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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 청계산 산행 및 사찰순례 ④ 京畿 城南 淸溪山 山行 及 寺刹巡禮 四
- 청계산 청계사(淸溪山 淸溪寺)를 찾아서 ① -
절고개능선 전망대에서 청계사에 이르는 구간은 약 900m로 청계사 전 150m를 제하면 그 구간은 경사가 급합니다. 오후 1시 31분 전망대에서 청계사로 향하여 청계사에 도착했을 때는 1시 56분이었으니 25분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내려온 셈입니다. 내려오니 바 로 적멸에 드신 와불상이 맞이하시네요. 여기가 바로 청계사입니다.
능선을 내려오니 여기는 의왕시에 속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뒤로 왔으니 앞은 어떻게 되 었는지 모릅니다. 왔던 길을 다시 넘어가야 하기에 앞의 모습은 담지 못했습니다. 청계 사는 우담바라가 핀 도량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바는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 합니다. 얼마나 청정하게 도량을 가꾸어 시민의 안락처가 되고 귀의처가 되는 지가 중요 하다고 생각됩니다.
특이하게도 자갈돌로 조성한 와불(臥佛)입니다.
고개를 내려오면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와불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보 니 조그마한 자갈돌로 조성한 와불입니다.
청계사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광장처럼 넓은 대지가 있고 여기에 거대한 와불상(臥佛像)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자그마한 자갈들을 모아서 조성한 이 와불상은 길이 15m, 높이 2m로 1997년 주지 지명(之鳴) 스님이 조성 1999년 완공 봉안했다고 합니다.
와불은 석가모니불께서 쿠시나가라 사라쌍수(娑羅雙樹)에서 대열반(大涅槃)을 보일실 때 머리는 북쪽으로 향하고 눈은 서쪽을 바라보시고 두 발은 곧게 펴서 표개신 다음 오른손을 머리에 대고 열반을 보이셨는데, 그 장엄한 열반상(涅槃相)을 열반상(涅槃像)으로 조성하 신 것입니다. 다만 이곳의 산의 형태가 북쪽이 산인 까닭에 머리는 서쪽으로 향하고 남쪽 을 바라보는 형태가 된 것은 아쉽습니다.
적멸상을 보이신 부처님, 불안(佛顔)이 평화롭고 고요해 보입니다.
외불이 모셔진 청계사는 어떤 절일까요?
청계사는 청계산 남쪽 태봉 기슭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 11번지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 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입니다.
《전통사찰총서》와 「청계사 홈페이지」를 통해서 역사를 알아 봅니다.
청계사의 정확한 창건 연도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봉은본말지(奉恩本末 誌)》에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구체적 근거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찰 경내에 있는 석등과 부도 일부가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어 신라시대의 창건설을 뒤받침한다고 합니다.
청계사에 관련된 기록은 대체로 고려 후기가 되면서 집중적으로 보이는데, 충렬왕 10년 (1284) 당대의 세력가였던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인규(趙仁規, 1227~1308)거사가 막대한 사재를 들여 중창하면서 청계사가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청계사의 역사에 있어서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청계사의 중요한 후원자 였던 조인규 및 그의 후손들을 빼놓고 말 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조인규거사가 1284년 청계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는데, 그는 청계사를 중창하면서 사찰 아래쪽에 별당을 짓고 거주할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는 이처 럼 원찰(願刹)을 지어 놓고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였습니다. 이것이 때 로 부정적 측면을 빚기도 했지만 불교 융성의 큰 뒷받침이 되기도 했습니다.
청계사와 조인규거사는 그 중요성이 크므로 자세히 알아봅니다.
조인규는 평양 상원(祥原) 지역의 미미한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청년 시절 역시 그다지 뛰 어난 행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 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43세 때 세자의 신분이었던 충렬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오 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인규는 몽고어 통역관을 뽑는 양성 시험에 합격한 후 상당한 노력으로 몽골어에 정통하였다고 합니다.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 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자 조인규는 공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공주의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충렬왕이 즉위하니 조인규 의 지위는 점차 향상되었고, 원나라 세조로부터도 신임을 얻어 원나라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습니다.
