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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윤숙 시집 <버려질 말들 사이를 걷다>, 푸른사상, 2024년 7월.
에네르게이아(energeia)의 시어들
맹문재
1.
봉윤숙 시인은 에네르게이아의 시어들을 통해 인간 가치를 추구하는 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인유나 반어 등의 비유와 상상력을 통해 작품의 구체성과 아울러 환기력을 획득한다. 창조적인 시어의 변주로써 이 세계의 부분과 전체를 연결해 세계 속에 존재하는 그 자신은 물론 공동체의 가치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작품 속의 시어들은 죽어 있는 기계처럼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움직이며 그 역할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교본과 경험을 통해 습득된 기술을 토대로 동일한 종류의 대상들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다.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행위로 디나미스(dynamis)에 해당된다. 또 다른 활동은 이미 주어져 있는 기술을 토대로 하지 않는 창조적인 것이다. 디나미스보다 선행하는 행위로 에네르게이아에 해당된다. 디나미스는 힘뿐만 아니라 잠재성을 의미하므로 에네르게이아와 대립한다. 잠재성과 실재성은 곧 존재론적 가능성과 실제적인 작용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네르게이아를 디나미스보다, 즉 활동을 가능성보다 중요하게 인식했다. 가능성의 실현은 언제나 활동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흄볼트는 디나미스와 에네르게이아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상호 보완적으로 보았다. 모두 언어에 대한 발생적인 본질 규정에 유용한 개념으로 간주했다. 언어 속에서는 아무것도 정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을 동적인 것으로, .모든 행위의 창조적인 힘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에네르게이아는 창조적인 측면에, 디나미스는 이를 통해 발생하는 동적인 측면에 무게를 두고 있다. 언어는 이미 실현된 것일 뿐만 아니라 실현된 것을 능가하는 가능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봉윤숙 시인은 유한한 시어들을 무한하게 사용하는 활동을 보이고 있다. 시어에 대한 다양한 상징과 의미화로써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어들은 창작 과정에서 힘을 발휘한다. 곧 에네르게이아의 활동을 추구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어들은 제한되거나 고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움직여 시 세계의 토대를 이루면서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확장한다. 이와 같은 면에서 봉윤숙 시인의 시어들은 활동성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2.
아침나절 어지럽던 머릿속 이야기들을 쓴다
아니 쓸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이미 붉게 물들었거나 벌레 구멍이 나 있다 분명 백지를 쓸었는데 나뭇잎 잔뜩 떨어진 나무 밑, 빗자루 자국만 가득하다
먼지를 풀풀 내는 징그러운 짐승의 털 같다
책상 위에는 빗방울로 만든 악보가 사막으로 빚은 화분이 생쥐로 만든 종이가 뾰족한 너의 목소리로 부스럭거린다
백지를 쓸고
나무 밑을 쓴다
세상의 구겨지는 종이들 중 깨끗한 백지를 못 보았다
종이를 구기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게 쓴 글자들을 구기는 것이다
귀는 입으로 달려가고 입술은 말 달리듯 고삐를 놓치고 손가락이 둥그러지며 펄럭인다
깨끗해지라고 쓸었을 뿐인데
아, 어지러운 저 획들
나무 밑을 흙바닥을 한참 동안 읽었다
마당을 구길 수는 없으니까
―「쓴다, 쓸다」 전문
위의 작품 화자는 “아침나절 어지럽던 머릿속 이야기들을 쓴다”고, “아니 쓸었다”고 밝히고 있다. 화자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쓸어낸 것은 그 말들이 “이미 붉게 물들었거나 벌레 구멍이 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의 말들이 변색했거나 불량한 상태여서 청소한 것이다.
화자가 머릿속의 이야기들을 쓸어내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분명 백지를 쓸었는데”라고 표현했듯이 그의 생각이 적힌 종이를 쓸어낸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종이에 적힌 글자에 든 원래의 생각은 쓸어낼 수 없기에 화자의 행동은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화자는 “나뭇잎 잔뜩 떨어진 나무 밑, 빗자루 자국만 가득하다”라고 토로한다. “먼지를 풀풀 내는 징그러운 짐승의 털 같다”고 부연까지 한다.
