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도를 위한 바울의 기도(2)
엡3:14-21
본문은 바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한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1장(1:15-23)과 3장(3:14-21) 두 번에 걸쳐 바울의 기도문이 등장합니다.
본문의 기도는 에베소서의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들어가는 통로의 역할을 합니다.
1~3장은 주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말씀을 담고 있다면, 4장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주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을 담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을 다루는 후반부의 삶을 위해서는 사람의 능력이나 계획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은 크게 < 세 부분으로 구성 > 되어 있습니다.
14~15절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밝히며, 16~19절은 그가 간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20~21절은 기도를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맺고 있습니다.
첫째. 무릎을 꿇고 비노니(14-15절) : 기도의 대상
14-15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본문은 '이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이러므로'는 앞서 3장 1절에서의 '이러므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바울은 2장 20-22절까지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함께 지어져간다고 증거했는데,
이제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항상 사용하였던 표현이며,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다를 수 있지만 성경에서 이렇게 기도에 등장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무엇보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하나님과 우리가 이런 관계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엡 2:2),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엡 2:3).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셔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5).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엡 2:19). 기업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엡 3:6).
갈라디아서에서는 입양된 자녀로서 우리의 권리를 이렇게 말합니다.
갈4: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나아갑니다.
그래서 3:12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아들이기에 두려움과 떨림이 아니라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십니다.
하늘이든 땅이든, 어디에 있는 누구든, 모두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을 창조하셨고 통치하는 권세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각 족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 된 모든 교회를 뜻합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권속)이라고 증거했었습니다.(엡 2:19).
즉,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란 하늘에서 이미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과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포함해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어느 곳에 살든지, 그 신분이 무엇이든,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부하든 가난하든, 어떤 피부 색깔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한 아버지의 자녀이며, 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차별이 없으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하며, 더욱 하나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무릎을 꿇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엘리야, 솔로몬(왕상8:52), 다니엘(단6:10),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이 표현을 통해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간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둘째, 구하노라(16-19절): 기도의 내용
■ 기도1) 속 사람의 강건케 해달라고 기도
16-17a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바울은 먼저 성령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올곧게 세워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육신이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새롭게 살아가는 속사람이 강건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여주시기를 구합니다.
“속사람”이라 하면 날로 낡고 썩어가는 “겉사람”과는 대조되는 말이지요. 우리의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어떻게 속사람이 강건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세상의 유혹과 고난, 핍박 속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질 때 세상의 어떤 유혹과 핍박, 어려움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드디어 담대히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상황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사람이 성령으로 강건해지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은 사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것은 바로 성령에 의한 것이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실 때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함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믿는 자의 마음에 이미 그리스도는 계시지요. 하지만 그분이 진짜, 제대로, 계신가하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는 편안히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연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즉 “거주하시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집을 예로 들면)
내가 사는 집에 그리스도께서 세를 들어 사시는 집은 어떨까? 여전히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원하는 모습이 조금씩은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그 집은 누가봐도 박성후의 집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눈치를 보며 불편하게 약간의 존재감만 드러낼 뿐일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내 집을 그리스도께서 사서 주인으로 계시고 내가 그 집에서 살고 있다면 어떨까? 여전히 나와 그리스도가 한 집에 살고 있지만, 그 집은 그리스도의 집입니다.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채워지고 가꿔진 집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는 간구를 할 때, '거주하다'라는 의미의 '카토이케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나그네가 하룻밤 묵어가는 것이 아닌, 자기 집에 있는 주인의 거처를 명확하게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안주)
‘거주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항상 내 마음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거주하여 주시기를, 그래서 우리를 통제하고 주관하고 강건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거주하시게 하는게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 대답을 엡3;17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계속해서 내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인되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께서 내 마음에 계신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쩌다가 잠시 잠깐 내 마음에 계신 것이 아니라 늘 내 마음에 상주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예수의 내주(內住)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태, 즉 내주(內住)의 상태에 대하여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을 골로새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골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속사람의 강건함을 구하며 노력해야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고, 무엇이든 다 내 마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강건함에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듯, 영적인 강건함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도 않고, 말씀을 가까이 하지도 않으면서, 영적인 나약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잘 먹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왜 나는 키가 크지 않고 힘이 약하냐고 불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하지요. 끊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더 많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집 성전으로 가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특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렇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즉, 하나님의 풍성한 능력 가운데 그저 얼마를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만큼, 풍성하게 주시기를 구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하는 동기가 있지요
바울은 계속해서 그렇게 노력할 수 있는 동기를 위해 기도하지요. 동기 없이 하는 일은 절대 오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강건함을 위한 노력의 동기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 기도2)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가운데 든든히 서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17b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뿌리가 박힌다는 것은 주님과의 사랑과 관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내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시는 것 그래서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에 기초가 된 삶을 간구하며, 농업의 비유와 건축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두 비유는 다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굳게 뿌리가 박히는 것의 중요성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 세상 통치자에 관해 말한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이사야 40: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뿌리 박지 않은 것의 위험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대조적으로, 바울은 성도가 그들의 뿌리를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에 깊게 박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의 삶의 터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굳어지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이 비유 또한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마 7:24)를 말씀하셨던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무의 뿌리와 집의 터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게 뿌리내리고, 굳건한지 평소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련의 폭풍우가 올 때, 사랑 안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해집니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힌 자(3:1) 되었고, 여러 환난을 당하였으나 자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중심에 굳건하였고 삶의 초석이 되었기에 사랑 안에서 삶을 세워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 기도3)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울을 통해 충분히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님의 사랑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의 무한한 너비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성도를 세상에서 강건하게 지키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지식을 뛰어 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넓게, 더 길게, 더 높게, 더 깊이 그 사랑을 깨달아 알수록 우리는 더욱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기도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만큼 그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19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란 온전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이 모든 것들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의 수준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달라는 바울의 기도가 담대함을 넘어 무모해 보입니다. 여전히 죄악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충만하신 상태를 꿈꾸며, 연약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며, 비록 여전히 죄악 속에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수준이 얼마나 온전한지를 보여줍니다.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언젠가 영화로운 순간이 다가오면 하나님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게 되겠지만,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충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 완전한 충만함은 아니지만 이미 시작된 충만의 단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해져가야 하며,
우리의 인격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더욱 하나님의 충만하심 안에서 온전해져야 합니다.
바울은 결코 이것이 에베소교회의 성도들 스스로의 힘으로나, 바울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굳건하게 하시며,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20-21절) : 기도의 확신과 찬양
바울은 확신가운데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20-21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그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구한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 역시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능력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도 바울은 걱정하지 않지요. 왜요?
하나님은 심지어 구하지 못하고 생각만 한 것까지도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상황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으십시다.
우리는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에 모든 것을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구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영적으로 강건해 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일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영적으로 자라간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대대로 영원무궁하게 영광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요.
우리가 생각하고 기도했던 것보다 더 넘치도록 이루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