때마다 미축이 필요한 자금을 내주었습니다. 미축이 엄청난 부자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요즘 말로 유력한 정치가와 재벌이 결탁한 셈..조조도 대부호 미축을 탐내어 태수로 천거했으나 미축은 조조가 아닌 유비를 선택했죠. 삼국시대 당시 상당수의 제후들은 민가를 약탈하여 군량을 충당하는 파렴치한 짓을 서슴지 않았지만 유비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유비는 미축이라는 정치자금줄(?)이 있었기에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고, 덕분에 민심을 잡을 수 있었는지도 모름.]
이사소 부부가 어떻게 재물을 모을 수 있었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결국 그들의 근거지였던 진양이라는 지역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오대 가운데 후당,후진,후한이라는 세 왕조는 모두 진양을 근거지로 세워졌다. 후한은 중앙 정부가 멸망한 다음에도, 나머지 사람들이 진양에서 성문을 닫아걸고 다시 북한北漢이라는 왕조를 세웠다. 나중에 송宋이 천하를 통일할 때도, 최후까지 남아있었던 세력이 바로 북한이었다.
진양이 이렇게 여러 왕조의 근거지가 되었던 이유는, 우선 당나라 말기에 이곳을 차지하면서 정착했던 사타 부족의 용감한 기풍이 남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땅이 왕조를 일으킬 만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진양이 속한 주州의 이름은 병주幷州였고, 군郡의 이름은 태원太原이었다. 이 부근은 옛날부터 철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당나라 때부터 이미 칼이나 낫처럼 날이 선 연장을 잘 만드는 곳으로 유명했고, 그 가운데서도 병주 가위는 특히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또한 이 지방에서 질 좋은 석탄도 생산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쩌면 이 무렵부터 이미 석탄을 이용해 철을 제련했느지도 모른다. 아무튼 군웅할거 시대에는 철의 산지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군벌들에게 가장 중대한 일이었다. 철은 군벌들에게 무기를 만드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는 일반적인 판매를 통해서 막대한 이익까지 안겨 주었다.
한편 이 지역에서 나오는 전국적인 특산품으로 명반明礬을 들 수 있다. 명반은 짐승 가죽을 무두질하는 데는 꼭 필요한 물품으로, 난세일수록 더 가치가 있는 상품이었다. 아마 이사소 부부도 이런 상품들을 사들여, 때때로 그것을 밀거래함으로써 재산을 모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산서성의 북부는 은을 생산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 부부가 축재의 한 수단으로 은광 경영까지 손을 댔느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이사소는 굉장히 많은 은괴도 갖고 있었다.
역사책에는 이사소의 처 양씨가 투기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형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때마침 거란의 세력이 커지자, 산서성을 거란을 고객으로 삼아 국제무역을 하기에 절호의 위치가 되었다.
따라서 양씨의 경제 활동은 이 국제무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은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기사회생할 수 있는 보약으로도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그의 재산은 신통력을 지닌 요망한 물건처럼 계속해서 사회적인 파란을 일으켰고, 결국 한 가족에게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
[이사소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양씨가 낳은 자식들..권력투쟁에 휘말리고,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형제간에 서로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결국 일곱 형제 가운데 오히려 병들어 있던 넷째 아들만 살아남아, 막대한 유산을 혼자 상속할 수 있었습니다.]
풍도 재상이 되다.
풍도는 당나라 말기 황소의 반란이 아직 진압되지 않았던 882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하북의 영주瀛州 경성현京城縣 내소향來蘇鄕 조한리朝漢里로 지금의 북경에서 남쪽으로 180km, 천진에서 서남쪽으로 120km 떨어진 곳이다. 그 무렵의 경성현은 장로현長蘆縣 곧 지금의 창주시에서 서남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대략 추정된다. 그의 고향인 내소향 조한리는 바로 이 경성현의 성곽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대략 2km 떨어진 지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부근은 하북 곧 황하의 북부에 있는 중앙 대평원의 한 가운데이다.
그의 조상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 풍도 자신은 시평始平과 장락長樂 두 개의 군郡에 속한 명문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은 듯하다. 장락군은 지금의 하북성 기주冀州지역으로, 경성현에서 서남쪽으로 100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는 곳이다.
정확한 사실만을 기록한 역사책의 인물 전기에 실린 사람들 가운데 가끔식 장락군의 풍馮씨 집안이 나온다는 사실에 비추어, 풍도가 자기의 출신 집안을 거기에 가탁했을 가능성이 높다.