화자의 머릿속에 든 원래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책상 위에” “빗방울로 만든 악보가” 있고, “사막으로 빚은 화분이” 있고, “생쥐로 만든 종이가” 있듯이 자연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자연 세계는 분명 인간의 경험 세계를 넘어선다. “뾰족한 너의 목소리로 부스럭거린다”라는 것이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화자는 백지를 쓸고 난 뒤 더욱 쓸어내기 위해 다시 “나무 밑”을 쓴다. 쓸어낸 데를 완벽하게 소제하려는 것이다. 화자는 그 행동을 통해 “세상의 구겨지는 종이들 중 깨끗한 백지를 못 보았다”고 말한다. “종이를 구기는 것이 아니라/어지럽게 쓴 글자들을 구기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에는 말들이 “귀는 입으로 달려가고 입술은 말 달리듯 고삐를 놓치고 손가락이 둥그러지며 펄럭”일 정도로 지천이다. 말을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들끓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내놓는 말들은 깨끗하거나 건강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붉거나 벌레 구멍이 나 있을 정도로 흠이 있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이 꺼낸 말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인정한다. 자신 역시 욕망의 한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화자는 “깨끗해지라고 쓸었을 뿐인데” 제대로 쓸리지 않아 “아, 어지러운 저 획들”을 다시금 발견하고, “나무 밑을 흙바닥을 한참 동안 읽”는다. 깨끗한 말, 바람직한 말, 생명력을 돋우는 말은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화자는 인간과 대비되는 자연의 힘을 발견하고 “마당을 구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인정하고 시어로 결합하는 것이다. 이렇듯 “쓴다, 쓸다”라는 화자의 인식은 의사소통이나 대상의 표기에 한정되지 않고, 사유와 정신 활동의 영역으로 심화한다. 시어들은 정보를 전달하고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데 함몰되지 않고 에네르게이아의 힘으로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다.
모두들 말의 착지점에서
딱 한 발짝 물러서 있다
아무리 시위를 당겼다 놓아도
딱, 그쯤에서 떨어지고야 마는
한 발짝 바로 앞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후렴을 시작하려는 찰나
간헐적으로 비상구가 보이지만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역설
그 사이를 지친 저녁들의 퇴근과
앞다투는 고층의 창문들과
자신들의 가장 연약한 취약점으로
밥을 벌러 가거나
밥을 먹으러 간다
햇살과 기진맥진해진 바람을 따라
숨을 헐떡이는 와이퍼가
허송세월을 걷어내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도
비겁하거나 난처한 혹은 무신경한
그 경계를 절묘하게 비껴서 있을까
간신히 앞가림을 피한 사람들
돌아보면 아득한 낭떠러지가
각자의 뒤쪽에 있다
한밤에도 말의 색깔들은
제각각 다르다
―「버려진 말들 사이를 걷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모두들 말의 착지점에서/딱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아무리 시위를 당겼다 놓아도/딱, 그쯤에서 떨어지고야 마는/한 발짝 바로 앞”을 주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후렴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찰나/간헐적으로 비상구가 보이지만/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역설”의 상황이 전개된다. 결국 사람들은 후렴을 부르지 못하고, 비상구도 발견하지 못한다.
사람들과 말의 착지점 사이에 “지친 저녁들의 퇴근”이며 “앞다투는 고층의 창문들”이 있다. “자신들의 가장 연약한 취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밥을 벌러 가거나/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도 있다. 화자는 “햇살과 기진맥진해진 바람을 따라/숨을 헐떡이는 와이퍼가/허송세월을 걷어내고 있”는 그 상황을 바라본다. “어쩌면 저렇게도/비겁하거나 난처한 혹은 무신경한/그 경계를 절묘하게 비껴서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시인들의 삶의 모습은 앞다투는 고층의 창문들이며 숨을 헐떡이는 와이퍼에서 보듯이 속도에 시달린다.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기 위해 “연등을 매달았는데 도시”이고 “가로수를 적었는데 트럭”이듯이, “분주한 거리는 목소리가 없고 단어들은 뜻이 없”(「연등」)다. 도서관의 “형광등이 구부러진 등에 핏발을 세”우고, “드르륵하면 뛰어가”는 책들 속에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가득”(「도서관을 걷다」)한 것이다.
화자는 “간신히 앞가림을 피한 사람들/돌아보면 아득한 낭떠러지가/각자의 뒤쪽에 있”는 처지를 안타까워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한 발씩 물러나는 바람에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곧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화자는 그 버려진 말들 사이를 걷는다. 버려진 말들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회피하지 않고 곁에서 동행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에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것이다.
