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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붉은 모란 주머니』는 제6회 담양송순문학상 수상작 〈연계정 대숲소리〉를 새롭게 고친 작품이다. 16세기 선조 임금의 경영관이었던 미암 유희춘과 그의 부인 송덕봉, 첩 방굿덕의 이야기를 각각의 시점으로 그려냈다. 소설에는 당대의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유희춘의 관직생활과 일상사가 부인 송덕봉과 주고받은 시와 편지로 디테일한 재미를 선사한다. 작가의 빛나는 상상력, 방굿덕의 편지에는 사랑과 욕망의 절절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가감없이 표현되었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네 딸을 기필코 양인으로 만들려는 어머니 방굿덕의 권세욕과 부귀영화를 향한 꿈이 ‘붉은 모란 주머니’로 상징된다. 이와 더불어, 조선의 여성 시인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주장했던 송덕봉의 생애 또한, 가을날 피는 노란 국화처럼 서늘하게 아름답다. 16세기 조선을 살았던 이들 두 여성, 각자의 삶은 진솔하면서도 열정적이다. 그럼에도 역시, 개성적인 인물은 방굿덕. 경제적 독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여성상은 이 소설의 매력을 더한다. 이 소설이 현대성을 갖추게 된 중요한 지점이다.
작가는 당시 붕당정치를 고민했던 유희춘의 정치 철학과 백성을 걱정하는 애민 사상도 소설 곳곳에 그려 넣었다. 정치와 학문에 대한 근심으로 피와 살이 마르던 학자 유희춘의 고통은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김현주
199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1998년 계간지 『문학과 사회』로 등단했다.
창작집 『물속의 정원사』와 산문집 『네 번째 우려낸 찻물』이 있다.
제10회 광일문학상, 제6회 담양송순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
어느 겨울, 우연히 『미암일기』를 발견했다. 희열을 느꼈다. 눈 내리는 밤, 틈틈이 미암 선생의 일기를 읽는 일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담양 대덕을 가끔 찾았다. 연계정 뒤로는 대숲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 맑은 시내가 흐르고, 초록 언덕에는 노랑 상사화가 드문드문 피어 아련했다. 그 풍경을 보고 떠올린 첫 구상의 주된 인물은 송덕봉이었다. 담양송순문학상에 부끄러운 이름을 올렸을 때, 방굿덕을 살리면 더욱 좋겠다는 소설가 문순태 선생님의 귀한 말씀이 숙제처럼 오래 남았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다. 다시 담양을 찾게 되었다. 미암 선생과 덕봉 선생의 쌍봉에는 청명한 하늘 아래 빛나는 햇살이 따뜻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아래,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가난한 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풀이 성글게 돋아있어 쓸쓸했다. 평생, 사랑을 믿었던 여성 방씨의 묘지였다.
해남읍 해리, 바다가 보였던 산마을을 물어물어 찾았다. 높고 푸른 곳 금강산. 미암바위는 눈썹을 가늘게 뜨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곳에서 바다 안개처럼 멀고 아득한 사랑을 했던 굿덕이 말
한다. 기어이 영감마님의 곁에 잠들 것입니다. 이것만은 이룰 수 있겠지요. 기필코 되겠지요. 붉은 모란 방굿덕이 치열하게 살았던 건, 다만 욕망이었을까. 그녀의 행복은 순간순간 꿈을 이루는 과정에 있었다. 불가능은 관념이었을 뿐이다.
함께,
문학을 살고 있는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목차
책 속으로
달빛이 사방에 환했다. 적막한 바다를 휘몰아치는 바람이 뼈
에 사무치게 찼다. 눈바람이 이는 초겨울이었다.
굿덕은 마천령 고개를 넘고 있었다. 춥다고 징징대는 딸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르고 달랬다. 몰아치는 겨울 북풍을 온몸
으로 받으며 무릎이 자꾸 꺾어지는 것을 겨우 추스르면서 걸었
다. 목울대에 가득 울음이 차올랐다.
-이제, 소첩이 떠나야겠지요?
굿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감마님이 서안 위에 내려
놓은 정실부인의 편지를 본 후였다. 편지를 손에 쥔 영감마님의
얼굴은 감격이 벅차오르는 듯 표정이 환했다. 무슨 내용일까, 굿
덕은 앞이 캄캄해 뜻을 캐어 물었다.
-어찌 떠날 생각부터 하는 것이냐?
영감마님이 간곡하게 물었다.
-마님이 오셔서 우리 딸들을 보시면 질색팔색하실 텐데, 그
때 쇤네는 어떡합니까.
-그동안 고생한 네 공이 큰데 무어라 하시겠느냐.
그 말로는 굿덕의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한 가지만 약속해주시어요.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딸 넷은
선산유씨의 핏줄이지요? 제 자식들 속량을 꼭 해주신다면 본가
옆에서 죽은 듯이 살 것입니다. 영감마님이 해배되는 날만 기다
리고 살 것입니다.
굿덕은 그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9p~10p
곱다. 참으로 곱다.
굿덕은 짙은 홍색으로 비단 주머니를 새로 만들어보고 싶었
다. 문득, 여지껏 간직한 붉은 모란 주머니를 생각했다. 아직 버
리지 못한 마님의 것. 낡고 헤진 비단 주머니. 연한 다홍색 비단이
색이 바랬고, 붉은 모란꽃과 한 쌍의 나비 자수는 실이 낡아 군데
군데 풀어져 버렸다. 다만 온전한 것은 끈 두 개에 매달린 녹두알
보다 조금 큰 비취색 옥이었다. 이제 새것을 갖고 싶었다. 붉은 모
란 한 송이를 수놓은 주머니. 둥근 수틀에 비단을 단단히 고정시
킨 다음, 모란꽃을 촘촘히 새길 것이다. 양반댁 마님이 되어.
“무명과 명주는 다르다. 명심해야 할 게야. 이 밑물은 연지로
쓰인단다. 해복이 혼사 때 쓰일 연지 말이야.”
신부가 연지곤지를 찍고 혼인할 때, 친정어머니는 당부한다.
현숙한 부인으로 내조를 잘해야 한다.
“마님, 이제 다 되었사옵니다. 오미자 국물도 준비했으니….”
해복이 다듬이질해서 곱게 펴낸 명주천에 오미자 우린 물을
걸렀다. 홍화 물이 얼마나 곱게 들 것인가. 굿덕은 가슴이 뛰었
다.
-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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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ISBN발행(출시)일자쪽수크기총권수
9791198257222 |
2023년 07월 20일 |
392쪽 |
137 * 201 * 24 mm / 575 g판형알림 |
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