‘구오대사舊五代史’의 ‘풍도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의 선조는 농사를 짓기도 하고, 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한쪽 일만 계속 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풍도의 조상 가운데는 농업에 종사한 사람도 있었고, 유학을 공부한 사람도 있었으며, 때로는 하급 관리가 된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풍도는 크게 내세울 만한 가문이 아닌, 보통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말기부터 귀족 제도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지만, 재상만은 예전처럼 명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조금도 내세울 만한 가문이 못되는 풍도가 최협과 함께 재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명종의 지명 때문이었다.
후당 명종 이사원(이극용의 양자)이 과감하게 풍도를 재상으로 삼은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풍도의 박학다식함이었다. 그 무렵 귀족들 가운데는 명문 출신임을 자랑하고 다니면서도, 실제로는 귀족에게 당연히 요구되었던 문학적 교양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반해 풍도는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로서의 관록을 당당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풍도가 만인과 다투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명종은 풍도가 어떤 일에도 남과 경쟁하거나 남을 욕하지 않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리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 공감을 느꼈다. 이런 인물은 특히 난세에서 얻기 힘든 존재였다. 결코 무리하지 않고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명종 자신의 생활 신조이기도 했다. 따라서 풍도는 자신의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의 뜻으로 재상 자리에 올라가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최협은 청하淸河최씨로 명문가 출신이다. 찬란한 영화가 대대로 이어져 순荀씨와 진陣씨, 왕王씨와 사謝씨까지도 능가하는 고고한 귀족이었다.
이런 사실을 비교해 볼 때 문벌 귀족 출신이 아닌 풍도를 재상으로 등용한 사건은 참으로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로지 본인의 실력만 가지고 재상에 취임한 새 관료 풍도에 대해, 귀족 출신임을 자랑하던 옛 관료들이 반발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끔씩 유학자가 나올 정도의 작은 지주 집안이었다거나, 인상이 좋고 몸가짐이 바르다는 점을 빼고는, 신임 재상 풍도는 도무지 세련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골뜨기 취급을 받았다.
시골 출신의 재상이 나타나자, 명문 출신이라는 의식에 젖어 있던 옛날 관료들이 질투와 조소를 했다.
풍도는 가문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재능만으로 재상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인간, 곧 좋은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문학적 재능과 풍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등용했다. 당나라 말기부터 귀족이었지만 말과 행동이 경솔한 인물들이 고위 관직에 오르던 풍조가 누그러진 것이다.
황소의 반란이 끝나는 당나라 말기가 되자, 귀족들은 점차 몰락해 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데다 군벌들의 힘이 커지면서, 귀족들이 몰락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와 함께 주전충이 수도를 장안에서 변주의 개봉으로 옮긴 사건은 몰락해 가는 귀족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나라의 귀족들은 대체로 관리 사회로 나갔기 때문에, 비록 중앙 정부에서는 세력이 있었지만 지방에 대토지를 가지고 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수도인 장안 부근에 모여 살았다. 그래서 농경보다는 수력을 이용해 밀가루를 정제하는 돌절구인 연애碾磑를 경영하는 방법 등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사원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이권을 통해 연애를 경영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수도가 개봉으로 옮겨지고 장안이 점차 쇠퇴하자, 귀족들은 생활 수단을 잃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빠졌다. 생활 수단의 하나로 당나라 시대까지 행해졌던 매혼賣婚, 요컨대 귀족들이 자기보다 낮은 가문의 상대와 재산을 목적으로 결혼하던 일마저도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족보를 매매하는 행위로까지 변하고 있었다.
생활이 궁핍해진 귀족들이 그나마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족보마저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세력가인 무인(군벌)이나 부호들에게 팔아 넘겼던 것이다.
황제가 재상을 등용하기 위해 당나라 때의 고위 관직 집안을 찾았지만, 모두 망해 버려서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명문 출신이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이들이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찾아내 재상으로 삼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귀족 출신임을 자랑하면서 무인들을 멸시함으로써 스스로 평판만 떨어뜨리고 있었다...(하략)
연운 16주
석경당이 거란을 이용하려고 생각했을 때, 거란의 상황은 태조 야율아보기으 아들인 태종 야율덕광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바야흐로 거란의 국력이 가장 왕성하게 커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공교롭게도 석경당은 이런 거란의 남침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거란과 교섭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계획은 거란에게 기병을 빌려 단번에 후당을 멸망시키고, 자신이 천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 대신 거란에게는 일부 땅을 넘겨 주면서, 매년 은이나 비단을 보내서 속국의 예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거란에게 주려는 땅은 노룡군이 지배하던 지역과 안문관 북쪽의 여러 주였다.