3.
서식지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빌어먹을, 빌어먹고 살고 있는 직장이 떠오른다
서식지 안에는 황금 부서와 한직이 있다 엽록소의 구성, 인사부 뿌리는 지하 3층에 있다 악역만 도맡아 하는 팀장도 있고 밥 대신 욕먹으며 일하는 사원도 있지만 세상이 세상인지라 붉은 머리띠를 두르기도 쉽지 않다
가시에 찔린 곳에 들어찬 찬바람 속엔 상처가 섞여 있고 그 상처를 빼는 것 또한 가시들 덕이지만 그 가시들의 집합을 찔러 와해시키는 보이지 않는 가시들이 또 있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옴니버스식 구성
서식지에도 계층이 있다 정년의 계층에서 떨어지면 다시 낮은 계층이 된다 한 가족이라 얘기하지만 개똥 같은 얘기다 여러분을 뜻을 모아 내 맘대로 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서식지가 생긴다는 것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무형의 구조물들이다
―「서식지」 전문
버려진 말들 사이에 도시인들의 서식지가 있다. 작품의 화자는 보금자리로 만들어 사는 곳인 서식지를 생각할 때마다 “빌어먹을, 빌어먹고 살고 있는 직장”을 떠올린다. 화자가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자아를 실현하는 직장을 남에게 구걸하여 음식을 얻어먹는 곳이라고 폄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식지 안에는 황금 부서와 한직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엽록소의 구성, 인사부 뿌리는 지하 3층에 있”고, “악역만 도맡아 하는 팀장도 있고 밥 대신 욕먹으며 일하는 사원도 있”는 것이다. 또한 서식지에는 계층이 있어 “정년의 계층에서 떨어지면 다시 낮은 계층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화자는 “한 가족이라 얘기하지만 개똥 같”다고 토로한다.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버려진 말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세상이 세상인지라 붉은 머리띠를 두르기도 쉽지 않”기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심이 기울어진 쪽을 내 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홀로라는 말보다 더 쓸쓸한 말”(「편(片)」)을 가슴속에 넣고 있다. “외로운 말을 가진 몸들은 혼자 앓”(「보조침대」)을 수밖에 없지만, 참고 견디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가시에 찔린” “상처가 섞여 있”다. “그 상처를 빼는 것 또한 가시들 덕”이듯이 용기를 낸 사람들이 있고, “그 가시들의 집합을 찔러 와해시키는 보이지 않는 가시들”도 있다. 용기를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서식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서식지가 생긴다는 것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무형의 구조물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개인은 할 말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말을 꺼낸다고 할지라도 수용되기가 어렵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계층은 견고한 것이다.
갑부는 모든 이념 위에 있는 사람
모든 권력을 삼시 세끼로 나눠 먹을 수 있는 미식가
부모 잘 만나 상류층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사람
돈이 돈을 잉태하는 축적의 세습
소원을 비는 주문이 있다
수르 수르 만수르
자본에 비는 주문,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신도 마술사도 램프 요정도 아니고
오로지 자본이다
자본이 자본에게 소원을 빌고
권력이 자본에게 소원을 빌고
자본이 권력에게 소원을 빈다
자본주의는 얼마나 천박하고 폭력적인지
갑부는 갑질과 감세를 서민은 을의 유리지갑
수르 수르 만수르
이 소원을 비는 주문이야말로
끔찍한 유령 자본이다
―「수르 수르 만수르」 부분
위의 작품 화자는 “갑부는 모든 이념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세력을 명쾌하게 진단한다. 자유와 평등 같은 절대적 인간 가치도 물질의 힘을 쥔 사람들에게 굴복될 수밖에 없다. “모든 권력을 삼시 세끼로 나눠 먹을 수 있는 미식가”나 “부모 잘 만나 상류층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사람”은 “돈이 돈을 잉태하는 축적의 세습”을 누린다. 그들은 그 영속성을 위해 “수르 수르 만수르”라고 주문을 외운다.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신도 마술사도 램프 요정도 아니고/오로지 자본이다”라는 진단은 예리하다. 실제로 “자본이 자본에게 소원을 빌” 뿐만 아니라 “권력이 자본에게 소원을” 빈다. 물론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 “자본이 권력에게 소원을” 빌기도 한다. 자본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천박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갑부가 “갑질과 감세를” 하는 바람에 “서민은 을의 유리지갑”이 되고 만다. 갑부가 탄생시킨 “끔찍한 유령 자본”에 서민들은 노예가 되고 목숨까지 잃는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 위 석탄으로 실려가 본 적 있는가