불족(佛足) 부분
그는 1292년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1298년 사위인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사도시중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 가 되어 개혁 정책을 크게 뒷받침하여 주었으나,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罽國大長公主) 가 조비(趙妃)를 질투하여 일어난 조비무고사건으로 왕이 7개월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조인규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安西)지역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6년 후인 1305년 방면되어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습니다. 1307년에는 원나라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인규도 다시 자의도첨의사사 평 양군(恣議都僉議司事平壞君)에 봉해지면서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 습니다. 말년에 누린 그의 권세는 곧 그의 가문이 튼튼한 세력을 구축해 가는데 밑받침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모두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인규가 1284년, 청계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후 청계사 의 역사에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조인 규의 정치적 활동이 절정에 달해 있을 정도로 막대한 권세를 누리던 때였으며, 그의 권세 가 그대로 사찰 중건에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사찰 지원에 관심을 보이고 영당(影 堂) 관리를 해왔음을 볼 때, 조인규가 나타내었던 청계사에 대한 열정은 쉽게 상상할 수 있 는 부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청계사가 오늘까지 그 전통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데 는 조인규와 그의 후손들에 의해 조성되었던 물질적 기반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것입니 다.
앞서 알아본 그의 증손 조견(趙狷)이 청계산에서 은거했던 것도 이와 깊은 인연이 뒤받침 하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와불 앞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후 청계사는 조인규의 후손들이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는데 연산군이 도성내의 사찰에 대한 폐쇄령이 내려졌을 때는 봉은사를 대신하여 선종본찰(禪宗本刹)의 기능을 담당하는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場)이 되기도 했고, 광해군 때는 사찰 소속의 전답과 노비를 몰수 당하기도 하고 궨세가들에게 수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숙종 15년(1689)에 사찰 전체가 소실되자 성희(性熙) 스님에 의해 사찰이 중건되었고 조인규의 11대손인 조신(趙新)과 조 운(趙橒)이 <청계사사적비>를 찬술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고종 13년(1876)에 화재가 발 생하여 건물이 소실되자 고종 16년(1879) 주지 은곡대사(隱谷大師)가 불에 탄 사찰을 중건 했다고 합니다.
그 후 1911년, 일제가 30본사제도를 제정할 때 봉은사의 말사로 소속되었는데, 1965년부 터는 용주사의 말사로 소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예불을 올리시는 미소님
청계사는 근대에 와서 경허(鏡虛) 선사가 출가 득도하였고, 만공(滿空) 선사가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리기도 하였습니다. 1955년 아연 스님과 이후 월덕, 탄성 스님 등의 중창불사 로 현재의 사찰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청계사는 지난 2001년 종상 스님이 주지로 부임해오면서 사격을 일신하고 진입로 불사를 마무리해 대찰의 면모를 갖췄고, 현재는 성행스님이 주지를 맡아 경허,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부도를 조성하는 등 회주 종상 스님의 지도 아래 민족 문화사적 위상제고를 위하여 경허 스님등 청계사와 인연을 가졌던 한국불교의 빛나는 고승 4분의 부도탑 조성을 위하 여 선종 종찰로서 명실상부한 「한국 선불교 중흥 본찰」로서 거듭나게 되어 호국안민은 물론 그 위업을 길이 계승하고 후손들의 정신교육의 산실로서 지역사회의 역사문화교육의 산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산수산님도 예를 올리고 계십니다.
와불 옆 축대에 소형불상과 동자승, 하루방 등이 즐비하네요.
이는 분명 집안에 불상을 모시면 안 된다고 해서 그리한 것 같네요. 집안에 호신불로 모 셔도 됩니다. 다만 늘 정갈한 마음으로 예경해야죠. 이것이 부담이 되어서 그런가요? ^^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 가장 뒤쪽 중심에 자리한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기단부는 최근에 쌓은 것이지만 중수할 때 대들보에서 '경자 삼년 삼월'이라는 글자가 확 인되어 광무4년(1900)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極樂堂前滿月容 극락장전만월용 서방정토 극락세계 만월같은 아미타불 玉毫金色照虛空 옥호금색조허공 금색신과 옥호광명 허공세계 비추시네. 若人一念稱名號 약인일념칭명호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 부르오면 頃刻圓成無量功 경각원성무량공 찰나간에 무량공덕 원만하게 이루리라.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
서방정토 극락세계 주인이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존으로 하여 좌보처 관세음보살 (觀 世音菩薩) 우보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한 삼존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계사 홈피의 글에 의하면,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은 한 작가의 솜씨로 보이지 만, 관음보살상은 양식에서 조금 차이를 나타내며 조성 연대도 다소 올라가는 특징을 보여 준다. 이 삼존불좌상은 사각형의 평면적 얼굴에 가는 눈, 작은 입과 코, 넓은 귀 등을 오려 붙인 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하체와 상체, 그리고 머리부분에서도 나발(螺髮)의 모습 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어 다른 불상보다는 다소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조선 후기의 불 상 가운데 보기 드문 정제미를 표현한 수작이라고 평가된다.』고 하였습니다.