마침 거란은 국력이 넘쳐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석경당의 제의에 곧바로 응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가을은 기병들이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계절이었다. 936년 9월에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은 기병 5만을 이끌고 내려와 진양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11월 11일에는 거란 태종의 명령을 받은 석경당이 그곳에서 왕위에 오르면서, 연호를 천복으로 고쳤다. 그가 바로 후진의 고조이다.
석경당은 이어서 거란의 군대를 선봉으로 삼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후당의 군대를 격파한 다음 낙양에 입성했다. 윤11월 26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말제 이종가는 석경당이 성에 들어오기 전에, 옥새를 손에 쥐고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재위 3년에 향년 51세였다.
후당에서는 장종,명종,민제,말제의 네 황제가 왕위에 올랐지만, 양자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성姓은 사실상 셋이었다. 요컨대 장종은 주야 씨였고, 명종과 민제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으며, 말제는 왕씨 였다. 14년을 이어온 후당 왕조는 말제의 죽음으로 마침내 최후의 날을 맞이했던 것이다.
후진의 고조 석경당은 왕위에 오르자, 우선 거란에게 연주燕州와 운주雲州를 포함해 16주를 넘겨주었다. 그 지역은 북경北京과 대동大同을 포함하고 있는데, 주로 철과 석탄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거란이 발전하는 데 이 지역이 절대적인 공헌을 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론 거란에 일부 땅을 넘겨주는 것은 후세에 골치 아픈 문제를 남겼지만, 고조 석경당으로서는 그때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오히려 고조가 직면하고 있던 가장 곤란한 문제는 출동했던 거란의 기병이나 자기의 직속 군대에 내릴 포상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만약 이렇게 해마다 전쟁이 이어진다면, 중앙 정부나 지방의 군벌 정부도 모두 적자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나라의 창고가 통째로 바닥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진양의 재벌 이사소가 남긴 유산이었다.
이사소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이 오히려 재앙이 되어, 모두 불운하게 세상을 떠났다. 다만 넷째 아들 이계충만이 병 때문에 화를 입지 않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상속자가 되었다. 고조 석경당은 이계충을 위협해 재산을 강제로 빌렸고, 그것으로 거란군과 자기 군대에 내리는 포상금을 충당했다.
만일 이계충의 재산이 없었다면, 고조 석경당의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재산 덕분에 이계충은 고조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여러 주의 자사를 역임하면서 친위 부대의 대장까지 올랐다. 그러나 아마도 고조에게 빌려준 돈은 끝내 돌려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계충은 946년에 수도에서 죽었다.(석경당은 942년에 죽었음) 이 다음부터 이사소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역사책에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사소를 비롯한 진양 이씨의 재력은 후량,후당,후진이라는 새 왕조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사소의 재산이 주로 부인 양씨의 수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 아녀자의 힘이 오대 왕조들의 판세를 바꾸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연운 16주에 속한 중국 땅과 그곳에 있는 중국 사람들까지 넘겨받은 요나라는 동아시아의 역사에 새로운 선례를 열었다. 이전까지는 이민족이 중국 밖에서 나라를 세워 중국을 압박하거나, 중국에 침입해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경우는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중국 밖에서 나라를 세우고도, 중국 영토의 일부를 넘겨받아 차지한 사례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요나라는 새로이 넘겨받은 땅에서 뛰어난 통치수완을 보여, 이민족도 중국을 지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요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태조 야율아보기가 중국인이 지닌 생산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을 초빙해 주현州縣을 설치하면서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시켰다. 그가 다른 부족들을 병합하고 거란 민족을 통일하기까지, 그들 중국인의 생산력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야율아보기는 거란인이 중국화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란인은 어디까지나 옛날부터 내려온 관습을 지키되, 중국인은 그들 고유의 법에 따라 지배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이 태조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뒤를 이은 태종 야율덕광도 이때 연운 16주에 속한 중국 땅과 그곳 사람들을 차지했지만, 달리 고심할 필요는 없었다. 중국인들은 그때까지의 방식대로 지배하면 되었다. 그래서 야율덕광은 특별히 남면관南面官이라는 관리를 새로 두어, 중국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중국인을 다스리게 하였다. 반면에 거란인을 포함한 북방 유목 민족을 지배하는 관리는 북면관北面官이라고 불렀다. 계통을 달리하는 이 두 관리는 천자 밑에 직속으로 두어,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요나라 통치의 성공 비결이었다.