분진을 나르며 굉음을 내는 컨베이어 벨트는 죽음을 운반하지 낙탄이 됐다가 삽이 됐다가 나는 찰리 채플린처럼 시커메져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는 별처럼 아득해지는 눈
스물네 살의 눈빛은 영롱하지 아니 참혹하지 누가 날 멈추지 않는 기계 속으로 떠밀었나 나에게 감성팔이를 하지 말라 하청과 비정규직이란 말은 나도 안다
열심히 일한 것이 죄인가
부릅뜬 눈으로 벨트와 함께 돌다가 속도에 휘말려보라 숨통을 틀어막다가 숨이 헐떡거리다가 먼지의 뽀얀 사막 속에서 길을 잃어 보았는가
컵라면 하나가 나의 유일한 위안거리다
나의 일터는 목숨을 거는 전쟁터다 엄마가 말했지 용균아 오늘도 무사히 일하고 와야 해 컨베이어 벨트는 엄마 말을 집어삼켰지
컨베이어 벨트는 키득키득 지금도 누군가의 목숨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돈은 목숨이다」 전문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힘없는 사람들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세상을 “용균”의 사고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김용균은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의 석탄 이송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한 노동자이다.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했다. 고장 난 손전등과 컵라면 등의 유품에서 볼 수 있듯이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회사에는 2인 1조의 근무 규정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컵라면 하나를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고 혼자 일하다가 과로와 비상 상황에 대처하지 못해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의 작업은 “분진을 나르며 굉음을 내는 컨베이어 벨트는 죽음을 운반”할 정도로 위험했다. 작업에 열중하다 보면 “낙탄이 됐다가 삽이 됐다가” 해서 마치 “찰리 채플린처럼 시커메져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는 별처럼 아득해지는 눈”의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목숨을 거는 전쟁터 같은 그 작업장에서 할당된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한계를 이기지 못해 “벨트와 함께 돌다가 속도에 휘말”렸다. “숨통을 틀어막다가 숨이 헐떡거리다가 먼지의 뽀얀 사막 속에서 길을 잃”고 만 것이었다.
그의 사고 이후 힘없는 사람들은 현수막을 내걸고 기자 회견을 하고 연좌 농성을 벌였다. “열심히 일한 것이 죄인”으로 취급받는 세상에 맞서 용기를 가지고 할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의 말이 비로소 세상에 전달되어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어 국회를 통과했다.
4.
도원은 곳곳에서 건설되고 있다
복숭아가 달리지 않는 도원으로 아버지는
새벽마다 출입 금지 팻말을 열고 들어간다
복숭아꽃 피는 봄은 상시의 계절
열매는 가책이 없는 맛이고 안개의 지침을 받으면 작업 시작
그 옛날 어부가 보았다는 무릉도원엔
일용직 주민들만 가득했을 것이다
나무 밑에 사계절용 봄을 설치하거나 간혹
우수수 떨어지는 주민세 갑근세가 있다는 사실은 불문율이다
이 우화 같은 우화 속으로
아버지는 매일 출근을 한다
해고는 인간계의 법칙
우화에는 우화의 법칙이 있기 마련이지만
아버지는 검은 장화를 신고
나무를 심고 밭을 갈고 돌을 깬다
아버지 직업란에 무릉도원 직원이라 쓴다
선생님은 엄마를 불러오라 했다
어딘가에 무릉도원은 매일 건설되고 있으나
우리들은 모르는 곳
아버지는 꽃처럼 사계절을 근무하지만
한 번도 복숭아를 구경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복숭아꽃은 시들시들해지고
도원에서 쫓겨나고
우리들의 무릉도원,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상류도 없고 좁은 입구의 지형도 없지만
늘 정문이 굳게 닫혀 있는 무릉도원은 있다
쉽게 들어갈 수는 있으나 복숭아 하나 살 수 없는 곳이다
―「무릉도원」 전문
위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복숭아가 달리지 않는 도원으로” “새벽마다 출입 금지 팻말을 열고 들어”갔다. “우화 같은 우화 속으로/아버지는 매일 출근”한 것이다. “해고는 인간계의 법칙”이고 “우화에는 우화의 법칙이 있기 마련이지만”, “아버지는 검은 장화를 신고/나무를 심고 밭을 갈고 돌을” 깼다. 당신은 “직업란에 무릉도원 직원이라”고 썼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당신이 일하는 “어딘가에 무릉도원은 매일 건설되고 있”었으나 “우리들은 모르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꽃처럼 사계절을 근무”했지만 우리는 “한 번도 복숭아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의 복숭아꽃은 시들시들해”졌고, 당신은 “도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우리들의 무릉도원”이 사라지자 “배를 타고 갈 수 있는/상류도 없고 좁은 입구의 지형도 없”었다.