법당에서 스님께서 기도를 하고 계셔서 살짝 예배만 드리고 물러나와 밖에서 사진에 담았 더니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신중탱화(神衆幀畵)
쳥계사 홈피의 글을 옮겨 봅니다.
『극락보전 후불탱보다 다소 앞선 시기인 1844년(헌종 10)에 그려진 신중탱은 화폭을 2단 으로 구분하여 윗부분은 제석과 범천을 위주로 한 신중의 그림을, 아랫부분은 천룡을 위주 로 한 무장 모습의 신중을 그렸다.
세로 172㎝, 가로 219㎝의 크기로 이전 시대의 것보다 채색이 짙어지고 윤곽선도 뚜렷해 졌으나 그림의 각 형태는 도식화된 느낌을 준다.』
이 신중탱화도 부득이 밖에서 당겨 찍었더니 먼 감이 있습니다. ^^
지장전(地藏殿)
이 지장전은 극락보전과 와불사이에 건축되어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건축되었습니다. 축대에는 십이지신상 중 해신상(亥神像)이 보이네요. 그 리고 비천상(飛天像)의 모습도 보입니다. 축대에 이런 상이 즐비합니다.
지장보살 입상(地藏菩薩立像)
왼손에 명주(明珠)를 들고 계시고 오른손으로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계시네요.
범종각(梵鐘閣)
의왕 청계사 동종(義王 淸溪寺 銅鐘) 보물 제11-7호
종각 앞에 동종에 대한 내력과 동종을 설명한 안내문이 있어 전문을 옮겨 봅니다.
의왕 청계사 동종(義王 淸溪寺 銅鐘)
지정번호 : 국가지정 유형문화재 보물 제11-7호 시 대 : 조선 숙종 27년(1701) 소 재 지 :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 11
『이 종은 원래 청계사에서 만든 것이지만, 서울 봉은사에 이전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제 위치로 돌아왔다. 승려인 사인(思印)이 60세 이후에 경간(明侃), 계일(戒日), 여석(餘釋), 수강(首剛), 귀성(貴性), 임선(任善) 등과 함께 제작한 종으로 전통적인 특징보다는 외래적 요소가 많은 외래 유형의 종이다.
이 종은 중국 종의 특징인 쌍룡(雙龍)의 종을 거는 고리 용뉴(龍鈕)를 가졌다. 이 종은 음 통 대신 공기 구멍을 뚫어 종소리를 조절한 것 같다. 종신은 안으로 오므라들지 않고 밖 으로 다소 벌어졌으며, 표면은 두 줄의 띠 장식대로 종신을 구분하고 있다. 띠 장식대의 상부에는 당초문이 조각된 상대(上帶)와 그 아래 사다리꼴의 유곽(乳郭)과 보살입상을 교 대로 배치하고 있다. 따 장식대의 하부에는 보상화문이 조각된 하대(下帶)가 있고, 그 윗 쪽에 많은 시주자를 적은 명문이 둘려져 있다. 특히 종의 명문에 사당패가 언급되어 있어 조선 후기 사원의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절과 사당패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 당초문(唐草文) : 중국 전래의 덩굴 무늬를 통털어서 일컫는 것으로, 덩굴인 당초는 오래 도록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이 무늬는 '쉬지 않고 살아간다[生生不息]'는 의미 를 가지고 있다.
* 유 곽(乳 廓) : 종의 윗 부분에 붙어 있는 사각형의 무늬 부분으로 유두(乳頭)를 둘러싸 고 있다.』
그러나 위의 당초문(唐草文)과 유곽(乳廓)이라는 설명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어서 적어 봅 니다. 그 동안 우리는 미소님께서 올려 주신 불교미술에 대하여 공부해 왔는데 주의 깊게 보신 분들은 저 설명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잘못된 설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강우방 교수의 글을 통해 우리는 바른 이해없이 뜻도 모 른 채 정해진 불교미술 용어에 대하여 공부했고 바른 의미를 공부해 왔습니다.
저 당초문이라는 것은 당초문이 아니고 영기문(靈氣文)으로 부처님의 법음(法音)이 영기 (靈氣)가 뻗어나가 듯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넣은 문양이며, 유곽(乳廓)이라는 것도 유 곽이 아니라 보주곽(寶珠廓)이라야 맞을 것입니다. 보주곽의 모양은 유두(乳頭)가 아니라 연봉(蓮봉)인데, 연봉은 곧 보주(寶珠)를 뜻합니다. 보주(寶珠)는 곧 부처님의 화생(化生) 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저 영기문(靈氣文)이라 것도 부처님의 몸에서 발산되는 서기광명 (瑞氣光明)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종에 새겨진 문양은 부처님의 법음(法音)이 온 누리 에 퍼지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새겼을 것입니다.