거란의 침입
거란이 944년 정월과 12월에 감행한 두 차례 침입은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두 차례의 전투로 후진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특히 거란의 1차 침입에 맞서 싸웠던 경연광의 기세는 더욱 당당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에게는 잘 갈아 놓은 10만 자루의 칼이 있도다. 그러니 거란 따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중국인의 이런 자신감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후당 시대에 철 생산의 중심지인 진양과 경제의 중심지인 개봉이 결합되어, 그때부터 중국의 무기 생산 능력이 눈에 띠게 향상된 배경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중국 군대도 그런 물량을 바탕으로 북방 유목 민족의기병들에게 맞설 수 있을 만큼 점차 강해졌다. 그러나 거란도 연운 16주를 넘겨받은 뒤부터 전력이 크게 강화되어 있었다. 다만 후진 쪽에서 이런 사실을 잊은 채 지나치게 자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은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947년 설날에 소제의 항복을 받았다. 그는 후진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영접을 받으며, 개봉의 대량성大粱城에 들어갔다. 야율덕광은 먼저 소제를 부의후負義侯로 강등시키면서 황룡부黃龍府로 보냈다. 황룡부란 옛날에 발해의 부여성이 있던 곳이다. 대량성에 들어간 야율덕광은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를 변주汴州로 고쳐 부르게 하고, 국호를 요遼로 하면서 대동大同으로 개원했다. 그리고 항주恒州 곧 옛날의 진주鎭州는 중경中京이라고 했다. 관리 제도는 후진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고, 야율덕광 스스로가 중국식 옷차림을 했다.
후진을 멸망시킨 야율덕광은 변주 개봉에 그대로 눌러 앉아 중국을 지배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중국을 통치할 때는 중국인을 이용한다는 예전부터의 원칙을 무시하면서, 거란에서 이끌고 온 기병 부대들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도록 한 데 있었다. 기병부대들이 온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촌락들을 마음대로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 반항하는 사람은 설사 노약자라고 하더라도 닥치는 대로 베어 버렸다. 심지어 그들은 이것을 ‘打草穀’곧 ‘벼베기’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민족인 거란인에게 이 지경으로 당하게 되자, 여태껏 양처럼 온순했던 중국인도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란의 대응도 점점 격렬해져, 중국인들에게 보복적인 학살 행위를 반복했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점점 악화되었다. 거란군이 지나간 곳은 마을과 거리가 모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의 상황은 단순한 내란과는 다른, 민족 사이의 분쟁으로 번져 처참한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졌던 것이다.
후한을 세운 고조(유지원)는 곧바로 중원을 경영하기 위해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일단 지방의 군벌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거란에게 저항하도록 뒤에서 부추기기 시작했다. 거란군은 북방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추위에는 잘 견디지만, 더위에는 약했다. 개봉에 침입할 때는 아주 추운 엄동의 계절이었지만,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자 그들은 북방의 평원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인과 치르는 유격전은 날마다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야율덕광은 북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개봉에 입성한지 겨우 3개월도 안된 시점이었다. 이것은 결국 거란의 중원 통치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는 의미였다.
사실 중국인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발적으로 벌어진 유격전으로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을 북쪽으로 내몰았다는 사실도 중국인에게 점차 자신감을 갖게 했다.
북방으로 철수하던 야율덕광은 도중에 병이 들어, 항주를 눈앞에 두고 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영이 북한을 직접 토벌하다.
뒤이어 그(후주의 태조 곽위)의 양자인 시영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때 그는 34세였다. 시영은 젊고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가 오대에서 제일 가는 명군이라고 불리는 후주의 세종이었다. 더욱이 그의 부하 군대는 거란병과의 전투를 통해 힘든 시기를 겪고 난 다음이었기 때문에, 종전과는 전혀 다른 체질로 개선되어 있었다. 이 천자의 금군禁軍 곧 친위 부대가 성장하여, 마침내 중국을 재통일하는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후주에서 젊은 천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北漢의 세조 유숭은 이 기회를 틈타, 황제의 지위를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숭은 온 나라에서 모집한 3만 군대를 이끌고 후주로 침입해 왔다. 세종은 몸소 친위병인 금군을 데리고 방어에 나섰다. 이때 세종이 직접 토벌에 나서는 일에 가장 반대한 인물은 그때까지 여저히 계속해서 재상의 자리에 있던 풍도였다. 이미 그는 73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풍도는 이제까지 천자가 직접 토벌에 나서는 일에 대해서는 항상 반대해 왔다.
풍도의 눈에도 세종은 장래가 기대되는 천자였다.
친위군의 장군 가운데에서는 북한에 호의를 갖고, 몰래 연락을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군대를 이끌고 직접 적을 토벌하러 가는 일에는 항상 예창치 못하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언제 적과 내통해 배반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먼저 태조의 산릉을 장악한 다음, 형세를 잘 지켜보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풍도는 전에 볼수 없었던 강한 기세로 천자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세종 시영의 기세도 만만하지 않았다.