그렇지만 “늘 정문이 굳게 닫혀 있는 무릉도원은 있”었다. “쉽게 들어갈 수는 있으나 복숭아 하나 살 수 없는 곳이”었다. 화자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선경(仙境)으로 복숭아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을 작품 속에서 인유했다. 별천지인 그곳을 반어적으로 사용해 무릉도원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상황을 부각시킨 것이다. 화자는 절망적인 현실 상황에 좌절하지 않는다. 무릉도원을 지향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홀로라는 말은 아득하다는 말
피켓을 들고 사거리에 선다
앰뷸런스 소리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휠체어에 실린 고통을 본다
절룩이는 소리들은
알약으로 코팅되고
돈보다는 생명을
돈벌이 경영 중단하라
부당 해고 철폐하라
해고된 노동자에서
해고되지 않는 노동자에게로 번지는 동지애
짧고 두꺼운 문구는 차갑고
교환되는 눈빛은 따스하다
주먹이 펴지지 않는 세상
노동자 피눈물은 누가 닦아줄까
절망의 피눈물을 참아내는 사람은 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문구가
당장 먹고 살아갈 길이 까마득하다는 말
절절히 가슴에 와닿는다
더 이상 겁낼 것은 없다
절박하다는
1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
거리에서 내일을 함께한다는
하루를 두 배로 산다는
혼자서 여럿을 느낀다
―「홀로」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홀로라는 말은 아득하다”고 느끼면서도 “피켓을 들고 사거리에” 섰다.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안 “앰뷸런스 소리에 응급실 문이 열리”거나 “휠체어에 실린 고통을” 바라본다. 작업하다가 사고를 당해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화자는 “돈보다는 생명”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돈벌이 경영 중단하라”고 외친다. “부당 해고 철폐하라”고도 외친다. 화자는 자신의 행동이 “해고된 노동자에서/해고되지 않는 노동자에게로 번지는 동지애”라고 생각한다. “짧고 두꺼운 문구는 차갑”지만, 다른 노동자들과 “교환되는 눈빛은 따스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화자는 “주먹이 펴지지 않는 세상”에서 “노동자 피눈물은 누가 닦아줄까”라고 반문하며 피켓을 들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문구”를 썼다. “당장 먹고 살아갈 길이 까마득”한 사람들과 “절망의 피눈물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함께 버려진 말들 사이를 걷는 것이다. “더 이상 겁낼 것은 없다”라는 배수친을 치고 해고에 당당히 맞선다. “1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거리에서 내일” 함께할 사람들을 기대한다. “하루를 두 배로” 사는 것은 물론 “혼자서 여럿”과 연대하는 것이다.
화자는 한 개인의 상황을 전체의 상황으로 연결하고 있다. 한 개인의 문제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 및 환경과의 관계로 이해한다. 한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자본주의 체제가 워낙 복잡하고 전문화되어 있기에 어렵다. 지식이나 정보를 동원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에 따라 한 개인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의나 제 역할을 망각하기가 쉽다.
봉윤숙 시인은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과 관계된 감정, 행동, 시선, 외침, 의지 등을 담은 시어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그에 따라 작품 속의 시어들은 부단하게 움직인다. 에네르게이아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시인은 개인과 세계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시어의 변주를 통해 유한한 수단을 무한하게 사용했다. 시어들의 활동으로 사회학적 상상력이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창작 과정 자체가 운동성을 띤 것이다.
맹문재 | 문학평론가 · 안양대 교수