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덕 감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가 1989년 만든 데뷔작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인다.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춘사영화상 신인감독상과 영평상 신인감독상을 받은 이 영화는 사실 서울 관객 3만명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도 내 머리 속에는 대단한 흥행작으로 기억되어 있다. 왜 그럴까? 같은 이름의 소설이 26만부가 넘게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랫동안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황규덕이 저자로 된 그 소설은 다른 사람이 썼다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시나리오는 자신이 썼지만 출판사에 판권을 팔았다는 것이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수익금은 전혀 받지 못했다. 하와이 영화제 출품하기 위해 프린트 만들 돈이 필요했고 판권을 팔아 3백만원을 받아서 준비를 했다. [꼴찌...]는 그 외에도 벵쿠버, 홍콩, 환태평양 영화제 등에 출품되었다.
황규덕이 영화판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에게 연락을 했다. 15년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프랑스에 이민 가려고 했다는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서울사대 독어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4학년 12월에 처음으로 영화 동아리에 가입했고, 방위 제대를 한 후 영화아카데미 1기로 영화공부를 시작한다. 지금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유지나 김소영 그리고 김의석 장형수 오병철 임종재 박종원 감독들이 동기다.
[대학 1학년 때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그룹사운드였다. 엘리스 쿠퍼에서 레드 제플린까지. 명동에 고고장이 있었다. [에버그린]이라고. 매일 30분씩 [솔저 오브 포춘] 같은 음악을 연주했다.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외인부대들이었지만 우리는 스스로 프로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음악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학교 다니다 보니까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그는 70년대 말 유신시절, 데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행정고시를 준비하다가 서울사대 학보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거기가 운동권 소굴이었다. 심재철과 유시민이 들락거리던 방이었다. 박통이 죽으면서 학도호국단이 학생위로 바뀔 때 그는 주도적 역할을 하는 멤버가 되어 있었다. 80년 5월에는 도망을 다녔다. 광주가 터지자 마르쿠제 같은 사회과학 서적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예비 줄행랑을 놓았다. 지금은 교보문고에서도 살 수 있는 막스의 [자본론]이 가방 속에만 들어 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당하던 시절이었다. 그해 10월 다시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음악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학생운동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5월의 충격 이후 학생운동은 현실과 거리를 두면 안 된다는 [존재의 사유속성]에 의해 노동현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대중문화라는 것을 바꿔보겠다고 생각했다.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대중들에게 엄청나게 비판을 받던 시절이어서 대중문화를 통해 대중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뒷골목의 사생아처럼 버려져 있는 대중문화가 무엇일까 살펴보았더니, 영화가 있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이었다. 그는 대학 4학년 12월, 학교에 있는 영화서클 [얄라성]의 문을 두드린다. 지금 시네마서비스 전무로 있는 김인수가 그 당시 2학년이었다. 그가 신입부원이 되겠다고 하자 황당해 했다. 선배인 박광수 감독이 없었으면 영화 서클 가입이 불가능했다.
그해 겨울 그는 제작 워크숍에서 첫 단편영화 연출을 맡았다. 8미리 필름으로 찍은 40분짜리 [전야제]가 그것이다. 그리고 대학 졸업하고 충무로 연출부로 나약하게 들어가서 현실 타협하지 말고 새로운 영화운동을 하자고 해서 서울영화집단을 만들었다. 박광수 김홍준 송능한 홍기선 김의석 전양준 등이 멤버였다. 방위 복무한 후에는 영화 아카데미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임권택 감독이 [티켓](86년)[연산일기](87년)를 만들던 시절 연출부에서 일했다.
그의 데뷔작 [꼴찌..]는 스스로 설립한 [물결]이란 영화사에서 만들었다. 그러니까 독립영화다. 충무로 토착자본의 도움 없이, 요즘처럼 투자사의 펀딩 없이 직접 기획하고 각본 쓰고 감독했다. 학생들 이야기여서 원래 여름방학에 개봉하려던 이 영화는 시기를 놓쳐 89년 추석에 개봉했다.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다.