세종은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터로 항했다.
후주와 북한의 두 군대는 산서성 남쪽에 있는 택주澤州의 고평高平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북한의 군주 유숭이 겨우 목숨만 건진 채 근거지인 진양으로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승리를 거둔 시영은 패하고 달아났던 (아군의)오른쪽 부대의 장교 70여명을 정렬시키고 그 자리에서 70여 명의 목을 하나도 남김없이 베어 버렸다. 동시에 조광윤(고평전투에서 새로 오른쪽 부대로 나서서 열세를 만회)을 비롯해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었다. 이때부터 군대의 기풍이 새로워져 장교들도 훈련에 정진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풍도의 체면은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오대의 50여 년 동안에 천하의 대세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삼국지연의의 첫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
“천하의 대세가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으면, 반드시 통일된다.”
이처럼 천하가 분열되던 기세도 극에 이르자, 이번에는 다시 통일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대 시대에서 왕위를 잇는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이전 천자의 금군 위에 새로운 천자의 친위군이 증강되었다. 이에 따라 예전과는 다른 금군이 조직되었고, 그때마다 다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천자 밑에는 정예 군사들만이 남게 되었다.
이에 반해 지방의 군벌이 지배하는 영역은 점점 줄어들어, 그들이 중앙에 대해 저항하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오대의 혼란도 50여 년 동안 계속되자, 이제는 조금씩 재통일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도는 그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풍도도 이제 구시대가 남긴 인물이었던 것이다.
태조의 장례를 치르는 사신으로 정주鄭洲에 부임한 풍도는 아마 그곳에서 고평 싸움의 승리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풍도는 이미 나이가 많았던 데다 여행의 피로까지 겹쳐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라의 모든 힘을 북한과의 전투에 쏟고 있던 때라서, 풍도가 정주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의식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곳에서 의식을 끝낸 풍도는 신주를 모시고 개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종묘에 태조의 신주를 올리는 제사도 마치지 못한 채, 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고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세종 시영은 군비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의 건장한 병사를 선발해서 후한 대우를 해 주며 금군에 편입시켰다.
국력이 더욱 강화되자 세종은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경제 중심지인 회남淮南 해안의 소금으로 눈을 돌렸다. 이 기회에 수군까지 정비하려는 주도면밀한 채비를 갖춘 후주군이 한꺼번에 침입하자, 이 무렵에 이미 국력이 쇠약해져 있던 남당은 단번에 양자강 이북의 중요한 영토를 모조리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 승리로 후주는 중국 남쪽의 최대 강국인 남당을 거느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금 공급을 독점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위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어서 후주는 동정호洞庭湖를 기준으로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에 각기 독립 정권을 세우고 있던 형남荊南의 고高씨나 호남의 마馬씨의 요충지까지 제압했다. 이 무렵부터 남북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출정해 위세를 떨친 세종은 방향을 바꿔, 북쪽의 거란에 대해서도 반격을 개시했다. 이것은 상당한 자신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행동의 배경에는 그 무렵의 국제 정세가 후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된 점도 있었다. 거란은 내부에서 여러 차례 정변이 일어나, 외부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세종이 이끄는 정예병은 거란 영토에 편입되어 있던 연운 16주로 공격의 선봉을 돌렸다.
그는 우선 연운 16주 가운데서 남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부분인 막주莫州와 영주瀛州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북쪽으로 진격하려고 했을 때, 불행히도 그의 가슴에 악성 종기가 돋은 사실이 발견되었다. 수도로 돌아온 시영은 곧이어 사망하고 말았다. 959년의 일이었다.
세종을 수행하면서 계속해서 수훈을 세우던 친위군의 대장 조광윤이 이듬해 천자로 반들어져 천하 통일을 실현시켰다. 그가 바로 송나라의 태조이다. 일본에서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눈앞에 두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세종 시영을 오다 노부나가에,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유하기도 한다.
풍도가 죽었을 때, 그가 태어난 고향인 영주의 경성현은 연운 16주의 하나로 요나라 경계 안에 들어가 있었다. 세종이 영주를 수복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의 일이었다.
아마도 풍도가 죽은 다음에 그를 매장할 때까지, 관에 넣어 안치해 두는 빈殯의 상태로 몇 년 동안 유해를 가지고 있다가, 영주가 수복된 다음에야 고향 묘지에 묻었을 것이다.
첫댓글 커헉...너무 길어요. 방학 때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