요사채
오래된 연륜이 묻어나는 석등ㆍ부도편
이 석등ㆍ부도편은 석등과 부도가 혼재되어 있는데 이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청계사의 역사에 대해서 고려 이전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지만 신라시대 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이 부도 파편의 일부가 신라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 어 신라 때 창건설을 신빙성있게 뒷받침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사채 옆의 지장보살상
1993년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지장상은 지장전 금동 지장보살입상과 함께 청계사의 지 장신앙을 느낄 수 있는 성보문화재입니다. 나무지장보살마하살 ()()()
지장보살 석상 앞에 이 황우상(黃牛像)은?
지붕 위의 까치 한 마리
극락보전과 요사채 사이의 계단에 앉아 있는 익살스런 원숭이상
축대 좌측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좌우로 폭 넓게 모셔져 있습니다.
축대 좌측에는 자신(子神 쥐), 축신(丑神 소), 인신(寅神 범), 묘신(卯神 토끼), 사신(巳神 뱀) 등 십이지신(十二支神) 중 육신(六神)이 석상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이들은 방위신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십이지신으로 모실 때는 몸은 장군 스타일이고 머리만 짐승의 모 습을 하고 지물(持物) 들고 있는데 여기는 그냥 동물모양을 하고 있네요. ^^
가운데는 부처님의 일대기인 팔상도(八相圖)가 부조되어 있습니다.
우측엔 나머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모셔져 있습니다.
우측엔 오신(午神 말). 미신(未神. 양), 신신(申神 원숭이), 유신(酉神 닭), 술신(戌神 개), 해신(亥神. 돼지) 등이 차례로 있습니다.
이 십이지신상 밑으로는 수많은 비천상이 양각되어 있어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공력과 정성으로 이루어진 도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천상에 대하여서는 청계사 2부에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 다음은 청계사를 찾아서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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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갈로 만든 와불이 특이하게 보였답니다. 미소는 누굴를 위하여 _()_
글씨, 그 마음 누가 알것소 .
와불이 모셔진 용인정사는 목불이고, 부여 미암사는 와불 속이 법당이었습니다. 공주 성곡사에 거대한 와불이 모셔져 있는데 자갈로 모자이크한 와불은 처음 봅니다. 누구를 위하여 와불전에 엎드렸을까요 자리이타(自利利他)... _()_
짧은 시간에 많은걸 담으셨내요. 감사 합니다....나무묘법연화경()()()
많이 담지는 못했습니다. 전체를 생각하다보니 세세한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카메라를 들어서 그런 부분을 잡으시면 좋을 텐데... 법우님들의 동정 등을... _()_
경허선사,, 만공선사,, 금오선사,, 월산선사 많이 들어본 분들 ()()(). 만공선사는 수덕사에도 명성이 되단 하신 스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2 년 4 월경 부터 가긴 하였으나, 4 호선 인덕원역 에서 청계사 오는 버스가 있으며. 남으로 하산 하시면 안양시 인덕원 성남시 판교동을 연결 하는 도로 와 만나고, 외곽순환고속도로 학의 J C 부근이며, 백운호수 가 가까운 청계사,,.. _()()()_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미타불 ()()(). 부처님 일대기 팔상도 잘 보았 습니다. 미소님 예불은 일품 입니다.
전각에 들어서면 시원하고, 부처님 품안이 편안한듯 ,,,. 자주 들르던 곳,
선사들의 발거음이 어디든 미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 경허 선사가 9세에 청계사에 동진출가하셨지만 본격적인 수행은 14세인 동학사부터라고 합니다. 청계사는 발심한 출가도량으로 의미가 크다 할 것 같네요. 날 청계산에 다시 가게 된다면 일주문을 비롯한 그 다른 부분도 보고 싶네요. _()_
자갈로 훌륭한 와불을 만들었군요. 황소상 같은데 저기에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
아마도 자갈을 붙였겠지요 참으로 솜씨도 좋습니다. 황소상은 왜 세웠을까요 이 절을 중창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서 세워 놓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옛날에는 물건 이동수단으로 황소의 역할이 컸으니까요. _()_
상세한 설명과 함께 청계사 순례기 1편 잘 봤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청계사를 통해서 조인규거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허스님의 동진출가처임도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_()_
지붕위의 까치까지 놓치지 않고 잘 담으셨네요... 잘 보았습니다..^^ _()_
까치를 만나면 길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깍깍깍(覺覺覺) 까치소리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_()_
자갈로 붙인 부처님 금빛 치장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셨으면 더 멋있었지 않았나 싶었습니다._()_
자갈로도 저 고요하고 온화한 빛을 그대로 살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