SBS 개국 당시 그는 외주 제작으로 [제 3극장]을 연출했다. 그러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문화적으로 조악하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태어났다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아래서 신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적으로 풍족한데서 살고 싶었다. 그는 90년대 초 프랑스로 갔다. 거기서 4년간 살았다.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이민을 가려고 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행복했다. 그런데 결국, 이곳은 내 땅이 아니다. 내가 남의 땅 구경하는 것뿐이지, 내가 참여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귀국했다. 파리 있는 동안 홍세화씨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펀딩을 받지 못했다. [[닥터봉]같은 웃기는 짜장면 같은 영화들이 날개 치던 시절이어서 심각한 영화는 발 딛을 곳이 없었다.]
귀국한 그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영화아카데미 주임교수로 일했다. 그리고 싸이더스에서 차승재 대표와 동양과 서양의 신화가 부딪치는 [N으로부터]라는 영화를 은밀하게 기획했다. 외국 배우를 써서 외국에서 올 로케로 찍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화산고][무사] 등 모험적인 싸이더스의 영화들이 성공하지 못하자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그리고 [철수, 영희]를 기획했다. 원래 젊은 감독 30명이 디지털로 영화를 찍어 매년 10편씩 완성시킨다는 NSN(뉴 스튜디오 네트워크)로 기획된 작품이었지만 기획자인 박철수 필름과 결별하고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자금을 모아서 찍었다. 데뷔작처럼 [철수, 영희] 역시 독립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 영화가 부럽다. 자기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 [철수, 영희] 만들면서 투자사들로부터 펀딩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거절당했다. 지금 큰 노름판이 벌어졌는데 너 같은 송사리는 빠져라, 이거였다.]
순제작비 2억원, 촬영회수 23번으로 완성시킨 [철수, 영희]는 1월 7일 전국 10개관에서 개봉한다. 20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국 530개 스크린에서 상영되었었다. 그러나 황규덕 감독과의 인터뷰가 있었던 다음 날, 12월 22일 첫 기자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계속 소리 내어 웃다가 마지막에는 눈물을 훔쳤다. 거대 블록버스터보다 [철수, 영희]가 훨씬 의미 있고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준비해서 찍는 데까지는 자신이 있다. 자신이 없는 것은 포장을 해서 팔아먹는 것이다. 요즘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가 24억, 포장비가 12억, 평균 36억 정도 되어야 영화를 찍는데, 투자자들의 입김이 세어지면서 영화가 하향평준화가 되고 있다. 영화만의 독특한 개성이나 질감보다는 교과서식 영화가 양산되고 있다. 너무 답답하다. 많은 감독들이 야심 찬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의 개성을 희생하고 있다. 영화창조자로서의 감독이라는 존재가 배우에게, 기획자에게, 펀딩하는 사람에게 밀리는 현상이 안타깝다. 그럴 바에는 적은 예산으로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이 좋다. [철수, 영희]도 자가용을 팔고 여기 저기 돈을 빌려 만들었다. 난 그런 과정에서 느끼는 열기가 좋다. 배수진을 치고 싸움하는 것이 좋다.]
[철수, 영희]는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한국 어린이의 대표 이름 철수와 영희를 중심으로 한 성장영화, 가족영화다. 대전 대덕 초등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해서 철수 역의 박태영과 한 학급 30명을 뽑았고 그 학교에서 영화 촬영을 했다. 여주인공 영희 역의 전하은과 조연급인 유리 역의 박송이를 제외하고 순수한 아마추어 연기자들로 학급이 구성되었다. 특히 박태영은 스텝들 사이에서 [리틀 송강호]로 불렸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안다. 뛰어난 아역 연기자가 탄생했다.
[앞으로도 저예산 디지털 작업을 계속 하고 싶다. 후배들도 디지털 시스템에서 영화 만들 수 있는 토양을 구축하고 싶다. 갈수록 필름은 사라지고 디지털 작업이 일반화 될 것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보면서 저런 영화를 왜 꼭 필름으로 찍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철수, 영희]를 끝내고 디지털 파일을 필름으로 옮기는 키네코 작업은 당연히 일본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시사실에서 한국 업체의 테스트 화면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외국에 갈 필요도 없었다.]
황규덕 감독의 다음 작품은 한국전쟁에서 가장 비극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노근리 사건]이다. 연극 [칠수와 만수]의 연출자인 이상우씨가 시나리오를 거의 끝냈으며 2005년 여름 촬영 들어가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졌다.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역사 우리 민족의 아픔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대충 만들어서는 개박살 난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슬픈 죽음을 얼마만큼 치열하게 담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라고 그는 말했지만 나는 한국 영화사가 기억하는 걸작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